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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술에 관한 통상적 해석은?

by 처사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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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술에 관한 통상적 해석은 어떻게 전개되고 있는가?

 

 현대 기술은 서로 이질적일 뿐더러, 인간, 사회, 자연, 그리고 역사까지를 모두 포괄할 만큼 광범위하다. 현대 기술의 모든 특성들을 동시에 고려하여 그것의 가능 근거를 탐구한다는 것은 사실상 불가능한 듯 보인다. 그러나 현대 철학자들은 나름대로의 고유한 관점에 따라 다양하게 기술의 본질을 해석한다. 그 중 우선 우리의 이목을 끄는 것은, 겔렌(Gehlen)으로 대표되는 자연주의적 해석과 데사우어(Dessauer)로 대표되는 합리론적 해석이다.

 

겔렌은 생물학적 인간학의 관점에서 기술을 해석한다. 인간은 다른 동물들에 비해 생물학적 본능과 신체 기관의 능력이 열등하다. 때문에 인간은 자연의 적대 세력으로부터 벗어나기 위해 필연적으로 기술적 도구를 만들어낸다. 기술은 인간이 자신의 생명을 유지하기 위해 취하는 본능적인 비의식적 요소에서 잉태된 것이다. 따라서 기술은 이성적 동물로서의 인간이 아닌, 공작인(工作人, homo faber)으로서의 인간과 밀접히 관련된다.

 

합리론적 해석은 자연주의적 해석과는 정반대의 관점에서 기술의 본질을 해석한다. 데사우어로 대표되는 기독교 사상가들은, 신의 명령에 따라 인간의 지성이 물질을 정신적인 것으로 만든다는 관점에서 기술의 본질을 해석한다. 이로써 기술의 발전을 가능케 하는 궁극적 원천은 자연이 아니라 인간의 지성으로서 규정된다. 인간의 지성은 자연을 지배해야 한다는 자신의 운명을 기술을 통하여 충실히 수행하는 것이다.

 

기술의 본질에 관한 앞서의 두 해석에서 두 해석의 형이상학적 가정은 상이하다. 합리론적 해석이 정신과 물질의 이원론적 구조에서 정신의 능동성을 강조한다면, 자연주의적 해석은 물질(자연)의 강압성을 강조한다. 그러나 이 두 해석은 겉으로 보기 만큼 그렇게 다르지 않다. 만약 우리가 이 두 해석이 움직이는 지평의 동일성을 주목한다면 이 두 해석은 궁극적으로는 기술의 본질에 관한 동일한 해석으로 입증된다.

 

이 두 해석에서 기술은 단지 수단으로 규정된다. 자연의 강압으로부터 벗어나야 한다라는 목적을 실현하기 위해서든 혹은 자연을 지배해야 한다라는 목적을 실현하기 위해서든, 여하튼 기술은 인간이 자신의 목적을 실현하기 위해 스스로 만들어낸 수단으로 규정된다. 따라서 기술에 관한 자연주의적 해석과 합리론적 해석은 결국 기술에 관한 도구적-인간학적 해석으로 귀결된다. 그런데 기술에 관한 도구적-인간학적 해석의 이면에는 기술의 미래에 관한 낙관론이 깔려 있다. 기술은 인간이 자신의 목적을 실현하기 위해 스스로 만들어낸 것이므로 기술에 의해 초래된 위험은 인간의 자발적인 조정과 통제에 의해 극복될 수 있다는 것이, 기술을 도구적 인간학적으로 해석하는 이들의 공통적 믿음이다.

 

이러한 관점에서 보자면, 마르크스주의자들 및 프랑크푸르트 학파에서의 기술 비판도 기술에 관한 도구적-인간학적 해석과 동일한 지평에서 움직이고 있다. 우선 마르크스주의자들은 기술이 인간의 기본 욕구를 충족시킬 수 있는 수단이라는 점에 동의한다. 그들은 과학 기술 자체가 위험을 잉태한다라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다만 그들은 과학 기술과 생산 관계의 모순 속에 과학 기술의 위험이 도사리고 있다고 진단한다. 소수의 부르주와가 과학기술을 군사 산업 복합체의 권력욕과 이윤욕에 이용함으로써 결과적으로 과학 기술의 진보가 자본주의적 생산 양식의 모순을 첨예하게 한다는 것이 그들에 의한 기술 비판의 핵심이다. 따라서 마르크스주의자들은 적대적 계급 모순이 해소된 사회주의적 생산관계 하에서만 과학 기술이 인간의 진정한 발전에 기여할 수 있다라고 주장한다. 역으로 말하자면, 그들은 계급적 갈등이 해소된 새로운 사회 제도 하에서라면, 다시 말해 기술에 대한 합리적인 조정과 통제가 가능하다면, 기술 문명의 모순을 극복할 수 있다라는 믿음을 가지고 있다.

 

마찬가지로 프랑크푸르트 학파의 대표자인 하버마스(J. Habermas)도 기술 자체를 비판적으로 파악하지 않는다. 오히려 그는 자연적 욕구의 충족이야말로 인간의 해방을 가능케 한다라는 대전제 하에서 자연에 대한 기술적 지배를 정당화한다. 다만 그는 기술 관료들의 독점적 지배현상 안에서 기술 문명의 예기치 않은 모순을 파악한다. 기술 관료들의 아무런 자기 성찰없이 기술적 진보가 자연사적으로 이루어지기에 기술 문명의 모순이 발생한다는 것이 그의 지적이다. 따라서 그는 기술적 진보에 의해 초래된 사회적 문화적 불균형은 기술적 지배력을 소수의 기술 관료로부터 모든 이들에게 돌려주어 정치적으로 효력있는 토론이 가능할 때 해소된다라고 주장한다. 즉 기술 문명의 모순은 기술 관료의 독점적 지배때문이데 이러한 모순도 제도화된 실천적 담론을 통해 해소될 수 있다라는 것이 그의 믿음이다.

 

그러나 이러한 믿음을 받아들이기에 우리의 현실은 너무도 삭막하다. 계급 간의 갈등을 폐기한 새로운 사회제도든 혹은 이상적인 담론이든 이 모두는 기술 시대의 모순을 인간의 손으로 해결하려는 시도인데, 불행히도 현대 기술이 인간의 손을 떠나 독자적인 매카니즘을 형성한 것은 벌써 오래 전이다. 이제는 별 꺼리낌 없이 인간까지도 소모품으로 사용되는 실정이다. 따라서 이러한 현실을 되돌아 볼 때, 지금까지 논의한 기술에 관한 도구적-인간학적 규정은 답답하다. 기술은 이미 인간의 손을 떠나 저렇게 광란의 질주를 계속하는데, 어떻게 기술을 단순히 인간의 목적을 실현하기 위한 수단 정도로 해석하면서 기술 시대의 미래를 낙관할 수 있다는 말인가?

 

이제 우리에게는 기술의 본질에 대한 새로운 규명과 극복 방안이 요구된다. 인간 및 기술의 본질을 근본적으로 재조명함으로써 인간이 기술에 대해 자유로운 관계맺을 수 있는 가능성이 탐구되어야 한다. 즉 이제 우리는 이 시대를 정초하는 숨겨진 의미를 사유함으로써 현대 과학기술 문명을 대신할 새로운 삶의 보금자리를 열어 보이도록 노력해야 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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