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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구로서의 기술을 비판해보라

by 처사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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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술에 관한 도구적 규정을 비판해보라.

 

 : 통상적으로 기술은 목적과 수단의 관련 안에서 도구로서 간주된다. 기술의 통상적 규정 안에는 목적과 수단의 도식이 전개된다. 그러나 기술은 단순한 도구 이상의 의미를 지닌다. 예컨대 인간이 노동력에 의해서만 농토를 경작할 때와 오늘날처럼 트랙터로 농사를 지을 때, 인간과 자연의 관계는 각각 다르게 맺어진다. 도구는 가공되어야할 사태에 대해 중립적 입장을 취하지 않는다. 도구의 의미는 도구성에 한정되지 않는다. 오히려 도구는 인간과 사태사이에 개입하여 이 양자의 관계를 새롭게 규정한다.

 

도구가 인간과 사태를 새롭게 매개하는 까닭은, 도구의 탈은폐적 성격 때문이다. 도구가 그때마다 사태를 새롭게 탈은폐하기에 인간과 사태의 관계는 종전과 다르게 맺어진다. 기술(테크네)의 근원적 본질은 탈은폐다. 기술은 결코 하나의 수단이 아니라, 탈은폐의 방식이다. 더욱이 탈은폐는 고대의 진리 규정이므로, 기술은 진리와 근원적 관계를 맺고 있다. 기술은 탈은폐의 영역이요 진리의 영역이다. "기술은 탈은폐와 비은폐가, 즉 알레테이아[ ], 다시 말해 진리가 발생하는 영역에서 현성한다."

 

테크네는 고대 그리스의 수공업을 가능케 한 포이에시스( s)와도 관련된다. 하지만 포이에시스적 산출이 자연을 인간의 의지대로 탈은폐하지 않는 반면에, 현대 기술은 주체적 인간의 욕구를 충족하기 위해 자연의 고유한 의미 지평을 파괴한다. 지구를 채탄장으로 탈은폐하듯 현대 기술은 거침없이 자연에게 더많은 에너지를 강요하며, 이로써 자연은 에너지원으로 고정된다. 그래서 하이데거는 현대 기술적 탈은폐의 특성을 "몰아세운다"(stellen) 혹은 "도발적 요구"로 규정한다.

현대 기술은 자연을 인간의 욕구에 맞게 몰아세우기에 자연은 고정된 하나의 기능으로 탈은폐된다. 지구는 채탄장으로, 대지는 채광장으로, 농토는 식량 공급원으로 탈은폐된다. 그런데 본격적인 석탄 채굴은 18세기 중반 이후에 이루어졌으나 광석 채굴은 훨씬 그 이전부터 이루어졌기에 우리는 대지가 채광장으로 탈은폐된 현실이 어떻게 현대 기술적 탈은폐의 전형적 특징일 수 있느냐는 의문을 갖기도 한다. 그러나 이러한 의문은 '존재자를 ...으로 탈은폐하는' 현대 기술적 탈은폐의 본질적 의미를 깨닫지 못한 오류다.

 

광석 채굴의 역사는 유구하다. 그러나 대지가 대지로 남아 있으면서 인간에게 광석을 부여하는 경우와 대지가 애초부터 광석 공급의 기능으로 환원되는 경우는 엄격히 구분된다. 전자는 대지가 자신의 고유함을 보존하는 경우요, 후자는 대지가 현대 기술에 의해 파괴되어 광석 공급원으로만 탈은폐된 경우다.

 

탈은폐의 이러한 의미는 식량공급원으로 기능하는 농토의 경우에도 적용된다. 전근대적 농부는 식물의 성장 비밀에 관여하지 않았다. 그것은 신의 몫이었다. 농부는 식물의 성장을 돌보고 보호할 뿐이었다. 수확물은 신의 축복으로 간주되었다. 그러나 근대 이후의 농부는 성장의 비밀에 관여한다. 농부는 농토를 다그쳐 더 많은 식량 생산을 요구한다. 농토는 더 이상 농토로서 남지 않고 식량 공급원으로만 탈은폐된다. 농업은 더 이상 생존 수단이 아니라, 거대한 식량 산업으로 변모한다.

 

현대 기술적 탈은폐는 인간의 낭만이 깃들었던 강()에도 적용된다. 시인 횔덜린(H lderlin)은 대양(大洋)을 향해 가는 강의 모습을 불멸자와 합일하고픈 동경(憧憬)으로 노래했다. 그러나 이제 강은 더 이상 동경의 대상이 아니다. 강도 현대 기술에 의해 수압 공급원으로 환원된다. 수력발전소와 물레방아를 비교해 보자. 근대 이전에 라인강에는 물레방아가 돌았다. 물레방아는 그때마다 인간에게 에너지를 공급했다. 그러나 물레방아가 라인강의 물줄기를 변모시킨 것은 아니었다. 물레방아가 돌던 라인강은 라인강으로 남아 있으면서 인간에게 도움을 줄뿐이었다. 그러나 오늘날의 라인강은 더 이상 횔덜린이 읊던 라인강이 아니다. 수력발전소가 세워짐으로써 라인강에는 원거리 발전소가 "주문 요청되고", 또 더 많은 수압 공급을 위해 라인강의 물줄기까지 발전소의 본질에 맞추어 변모된다. 즉 라인강도 "주문 요청된 것"으로 나타난다.

 

이처럼 현대 기술은 자연을 에너지원으로 환원한다. 자연은 거대한 에너지 탱크로 탈은폐된다. 그런데 현대 기술은 양적 차원에서만 아니라 질적 차원에서도 전근대적 기술과 비교된다. 설령 단순한 풍력이나 수력이라 하더라도, 현대 기술은 그것들을 자연 그대로가 아니라 오히려 채굴 저장하여 이후의 사용에 대비한다. 더욱이 현대의 주요 에너지원인 석탄 석유 천연가스 우라늄 등은 풍력이나 수력과는 달리 감추어져 있기에 우선은 캐어내어 변형되어야 하고, 또 앞으로의 사용을 위해 저장되고 적절한 장소에 분배되어야 하며, 저장 분배된 에너지도 다시 동력기를 통해 2차 에너지인 전기로 전환되어야 한다. 이처럼 현대 기술은 자연에너지를 이중적으로 채굴하는데, 이 때문에 하이데거는 현대 기술적 탈은폐의 질적 특성을 "이중적 의미의 채굴"로 규정한다.

 

현대 기술은 자연을 도발적으로 몰아세워 인간과 자연 그리고 이 양자의 관계를 근본적으로 변화시킨다. 기술적 탈은폐가 극도로 확장된 결과 자연은 황무지로 변모하며, 더욱이 인간의 가장 내적인 본질도 혹사당한다. 자연은 원료공급자로서 탈은폐되고 인간은 노동하는 동물로서 대두한다. 실로 현대 기술은 인간의 삶 전체를 구성하는 지배적인 탈은폐 방식으로 등장한 것이다. 그러면 현대 기술에 의해 탈은폐된 존재자는 어떤 고유한 신분 상태를 갖게 되는가? 즉 그렇게 탈은폐된 존재자의 존재론적 위상은 과연 무엇인가?

 

현대 기술은 자연을 즉각 사용될 수 있는 원료로서 탈은폐한다. 자연은 기술의 주문 요청에 따라 그 요청된 결과로서 존재한다. 이러한 점은 유독 원료에만 아니라, 원료로 가공된 제조품이나 인간 재료에까지 해당된다. 예컨대 활주로의 비행기는 주문 요청에 따라 언제든지 자신의 임무를 완수할 준비를 갖추고 있고, 인간도 거침없이 임상실험용 자원으로 사용되는 실정이다. 이렇게 주문 요청된 존재자의 고유한 신분 상태를 하이데거는 부품(Bestand)이라 명명한다. 하이데거적 의미의 부품은 단순히 그 일상적 의미인 재고품을 뜻하지 않고, 오히려 현대 기술에 의해 탈은폐된 존재자의 존재성격을 의미한다.

 

현대 기술은 자연과 역사를 포함한 모든 존재자를 부품으로 탈은폐한다. 모든 존재자는 그 고유성을 상실한다. 사물은 사물로서 존재하지 못할 뿐더러 이제는 대상으로도 존재하지 못한다. 그래도 대상은 자신의 고유성 저항성 불가침투성 따위를 어느 정도 지니고 있었으나, 현대 기술에 의해 존재자는 "즉각 가까이 지정된 장소에 놓이도록 주문 요청하는" 기술적 의지에 응답하는 부품으로만 존재한다. 부품을 통해 대상은 소멸된다. 그러나 소멸되는 것은 대상만이 아니다. 현대 기술의 극단적인 주문 요청의 성격에서는 주체까지도 부품으로 흡수된다. 인간도 기술적 의지의 주문 요청에 응답하는 부품으로 전락한다. 이제 남은 것은, 기술적 의지의 주문 요청과 그에 대한 응답이라는 그야말로 순수한 주-객 연관뿐이다. 즉 종래 형이상학에서의 주-객 연관이 아니라, 기술적 의지의 주문요청과 주문 요청되어야 할 부품으로서의 순수한 주-객 연관만이 남을 뿐이다.

 

현대 기술에 의해 모든 존재자는 부품으로 탈은폐된다. 우리는 이러한 탈은폐의 영역에서 그리스 수공업에서와는 다른 텔로스(Telos)의 모습을 발견한다. 본래 텔로스란 사물을 처음부터 그 사물로서 한정하는 유의미한 사회적 욕구였다. 은잔의 예에서 보듯, 은잔의 텔로스는 이 잔을 제기(祭器)로서 한정하는 제사행위였다. 하지만 현대 기술적 탈은폐에는 그런 의미의 텔로스가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다. 기술적 욕구의 무제한적인 주문 요청만이 텔로스로서 기능한다. 더욱이 부품의 존재 방식은 이미 "대체가능성"을 본질적 계기로 포함하기에, 대량 생산 경제에서 수선은 당연히 캐캐묵은 생각이 된다. 하이데거는 이런 까닭에 오늘날의 존재를 "대체 가능 존재"로 규정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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