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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지같은 사랑

by 처사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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텔레비전 방송에서 한 사내를 보았습니다. 아마도 SBS의 '궁금한 이야기 Y'에서 방영됐던 것으로 기억되는군요. 나이는 예순 한 살이었죠. 그는 제주도의 게스트하우스를 매일같이 순례하듯 돌아다녔어요. 사람을 찾기 위해서였죠. 찾는 사람은 여자였어요. 나이는 스물 여섯살. 사내는 총각이었지요. 사람들은 좀처럼 믿으려 하지 않았습니다. 그 나이가 되도록 결혼도 하지 않았다는 사실을. 그렇게 늙은 사내가 시퍼렇게 젊은 여인네에게 연정을 느낀다는 것을.

 

그는 대학에서 행정학으로 석사학위까지 받았고 그저 도서관에서 시간 보내기를 좋아하는 사람이었어요. 그런 삶이 익숙해져서 그 흔한 사랑, 그 흔한 결혼과도 인연이 없이 살았습니다. 그러던 그가, 어느날 버스 정류장에서, 맞아요, 버스 정류장에서, 한 여자를 만났어요. 바로 그 여자. 스물 여섯 살의 그 여자...... 그런데 이걸 어쩌나요. 사내는 그 여자가 그만 쏘옥 맘에 들어 버렸어요.

 

단발머리에 보조개가 들어가고, 현모양처처럼 인상이 좋던 여자. 그리고 그의 질문에 상냥하게 대답해 주던 여자......사내는 그 후에도 버스에서 두어 번 그 여자를 만났어요. 하지만 그뿐이었지요..... 그리고 어느날...... 사내는 그 여자가 궁금해졌어요. 보고싶어진 거죠. 버스에서 몇 번 스친 여자였지만 한 사내의 마음에 불씨를 남겼어요. 음, 누구나 그럴 수 있죠. 그럴 수 없나요? 그냥 인상이 좋고 친절한 이성이었는데, 그냥 우연히 몇 번 만났을 뿐인데, 어느 순간 그가 못견디게 보고싶어지는 경험, 누구나 한번 쯤 있지 않나요. 사내는 언젠가 대화 중에 여자가 게스트하우스에 묵고 있다는 이야기를 들은 기억이 떠올랐어요. 그래서 달 포째 여기저기 게스트하우스를 찾아 다니게 된 거였죠.

 

 

 

그리움은 규범대로 되는게 아닌데

 

방송에서 인터뷰를 하는 사람들은 모두 그를 나쁘게 말했죠. 첫번 째 이유는 한마디로 늙은이가 주책이라는 거였어요. 말은 안했지만 늙은이가 노망났나? 뭐 그런 뉘앙스였지요. 나이도 많은 사내가 삼십 오년씩이나 차이 나는 처자를 찾아 다니다니 쯧쯧. 사람들이 그 사내를 나쁘게 말한 두 번째 이유는 사내가 게스트하우스를 그렇게 일방적으로 들쑤시고 다니면 여자의 입장에서 얼마나 두려움과 공포에 떨겠냐는 거였어요. 하지만 이 이유는 딱이 적절해 보이지 않아요. 근사하고 젊고 멋진 사내가 버스에서의 인연을 이야기하며 그렇게 한 여자를 수소문해 다녔다면, 더러 사랑의 낭만으로 봐주지 않았을까요. 물론 케이스에 따라 좀 다를 순 있겠네요.

 

어쨌든 방송 PD조차도 교양 있는 말투로 사내를 설득했죠. 그리운 처자를 위해서도, 게스트하우스를 운영하는 사람들을 위해서도, 무엇보다 사내 스스로를 위해서도, 여자 찾는 일을 그만 두는 게 어떻겠냐구요......

 

 

 

누구나 누구를 좋아할 순 있다

 

일련의 과정을 보면서 조금 마음이 아팠어요. 늙은 사내는 처음 경험하는 자기 스타일의 여성에게 마음을 준 거잖아요. 누군가를 그리워하거나 좋아하는 것이 죄는 아니잖아요. 그 나이가 되도록 결혼은커녕 사랑도 해보지 않은 사내의 개인사를 보면, 사내의 그리움은 일반적인 규범과 좀 멀어보이긴 해요. 규범? 음...... 그리움에 규범이란 단어를 붙이자니 뭔가 어색하긴 하군요. 사랑의 감정이 규범대로만 되지 않는 거 우리 모두 조금씩 알고 있으니까요. 오히려 그 사내의 그리움이 너무 터무니 없어서 좀 진실해 보이기도 했어요. 물론 터무니 없는 것이 다 진실한 것은 아니지만, 진실한 것이 때로는 터무니 없을 수는 있으니까요.

 

당사자를 만나 '태어나 처음 만나는 내 스타일의 여자'라고 고백하는 일마저 허락될 순 없는 건가요. 누구나 누군가를 좋아해 본 경험이 있잖아요. 그 마음을 고백하지 않고는 도저히 견딜 수 없는 뜨거운 마음을 겪어 본 경험, 없으시나요. 가슴이 너무 뜨거워서 식도가 타고 머리속이 늦더위처럼 후덥지근해 어질어질한 그런 경험이요. 그렇게 고백은 할 수 있지 않을까요.

 

그 다음 일은 당연히 여자의 몫이지요. 고백을 들은 여자는 자신의 생각을 이야기하겠죠. 그러면 사내는 여자의 결정을 듣고 자신의 포지션을 선택해 나가야 하겠죠. 뜻밖의 yes라면 태어나서 처음 겪는 신열에 온 몸이 타오를 것이고, no라면 번민 속에 자신의 아픔을 견뎌 나가야 하겠죠. 모든 사랑이 이루어지는 것은 아니니까요.

 

 

 

상식이 꼭 진리인 건 아니다

 

그 사내가 상식적이지 않은 것은 맞아요. 하지만 상식이 늘 진리인 것 또한 아니죠. 한 남자는 혹은 한 여자는 한 이성을 좋아할 권리가 있지요. 사랑은 상호적인 것이기 때문에 그게 잘 이뤄지지 않으면 거기에서 모든 것은 멈추겠죠. 물론 열 번 찍어 안 넘어가는 나무 없다며 일방적이고 무례한 대시를 할 수도 있지만, 당장 사내가 그 여자에게 해코지를 하거나 폭력적인 행동을 한 것도 아니니까요. 가능성만으로 사내를 범죄자로 몬다면 그것처럼 억울한 일도 없을거예요. 

 

그 늙은 사내는 그 젊은 처자가 얼마나 좋으면 그 비상식적인 그리움을 찾아 비상식적인 여로에 올랐을까요. 그리움은 마음대로 되는 것도 아니잖아요. 우리는 한 인간의 나이만을 사랑하는 것도 아니잖아요. 한 인간의 나이만을 미워하지 않듯이요. 우리는 한 인간의 마음만을 사랑하지도 않구요. 한 인간의 육체만을 사랑하지도 않죠. 우리는 그저 한 인간을 사랑하는 게 아닐까요. 인간의 사랑이 불완전하다든가 하는 등의 문제는 이 자리에서 논할 주제는 아닌 듯 해요.

 

 

 

우리는 나이만을 사랑하지 않는다

 

그 사내가 그 여자에게 고백이라도 할 수 있는 기회가 주어지길 바랍니다. 직접적인 대면이 가능하지 않다면 전화만으로라도요. 문자만으로, 카톡만으로라도요. 다행인지 불행인지 사내는 방송을 통해 그 여자에게 그리움을 표현한 결과가 되었네요. 그 사내의 무분별을 질타하는 의도로 시작된 방송은, 일반적인 규범을 가르치는 여러 방송 장치들을 받아들이는 사내의 마음으로 끝났어요. 정신을 못차리고 그리움에 빠졌던 사내가 마침내 이성적인 결정을 되찾게 되었다는 컨셉, 그런거였죠.

 

결국 사랑은 비슷한 나이끼리, 같은 민족끼리, 비슷한 학력끼리, 비슷한 외모끼리, 비슷한 재산끼리, 비슷한 생각끼리 하는거군요. 그렇죠? 참 거지같은 사랑이네요...맞아요. 사실 저는 아주 비현실적인 사람이에요. 철이 없죠. 하지만 제가 그 사내였더라도 사람들의 모든 비난을 감수하면서 지속적으로 그 여자를 수소문하고 다니진 못했을 거예요. 그저 한 인간의 본능에 가까운 그리움이 '나이'라는 벽에 막혀 기회조차 갖지 못하는 현실이..... 조금...... 안타깝긴 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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