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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배지에서 꽃피는 다산 정신-다산시에 대하여

by 처사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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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배지에서 꽃피는 다산 정신

-다산시에 대하여

 

 

다산의 시문학을 대표할 수 있는 핵심을 간략하게 지적한다면 도지현자위지문광제일세라는 두 마디로 요약된다. 전자가 다산이 이어받은 문학 사상의 전통에서 나온 기본적 명제라면, 후자는 당대의 현실에 대처하면서 이를 좀더 구체화하고 심화시킨 지표에 해당한다. 이 두 명제로 대표될 만한 문학론을 통해 다산은 도()와 문()을 분리하여 문에 치중하는 경향이나, 문을 해로운 것으로 보는 입론을 모두 부정했고, 단순한 개인적 수양이나 심성 도야를 넘어서서 사회, 정치적 비판과 실천으로서의 도를 지향하는 문학을 긍정했다.

 

자신의 작품 속에도 한가로운 경관이나 만흥을 읊은 것들이 없지는 않다. 그러나 이러한 작품들은 대부분 다산이 자신의 사상을 정립해 나아가던 과정의 핵심에서 시기적으로 동떨어진 것들이며, 이에 대해 그는 별로 애착이나 관심을 갖지 않았다.

 

시이자가계를 보면, “나는 천성이 시율을 좋아하지 않았다. 1801년 이전에는 시를 지었어도 모두 다 형편에 따라 할 수 없이 지은 것들이며, 간혹 많이 있으면 한가로이 읊기도 하였으나, 이 모두가 전혀 마음 쓰거나 힘을 기울인 일이 아니었다.”고 쓰고 있다.

 

반면에 다산은 도덕적 지향과 현실성에 투철한 시를 긍정했고, 그것을 시의 근본이라고 생각했다. 긍정적 문맥에서 그가 말하는 시란 바로 이러한 뜻으로 이해된다.

 

무릇 시의 근본은 부자, 군신, 부부의 윤리에 있으니, 혹은 그 즐거운 뜻을 선양하며 혹은 그 원망하고 그리워하는 뜻을 말하여 전함이다. 그 다음으로는 세상을 걱정하고 백성을 도움이니, 항상 힘없는 자를 돕고자 하며, 가진 것 없이 방황하는 자를 전휼하고자 하며, 불쌍히 여기어 차마 버리지 못하는 마음을 가진 뒤라야 참다운 시이다. 단지 자기의 이해에만 구애된다면 그것은 시가 아니다,”

 

오늘날의 말로 바꾸어 말하면 서정시 같은 감정을 주로 하는 시보다 사실을 있는 그대로 그리는 서사시를 시작 활동의 기저로 삼겠다는 말이다. 그러므로 다산의 시는 부자나 부부애를 비롯하여 사회의 부조리를 샅샅이 드러내는 데에 주안을 두고 있다.

 

 

다산은 16세 때에 이가환과 매부 이승훈을 따라 성호 이익의 유고를 보았다. 그래서 학문의 현실적인 면을 알게 되었으며, 정치와 경제를 중심으로 한 학문에 힘쓰게 되었다. 이러한 정신에서 그의 학문 전체가 조선의 현실을 개혁하는 데에 지향점을 주게 되었다. 그 때부터 성호를 하늘에 솟아나고 사람 중에 빼어나며 도덕과 학문이 고금을 초월했던 분으로 존경하여 마지 않았다.

 

다산보다 한 세기 먼저 살았던 성호는 여러 가지 저서가 있으나 시경론도 빼놓을 수 없다. 다산의 시문도 아마 여기서 출발했던 것 같다. 성호의 경전 연구제경질서중 하나인 시경질서가 그것이다. 이 저작이 현재 전해지는지는 확실치 않으며, 다만 그 서문이 문집에 실려 있다. 그러나, 다행히 잡저 중에 국풍총설등의 글이 들어 있어 그의 견해를 대강 알 수 있다. 이로 미루어 보아 그가 사숙한 성호 이익에게서 시에 관한 구상을 받은 구절은성호사설의 한 구절이니 성호의 시에 관한 개념을 대충 짐작할 수가 있다.

 

시란 뜻이 밖으로 나타난 것이다. 말과 뜻이 있으매, 뜻은 깊고 말은 옅은 까닭으로 말은 마칠 수 있어도 뜻은 다할 수 없다. 시경 삼백 편은 대개 다 사언이어서 읽으면 그 말이 쉽게 이해된다. 사람들은 그 말이 다양한 생각을 표현하기에 너무 좁음을 느껴서 글자를 늘려 오언을 만들었다. 오언은 사, 부로부터 비롯되었다. , 부는 위에다 한 글자를 보탠 것이다. 오언은 가운데에 한 글자를 늘린 것이다. 뜻을 표현하는 데 약간의 여유가 있게 되자 세상의 시풍이 점점 공교하고 미세해져서 말을 짜고 장식함이 극심하게 되었다. 후인들이 다시 더 늘려 칠언을 만드니, 더욱 더 옛것과 달라졌다. 성률, 배려 등이 나오게 되매 시도(詩道)가 상하였다.”

 

다산 역시 시가 형식적 배려에 치우침으로써 본말이 전도되어 타락했다고 보고, 이를 바로잡기 위해서는 풍아의 근본이 다시 음미되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율시보다는 고시를, 고시보다는 시경체의 사언시를 낫다고 한 것은 그 단적인 표현이다.

 

여기서 더 나아가 다산은 스스로 사언시를 창작하기까지 했다. 현재여유당전서에 전해지는 자료를 보면 그가 창작한 사언시는 약 40수에 이른다. 이 작품들은 물론 그의 시작 전체와의 관계 속에서 다루어져야 한다. 그러면 참고삼아 다산의 묘지명 속에 들어 있는 시에 관한 견해를 먼저 보기로 하겠다.

 

“‘()’는 이렇게 다루었다. 이를테면 시란 간림이다. 순임금 때 오성과 육률로 오언을 받아들였으니, 오언이란 육시 중의 다섯 가지이다. , , , 흥이 아와 함께 다섯인데 묘송은 포함하지 않았다. 이를 약관이 조석으로 풍송하였다. 가란 비파에 창화하여 왕으로 하여금 그 선을 듣고 감발하며 그 악을 듣고 징계하도록 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시의 포폄이 춘추보다도 엄하여 임금이 두려워하기 때문에 시가 없어져서 춘추가 지어졌다고 한 것이다. , , , 흥은 풍자한 것이고, 소아, 대아는 바른말로 간한 것이다.”

 

그리고 강진에 유배할 때에 교우 관계를 맺었던 중 초의가 시에 대하여 묻기 때문에 간곡하게 그의 질문에 답한 글이 있어서 번거로움을 무릅쓰고 인용하기로 한다.

 

시라는 것은 사상의 표현이다. 사상이 본디 비겁하다면 제아무리 고상한 표현을 하려 해도 이치에 맞지 않으며, 사상이 본디 협애하다면 제아무리 광활한 묘사를 하려 해도 실정에 부합하지 않는다. 때문에 시를 쓰려고 할 때는 그 사상부터 단련하지 않으면 똥무더기 속에서 깨끗한 물을 떠내려는 것과 같아서 일생토록 애를 써도 이룩하지 못할 것이다.

 

그러면 어떻게 할 것인가. 천인 성명의 법칙을 연구하고 인심 도심의 분별을 살펴 그 때묻은 잔재를 씻어내고, 그 깨끗한 진수를 발전시키면 된다. 저 도연명이나 두자미 같은 시인들도 모두 이런 방향으로 노력했겠는가.

 

물론 그렇다. 도연명이 정신과 물질이 서로 영향을 주는 원리를 인식했음은 두말할 것도 없거니와 두자미는 더욱이 천품이 높은데다가 충후 측달한 도덕과 호매경한 기상을 겸비했었다. 범상한 우리들은 일생 동안 수양을 쌓아도 그 본바탕의 청수한 점은 두자미에 미치기가 쉽지 않을 것이다. 그보다 못한 여러 시인들도 모두 당하기 어려운 기백을 가지고 있어서 그대로 본뜨지는 못한다. 설사 노력하여 도달한다 하더라도 그 천품만은 배워서 따를 바가 아니다.“

 

다산의 시와 박지원의 시를 비교해 본다면 더욱 잘 이해가 갈 것이다. 다산은 서정시보다도 서사시에 더 장하고, 박지원의 동적인 생활 묘사의 시와 같은 점이 있으면서도 서경시가 아니요, 인간의 삶의 고뇌를 직서한 사실적인 시인 것이다.

다시 말하자면 박지원이나 정다산의 시는 사실적이요, 현실적인 삶을 소재로 한 동적인 면에서는 양자 동일하나 박지원이 서정적인 데 대해 다산은 생활과 그 몸부림을 예리, 정직하게 서사적으로 묘사했다.

 

박지원은 풍자적인 데 대해 다산은 척결, 비판적이고 따라서 연암의 것은 단형 서정시가 되었고 다산의 것은 장형 서사시가 될 수밖에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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