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어독서창고

역사 속의 교훈들― 혈통과 국적을 넘어서

by 처사21
728x90
반응형

역사 속의 교훈들

혈통과 국적을 넘어서

 

 

많은 사람들이 내가 한국사를 공부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면 왜 하필이면 그런 공부를 하느냐고 묻는다. 나의 한국사 연구가 무슨 문제냐고 반문하면, 억압과 폭정, 한 번도 정치판을 제대로 뒤엎어 버리지 못한 무력함으로 얼룩진 이 역사에서 무슨 재미를 찾느냐고 되묻기도 하고, 과거의 폭압과 편견이 오늘날에 와서까지 무슨 의미가 있느냐고 따지기도 한다.

 

이에 자신의 직업 선택을 변호해야 하는 나는, 과거가 아름답고 좋아서 배우는 것이 아니고 눈물과 피의 범벅인 그 억울하고 저주스러운 과거의 숱한 비극과 좌절이 우리에게 매우 중요한 교훈을 줄 수 있기 때문에 꼭 배워야 한다는 논법을 이용해 왔다. 그리고 상대방이 가장 중요한 역사적 교훈을 예로 들어 보라고 하면, 한국사에서 다민족적 국가들이 단일민족의 국가들보다 훨씬 자주적이고 선진적이었다는 이야기를 해 왔다. 여기에서 보통 우리가 단일 민족이라는 것을 어릴 때부터 상식적으로 외운 상대자는 아니, 우리 역사에 무슨 다민족까지 있었느냐고 당황하곤 했다. 그럴 때 나는 북쪽의 고조선과 고구려, 발해 등을 남쪽의 신라와 비교한 뒤에, 고려와 조선을 비교한다.

 

요즘 고구려 역사를 보는 일반인들의 분위기는 고구려의 군사적인 강성과 넓은 영토를 강조하는 쪽으로 많이 기울고 있다. 이러한 분위기에 편승한 몇몇 극우 논객들은 고구려를 중국의 절반을 지배한 군사 대국으로 과대 선전함으로써 파쇼적 군사주의와 재벌들의 아시아 시장 공략을 역사적으로 합리화한다.

 

그러나 고구려가 강한 군사력을 키우고 영토를 넓힌 힘의 바탕은 극우 논객들이 외치는 폐쇄적 국수주의가 아니라 다종족적다문화적 포용이었다. 고조선이 나중에 왕위 찬탈자로 변신한 위만의 이민자 집단을 호의적으로 받아들인 사실은 고조선의 종족 구성이 매우 복잡했음을, 곧 다종족 사회였음을 보여 준다. 그리고 넓은 역사적 의미에서 고조선의 전통을 이은 고구려는 포용과 관용, 다종족적 융화의 풍토를 더욱 더 발전시켰다. 말갈과 예맥옥저 등 수많은 변방 종족의 전통과 문화를 존중해 주면서 거점을 중심으로 간접 지배했는가 하면, 문화 수준이 높은 중국 귀화인들을 우대하여 중용하기도 했다. 민족사의 자랑거리가 된 고구려에 의한 낙랑군의 멸망은, 사실상 상당수의 중국 인구를 고구려가 흡수했음을 의미했을 것이다.

 

종교적으로도 고구려는 매우 다채로웠다. 당시 동아시아 세계에서는 불교와 도교가 서로 치열한 경쟁을 벌이고 있었다. 신라와 백제가 주로 불교만 신앙적으로 수용한 반면, 고구려는 도교까지 수용하여 다종교 사회를 이룰 수 있었다. 바로 이러한 종족적종교적 성분과 정치 형태의 다양성이 고구려를 숱한 외침을 당당히 물리칠 수 있는 강국으로 만들었다.

고구려 유민과 말갈을 양대 축으로 한 다종족 국가 발해는 북방의 다종족 국가의 전통을 더욱 계승발전시켰다. 반면에 폐쇄적인 혈통 집단들의 경직된 서열을 전제로 한 골품제를 주축으로 유지되어 온 신라는 한반도 일부의 불완전한 통합마저도 외세의 지원 없이 하지 못했을 뿐만 아니라, 고구려백제 유민들의 정서적정신적 통합에 실패하기도 하였다. 경주인들의 칼에 억눌려 있던 반신라적 감정이 신라 말에 다시 표출되어 결국 신라를 멸망시킨 요인 중 하나가 되었다.

이후 고구려의 전통을 일부분 계승한 고려와 성리학적 폐쇄주의에 치중한 조선을 비교해 보면, 다종족 사회의 장점과 개방적 문화 정책의 중요성을 더 잘 이해할 수 있다. 중국일본거란여진위구르 출신의 수많은 귀화인들을 반겨 주고 잘 대우해 준 고려는 958년에 중국인 쌍기의 건의로 당시로는 매우 선진적인 과거제도를 시행하고, 960년에 승려 체관을 중국에 보내서 중국에서마저 쇠퇴해 버린 천태학을 중국인에게 다시 전수하게 하는 등 빠르게 중국과 거의 대등한 문화 대국으로 성장했다. 이와 반대로, 외래인들을 의심하고 경계한 조선은 1653년 제주도에 표착한, 당시 최고 선진국이던 네덜란드의 선원들을 제대로 이용하지 못한 탓에 근대화의 중요한 기회를 억울하게 잃고 말았다.

 

한국의 전근대적인 왕조 국가 중에서 비교적 융통성이 있는 종족문화 정책을 실행한 고구려나 고려와, 지나치게 경직된 신라나 조선을 대조해 보면, 민족의 미래가 분명히 종족적문화적종교적 다양성과 여러 집단 간의 상호 존중에 있다는 교훈을 얻지 않을 수 없다. 그리고 국내에서 이질적 집단의 존재를 인정하지 않으면, 해외 진출도 그만큼 어려워진다는 말을 여기에 덧붙여야 한다.

 

가령 한국인이면 백제가 불교를 비롯하여 많은 선진 문물을 고대 일본에 전수하여 고대 일본 문화의 형성에 결정적인 역할을 하였다는 사실을 모르는 사람이 없을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대대적인 문화 전수의 배경에 중국인과 왜인을 관료로 등용하기까지 한 백제의 개방성이 있었다는 사실을 과연 알고 있을까? 받을 수()와 줄 수()가 서로 비슷하게 생긴 만큼 외부로부터의 수혈과 외부로의 진출을 떼어서 생각할 수 없다.

 

이 역사적인 교훈을 오늘날에 적용해 보면, 우선 두 가지 측면을 생각해 볼 수 있다.

첫째, 각각 중국과 구소련에서 독자적이고 탄력성 있는 문화권을 형성한 조선족(재중 교포)과 고려족(재소 교포)의 독특하고 이질적인 경험에 대해, 경제력부터 먼저 밝히는 남한 사회가 지금까지 너무 무관심하지 않았나 싶다. 사실 우리가 상상하는 것 이상으로 수난을 당했던 재중재소 교포들은 20세기의 광란 속에서도 민족 정체성을 어렵사리 보존해 왔으면서도 남한 사회와 달리 폐쇄적이고 배타적인 요소를 별로 지니고 있지 않다.

 

나의 은사 중 한 분이신 레닌그라드 대학의 임수 교수(76, 고려인)가 고려족의 그러한 면모를 대표한다. 당국의 압력에도 불구하고 끝까지 고려식 이름을 러시아식으로 고치지 않고 아들들에게도 한자 이름을 지어 준 그는, 고전 소설을 러시아어로 번역할 정도의 러시아어와 러시아 문화를 완벽하게 익혔을 뿐 아니라 러시아 인 며느리와 조화롭고 원만하게 지내고 있다. 미국의 삼류 문화보다는 고려족 지식인의 이러한 문화적혈통적 포용성이 한국의 진정한 세계화에 더 큰 도움이 될 것이다.

 

둘째, 남한에서 죽을 고생을 하고 있는 아시아 각국의 노동자들이 현재의 현대판 노예 신세에서 벗어나 이 사회의 어엿한 구성원이 될 수 있도록 해야 한다. 거란과 여진, 몽골, 일본 출신 귀화인들이 고려 사회를 문화적으로 더 풍부하게 만들었듯이, 네팔인의 순수한 불심과 인내심, 인간 존엄성을 존중하는 몽골인의 심성, 파키스탄인의 상술과 필리핀의 열정 등은 단색적인 한국 사회를 다채롭게 만들 수 있다. 그들이 가난하다는 얇은 생각 이전에 독특하고 깊은 그들의 문화를 눈여겨볼 줄 알아야 한다. 그렇게 되어야 동북 아시아와 한반도에 산재해 살던 여러 종족과 다양한 정치문화혈통적 관계를 유지했던 고구려가 그 다양성을 바탕으로 비교적 자주적인 자세로 중국을 대한 것처럼, 한국도 반세기의 숙제인 대미 종속성의 굴레에서 벗어나 독립적이면서 국제적인 문화를 발전시켜 나갈 수 있을 것이다.

 

--박노자당신들의 대한민국

 

<생각해 봅시다>

1. 필자가 우리 나라를 단일 민족이 아닌 다민족 국가라고 하는 근거는 어디에 있습니까?

2. 고구려, 고려와 신라, 조선이 외국인 및 외래 문화를 수용하는 자세를 비교해 보고, 이들의 태도가 어떤 결과를 가져왔는지 정리해 봅시다.

3. 결국 필자가 말하고자 하는 문화에 대한 수용 태도를 간단히 써 봅시다.


 

728x90
반응형

블로그의 정보

국어독서창고

처사21

활동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