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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신탕 문화의 충돌과 가치 모형

by 처사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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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신탕 문화의 충돌과 가치 모형

 

 

문화란 그 시대의 사람들이 만들어 내는 가치이자 산물이다. 한 나라의 국민의 문화적 모형은 유전적 모형만큼이나 중요하다. 문화적 모형은 일시적으로 창조된 것이 아니라 전통적 가치 모형 중에서 선택된 고유한 문화 그 자체다. 인간은 스스로 문화를 창출하며 역사를 발전시킨다. 최근 월드컵 개최가 화두로 떠오르자 어김없이 단골 메뉴처럼 보신탕 문화에 대한 편협하고 비뚤어진 잣대를 들이대며 마치 한국인을 야만인처럼 매도하는 강대국의 편견은 문화적 갈등과 격리를 조장하는 행위로서 도저히 묵과할 수 없는 한 나라에 대한 의식적 문화 충돌을 예상케 한다.

 

당연히 옹호되어야 한다. 생각이 다르다고 해서 행위가 다르다고 해서 잘못되었다고 주장하는 것은 문명에 대한 고립주의를 자초하기 쉽다. 전통적 가치 이념이 재해석되고 상대적으로 세계적인 식문화에 대한 관찰이 모색된다 하더라도 인간의 행동양식으로 통일될 수 없는 처지에서 오만한 문화 상대주의의 우월 의식으로 타문화를 깔보는 행위는 겸허한 행동을 각성케 하는 촉진제가 되었으면 싶다.

 

문화의 다원주의는 종의 다양성이 가치 있는 것처럼 가치 있는 행위이다. 모든 나라마다 제 각각 지켜 온 전통과 관습과 그에 어울리는 인간으로서의 고유한 역사가 있다. 문화 역시 그러한 과정 속에서 태어난 산물이라서 더더욱 가치 있다. 비록 어줍잖더라도 어떤 문화가 역사적으로 존재했다 사라지고 재생되고 변형되고 개발되는 것은 그 나라와 민족이 존속해 온 환경과 무관하지 않다. 우리가 개고기를 즐겨 먹는 것도 프랑스 인이 거위의 간을 즐겨 먹는 것도 몽골 인이 말고기를 먹고 아프리카 인이 뱀을 즐겨 먹으며 사냥하는 것도 미국인이 다람쥐 고기를 먹는 것도 모두 그럴 만한 당위성과 문화적 기반 위에서 탄생된 일종의 인간 본연의 틀 속에서 존속하는 식문화일 뿐이다. 영국인이 영어를 쓰고 중국인이 중국어를 러시아 인이 러시아를 쓰는 것처럼 한국인이 한국어를 쓰는 것이 너무도 당연한 것처럼 어떤 음식을 먹건 그것은 그 나라가 지키며 아껴 온 산물일 뿐이다. 우리가 보신탕을 먹는 것을 비판하는 것은 한국인에게 한국어를 쓰지 말고 프랑스 어나 영어만을 쓰라는 충고와 마찬가지 설법이다. 영어와 프랑스 어를 쓰면 문화인이고 한국어와 중국어를 쓰면 야만인이다 라는 논리와 매한가지인 논리는 우리를 경악케 한다.

 

인류의 역사 발전 과정을 지켜보면 기술 문명의 발전이 지속될수록 그들 나라들은 전통적인 문화적 가치 보존에 그 이상의 투자를 게을리 하지 않았던가. 루브르 박물관과 스미소니언 박물관에 진열된 인간의 역사적 유물만 소중하고 유형무형의 문화적 질 관리는 일고의 가치가 없다고 생각되지 않는다. 더 높고 숭고한 문화적 가치이념은 그 나라가 지켜 온 문화와 전통이 잘 보존되고 다양하게 발전되도록 조화롭게 이해하는 것이 정도이자 순리이다. 인간의 역사가 만들어 내는 모든 문화적 유물은 전쟁과 인간의 속박을 일궈낸 범죄적 유물과 독재적 산물을 제외하고는 보존할 가치가 있다. 설령 그러한 문화가 시들어 가도 그것은 그 시대를 산 그 민족이 선택할 고유한 영역이지 결코 상대적 사팔뜨기인 우월주의의 평가 대상일 수는 없다.

 

개고기를 먹는 우리 민족의 행위는 전통 문화적 가치 이념에 대한 집념이 아니라 그저 단순히 맛에 대한 기호 식품으로서의 가치 때문일 수도 있다. 달팽이 고기와 개구리 요리가 일품이라는 프랑스 인이 즐겨 먹는 것들은 우리의 혀끝으로는 구미가 당기지 않음은 두말할 나위가 없다. 사실 우리 민족처럼 음식의 맛에 까다로운 민족이 있을까 싶다. 음식의 가지 수만 해도 선진국이라고 하는 나라와 비교해도 모르면 모르되 훨씬 많을 것이다. 우리는 코끝으로 음식을 헤아리는 민족이 아니라 혀끝으로 음식 맛을 헤아리는 민족이다. 그만큼 감수성이 많고 눈물이 많고 정이 많고 예술적 감각이 두드러진 민족이다. 전통 한옥에서 전통 한식을 먹어 본 외국인들의 찬사는 단지 우리의 음식 맛보다는 우리 음식의 다양한 요리법과 가지 수일 것이다. 아무리 맛없는 음식이라 하더라도 어려서부터 먹은 음식 맛은 커서도 크게 변하지 않는다. 영양학적으로도 보신탕은 비타민 C가 듬뿍 들어 있으며 지방 역시 스테이크에 비해 훨씬 적은 보양식으로 몇몇 안 되는 비타민 생성 동물 중의 하나이다.

 

보신탕 문화에 대한 가치 이념의 판정을 문화 상대주의의 우월감으로 재단하는 것은 온당치 않다. 인간은 모든 동물을 다스린다. 모든 가축을 도살하는 행위 자체에 대해 어떤 계시론적 메시지가 전 세계의 패러다임으로서 모든 인류의 기본 헌장처럼 제정되면 몰라도 절대적 원리도 없는 현실에서 한국의 보신탕 문화만을 단두대에 올려놓고 후려갈기는 그대들은 누구인가? 월드컵을 치르지 못하는 한이 있어도 문화적 상대주의를 인정하지 않는 것은 용서할 수 없다. 우주와 인간에 대한 겸허한 세계관을 월드컵이라는 세계인의 축제를 이용하여 말살하려는 진의는 매우 부당하고 건전한 발상이 아니다. 만일 우리가 프랑스 인에게 말고기를 먹으면 월드컵을 보이콧한다고 하면 그들은 수용할 것인가 말이다.

 

본원적 당위에 대한 가치 등급은 어느 한 문화 비평가의 말에 달려 있는 것이 아니라 인간의 행위 그리고 어떤 문화가 전 세계인에게 지대하리만큼 피해를 줄 만큼의 엄청난 쇼크를 일으킬 위협적인 요소를 지녔다 해도 그것은 전 인류가 풀어야 할 과제일 뿐이다. 어느 개별 국가가 자기 나라의 잣대로 다른 나라의 관습과 문화를 거들먹거리는 것은 인류의 윤리 규범 자체를 어떤 특정 국가의 성역을 끌어내려 바꾸고자 하는 문화 침입자로서의 혁명일 뿐이다. 그러나 그게 타당한 가치 설정의 도그마인가 말이다.

 

그러나 우리에게도 급격한 외적 환경의 변화에 대한 불가피한 수정론은 제기될 수 있다. 가능하면 마찰 없이 역기능을 유발하지 않을 정도의 보신탕 문화는 성숙되어야 한다. 정정당당하게 슈퍼마켓에서도 개고기를 팔 수 있을 만큼 위생적으로도 당당하고, 소나 돼지처럼 도살시켜 흉칙하리만큼의 도살 행위를 금하며, 식용견만을 사용하고 개고기 요리를 보다 선진화시킬 수 있는 맛깔스런 요리로서 개발해야 할 것이다. 모든 동물과 마찬가지로 우리들 또한 동물 애호가들을 이해하는 지혜도 있어야 한다. 충견들의 고백 속에는 요람에서 무덤까지 영혼이 아름답게 기도할 것도 눈물겹게 생각하면서 말이다. 그리고 개고기에 대한 금기를 가지고 있는 나라들에 대한 상대적 문화를 이해할 수 있는 아량 또한 지켜 내어 고립된 문화가 아니라 아름다운 식문화의 폭을 이해시킬 수 있는 주체성도 지녀야 할 때다. 지구상에 펼쳐지고 있는 장엄한 생명 존중의 잠정적 명제가 경건해질수록 아름다운 것을 인식하면서 보다 성숙한 월드컵에 결코 흠집이 되지 않도록 우리 문화의 질 제고에 긍지와 자부심을 잃지 말며 구체적인 문화적 갭을 해소시킬 수 있는 대안에 한 차원 높은 세계인의 일원으로서 다가서자. 인류의 집합적 지혜의 대상도 아닌 흠집이 어찌 보신탕 문화를 저당잡고 우리를 후퇴시키려 하는가? (김영곤)

 

 

<생각해 봅시다>

1. 우리의 보신탕 문화를 성숙시키기 위해서 필자가 제시한 방법들은 무엇입니까?

 

2. 한국의 보신탕 문화는 결국 어떤 관점에서 이해해야 할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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