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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술가의 사명, 순수냐 참여냐?

by 처사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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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술가의 사명, 순수냐 참여냐?

황 광 우

 

예술 문화인은 직접적인 정치 활동을 삼가야 합니다. 예술 문화인의 사명은 어디까지나 민족 예술 문화의 진흥과 창달을 위한 활동에 있습니다. 예술 문화인의 전적인 정치 활동에의 개입 내지는 단체적인 참여는 예술 문화의 본질을 모르는 무식의 결과입니다.

--1965710, 예술문화단체총연합 화장단이 발표한 성명서

 

 

 

한 사회의 생산력은 분업의 크기에 비례한다.’는 명제는 일찍이 애덤 스미스가 내 놓은 상식의 하나입니다. 농부는 농사에 충실해야 하고 어부는 고기잡이에 충실해야 하며 선반공은 쇠깎는 일에 봉제공은 옷 만드는 일에 충실해야 하며 그래야 한 나라의 국부가 발전한다는 주장은 지당한 것입니다.

 

그런데 이 명제가 노동자는 노동만 열심히 해야 하고, 학생은 공부만 해야 하고 문인은 글쓰기에 충실해야 하며 정치는 정치가에게 맡겨놓아야 한다는 주장으로 확대되면 즉각 이의가 제기됩니다. 이에 대해서는 주권재민설이 강력한 논거로 제기됩니다. 정치 권력의 원천은 국민의 주권에 있으며, 국민은 정치가에게 자신의 주권을 위임한 것에 지나지 않는 것이기에 결코 정치는 소수 정치가의 전유물이 아닐 뿐더러 정치권력이 국민의 뜻을 배반할 시에는 정치권력을 반대하고 무너뜨릴 권리가 국민에게 부여되어 있다는 것입니다 노동자도 학생도 국민이며 따라서 이들이 정치권력에 대해 반대의 의사를 조직하고 표현하는 것은 국민의 정당한 권리 행사의 일환인 것입니다.

 

문화 예술인도 예외가 아닙니다. 문화 예술인은 국민의 일원일뿐더러 그 직업의 속성상 국민을 교화해 나갈 의무를 진 사람들입니다. 앞에서 우리가 살펴 보았듯이 인류는 문자의 탄생이래 문인들에게 사회의 교사로서의 임무를 부여하여 왔던 것입니다.

 

때는 1965, 5.16군사 쿠데타를 통해 권력을 잡은 박정희 군사 정권이 조국의 근대화를 위해 일본과 굴욕적인 국교 정상화를 시도하던 시절입니다. 40년 동안 일본의 식민지 통치를 받아 온 우리 민족이 돈 몇 푼 받으려고 일본에게 굽실거린다는 것은 논리 이전에 민족 감정상 용납하기 힘든 것이었습니다. 나라의 운명을 걱정하는 많은 지식인, 학생들은 박정희 정권의 한·일 정상회담에 반대했습니다.

 

여기에서 예술문화단체총연합의 회장단은 일부 문화 예술인의 정치 참여를 반대한 것입니다. 한편은 정권을 비판하는 유인물을 찍고 돌리고, 거리에서 최루탄을 마시면서 시위를 하고 감옥에 가는 반면, 한편은 정치에 참여하는 문인들을 비난하는, 이런 식의 대립은 우리의 현대사에서 수없이 많이, 사회의 모든 영역에서 반복되어 왔고 그때마다 참여냐, 순수냐하는 양자 택일의 논쟁이 벌어졌습니다.

 

참여를 주장하는 사람들은 문학의 사회적 임무를 중시하는 입장이어서 문인들도 정치적 상황에 책임을 지고 참여해야 하며 문학 작품은 그러한 현실을 반영해야 한다는 주장을 폈습니다. 또 순수를 주장하는 사람들은 문학의 예술적 기능을 중시하는 입장이어서 문인들의 정치 참여를 반대하였으며 문학은 특정의 사상이나 정치적 입장으로부터 자유로워야 한다는 주장을 폈습니다.

 

참여를 주장하는 사람은 음식의 영양 공급 기능을 강조한 셈이며, 순수를 주장하는 사람은 음식의 맛을 주장하는 사람이고 보면, 논쟁의 결론은 영양가 좋고 맛있는 음식을 만들자로 될 것입니다. 그런데 음식은 영양가만 충분하면 된다는 주장과 음식은 뭐니뭐니해도 맛이 있고 볼 것이라는 주장은 끝없는 논쟁의 평행선을 달렸습니다. 무려 50년 동안이나 말입니다.

 

그런데 재미있는 것은 1965년의 문단의 주류를 형성했던 예총이 순수를 주장한 것과는 달리, 1925년의 문단의 주류는 참여를 주장한 카프였다는 사실입니다. 또 순수는 카프의 참여에 반대하여 제기된 구호였다는 점도 상기해 둘 만합니다.

 

 

순수의 고발

 

다음은 우리가 잘 아는 서정주 씨의 진술입니다.

 

1931년으로부터 1942년 일제에 의한 우리 어문 말소 때까지 있었던 순수문학이나 순수시의 뜻은 다분히 반사회주의적인 열성에서 생긴 것이다. 1925년으로부터 1934년에 이르는 사회주의 시운동이 빚어낸 무모한 횡포와 조잡안가한 예술품으로서의 가치에 아연한 시인들이 이에 반기를 들고 시의 본연의 자세와 권한을 돌이키는 데서 쓰기 시작한 것이다. 문학은 사회주의 사상뿐 아니라 어떤 한 사상의 단독 통제도 받을 수 없는 것이다. 그와 동시에 문학작품은 무엇보다도 먼저 예술품으로서 성공한 것이어야 한다.

--서정주 한국의 현대시

 

 

여기에서 서정주 씨는 네 가지 사항을 말하고 있습니다. 첫째로 순수시의 출현은 반사회주의적 열성에 기인한다는 것, 둘째, 1925년에서 1934년에 진행된 사회주의 시운동, 흔히 프로문학 계열에서 생산해 낸 작품들이 조잡하였다는 것, 셋째, 문학은 사상의 통제를 받을 수 없다는 것, 넷째, 문학작품은 무엇보다도 예술품으로서 성공한 것이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첫째와 둘째는 순수문학의 역사적 배경을 언급한 것이고 셋째와 넷째는 순수문학의 입장을 밝힌 것입니다. 서정주 씨의 견해에 따르면 참여 대 순수의 대립은 참여 측의 오류에서 시작된 것으로 보입니다.

 

그러면 먼저 사회주의 시운동은 어떠한 것이었는가를 살펴봅시다.

19193.1운동은 조선의 독립운동이 본격적으로 발전하게 된 민족사적 계기였습니다. 교과서에서는 3.1운동이 미 대통령 윌슨의 민족 자결 선언의 자극을 받아 일어난 것으로 기술하여 왔으나, 3.1운동을 이끈 지식인들에게 결정적인 자극을 주었던 것은 191710월의 러시아 혁명이었습니다. 러시아 혁명을 이끈 지도자 레닌은 권력을 장악한 직후 수세기 동안 차르의 전제적 지배하에 신음하던 소수 민족들에게 즉각적인 독립을 선포했습니다. 지금은 역사의 운동이 바뀌어 사회주의 진영이 자본주의 진영에게 패배한 것으로 귀결되고 있으나, 1917년 당시엔 사회주의 이념과 사회주의 운동은 모든 피압박 계급과 민족들에게 커다란 희망이 되었습니다.

 

일본의 진보적 지식인들은 대다수 사회주의 진영으로 가담하였고, 일본으로 유학을 간 한국의 젊은이는 그대로 사회주의의 세례를 받게 되어 있었던 것입니다. 이후 조선의 독립운동은 민족주의 진영과 사회주의 진영이라고 하는 두 진영에 의해 주도되었는데, 사회주의자들이 독립운동의 대다수를 점하였음은 과장이 아닌 역사적 사실이었습니다. 테러를 투쟁의 무기로 삼았던 김구, 대미 외교를 위해 독립을 청원하였던 이승만, 그리고 실력 양성을 주장한 안창호와 같은 몇몇 유명 인사를 제외하면 민족주의 진영은 취약하기 그지없는 구조를 갖고 있었습니다. 반면 사회주의 진영은 해외에서 공부를 하고 온 젊은 지식인들과 공장과 농촌에서 성장한 노동자 농민들로 구성되었기 때문에, 1920년 이후 조선의 독립운동은 대다수가 사회주의 이념을 옹호하는 자, 혹은 사회주의를 지지하는 자들로 구성되었던 것입니다.

1929년 광주 학생 독립 운동에 관한 한 기록을 봅시다.

 

192911월 국내에서 일어난 광주 학생 사건은 동경 유학생에게 커다란 충격을 주었다. 당시 일본 유학하는 한국인 학생 연합 회합에는 대개 3파의 대립이 있었다. 민족주의 그룹, 사회주의 그룹, 무정부주의 그룹이 그것이다. 광주 학생 사건을 계기로 한 항일 투쟁에도 이 세 가지 경향이 있었는데 공작과 조직에 있어서는 사회주의 그룹을 따를 수가 없었다. 이 사건만 하더라도 배후 조종은 사회주의 계열이었던 모양이다.

--이헌구 사상계

 

 

 

채만식의 치숙에는 이런 구절이 나옵니다.

 

우리 아저씨 말이지요, 아따 저 거시기 한참 당년에 무엇이냐 그놈의 것, 사회주의라더냐, 그걸 하다 징역 살고 나와서 폐병으로 시방 앓고 누워 있는 우리 오촌 고모부 그 양반

 

채만식의 치숙 같은 이들이 1925년 조선 프롤레타리아 예술가 동맹을 조직하였는데, 이 단체의 약칭이 카프였습니다. 카프는 그 당시 조선 문단을 이끌었던 이광수와 최남선 류의 소박한 민족주의 문학을 거부하면서 사회주의 문학 이론을 도입, 보급했습니다.

 

문학은 이데올로기의 한 영역으로서 계급 투쟁으로부터 결코 자유로울 수 없다는 것, 역사의 진보의 편에 서고자 하는 이들은 억압 받는 노동자, 농민의 이익을 대변해야 한다는 것, 문학은 이들의 이해와 정서를 객관적으로 묘사하는 데 충실해야 한다는 것 등을 주장했습니다.

카프의 대변자 박영희는 이렇게 주장했습니다.

 

문예의 전 목적은 작품을 선전 삐라화하는 데 있다. 선전문이 아닌 문학은 프로 문예가 아니요, 프로 문예 아닌 모든 문예는 문예가 아니다.”

 

문학의 교시적 기능을 극단적으로 강조한 카프의 입지는 적과 치열한 전투 중인 병사들에겐 절실한 진리일 수 있습니다. 전투 중인 병사에게 필요한 것은 한 알의 총알이요, 적진을 교란시키고 아군을 증강시킬 수 있는 선전문이지 않겠습니까? 하지만 모든 문예가 선전문이어야 한다는 데에는 문학이 갖추어야 할 고유의 성질을 간과하는 오류가 들어 있습니다.

 

우리는 여기에서 카프에 가담한 당시 지식인들의 사상이란 오래된 실천과 연구 위에서 체득한 토착적인 사상이 아니었다는 점, 일본의 동경을 통해 들어온 서구 유럽의 사회주의 사상이 아무런 여과 장치를 거치지 않고 직수입된 것이라는 점, 모든 외래의 문명은 일정한 정정 과정을 거치지 않으면 토착인에겐 매우 생경하게 비춰진다는 점을 참고로 할 필요가 있습니다.

 

 

카프의 대표적 평론가 팔봉 김기진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예술이 길다는 말은 새빨간 거짓말이다. 모든 예술은 죽었다. 지금까지의 모든 지배계급의 예술은 무산계급을 타락시킨 죄악이다.”

 

인류의 전통적인 예술을 깡그리 부정하는 이런 태도는 사실 사회주의 사상의 창시자인 마르크스, 엥겔스와는 무관한 것이었습니다. 그들은 여려 곳에서 노동자 계급은 인류의 예술적 전통을 계승, 발전시키는 주역이 되어야 한다고 주장했습니다. 김기진은 지금까지의 모든 예술이 지배계급의 전유물이었음에 착안하여 예술의 과거를 전면 부정함으로써 사회주의자의 철저함을 과시하였지만, 이러한 태도야말로 무정부주의자의 것이지 사회주의자의 것은 아니라는 것을 이해하지 못했습니다.

 

인간은 역사를 만듭니다. 하지만 역사가 물려준 현실 위에서 역사를 만들어 나가는 것입니다. 따라서 한 인간이 역사가 물려 준 유산을 부정할 수도 없으려니와 굳이 부정하려 하였을 때 그가 설 수 있는 곳은 거친 야만의 문학입니다.

 

 

 

순수가 추구한 세계

 

이제 순수문학은 1925년으로부터 1934년에 이르는 사회주의 시 운동이 빚어낸 무모한 횡포와 조잡에 반기를 들고 일어난 문예 운동이었다는 서정주 씨의 언급을 우리는 이해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그들은 아마도 걸핏하면 소부르주아적이라 비난을 퍼붓고 계급의 이익이라는 미명하에 문학인의 다양한 개성을 억압하는 사회주의 경향의 문인들에게 심한 적개심을 갖게 되었을지 모릅니다. 동시에 이들이 생산하는 문학의 조잡함, 생경함을 보면서, 문학은 이것이 아닌데, 문학이 해야 할 역할이 이렇게 정치와 사상에 의해 제한되어서는 안 되는데 한탄하면서 문학의 정신을 옹호해야 할 일종의 사명감을 느꼈을 것입니다.

 

그들은 거친 현실을 떠나 아름다운 자연에서 시를 발견했습니다. 김영랑은 모란이 피기까지 나는 아즉 기둘리고 있을 테요, 찬란한 슬픔의 봄을.’이라고 읊었고 박목월은 구름에 달 가듯이 가는 나그네, 술 익는 마을마다 타는 저녁놀을 읊었으며, 서정주는 한송이 국화꽃을 피우기 위해 봄부터 소쩍새는 그렇게 울었나 보다라고 읊었습니다.

 

일제 시대의 참여 문학이 민족의 독립과 계급의 해방이라는 기치 하에서 활동한 것이라면 순수문학은 그 상황에서 무엇을 추구하였을까요? 순수문학의 이론적 대변자 김동리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순수란 문학 정신의 순수이다. 다른 목적에 예속되지 않는다는 뜻이다. 따라서 본령 정계의 문학이다. 문학 정신의 본령이란 인간성 웅호에 있으며 이 인간성 옹호가 모든 것에 우선하기 때문이다.

--김윤식 한국 근대 작가 논고

 

 

여기에서 우리는 인간성 옹호라는 아름다운 언어를 만납니다. 인간성이란 옹호되어야 합니다. 그리고 인간성을 억압하는 모든 것은 이 지상에서 사라져야 합니다. 그리하여 모든 인간이 갖는 다양한 개성이 봄날의 꽃처럼 만발하여야 합니다. 그런데 1930년대 일제 강점 하의 조선 땅에서 무엇이 인간성의 자유로운 발현을 억압하고 있었던가? 이 점에 대해 순수론자들은 카다란 착각을 했습니다. 문학의 순수를 추구하고자 하는 그들에게 끊임없이 현실의 참여를 종용하고 자신들을 향해 손가락질을 하는 카프 계열이 문학의 순수를 억압하는 힘으로 다가왔겠으나, 정작 당대의 2천만 대중의 인간성을 억압하는 힘은 분명 일본 제국주의였습니다.

 

1931년에는 만주사변이 터지고 1937년에는 중일 전쟁이 터집니다. 지구는 제2차 세계대전을 향해 치닫고 있었습니다. 아시아를 일본의 무력으로 통일하여 대동아 공영권을 만들려 하는 일본의 야심이 본격화되던 그 시절, 조선의 땅에서 살던 대다수 민중들은 풀뿌리로 목숨을 이어가고 있었습니다. 1940년대가 되자 조선은 일본의 전쟁 물자 공급지가 되었습니다. 학생들은 정복 전쟁에 총알받이로 동원되었고, 힘깨나 쓰는 농민과 노동자는 군수물자를 생산하는 탄광과 공장으로 징용되었으며, 조선의 처녀들은 정신대로 끌려갔습니다. 집안의 가마솥, 수저, 제기, 심지어 요강까지도 탄피를 만들기 위해 공출해 갔습니다.

 

문학의 순수를 옹호하는 그 자체는 좋았는데, 왜 이처럼 참혹하게 민중의 인간성이 짓밟히고 있던 시절에 제기되었던가? 하는 게 순수 문학론에 제기되는 역사의 물음입니다. 역사는 순수문학 옹호론자의 발걸음을 이렇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장하도다!

그대는 우리의 오장(일본 육사의 하사) 우리의 자랑

그대는 조선 경기도 개성 사람

인씨(印氏)의 둘째 아들 스물한 살 먹은 사내

 

장하도다!

그대는 우리의 가미가제 특별 공격 대원(글라이더에 폭탄을 싣고 가 미군의 군함에 부딪혀 자폭하던 비행사)

정성껏 만들어 보낸 비행기 한 채에

그대 몸을 실어 날았다 가 내리는 곳

기쁜 몸짓하며 내리는 곳

조각조각 부서지는 산더미 같은 미국 군함!

 

우리의 땅과 목숨을 뺏으러 온

원수 영미의 항공모함을

그대 몸뚱이로 내려져서 깨었는가?

 

장하도다

우리의 육군 항공 오장 마쓰이 히데오여

 

이 시의 지은이는 서정주 씨입니다. 물론 역사는 이처럼 일본의 침략 전쟁을 옹호한 문인들의 이름을 다수 기억하고 있습니다. 문인들에게마저 순수의 자유를 앗아간 저 일본 제국주의의 가혹과 간계를 우리는 과연 어떻게 탓해야 합니까?

나름대로 문학의 사회적 임무에 치중하려다 패배한 카프가 우리 역사의 한 아픔이라면 문학의 순수성을 옹호하다가 결국엔 친일문학이라는 가장 치욕스런 딱지를 몸에 새기게 된 순수문학 역시 우리 문학사의 아픔입니다.

 

김동리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자본주의적 기구의 결함과 유물 변증법적 세계관의 획일주의적 공식성을 함께 지양하여 새로운 보다 더 고차원적 제3세계관을 지향하는 것이 현대문학 정신의 세계사적 본령이며, 이것을 가장 정력적으로 실천하려는 것이 시방 필자가 말하는 소위 순수문학 혹은 본격문학이라 일컫는 것이다.

--문학과 인간

 

 

일본 제국주의의 물질적 토대인 자본주의도 거부하고 이에 대항하는 사회주의 운동도 거부하는 제3의 세계관, 진정으로 인간성을 옹호하는 문학을 창조하겠다는 야무진 김동리의 야망은 어떻게 되었던가요? 그리하여 까 만든 작품은 무녀도’, ‘바위’, ‘역마였습니다. 이들 작품 속에서 그가 구현한 것은 자본주의와 사회주의를 넘어선 지점의 정신이 아니라 자본주의도 사회주의도 모르는 원초적 세계의 인간성, 샤머니즘적 운명관에 지배되는 인간성이었습니다. 김동리는 이런 귀착을 정당화하기 위해 아무리 몽환적이고 비과학적이고 초자연적인 현상이더라도 그것은 가장 현실적이고 상식적이고 과학적인 다른 어떤 현상과 꼭 마찬가지로 리얼리즘이 될 수 있다.”라고 말했습니다.

 

그에게 중대한 현실로 여겨진 몽환적이고 초자연적인 현상이란 객관적인 입장에서 볼 때 현실을 도피한 순수문학의 동굴에 지나지 않았습니다. 이 동굴 속에서는 결코 현실 정치의 불순으로 더럽히지 않은 문학 그 자체의 순수를 보지(保持)할 수 있었는지 모릅니다. 그러나 이 순수는 현실의 불순과 피투성이로 싸우는 순수가 아니었습니다.

 

예술을 위한 예술’, 이 구호는 프랑스의 콩스탕이 1804년 그의 일기에서 최초로 사용한 것으로 전해집니다. “보들레르(프랑스 시인)는 유용성이 예술에는 가장 적대적인 것이며, 예술은 모든 도덕적 제약으로부터 자유로워야 한다고 예술지상주의를 옹호했습니다. “부도덕한 책이라고 하는 것은 없다. 잘 쓰여진 책과 서투르게 쓰여진 책이 있을 뿐이다.”라고 마란 오스카 와일드 역시 예술 지상주의를 편든 사람이었습니다.

 

서구 유럽 문예에서 예술지상주의를 철학적으로 보장해 준 이는 칸트입니다. 칸트는 미적 대상은 공리적 대상과 전혀 다른 것으로서 무목적이 미의 목적이며 아름다움과 숭고함을 즐기는 것이야말로 다른 어떤 것도 제공하지 못하는 미의 독자적인 가치라고 말함으로써 미의 자율성을 주장한 철학자였습니다. 이렇게 볼 때 예술지상주의는 하나의 치밀한 이론이라기보다 비슷한 생각들을 한데 묶어 놓은, 문예의 한 경향이라고 보아야 할 것입니다.

 

서구 유럽에서 예술지상주의가 등장하게 된 데에는 예술가들의 생존권과 깊은 연관이 있었습니다. 자본주의가 모든 인간의 노동 생산물을 상품화하면서 예술품마저 시장의 논리에 걸려들게 되었습니다. 시장에서는 구매자의 수요를 충족시키지 못하는 상품은 공급의 중단을 강요받습니다.

 

그런데 예술품의 구매자들은 모두 기본적으로 부르주아 계급에서 나왔습니다. 부르주아지의 천박한 욕구가 시장을 매개로 예술가들의 창작 행위를 지배하게 되었을 때, 예술가들은 시장을 위한 예술이 아니라 예술을 위한 예술을 부르짖으면서 예술 창작 활동의 자유를, 예술가의 생존권을 옹호하였던 것입니다. 미국의 청교도들이 영국의 식민지 지배로부터 독립 선언을 하였듯이 예술가들은 부르주아지로부터 예술의 독립 선언을 제기한 것입니다.

 

19세기의 유럽은 자유와 민주주의를 구가한 사회라고 우리는 알고 있지만, 실제로 그 내막을 들여다 볼 때, 문필 활동에 대한 국가의 감시, 간섭, 억압은 여느 독재 국가와 마찬가지였습니다. 툭하면 문인들은 체포 구속되었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예술은 예술 그 자체를 위해 존재하는 것이어서 그 누구로부터도 간섭을 받을 수 없다는 것이 예술을 위한 예술의 의도였습니다.

 

이렇게 볼 때 서구 유럽에서의 예술지상주의와 일제 시대의 순수 문학론은 문예인들의 예술적 생존권의 옹호라는 맥락에서 공통점을 지닙니다. 시대가 예술가들의 창작열을 따뜻하게 감싸주지 않을 때 예술가들은 시대를 버리고 자신들만이 사는 동굴로 들어가는 것입니다.

 

학은 비단을 짜기 위해 아무도 보지 않는 밀실을 요구했습니다. 밀실은 아름다운 비단을 짜내는 작업 공간이었습니다. 참여를 주장하든 순수를 주장하든 모든 예술가에게는 이 밀실이 필요합니다. 그리고 어느 쪽을 주장하든 그의 노동의 결과가 당대의 인류의 절실한 염원을, 예술적으로 형상화해 냈는가는 여전히 문제로 남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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