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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후인, 서정시의 본질론 해명에 완벽한 전형

by 처사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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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후인, 서정시의 본질론 해명에 완벽한 전형

 

 

 

임이여, 물을 건너지 마오.

임은 그예 물을 건너시네.

물에 휩쓸려 돌아가시니

가신 임을 어이할꼬.

 

공후인황조가’, ‘구지가화 함께 전하는 희귀한 고대 가요 중의 하나로 고금주에 전한다. 술병을 끼고 강물로 뛰어든 미친 남편의 뒤를 따라 익사한 아내의 정절을 노래한 비가(悲歌)이다. 문학사상 면면히 이어져온 여심을 노래한 가요의 효시로, 근세민요인 아리랑의 여심과 직결되며 서정시의 본질론 해명에 있어 완벽한 전형이다.

 

 

= 우리는 서사문학의 원형으로 단군신화를 살펴보았는데 이번엔 서정문학의 원형을 이야기해 봅시다.

 

= 우리나라 서정시의 원류를 현존하는 작품에서 찾아본다면 황조가공후인을 들 수 있겠지요. 그러나 아쉽게도 이 두 시가 모두 한자로 되어 있고 그 형식도 시경(詩經)’의 경우처럼 사언체(四言體)지요. 더구나 공후인은 작자나 배경이 과연 우리나라 것인지 논란이 많습니다.

 

= 모든 문화는 거슬러 올라갈수록 미분화상태가 되기 때문에 네 것이냐 내 것이냐를 따지기 힘들 때가 많아요. 두만강이나 압록강이나 그 근원을 캐보면 다같은 천지(天池)의 물이 됩니다. 재미난 것은 서구에서 서정시(lyric)를 뜻하는 말이 리라(lyra)라는 하프형의 칠현금(七絃琴)에서 생겨난 것처럼 공후인의 경우도 공후라는 악기에서 비롯된 시라는 사실입니다.

 

= 문헌에 나타난 것을 보면 공후는 한나라 때부터 널리 보급된 악기인데 줄이 23개이고 영제(靈帝)가 애호했다고 합니다. 그래서 공후인이란 노래도 이 시기에 지어진 것이라고 추정하는 설이 있지요. 이렇게 서정시는 동서할 것 없이 노래에서 발생된 것이므로 서양사람들은 리라를, 동양 사람은 공후에 맞춰서 가사를 붙여 노래를 불렀고 거기에서 서정시가 생겨난 것이라고 풀이할 수 있겠습니다.

 

= 서정시의 원시적 형태를 보면 의미없는 단순한 외침소리로 된 것들이 많다는 것입니다. 워라쉐크는 고대음악이라는 저서에서 모든 미개인의 가요 가운데 가장 현저한 특질은 아무런 의미도 없는 말을 자주 되풀이하는 것이라고 지적했습니다. 그러고 보면 오하마 인디언들이 백인들은 노래를 부를 때에도 훌륭한 말을 한다.’고 놀라워하는 것도 무리가 아니죠.(웃음)

 

고려가요를 봐도 위두어렁성이니 얄리얄리얄랑성 얄라리얄라같은 무의미한 후렴들이 많이 나오지 않습니까. 그런 노래에 의미를 조금씩 불여가는 과정에서 서정시가 태어나게 되었다는 것을 짐작할 수 있습니다.

 

= 좀더 구체적으로 이야기하면 이 노래는 나루터에서 남편이 물에 빠져 죽는 것을 보고 그 아내가 슬피 공후를 타며 노래를 부른 것이라고 했는데, 사실 그때 무슨 경황이 있었겠습니까! 지금 초상집에 가면 울면서 넋두리를 하듯이 그 경우도 통곡의 외침소리에 간간이 사연을 늘어놓는 것이었겠지요.

 

= 그래서 지금 국문학계에는 과연 이 시의 원작자가 누구냐로 논란이 많은 것 같습니다. 설화 내용대로 원작자를 백수광부의 처라고 해야 된다는 것과 남편이 죽었는데 당사자가 공후를 들고 와서 시를 짓는다는 것은 이치에 맞지 않는다, 그러니까 아무래도 그 광경을 옆에서 지켜보았던 뱃사공 곽리자고가 이야기해준 것을 듣고 그의 처 여옥이가 지은 것이라고 봐야 된다.’는 양설(兩設)이지요.

 

= 더욱이 문제가 되는 것은 당사자가 지은 것이라면 공후인이 한국것이라는 설이 유력해지고, 곽리자고의 처 여옥이라면 한인(漢人)의 작으로 봐야 하므로 이 싸움은 자꾸 커지지요. 물론 중국문헌에 나오는 그 설화의 조선진(朝鮮津)이라는 것이 과연 한사군 때의 조선현을 뜻한 대동강 부근이냐, 그렇지 않으면 한대의 중국 북경 근처에 있었던 지명이냐의 양설이 있지만 전자라 해도 여옥의 작으로 본다면 한인(漢人)의 작으로 기울어지거든요. 그녀의 남편이 곽리자고이므로 그런 성명은 우리나라 사람것으로는 볼수 없으니 말입니다.

 

= 그러나 그런 싸움보다는 이 양설을 합쳐서 생각해 보면 서정시가 무엇인가 하는 그 본질을 해명하는 데 귀중한 도움이 됩니다.

 

공후인은 다같이 두 부부의 짝으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강에 빠져 죽은 백수광부(白首狂夫)와 그 아내, 그리고 한 옆으로는 그 광경을 본 곽리자고와 그 이야기를 들은 아내 여옥, 이렇게 A그룹의 부부와 B그룹의 부부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그러니까 A백수광부 = B곽리자고, A1백수광부의 부인 = B1 은 동일한 입장으로 서로 대응됩니다. 서정시가 노래에서 언어로 화하는 것처럼 A는 노래의 상태요 B는 언어의 상태입니다. 즉 베르너의 설대로 외치는 상태에서 표현의 상태로 옮겨오는 서정시의 발달과 과정이 그대로 드러날 있는 경우입니다. 베르너는 죽음에 관한 노래의 원초적인 형식은 아마도 단순한 외침소리(통곡)였을 것이다. 이 외침소리는 부분적으로 전연 의미가 없는 음절로 되어 있을 것이지만, 그것이 내부의 감절해방의 표현잉 될 때 이미 최초의 놀리적 단계에 도달한 것이 된다고 했는데, ‘공후인은 이러한 이론을 설화와 작품으로 직접 보여주고 있는 훌륭한 예가 될 것입니다. 서정시인의 마음 가운데에는 백수광부의 처와 여옥이는 하나인 것입니다. 그 제작 과정의 두 마음일 뿐이지요.

 

= 그러니까 공후인은 서정시의 발생 연구에 있어서 완벽한 전형성을 지닌 시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A그룹의 부부가 B그룹의 부부로 옮기는 것, 즉 정서의 객관화에서 노래가 의미가 되고 행동이 언어가 되는 것이고 그것이 서정시의 본질이 된다는 말씀이군요.

 

= 뿐만 아니라 서정시의 주제도 그래요. 서정시는 즐거움보다도 죽음쪽에 있었다는 것입니다. ‘단군신화에서도 보았듯이 서사지는 태어나는 것’ ‘만나는 것그리고 영웅들의 찬가라 한다면 서정시는 주로 죽는 것’ ‘이별하는 것그리고 패자(敗者)의 비가(悲歌)라는 데 가장 그 특성이 잘 나타날 있습니다. 물론 서정시는 섹스나 음식을 먹는 즐거움을 표현하는 경우도 많았지만. 대부분의 서정시는 울음이었고 한탄이었지요.

 

그래서 서사시를 낳은 것은 방패와 창이요, 서정시를 낳은 것은 리라요 공후같은 악기입니다.

= ‘공후인황조가도 사랑하는 사람을 잃은 슬픔을 노래한 것이지요. 이 서정시들은 모두 한국적인 한을 담고 있어요. 이별과 죽음은 같은 차원의 것이 아닙니까? 사람들은 이러한 이별과 죽음을 이기기 위해서 노래를 불렀고, 그 노래를 통해서 슬픔과 어둠에서 해방되려고 했습니다. 이 서정시에서 우리는 한국인이 비극에 대처하는 마음의 바탕을 읽을 수 있을 것입니다.

 

= 그것이 강물로 상징되어 있다는 것이 흥미있습니다. 강물을 공간적으로 보면 단절이지요. 이 땅과 저 땅을 갈라놓고 너와 나를 떼어놓는 말하자면 강은 인간이 만난 최초의 좌절이었습니다.

 

= 그래서 옛날 시에서 이별의 장소는 대개가 다 강입니다. 공후인에서의 강은 죽음의 상징이 되겠지요.

= ‘요단강 건너가 만나리라는 기독교의 창송가가 그렇듯이 그리고 현세를 차안(此岸), 내세(來世)를 피안(彼岸)이라고 하는 불교가 그렇듯이…… 그러면서도 강물은 시간적으로 보면 흘러내려가고 흘러오는 생의 지속하는 흐름, 순환하는 흐름이기도 하지요. 죽음이며 동시에 영원한 생을 상징합니다.

 

= 그러니까 강을 넌너간다는 것은 이 좌절과 단절을 뛰어넘는다는 말로 볼 수 있는데 정신분석학자들은 그것은 성()의 원망(願望)으로 풀이하기도 하더군요. 강을 건너가려던 백수광부의 심리를 따져본다는 것은 재미있을 것 같아요. 정병욱씨는 이 강을 건너가려고 한 백수광부를 주신(酒神) 디오니소스와 같은 존재로 풀이했던 적이 있어요.

 

설화에서 그려진 백수광부는 허리에 술병을 차고 있었습니다. 그가 미치광이었든 술꾼이었든 문학적인 상징으로 보면 마찬가지입니다. 도취의 상태는 미친 상태처럼 현실이 아니라 환상의 세계를 추구하는 힘이니까요.

 

= 물고기도 아닌데 배도 타지 않고 강을 건너가려는 무모한 백수광부와 그의 뒤를 쫓아가서 만류하는 아내, 이것은 비단 공후인의 경우만이 아니지요. 강을 건너가려는 것은 현세의 한계와 질서를 초월하려는 마음입니다. 그것이 바로 상상력이 지배하는 원심적(遠心的) 세계입니다. 그러나 한옆으로는 그것을 지상의 현세에 묶어두려는 구심적(求心的)인 이성의 세계가 뒤따르지요. 우리의 마음은 떠나려는 것잡아두려는 것의 원심 운동과 구심 운동의 모순 속에서 움직입니다. 어느 한쪽만 있어도 인간의 마음은 늪처럼 괴어 썩어버립니다. 서정시는 대립하는 두 마음이 있을 때 꿈틀거리지요.

 

= ‘말은 가자울고라는 이별가의 패턴도 마찬가지지요. 떠나려는 힘은 ()’이고 또 잡은 애인의 손은 머물게 하는 힘……

 

= 남자들은 늘 떠나려고 하지요. 백수광부처럼. 그리고 여자들은 그 소매를 잡습니다. 강을 건너지 말라고. 그리고 백수광부는 물속에, 현실속에 침몰합니다. 그런데도 제2, 3의 백수광부들은 술병을 차고 강으로 그 한계 너머로 뛰어듭니다. 단순히 죽는 것이 비극이 될 수는 없지요. 무엇인가 꿈을 꾸는 도취의 술병이 없었더라면, 강을 건너려는 그 내심의 소리가 없었더라면 슬픔도 또한 없었을 것입니다. 그러니까 서정시를 낳은 그 슬픔의 원천은 절대로 수동적이고 부정적인 의미만을 갖는 것이 아니라는 게지요. 끝없이 구하는 생이 있을 때만이 또한 그 죽음은 시가 될 수 있습니다.

 

= 그러기 때문데 언뜻보면 평범한 익사의 이야기인데도 이태백까지 이 공후인을 제재로 시를 쓰지 않았겠습니까? 미치광이 남편을 잃은 한 여자의 마음이지만, 그 상징성에는 보편적인 모든 인간의 마음을 나타낸 서정의 근원이 배어 있는 시입니다.

 

= 아까 말씀하신 한의 세계가 바로 그렇지 않습니까? 한국인의 서정시는 거의 모두가 이별가입니다. 타의든 자의든 떠난다는 것은 새것을 구하는, 즉 강 저쪽으로 건너간다는 이야기가 되겠습니다. 그러면서도 강을 건너서는 안된다는 차안(此岸)에 머물러 있어야 한다는 마음, 아내의 부름소리가 있지요. 물에 빠져 죽었든 강을 아주 건너가 버렸든 차안(此岸)에서 볼 때, 남게 되는 감정이 바로 그 한입니다. 떠나지 않아도 못떠난 한이 있고 떠난다 해도 머물지 못한 한이 있습니다. 그러므로 한의 자각은 인생을 백수광부와 그 처의 양면성으로 본 것이고 또 이 양면성을 부부가 한몸이듯이 하나로 파악한 것이라 할 수 있지요. 그런데 이 한을 적극적으로 몰고나가지 않고 소극적으로 파악하였기 때문에.

 

= 사실 그래요. 체념의 감정이 너무 짙습니다. 건너가지 말라고 했는데 끝내 임은 물에 빠지고 말았구나. ! 그대를 잃었으니 내 어찌 하겠느냐는 즉 마지막 내 어찌 하겠느냐의 체념사(諦念辭)는 국문학시가에서 계속 되풀이되는 한숨입니다. 주저앉아 버리는 감정이지요.

 

= 그것이 집념으로 일관하는 서양문학과 대조되는 감정이라 할 수 있겠어요. 시조의 종장은 대개가 다 해서 무삼하리오’ ‘두어라’ ‘어쩌랴!’ 등으로 되어 있지요. 우리의 서정시는 익사자의 노래인데 희랍의 노래는 아르고스라는 배에 대한 노래입니다. 인간이 물을 건너가기 위해 최초로 만들었다는 전설적인 배 아르고스의 선원들에 대한 시가입니다. 참 대조적이지요. 그러나 동양인은 그들보다 인생을 깊이 관조했기 때문에, 삶의 부질없음에 대해 일찍 눈을 뜬 것이라고도 할 수 있어요.

 

= 철모르는 아이들, 물불을 모르는 아이들이 아니라 세상일을 다 겪은 성숙한 노인의 마음이라고 할까요. 그러니까 같은 서정시라도 서양 것은 젊고 앳된데 우리 것은 노숙하고 은은해요.

 

= 강을 건너지 못하게 잡아두려던 백수광부의 아내 쪽이 더 강했지요. 강을 건너봤자 별수없다는 마음입니다. 사실 공후인은 강을 건너려 한 남편의 심정이 아니라 그를 뒤쫓아가서 만류하던 아내의 심정 쪽에서 만들어진 것이니까요.

= 그 남편을 단순히 광부(狂夫), 미치광이로만 그려놓았지요. 좀더 광부 쪽에 의미부여가 되었더라면 한의 세계도 치열했을 것입니다.

 

= 사랑하는 이와 미치광이와 시인은 모두 같은 사람들이라고 한 셰익스피어의 말이 있지 않습니까? 진짜 시인은 그 아내가 아니라 백수광부 자신이에요. 그는 왜 강을 건너려 했을까? 왜 배를 타지도 않고 물속에 그냥 뛰어들었을까? 건너지 못할 강 너머 저쪽에 무엇을 보았기에 그는 그리도 급히 강을 향해 뛰어들었을까? 아내가 부르는 소리보다도 더 강한 유혹의 소리는 무엇이었는가? 허리에 찬 술병이 그를 그렇게 강너머의 세계로 밀어낸 것이지요. 그 술병은 허리가 아니라 마음 속에 있는 꿈의 도취였지요.

 

= 사자(死者)의 노래지요. 그 아내도 결국 백수광부의 뒤를 쫓아 빠져죽고 마니까 결국 생은 죽음으로 끝납니다. 그러나 인간은 그 죽음 이상의 것을 남기는데 그것이 노래요 서정시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공후인은 무엇인가를 쫓다가 죽어가는 사람들의 이야기며 그 노래라 할 수 있을 것입니다.

 

= 그리고 보통 사랑하는 사람과의 사별이 아니라 그들이 부부로 설정되어 있다는 점이 서양의 서정시와는 다르지요. 서양의 러브 서토리는 대개가 다 간통이거나 현실에서는 이룰 수 없는 사랑의 심정을 노래한 것이 아닙니까. 중세의 기사연애문학도 바로 자기 성주(城主)의 부인을 사랑하는 것이었지요. 그런데 우리는 이미 짝을 이룬 부부애에 사랑의 시에 대한 터전을 둡니다. 망부석의 이야기, 도미의 아내, 춘향전, 모두가 짝을 잃지 않으려는 마음에서 생긴 것이지요.

= 그러니까 이미 이야기한 대로 짝을 떠나는 백수광부 쪽보다 그것을 놓지 않으려는 아내의 입장에서 서정시가 쓰여진 것이라는 것은 매우 암시적입니다.

 

= 그래서 사랑의 시가 도덕적인 지조, 정절 등의 것으로 흘러 예술적인 긴장감이 희박해지기도 했구요. 단군신화에서는 탄생의 문학을, 그리고 공후인에서는 이제 죽음의 문학을 보았으니 앞으로 이 생과 사에서 빚어진 한국인의 정서와 사상이 어떻게 전개되어 갔는가를 따져봅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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