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어독서창고

윤상원, 광주항쟁의 마지막 목숨

by 처사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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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상원, 광주항쟁의 마지막 목숨

브래들리 마틴(뉴스위크 전 동경지국장, 샘이깊은물 1994년 오월호에서)

 

 

언론인으로 일해 온 이십오년 동안에 나는 소련의 아프카니스탄 침공, 중국 사인방의 공판, 인도 수상 인디라 간디의 암살에 뒤따른 폭동과 살인 같은 사건들을 다루어 왔다. 그러나 누가 어느 사건이 내 기억 속에 가장 뚜렷하냐고 물으면, 나는 서슴없이 한 마디로 광주라고 말한다. 광주 항쟁 때에 거기에 하룻동안만 있었을 뿐이지만, 천구백팔십년 오월 이십육일 하루만은 폭정에 대항해서 싸우는 것이 생사의 문제나 다름없던 용감한 사람들의 모습을 내 머릿속에 항구적으로 새기기에 충분했던 날이었다.

 

 

내 마음에 살아 있는 한 학생

이십육일에 광주에 다다를 즈음에는 그 곳의 순교자들은 거의 다 이미 죽어 있었다. 일가친척들이 여러 시신들이 누구의 것인지 이미 확인한 뒤였다. 자기 아이들의 널을 부둥켜안고 통곡하는 슬픈 어머니들의 뼈에 사무치는 울음 소리가 도청 건너편에 있는 그 강당을 가득 채웠다. 도청의 행각에는 추가 시신이 열다섯 남짓하게 뚜껑 열린 널 속에서 퉁퉁 부어 보랏빛이 되어 가며 신원 확인을 기다리고 있었다. 오늘날 그 광주 시신들은 망월동의 오일팔 광주 민주화 운동 희생자 묘역에 묻혀 있다. 그 무덤에는 살아 생전에 사랑하는 사람들이 알던 얼굴의 초상화가 놓여 있다. 그러나 나는 그 거의 모든 사람들이 살아 있던 모습을 알 수 없었으니, 죽어 있던 모습으로 그 사람들을 내 눈 감을 때까지 그릴 것이다. 다만, 하나만은 예외다. 내 마음의 눈에 또렷이 살아 있는 광주 희생자 한명이 있으니, 그날 이십육일에 기자 회견을 했던 대변인 학생이다.

 

나는 광주에 있는 전남 도청 건물 안 한 방에 응접 탁자를 사이에 두고 바로 그 사람 건너편에 앉아서 이 사람 머지않아 죽게 될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했다. 그 눈길이 내 눈에 비칠 때에 나는 그 사람이 자기가 죽을 줄을 스스로 알고 있다는 생각도 했다. 나는 그 사람이, 한국인에게는 드문 그 곱슬머리를 한 것을 보았고, 그 사람보다 훨씬 더 젊은 듯하던 그 무장한 동료들의 히스테리에 가까운 설치는 모습과는 대조되게 조용한 몸가짐을 하는 것을 보았다. 그때에 나는 그 사람이 죽을 것 같다는 예감을 또렷이 느꼈던 것이다. 그 사람은 눈길이 정다웠고 내 보기에는 체념한 듯이 침착했다. 그리고 눈길을 내 눈에서 딴 데로 돌리지 않다시피 했다. 그 대변인은 나이가 스물다섯살쯤인 듯했다. 굳세 뵈는 광대뼈, 똑똑한 모습을 하고 있었다. 그러나 내마음을 사로잡은 것은 내 생각에는 틀림없이 다가오는 죽음의 인식이었던 것을 직면하고도 점잖고 상냥해 뵈던 그 사람의 눈길이었다.

 

 

앤더슨이 본 그 시신

바로 이날 아침에 광주를 둘러싸고 있던 군인들이 그 도시의 중심 쪽을 좀더 접근해 있었다. 학생 투사들은 분명히 육군이 진격해 오면 오래 버틸 화력이 모자랐다. 그 대변인은 나를 뚫어지게 바라보면서 우리는 미국이 우방으로서 한국 정부에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다고 생각해요. 그러나 그러지 못했으니 우리는 미국이 전 두환 장군을 지지할지 모른다는 의심을 품고 있어요.” 했다. 그 학생은 미국 사람들이 대사를 보내 광주 문제를 중재해야 한다면서, 그 이유로 우리는 정부 당국자들을 믿을 수 없어요. 최근의 (사북) 탄광 파업 때에도 정부에서는 폭동을 그만두면 처벌하지 않겠다고 약속했으나 실제로 나중에 그 사람들 체포됐어요하는 말을 했다.

 

그 대변인은 자기 이름을 대 주지 않으려 했다. 그 사람은 군대 쪽에서 자기 이름을 알고 있기야 하겠지만 이름 밝히지 않는 것이 항쟁 학생들의 방침이라고 했다. 나는 그 사람을 쳐다보면서 그 눈에서 내게 확인되는 닥쳐올 미래를 떨쳐 버릴 수 없었다. 보도된 통계대로라면, 백명이 넘는 광주 사람들이 그 전 주일의 항쟁에서 죽음을 당했으나, 그 사람에 따르면 진짜 사망자 수효는 이백육십명쯤이었다. 드디어 나는 날 괴롭히고 있는 질문을 그 학생에게 하고야 말았다. 외부 사람이면 누구에게나 분명하듯이, 군대가 힘이 막강해서 어느 때고 작살내기로만 작정하면 쳐들어와 그 도시를 탈환할 수 있는데, 보잘 것 없이 무장된 항쟁 학생들로서 저항하다가 죽을 참이냐, 항복하려느냐고 했다.

 

그 학생은 그 점잖은 눈매로 자기 말이 믿기우기를 당부하면서 차분히 대답했다. “맨마지막 사람까지 대항해 싸우겠어요.” 그 학생은 또 자기들에게 도시를 폭파시킬 만큼 충분한 다이나마이트와 수류탄이 있다고 했다.

 

기자 회견이 끝나자 광주에 얼마쯤 머물러 바리케이드를 살피고 시민들의 말을 들어보고 했다. 그리고는 저녁에 서울로 돌아가 우리 신문사에 거기에서 본 것들을 기록한 기사를 보냈다. 그 기사는 신문에 나지 않았다. 인쇄되기도 전에 군대가 광주를 탈환했다는 소식이 닿았던 것이다. 처음에 발표된 사상자 수효는 아주 낮아, 학생들 중에는 두명밖에 없었다. 더 많지 않아 안심했다. 그 학생들은 새파란 청춘으로 이상과 결심에 아주 가득 찼었다. 나중에 나는 더 많은 수효 얘기를 들었다. 에이피 통신 특파원인 테리 앤더슨이 기자 회견 자리에 있었는데, 자기가 세어 보니 젊은 사람 열여섯명이 죽었더라 했다. 앤더슨이 일러 주기로 그 사망자 중에는 그 학생 대변인도 있었는데 그 시신은 그 학생이 그 맨처음이자 맨마지막인 정례기자 회견을 하던 자리인 그 도청 사무실에서 발견되었다고 했다. 앤더슨은 또 말하기를 그 대변인의 시신은 거기에서 난 화재에 얼마쯤 타 있더라고 했다.

 

 

그 이름이라도 알았던들!”

그 청년의 삶과 죽음은 군사 통치 아래에 있던 남한땅의 비극을 나에게 요약해 준 것이었다. 그 죽음을 확인한 뒤로 나는 우리 신문 더 볼티모어 썬에 보낼 요량으로 그 학생에게 초점을 맞춘 기사를 썼다. 나는 거기서 보고 들은 바 곧 위에 쓴 것과 크게 다를 바 없는 사연을 기술했는데, 그 끝을 그 학생의 이름이라고 알았던들 여기에 쓸 수 있을 것을!” 이라는 말로 마무리 했다. 서울 조선 호텔의 텔렉스로 이십칠일 저녁에 그 기사를 볼티모어 시로 보내자마자, 딴 외국 특파원들과 더불어 나가서 생전에 어느 때보다 더 술에 취했다. 우리가 그날 저녁에 들렀던 서울 시내 술집들을 거의 다 기억하지 못하고 있다. 나의 술벗들은, 나중에 이 술집에서 저 술집으로 비틀거리며 옮겨다니면서 전 두환과 그 밖의 남한 신군부 지배자들을 고래고래 소리 지르며 저주하느라 몸을 가누지 못하는 나를 부축해야 했다고 했다. 나의 그 격한 감정은 한국 취재를 삼년 동안하면서 한국이라는 나라와 그 국민들에게 정이 들었다는 사실을 반영한 것이었다. 광주 항쟁에 미국 사람으로보다는 오히려 한국 사람으로 반응했던 듯하다.

 

우리 신문 편집실에서 다행히 그 기사를 감격적이라고 보고 독자들도 그리 느끼리라고 생각해서 오월 이십팔일치 조간의 제일면 머릿기사로 앉혔것다! 하기야 그 기사는 내가 쓴 것치고는 가장 정열적인 것이기는 했다. 어쩌면 나는 잠재의식 속에서 그 정열로 그 청년 대변인의 성가신 귀신을 몰아내 버리려 했을지도 모르지만, 그 청년은 나에게 붙어다니고야 마는 끈질긴 귀신이었다. 나는 그 사람이 그 순간까지 살아온 세상살이가 궁금했다. 십년이 넘게 나는 그 사람이 누구인가까지 몰라 답답해 하는 신세였다. 그 사람이 항쟁 학생들의 대변인이었음 말고는 그 이름, 그 어떤 것도 그 동안에 몰랐기 때문이다.

 

종종 서울 친구들에게 캐물었지만, 그 젊은이는 이름이 널리 알질 만큼 유명하지는 않았던 듯했다. 비록 그 사람이 우리에게 군인들이 그 이름을 알고 있다 했지만, 실제로는 군인들도 딴 한국 사람들도 그 이름을 모르는 듯했다. 테리 앤더슨도 마찬가지였다. 그 에이피 통신사 기자는 나중에 딴 기사 곧 중동 취재를 하다가 맘에도 없는 명성을 얻었는데, 베이루트에서 일하다가 아랍 납치인들에게 인질로 잡혀 칠년동안이나 붙들렸었다. 그 사람이 풀려난 얼마 뒤인 천구백구십이년에 편지를 보내 그 대변인의 이름을 아느냐고 물었더니 답서에서 모른다고 했던 것이다.

 

마치 광주에 내 발로 가서 그 학생 대변인에 대한 나의 모자란 지식을 채워넣어야 할 판인 듯해서, 그 과제를 언젠가 수행할 요량으로 내 비망록에 적어 두었다.

 

 

낯선 사람이 걸어 온 반가운 전화

그랬는데 근래에, 앞으로 나올 내 저서를 위한 조사 작업을 하느라고 서울에 있는 동안에 낯선 사람한테서 전화가 걸려 왔다. 그이는 자기를 서 유진이라고 하면서, 미국 볼티모어 시와 워싱턴 시 사이에 있는 조그마한 읍 곧 매릴런드 주 칼럼비어에서 온 한국 태생 미국 시민이라고 했다. 그이는 나에게 만나자고 했다. 서울 외신 구락부에서 만나 보자, 그이는 웃는 얼굴의 내 나이 또래(천구백사십이년생)남자였고 격식없는 수수한 차림을 하고 있었다. 그이는 더 볼티모어 썬에서 내가 쓴 그 광주 대변인 기사를 읽은 천구백팔십년부터 줄곧 나를 만나기를 바라 찾아 헤맸다고 했다.

 

서씨는 천구백칠십년에 한국에서 미국으로 이민갔다고 했다. 그 뒤로 여러 해 동안 그이는 워싱턴에서 민주-민중-민족 통일 운동 연합”(민통련)을 위해 로비 활동을 했었다. 천구백팔십년에 나의 광주 기사를 복사해서 워싱턴의 유력 인사들에게 배포했었다. 그이는, 또 그 기사를 번역해서 한국으로 되보내 민주 운동 인사들의 사기를 드높였었다. 그이는 늘 나를 만나기를 바랐던 것은 그 기사가 그 광주뒤의 무서운 시절에 친민주 세력을 격려하는 데에 주요 역할을 했음을 이야기해주고 싶었기 때문이라고 했다. 당연히, 들어 반가운 말이었다. 서씨에게 나를 그토록 사로잡던 물음을 물을 수 있는 것은 더 반가웠다. “그 학생 대변인이 누구였죠?”하자, 그이는 얼른 , 윤상원 말씀이군요했다. 그리고는 호남에서 태어나서 그 친지들과 식구들을 알죠. 광주에 가서 그이들을 만나보고 싶으세요?” 했다. “물론이지요했다. 며칠이 지나 서씨와 나는 비행기 안에 있었다.

 

 

오일팔 묘역에서의 만남

광주에 당도하자 우리를 전국 민주 학생 연맹(‘전민학련’)”을 조직했던 박 성현씨가 맞아 주었다. 박씨는 이제 옷깃에 로터리 클럽 배지를 꽂고 힘센 사업가로 변신되어 있었다. 스프트웨어 회사를 차렸으며, 자기 집안이 대주주인 고려 시멘트 제조 주식회사의 사장이었다. 천구백팔십년에 행동파 학생이었던 그이는 항쟁이 일어나기 전에 광주를 떠났었는데, 당국에서 그이가 서울에서 한 저항 활동과 연관하여 그이를 찾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박씨는 말하기를 윤상원을 무척 부러워 했어요. 똑똑하고 그릇이 크고 아주 씩씩한 사람이었기 때문이에요했다. 그이는 또 윤상원이 항쟁 학생들 대변인 노릇을 훨씬 넘어선 사람이었다고 했다. 그 주요 책무가 널리 알려지지 않았을 따름이지 항쟁 중간께부터 윤상원은 실제로는 광주의 총책임자였다고 했다.

 

박씨는 나를 윤상원의 절친한 동지였고 항쟁 때에 국립 전남대학교 학생이었던 전 용호씨에게 소개했다. 전씨도 박씨와 이제 나이 먹어가는 다른 많은 저항자들이 그러듯이 사업에 재미를 붙였다. 그이는 최근에 광주에서 광고와 통신에 관계되는 회사를 차렸다. 전씨와 서씨는 나를 오일팔 묘역으로 안내 했는데, 나는 거기서 윤상원의 묘소에 절을 했다. 묘비에는 겨우 윤상원이 살다간 삶의 골격만이 기술되어 있었다. “윤상원, 천구백오십년 팔월 십구일생. 도청에서 투쟁위원회 대변인 노릇을 했음. 군대가 광주로 진격했던 천구백팔십년 오월이십칠일 새벽에 총에 맞아 죽었음.”

 

묘비 앞에 놓인 윤상원의 사진이 내가 기억하는 얼굴을 보여 주었다. 딴 항쟁 학생들보다 더 나이 먹어 보이고 곱슬머리, 또렷한 광대뼈를 하고 있었다. 누군가가 저승에서나마 피우라고 권련 한 개비를 무덤 앞에 제물로 바쳐 놓았었다.

 

 

내 가슴을 울린 아버지 윤씨의 말

그날 저녁에는 윤상원의 동지들과 친인척이 모인 자리로 안내되었다. 그이들 사이에서 윤상원의 부친 윤석동씨를 얼른 알아보기는 조금도 어렵지 않았다. 아들과 똑같은 광대뼈를 했고, 비록 백발이었고 벗겨진 머리의 가장자리에 조금 남았을 따름이기는 했을지언정 곱슬머리를 했었다. 나는 나와 한국, 광주와의 인연을 설명하고 윤상원 공부를 더 해 글을 쓰고 싶은 심정을 말했다. 그리고 광주야말로 나의 기자 생활 동안에 가장 감격적인 경험을 준 곳임을 모인 사람들에게 말했다. 탄압이 하도 잔인해서 나는 한국의 민주주의 운동이 재집합을 해서 군사 정권에 다시 저항하려면 몇 년이 걸릴 것이라고 생각했었다. 천구백팔십년 여름에 인도 지국 개설 발령을 받자, 한국을 그만둘 것을 알고 묘하게 안도하기까지 했었다. 한국의 미래가 하도 가망없어 보여서 이 나라를 취재할 마음이 남아 있는지조차 그때에는 알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반 정부 데모가 또다시 드세져 천구백팔십육년에 한국 취재를 하러 돌아와서, 한국인들이 용기를 되찾았음을 보고 기뻐했다. 노태우씨가 시위자들에게 굴복하여 민주화 선언이라는 것을 내놓는 것을 보고 어느 한국인에게 못지않게 기쁘게 느꼈다. 그리고 천구백팔십구년에 중국인들이 천안문 광장에서 중국판 광주 학살을 겪을 때에는 나는 스스로 그 불굴의 투쟁 정신을 얼마쯤 이해하고 있다고 느꼈다. 옳았는지 글렀는지는 아직은 모르지만 확신을 가지고, 중국인들도 한국인들처럼 일곱해 남짓 지나면 전제 정치에 조직적으로 저항하며 재기하여 좀더 민주적인 제도가 설립되도록 하고야 말리라고 예견했다.

 

그날 저녁 전에, 내 국적 때문에 좀 냉랭한 분위기와 마주칠 것이라고 예상했는데 윤상원의 친척, 친지들을 만난 일의 현실은 꼭 그 반대였다. 내 이야기가 끝나자 다들 나를 따뜻하게 받아들였다. 구릿빛 얼굴을 한 아버지 윤씨는 광주 학살 유가족 협회”(유가협)의 의장이었는데 이렇게 너그럽고도 가슴을 울리는 말을 했다. “선생님 같으신 분들이 계시기 때문에 제 아들이 영원히 살아 있을 수 있습니다. 감사합니다.”

 

 

단순하고 천진한 민주주의자

그 자리엣 만난 사람들과 나중에 만난 다른 분들, 특히 이제는 주간 노동자 신문 발행인인 이 태복씨 같은 고인의 친한 동지들과 나눈 말을 기초로하여 나는 윤상원이 이 세상에 나와 한뼘 살다가 죽은 이야기를 엮어 보았다.

 

윤상원은 도로가 포장되기 전에는 광주에서 자동차로 한 시간쯤 걸리는 임곡 마을에서 성장했다. 거기에서 그 윤씨댁은 논농사를 한 삼천평 지었다. 윤씨댁에서는 이 장남 공부 뒷바라지에 갖은 애를 썼다. 윤 상원은 광주에 있는 가톨릭 고등학교에 다녔다. (그리고 거기서 가톨릭으로 개종했으나 그 종교열은 나중에 감퇴했다.)

 

광주에 있는 국립 전남 대학교에서 윤상원은 그때의 민주화 학생 운동에 관여했다. 정치학도였다. 연극반에서도 활약이 커, -정부 학생들 사이에 인기가 있었던 한국 가면극 운동에도 참여했다. 여러해 뒤인 천구백칠십구년에 이 태복 씨에게 그 대학 생활 첫 두해를 설명하면서 윤상원은 자기는 단순하고 천진한 민주주의자로 사회 정의를 갈구하는 열성을 가지고 있었다고 말했다. 천구백칠십년대 초기의 학생 구호들은 박정희의 항구 집권 결심에 대항하는 것이었고, 그 사람의 절대적이다시피 한 권력에 불가피하게 수반되었던 부패에 반대하는 것이었다.

 

대학 이년을 마치고 윤상원은 군대에 징집되었다. 군대 복무를 마치고 다시 대학에 돌아왔다. 거기에서 윤상원은 학생 운동의 새로운 분위기를 감지했다. 박정희에게 대드는 것만으로는 부족했다. 학생들은 좀더 포용적이고 진보적인 세계관을 탐색했다. 남한 사람들은 그때까지 대체로 구할 수가 없어서 맑스 원전을 읽지 못했으나, 그 책 모서리를 맛보며 갉아먹는 것은 가능했다. 윤상원과 그 동료들은 헤겔 철학, 제삼 세계 급진 저술물, 또 경제사와 자본주의 발달을 다루는 서구 사회 서적들을 탐독했다.

 

광천동 빈민촌의 셋방에서 동생과 함께 기거하면서 윤상원은 빈민굴 거주자들의 처참한 세상살이를 보고 무슨 직업을 추구해야 할지를 두고 고민했다. 본가 식구들이 바라듯이, 월급 높은 하이까라 월급쟁이가 되어 동기간의 진학을 도울까? 아니면, 전혀 다른 방향으로 나아가서 빈민들 사이에서 사회 운동을 조직할까?

 

윤상원은 진보적인 학생들 사이에 인기있던 사회과학 서적이 나타내는 세계와 회사 입사 시험 준비 공부 사이에서 시간과 몸을 반분했다. 학교 공부를 잘하여 천구백칠십칠년에 졸업하고 서울에 있는 큰 은행에 취직을 했다. 그러나 서울에 와서도 봉천동 빈민굴에서 살았으니, 거기는 공장 일거리를 찾아 시골에서 올라온 농촌 사람들이 주로 사는 곳이었다. 학생 운동에 아직 열중하던 손아래 동료들이 더러는 경찰에 쫓기는 몸으로 그곳의 윤상원을 찾아왔다. 대화가 흔히 그때 행동파 학생들 사이에 인기 있는 생각쪽으로 옮아갔다. , 여러 공장에 가서 노동자가 되자는 것이었다. 나중에 이태복 씨에게 말하기로는 윤상원은 처음부터 은행에는 상징적인 기간만 머무르고 그 다음에 운동 조직 작업을 할 참이었다고 한다. 윤상원은 또 서울에서 겪은 경험이 결의를 굳혀 주었을 뿐이라고 말했다.

 

 

세상을 바꾸고 싶어요

은행원 노릇을 반년 하고는 윤상원은 사직을 했다. 그리고는 아버지에게 편지하여 설명하기를 나라를 위해 무슨 일에 전념하겠다고 했다. 은행 취직을 한 것은 오로지 아버지가 자기 대학 졸업에 그토록 많은 애를 썼기 때문이었다. 그 취직으로 기회 선용을 충분히 했음을 증명해 주고 싶어 했던 것이다. 그 어려운 일류 직장 입사 시험에 합격했으니, 적어도 아버지가 자식이 친구들 앞에서 체면 잃는 일은 모면했다고 생각할 수 있을 것이었다. 그 아버지는 나에게 내 아들놈은 성격과 의지가 강한 녀석이었지요했다. 언젠가 우리는 꽤 긴 이야기를 했어요, 내 생각에는 그애가 억울하고 수탈당한 사람들을 너무 동정했어요. 그래서 돈 많이 벌어 도와주렴했더니 아들놈이 말하기를 그 돈 가지고 몇 명이나 돕겠어요? 세상을 바꾸고 싶어요하더군요. 주고받고 많이 다투었으나 나는 한 번도 이겨보지 못했어요

 

그 노인은 목소리를 속삭임으로 낮추더니 이렇게 말했다. “은행 자리를 그만두고 아들놈은 스티로폼 공장에 가 일했어요. 그 즈음에 그애 어머니가 장질부사에 걸려 입원했어요. 아들 놈이 친구 한놈하고 병원에 문병하러 왔어요. 그애 어머니가 좀 열이 올라 나 너 대학 보내느라 얼마나 뼈빠지게 일했는지 알지? 그런데 너는 막일꾼이 되고 말았어!’ 했어요. 그러자 내 아들놈은 엄마, 서러워하지마. 언젠가는 엄마를 정말로 잘 모실거야. 시방은 내가 한 사람말고 여러 사람을 모시고 있는 거야. 그렇게 해서 나중에 엄마를 정말로 잘 모시게 될 거야하더군요.”

 

이태복 씨는 그 단계에서 윤상원의 이념적, 이론적 배경은 아주 세련된 것이 아니었습니다. 가난한 사람을 동정하고 민주주의를 열망하고하여 마음이 감동되어 있었지만 그리 과격하지는 않았습니다.” 했다. 그러나 시대에 앞서고 있었다. 이씨는 사람들이 노동자가 되겠다는 소리는 많이 했지만 실제로 공장으로 간 사람은 별로 없었어요했다. 광주 지역에서는 오직 지식인 한명만이 윤상원보다 먼저 공장일을 했는데, 그 노릇도 아주 짧은 기간만 했다.

 

 

윤상원의 관점

윤상원은 몇 달 동안은 도대체 지식인이 노동자로서 무엇을 성취하기를 바랄 수 있을까 하는 물음의 공부를 했다고 이씨는 말했다. 이씨에 따르면, 그 질문을 두고 진보적 지식인 사이에 세 사상 계파가 있었다. 아마 그때의 광주 지역 행동파이면 거의 다 속했을 첫째 계파는 노동자가 되는 것 자체가 중요한 것이라고 주장했다. 둘째 계파는 노동자거나 학생이거나 하이까라 봉급쟁이거나가 문제가 되는 것이 아니라, 중요한 것은 지금 당장 지하 저항 기구를 조직하는 것이라고 주장했다. 이 계파의 관점은 농촌 지역에 기반을 둔 무장 반란을 시작하는 쪽으로 기우는 경향을 보였다. 그 신봉자들이 남조선 민족 해방 전선(남민전)”을 형성했는데, 그 행동파들이 천구백십구년 시월에 체포되었다.

 

셋째 관점은 노동자, 학생들 사이의 일반 정치 의식 수준이 다같이 아직 성장 과정에 있다는 것이었다. 그리하여 중요한 것은 융통성과 경계심이 있을 것이었다. 윤상원은 이런 관점 언저리에 있었다. 남한의 공업화 경향이 결정적인 단계에 있고, 시대가 요청하는 것이 노동 운동이었지 농민 운동이 아니고, 노동 운동은 근본적으로 무장 투쟁에 기초를 두지 않아야 하겠다고 단정했다. 지식인이 다만 노동자가 되는 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고도 단정했다. 아무 것도 삶을 단순히 공장에서 일하는 데에 바치는 것만으로는 해결되지 않을 듯했다.

 

 

인민주의자를 초월한 사람

이씨는 덧붙여 말했다. “은행에서 사직한 것이 윤상원에게 일생의 진로를 뜻하는 것이었음을 아는 것이 중요해요. 그 뒤로, 더 효과있고 과학적인 방법을 찾아 세상을 바꾸려고 했죠. 그때에 윤상원은 이론가나 공산주의자가 아니라 오히려 인민주의적인 해결책보다 더 진지한 해결책을 탐색하는, 인민주의자를 초월한 사람이었을 뿐입니다.” 나는 그런 평가를 뒷받침하는 증거를 그 광주 사람들이 나를 임곡으로 데리고 갔을 때에 윤상원의 장서를 둘러보고서 확인할 수 있었다. 윤씨댁에서는 천구백구십이년에 본체를 신식으로 따로 지었는데 농가 주택이기는 마찬가지였다. 그집 내외분과 방바닥에 앉아 담소하고 있을 때에 닭이 방으로 들어와 어슬렁거리고 있었다. 아버지를 아주 닮았지만 윤상원이 어머니를 더 닮기조차 했음을 알았다. 마당 건너편에 옛날식 농가가 한 채 남아 있는데 거기가 윤상원이 잠자고 공부하고 하던 데다. 거기에 있는 방에 윤상원의 사진들과 책들이 보관되어 있다.

 

거기에서 본 책들 속에는 이런 영문 서적들이 포함되어 있었다. 게오르그릭타임의 사회주의의 기원’(해적판), 폴 에이 배런과 폴 스위지의 독점자본’, 새뮤엘 피 헌팅던의 변화하는 사회 속의 정치 질서’, 잭 그레이와 패트릭 케이븐디쉬의 위기 속의 중국 공산주의’, 존 엠 허츠의 정치 현실, 정치 이상’, 모리스 도브의 정치경제와 자본주의’, 게오르그 루카치의 역사와 계급 의식 - 맑스 변증법 연구’, 시드니 버빈의 작은 집단과 정치적 행동’(이 책은 미국 공보원 도서관에서 빌어와 반환하지 않은 것이었다.), 앨렉샌더 워트의 러시아; 전후 몇 년’, 알 엔 캐류 헌트의 공산주의의 이론과 실제’.

그 책들은 공산주의 화제에 국한된 것들이 아니었다. 그리고 선동 서적이기는커녕 오히려 심각한 학술적 분석 자료인 편이었다. 윤상원의 독서 목록은 그 철없던 지난 육십년대 초기의 내 독서 목록을 생각게 했다. 그때에는 사회주의 사상에 한눈 파는 것이 열정과 정상적인 진리 탐구 정신이 있는 미국 대학생이라면 누가 그러더라도 정상적인 양상으로 받아들여졌었다. 나는 자본주의 분석같은 제목의 책으로 과정을 밟고 헤겔의 변증법과 씨름하면서, 윤상원이 칠십년대에 나이가 들면서 밟은 듯한 길과 아주 유사한 길을 시험적으로 밟았었다.

 

 

학림과 광주

천구백칠십팔년에 윤상원은 야간 학교를 설립하여 노동자들에게 노동권과 같은 제목들의 공부를 시켰다. 그때에 전남대학교 학생이었던 전용호씨 같은 이들이 윤상원을 도왔다. 천구백칠십구년 중반께에 윤상원은 전국 민주 노동자 연맹”(전민노련)과 그 연대 기구인 전국 민주 학생 연맹(전민학련)”의 광주 지역 조직을 한 사람들 축에 들었다. 이태복 씨는 천구백칠십팔년에 중앙에서 전민노련의 창립에 중심적으로 관여했었다. 천구백칠십구년에 윤상원이 거기에 가입할 때에 그 자격을 심사하는 면접을 수행했던 사람이 바로 이씨였다. 그 두 사람은 위 두 조직체에서 가까운 동지가 됐는데, 위 두 조직체를 싸잡아서 경찰은 학림(학생의 숲)이라고 불렀다.

 

한국계 미국인이 소유한 와이에취 방직의 파업을 조직한 것이 학림이었다. 노조의 요구가 너무 과격하다고 보고 그 소유주는 회사를 폐쇄하고 해외로 망명했다. 직장을 잃지 않게 해 달라는 노동자들의 요구를 정부가 묵살하자, 노동자들은 천구백칠십년 팔월에 신민당 당사에서 연좌 농성을 했다. 그 연좌 농성은 법원이 김영삼씨의 당 지도자 노릇을 정지시킨 직후에 일어났다. 그 농성을 김씨 세력과 노동자들이 제휴해서 하는 것으로 보고 정부에서는 농성자들을 진압했다.

김 경숙이라는 여자 노동자가 그 건물에서 뛰어내려 죽었다. 그리하여 와이에이취 사건은 김대중 씨가 집안에 연금당해 있는 동안에 김영삼 씨와 민주주의 운동에 대중의 동정을 끄는 일에 일조하여, 천구백칠십구년 시월 중순의 부산, 마산 데모에 대대적으로 사람들이 모여드는 일에 기여했다.

 

군인들이 십이십이 정권 탈취와 서울의 봄에 이어, 천구백팔십년 오월십오일에 적어도 오만명은 되는 학생들이 서울에서 데모하여 전두환은 물러가고 계엄령은 해제하라고 요구했다. 데모 참여자들은 그 다음에 할 일을 놓고 의견을 달리했다. 이태복 씨 집단은 방송국 같은 도심의 요소를 점거하기는 원했다. 그러나 대다수는 십육일에 대모를 중지하고 정부의 반응을 기다려 보기로 했다. “ 이 말을 듣자 윤상원은 서울의 패배를 맹렬히 비난했어요하고 이태복 씨는 또 딴 자리에서 나에게 말했다.

 

그러니, 이씨, 윤씨의 조직은 광주 사태 자체에까지 이어지는 여러 주요 사건에 깊이 관여되어 있었다. 이씨는 말하기를 광주 직전에 윤상원을 만났을 때에 우리는 군사 정변이 일어나리라는 생각을 함께 했습니다.”했다. “우리가 기대하기로는 부산과 마산과 서울이 대중 저항의 열기가 있는 곳이었지 광주가 아니었습니다. 우리는 그런 쿠데타가 일어나고 대대적인 저항이 나타나면 최후까지 싸워 그 운동이 팔십년대에 걸쳐 자라게 하자고 합의했습니다.

 

 

핏값이랄까를 바랐습니다.”

오월 십칠일에 전두환 씨는 계엄령을 전국으로 확대하고 정치 활동을 금지하며 대학들을 폐쇄했다. 그 다음날 광주 항쟁이 시작될 때에 핵심적인 농성자들은 전두환 씨의 행동에 항의하는 대학생 몇백명이었다. “검정 베레모특수 부대를 포함한 계엄군이 쳐들어왔던 것은 이 학생들이 데모하고 있을 때였다. 계엄군은 이 학생들을 포위하고 데모 학생, 구경꾼을 가릴 것 없이 무차별하게 칼질을 하고 두들겨 팼다. 군인들이 휘두르는 폭력은 다음날도 계속됐다. 사람들을 몇십명을 죽인 것이 노소 시민들의 분노에 불을 붙였고 이십일에 십만명이 넘는 시민을 데모에 가담케하는 계기가 됐다.

 

그 단계에서는 총지도자라 할 사람이 없었다. 분노에 넘친 윤상원이 오월 십팔일 밤에 광주에서 서울의 이태복 씨에게 전화는 걸어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를 알려줬다. 이씨는 말하기를 윤상원은 친구들과 후배들을 동원한 투쟁자 소식이라는 삐라를 발행했고화염병을 준비했어요했다. 윤상원은 그 첫 단계에서는 지도자들 중의 한명이었지 바로 지도자였던 것은 아니다. 오월 이십일일에 이십만명이 데모에 가담하자 시민들은 경찰서와 병참부대에서 무기를 탈취했다. 전용호 씨는 말하기를 누군가가 경찰로 가자!’ 하는 구호를 외치면 다들 달려갔지요하며 회고했다. 윤상원은 몸소 병참 부대 습격에 앞장서서 장갑차와 그밖의 차량을 징발했다고 전씨는 말했다. 그리하여 학생, 시민 수천명이 무장을 하게 되었고 군대는 그 도시에서 후퇴했다.

 

광주 시장이 군대와 협상할 임시 위원회의 긴급 회의를 소집했다. 그러나 끝내 이 위원회는 시민들에게 모든 탈취 무기들을 반환하도록 권유하여 군대에 넘겨주기로 결정했다. 전씨는 이 임시 위원회는 주로 시청, 도청의 관리들로 구성되었었지요, 이 관리들 아주 보수적인 편일 것 뻔하지 않아요?” 했다. 그 사람들은 안정을 호소했다. 그리하여 무기는 거의 다 반환되었다. 그러나 많은 시민들은 피가 그토록 많이 흐른 것을 목격한 뒤로 아주 감정적인 심정에 휩싸여 있었다. 전씨는 시민들은 핏값이랄까를 바랐습니다.” 했다.

 

 

항복의 대안은 무장 저항

이 시절부터 윤상원의 역할이 확장됐어요전씨의 말이다. 그 임시 위원회의 접근 방식에 찬성하지 않으면서도 윤상원은 그 위원회와 협력하는 체하고 흥정을 하여 더 급진적인 사람들을 뽑아 위원이 되게 했다. 광주 시장은 얼마 안되어 그 분열된 위원회를 이끌 힘이 없음을 알아차렸다. 그러나 윤상원은 함께 일하십시다했다. 그러고는 오월 이십이일, 이십삼일까지 위원회에서 다수를 확보할 때까지 저항 인사들을 끌어들이기를 계속했다. 이태복 씨는 이 둘째 국면 투쟁이 조직된 투쟁이었습니다.” 하면서, “그것은 완전히 저희 그룹-전국 민주 노동자 연맹-의 관점과 일치했습니다.” 했다.

윤상원은 젊은이들에게 와이엠시에이에서 무장하라고 재촉했습니다.” 전씨의 말이다. 후보자들이 나타나자 윤상원은 군사 훈련을 몇분 동안 시켰다고 한다. 그리고는 그 사람들이 도청 건물 보초 설 사람으로 보내졌다. 박남선이라는 사람이 이미 대두되어 성인 투쟁자들의 지도자가 되어 있었다. 윤상원은 박남선과 함께 무기를 더는 되돌려주지 않고 끝까지 저항을 수행하는 일이 중요함을 의논했다. 군중 시위가 계속되어, 이십사일에는 비가 왔음에도 불고하고, 오만명쯤이 나타났다.

 

윤상원은 박남선과 그 무장 청년들을 뒤에 두고 인상적인 모습- 그러나 어떤이에게는 아마 겁도 주었을 모습 - 으로 연설을 했다. 윤상원은 거기에 모인 사람들에게 임시 위원회에서 발표한 모든 무기 회수 - 반환 목표는 광주 사람들의 뜻과 일치하지 않는다고 말했다. 시민은 근본적인 해결을 원한다는 것이었다. 무기를 돌려주기만 한다면 그 다음엔 어찌될까? 임시 위원회는 어찌 대답할지 몰랐다. 그리하여 윤상원은 자기 그룹의 접근 방식 곧 무장 저항의 계속이 항복의 대안이라고 했다. 여기에 반대하는 사람은 위원회를 떠나야 한다고 했다. 몇몇은 떠났고, 초기 위원들 중에서 몇몇은 당분간 윤상원과 행동을 같이 할 의사가 있었다. 윤상원과 그 그룹은 그런 방법으로 위원회를 인수했다.

 

윤상원은 그 위원회의 공식 조직표의 꼭대기에 자기 자신을 앉히지 않았다. 남아 있는 초기 위원들을 고무하려고 그 사람들 중의 두명을 의장, 부의장 자리에 앉혔다. 그런 명목상의 지도자들 아래에서 윤상원은 대변인의 직위를 가지고 선전, 기획, 공급의 일 곧 박남선이 책임질 실제 무장 투쟁이 아닌 모든 운영 기능을 감독했다. 윤상원은 몸소 선전부를 관장했는데, 이 부서에는 가두 차량 방송팀과 선전물 인쇄팀(전씨가 여기에 속했다.)과 셋째로 모금과 시민 헌혈 독려를 하는 팀과 넷째로 군중 집회를 조직하는 직무를 맡은 팀이 포함되어 있었다.

 

 

저에게 이 잔을 거두어 주소서

아마 윤상원이 유일하게 전략적 관점을 가진 사람이었을 겁니다.” 전용호 씨의 말이었다. 전략적 관점이란 무엇이었을까? 전씨와 다른 몇몇 사람들이 급히 십분 동안인가 설명하여 대답을 했다. 그 다음에 박성현 씨가 그 사람들의 말을 요약하여 해석해 주면서 윤상원이 내다본 저항의 고립 지대를 설명했다. 그 생각은 최후까지 버티면서 항복하기를 거부하여 그 정권이 치러야 할 값을 올리자는 것이었다. 저항자들은 군사 정권을 궁지에 빠지게 할 참이었다. “만일에 너희들이 사람을 더 죽일 배짱이 없으면 항복해라. 그리고 그럴 뱃장이 있으면 스스로 야만인임을 증명해라하는 것이었다. 박성현 씨가 물었다. “피압박자가 체통을 증명하는 방법이 이것말고도 있겠습니까?” 그리하여 윤상원과 그 상위 간부들은 그 값 곧 목숨을 치를 뜻이 있었다. “그 사람들은 항쟁을 완수하고 싶어 했고, 항쟁에 마지막 손질을 하려 했습니다. 그러나 그와 동시에 그 사람들은 자기들이 버티면 항쟁들이 다른 데서도 일어날 것을 희망했습니다.” 전씨가 끼어들어 신약 성서에 기록된 예수가 십자가에 못박히기 전에 하늘에 빌던 말을 인용했다. “저에게서 이 잔을 거두어 주소서.”

아까 그 다른 사람들의 말을 계속해서 요약해 주면서 박성현 씨는 그 내부 심복들이 그 잔을 면제받지 못할 때에 닥칠 일들을 수락하기로 체념했으나 그와 동시에 일부러 모든 희망찬 뉴스를 퍼뜨렸다고 했다. 특히, 윤상원과 그 간부들은 마음속으로는 그 성사가 되리라고 믿지는 않았지만미국인들이 끼어들어와 더 많은 유혈을 막아주기를 희망했다. 그 목적은 내부서클밖에 있는 사람들에게 그 과정을 버텨 낼 용기를 주기 위함이었다. 광주가 미래 혁명가들의 상징이 되고 재집결지가 되게 하자면 항복은 말도 안 되었다.

 

항쟁하려고 모인 사람들은 서로 다른 배경의 다양한 무리였다. 몇몇은 목사이기도 하고 변호사이기도 해서 세상에 잘 알려졌지만, 대다수는 서로 몰랐다. 그리하여 군대 정보원이 그 급진 저항 세력에 침투하기가 쉬웠다. 누가 집회에서 급진적 반응을 재촉하면 그럴 때마다 관중 속에서 누군가가 너는 틀림없이 북한 간첩이다!”했다. 이십오일에는 독침소동이 있었다. 북한 간첩이 독침을 소지하고 있다는 유언비어가 퍼진 것이다. 항쟁자들은 정부 첩자들이 그런 소문을 심었다고 비난했다. “어떤 사람이 독침에 찔린 시늉을 했어요.” 그때에 무장 투사였다가 이제는 광주에서 화랑 지배인으로 일하는 김윤기 씨가 해준 말이었다. 김씨가 다른 사람들과 함께 그 희생자를 병원으로 데려갔으나 아무 것에도 찔리지 않은 것으로판명되었다.

 

 

정부조차도 잘 몰랐던 그 역할

도청 청사에 윤상원과 함께 있던 무장 투사들은 건물 앞에 배치되었으나 군대는 그 뒤쪽에서 접근했다. 군인들은 그 항쟁자들에게 무기를 던지고 기어나와 항복하라고 명령하고, 그러지 않으면 죽이겠다고 했다. 몇몇은 그 명령을 따라 항복했다. 그러나 윤상원은 총을 들고 복도로 나와 거기에서 콩팥 부위에 총을 맞았다고 전씨가 말했다. 그때에 윤상원과 함께 김영철이 있었는데, 그 사람은 그 저항 세력의 기획부장으로 바로 윤상원 아래에서 일했었다. 김영철이, 피를 흘리고는 있었으나 아직 숨은 쉬고 있었던 그 대변인 지도자를 커튼에 싸서 옮기고 있었는데 그때에 군인들이 던진 수류탄이 터져 커튼에 불이 붙었다. 에이피 통신의 테리 앤더슨이 보았을 때에 윤상원의 시신이 불에 타 있던 것이 그것으로 설명이 되었다.

 

나는 무장 저항 계획이 형편없었던 것같이 들린다고 말했다. 나는 생각을 고쳐 윤상원이 근본적으로 상징적인 자살 계획으로 여겼을 계획에는 효과있는 무력 저항이 그리 중요하지 않았던 것 아니냐고 했다. 전씨는 수긍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나는 더 조여들어가 묻기를 전씨가 그때에 윤상원의 저항의 고립 지대책략을 알아차렸었느냐고 했다. “그 사람의 관점을 누가 알아들었을까요?” 했다. 전씨와 그 딴 사람들은 나중에 그 책략을 이해하고 음미하고 했으나, 일반 대중이 윤상원의 역할을 인정하는 과정은 더뎠다.

 

정부조차도 분명히 윤상원이 광주에서 한 역할의 범위를 모르고 있었다. 윤상원의 학림 동지들이 한 사백명쯤이나 천구백팔십일년 유월에 체포되어, 이태복 씨가 삼개월 동안의 아주 심각한 심문이라고 설명한 처지에 묶여 있었다. 기관원들은 구 심문을 하는 동안에 마지막에 죽은 그 광주 대변인이 실제로 전국 민주 노동자 연맹의 광주 조직책이라는 말을 들었다. 그러나 그 심문 기관원들은 그 일을 더 캐묻지 않았다고 스스로도 그때에 심문당한 사람들 중에 들었던 이태복 씨는 말했다. “정부는 윤상원이 거기에서 수행한 역할이나 그 정치 조직 배경을 그리 많이 알고 있지 못했어요.”

 

이씨의 이론으로는 정부는 광주 책임자가 도대체 누구였는지의 다른 두 설명에 너무 몰입되어 제삼의 설명에는 눈을 돌릴 수 없었다. 정부 설명 두 가지 중의 하나는 실제로 관리들 스스로도 믿지 않는 것이었는데, “불순분자곧 북한 첩자나 동조자가 총질을 불러일으켰다는 것이었다고 이씨는 말했다. 군사 정권의 설명 또 하나는 많은 관리들이 믿는 것이었는데, 김대중 씨가 배후조절을 했다는 것이었다고 역시 이씨가 말해주었다. 그러면 윤상원과 김대중 씨의 관계는 무엇이었을까? “없었어요! 서로 만난 일도 없고요.” 가 이씨의 대답이었다. 광주 의거 직전에 김대중 씨를 위한 새 정당의 준비 작업을 하는 단체에 가입하라는 초청을 윤상원이 받았지만, 그 제의된 자리는 아예 생기지도 않았다고 생각한다고 이씨는 말했다.

 

팔십년대에 학생 사이에 번진 평양 열병을 의중에 두고, 나는 광주 사태 배후에 북한의 손이 감춰져 있었다는 정부의 단언에 어떤 진실이 있을지를 두고 더 캐물었다. 이태복 씨는 단호히 광주 의거는 북한의 영향을 전혀 받지 않았어요했다. 윤상원의 북한관을 두고는, 이씨는 그 사람의 전국 민주 노동자 연맹 가입 심사의 일원으로 천구백칠십구년에 그 화제를 두고 윤상원을 몸소 면접한 일이 있다고 했다. “아까 세 계파 얘기를 했던 것 생각나죠? 그 둘째 계파 곧 남조선 민족 해방 전선은 친-북한 경향이 있었어요.” 그러나 셋째 계파는 윤상원이 속했던 데인데 관점이 달랐다. “윤상원은 북쪽에 대해 아주 비판적이었어요. 우선, 그 사람은 북한 정권이 남쪽의 실정을 이해하지 못하고 있다고 느꼈어요.” 윤상원은 또 김일성 씨 개인 숭배, 김정일 씨의 왕조적 세습에 대해서도 비판적이었다.

 

 

죽을 때까지 싸운 유일한 혁명 인텔리

이윽고, 그러나 아직은 천천히 윤상원이 인정되기 시작됐다. 오랜 동지들이 다른 사람들과 함께 남한의 민주화에 공헌한 사람들에게 해마다 수여할 윤상원 상을 설립했다. 이제는 환경 운동에서 활약하는 그 옛 동지 임낙평 씨는 윤상원의 전기를 써서 출판했다. 그렇지만 “‘오월 문제는 아직 해결되지 않았어요. 그 때문에, 새 정부가 들어섰어도 윤상원 상 위원회의 활동이 제약을 받습니다.

 

주간 노동자 신문 광주 지사장인 김창중 씨는 그 신문이 천구백구십삼년 오월 십육일에 제일회 윤상원 문화 축제를 광주에서 주최한 이야기를 했다. “그 축제의 배경은 윤상원이 광주에서 죽을 때까지 싸운 유일한 혁명 인텔리였다는 것입니다. 그 사람은 실제로 이 지역에서 맨처음으로 과학적인 노동 운동을 지도한 사람입니다.” 늘 회의적인 언론인으로서 나는 김씨에게 남한이 만일에 노동계가 더 이른 단계에서 자유를 성취했다면 팔십년대 후반의 빠른 경제 성장을 경험했겠느냐고 물었으나, 딴 사람이 딴 화제를 가지고 끼어들어 끝내 대답을 얻지 못했다.

 

그렇다면, 윤상원의 광주 역할은 어떻게 평가할까? 사람이 항쟁 마지막 국면의 지도자였을지언정, 말할 나위도 없이 가장 많은 목숨을 잃은 것이 그 첫째 국면이었고, 가장 많은 시민이 정부에 대항하여 일어난 것도 그때였다. 어느 국면이 더 중요했을까? “그 두 국면은 서로 별개인 것이 아닙니다.”고 이태복 씨는 말했다. 박성현 씨가 말을 보탰다. “둘째 국면은 첫째 국면을 어찌 마무리지을까의 문제였어요. 그리고는 자진해서 무기를 버린다는 말입니까? 그건 웃음거리일 뿐이에요.”

 

한국의 저항아들에게 팔십년대에 다시 일어나 싸울 용기를 주어 마침내 군사 통치를 무너뜨린 것이 윤상원의 저항의 고립 지대였다고 믿는 사람도 있다. “한국 국민이 천구백팔십칠년에 그 무서운 폭력을 그토록 빨리 극복했던 이유는 광주의 수도에 대한 저항 때문이었습니다.” 하고 우리와 자리를 함께 했던 전남 사회 연구소의 사무총장 이재위 씨가 말했다.

역사학자들이 모두를 판가름해 줄 것이다. 윤상원이 남한땅에 변화를 가져오는 데에 그 짤막한 생애를 쏟고 목숨을 바쳤고, 실제로 변화가 왔다고 말하는 것으로 만족해 하자. 그날 방문한 윤씨댁을 우리가 떠나자 경찰차가 옆집 문앞에 멈추고 있었다. 당국자들이 나를 안내하던 옛 학생 급진 분자들을 염탐하러 왔을까? 전용호 씨와 서유진 씨는 내가 그런 낌새를 느끼는 것을 보고 웃어댔다. 서씨가 옛날과는 달라요.” 했다.

 

 

브래들리 마틴/ ‘볼티모어 썬’ ‘에이시언 월스트리트 저널’ ‘뉴스위크의 동경 지국장으로 차례로 일하다가 최근에는 풀브라이트 학자로서 분단 한국을 소재로 한 책을 저술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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