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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학강좌 - 꽃봉우리는 터지고 있다

by 처사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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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학강좌

꽃봉우리는 터지고 있다

 

 

 

우리가 화분에 심어진 꽃나무를 보면 어느날 아침 갑자기 꽃이 피어 있는 걸 보게 되는 경우가 있습니다. 봉오리로 있었던 것이 피어서 꽃이 된 것입니다. 봉오리가 막 터져서 꽃으로 피는 데는 몇 시간이 걸립니다. 봉오리가 터지면서 꽃으로 되는 동안 그 봉오리를 가만히 바라보고 있다 하더라도 그 움직이는 것을 눈으로 직접 보기는 거의 불가능합니다. 그만큼 천천히 움직이고 있기 때문이지요. 하지만 몇 시간이 지나면 봉오리는 터져서 꽃이 됩니다. 우리 눈에는 보이지 않지만 그 몇 시간 동안 봉오리는 분명히 조금씩 움직이면서 꽃으로 변한 것입니다. 만약 이러한 것을 확실히 알고 싶다면 카메라로 봉오리를 고속촬영해 보면 됩니다. 그러면 우리가 가끔 텔레비젼이나 영화에서 보는 것처럼 봉오리가 터져 꽃잎이 활짝활짝 펴지는 것을 수초 내에 볼 수 있습니다. 그것은 몇 시간 동안 봉오리에 카메라를 대고 꽃으로 변하는 모습을 담아 그 필름을 아주 빨리 돌리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화면을 보면 눈으로 직접 보기에는 움직이지 않는 것처럼 보이는 꽃잎이 사실은 조금씩 움직이고 있다는 것을 확실히 알 수 있습니다.

 

시계의 경우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가 시계를 보면 초침은 빨리 돌기 때문에 시간이 가는 것을 초침을 통해 알 수 있습니다. 하지만 시침을 보면 분명히 가기는 가는데 그 움직이는 것을 직접 눈으로 느끼기는 매우 어렵습니다. 만약 이것도 고속촬영을 한다면 그 움직이는 모습을 직접 눈으로 볼 수 있을 것입니다.

 

이처럼 우리는 사물이 사실은 움직여 변화하고 있는데도 불구하고 우리가 그것을 보지 못한다는 이유로 변화하지 않는다고 생각하는 경우가 많이 있습니다.

 

황색의 구두를 한 켤레 샀다고 합시다. 그 구두를 신고서 얼마의 기간이 지나면 구두의 뒷축이나 깔창이 닳아서 이것을 갈아야만 합니다. 이렇게하여 몇 번의 수선을 거치면 그 구두는 처음에 샀던 본래의 구두와는 다른 것이 됩니다. , 수선하지 않은 부분이라 하더라도 구두는 오래 신음으로써 닳는다든지 하여 본래의 모습과는 상당히 다를 뿐더러, 수선한 부분은 새로운 뒷축이나 깔창으로 갈았으므로 더 말할 나위가 없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이 구두에 대하여 여전히 "저 황색의 구두를 신어볼까"하는 식으로 말합니다. ,처음 샀을 때의 그 구두와 똑같은 구두인양 말을 합니다. 사실은 그 동안 많은 변화를 거쳐 본래의 구두와는 상당히 다른 구두가 되었는데도 말입니다. 이처럼 우리는 일상생활에서 사실은 변화하고 있는데도 불구하고 변화하지 않는 것처럼 생각하는 경우가 많이 있습니다.

 

사실 세계에 존재하는 모든 사물은 끊임없이 변화하고 있습니다. 우주의 경우를 생각해 보더라도 우주는 먼 옛날 있던 그대로 오늘날까지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그 동안 어떤 별은 탄생하고 어떤 별은 없어짐으로써 끊임없는 변화를 거쳐 오늘날에 이르고 있는 것입니다. 별이라는 것은 있는 그대로 언제까지나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탄생해서 성장하고 그리고 사멸해갑니다. 그러므로 우주라는 것도 끊임없이 변화하고 있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지구에 관해서 보더라도 마찬가지입니다. 현재 지구에는 아시아,유럽,아프리카, .북아메리카, 오세아니아 대륙이라는 6대륙이 있고, 태평양, 인도양, 대서양 등의 바다가 있습니다. 하지만 이러한 대륙이나 바다는 본래부터 이렇게 있었던 것이 아닙니다. 먼 옛날에는 육지와 바다의 모습이 지금과 달라 에리아, 앙가라, 곤드와나 대륙이라는 3대륙으로 되어 있었습니다.이것은 과학적으로 연구하여 증명된 것이고 우리가 세계지도를 자세히 보면 그것을 어렴풋이나마 짐작할 수 있습니다. , 아프리카의 서쪽 해안의 모양과 남아메리카의 동쪽 해안의 모양이 거의 서로 맞물리는 모양으로 되어 있고, 또한 북아메리카 대륙의 동쪽과 유럽의 모양도 거의 서로 맞물리는 모양으로 되어 있어 과거에는 이것들이 붙어 있었다는 것을 짐작케 합니다. 이처럼 지구는 변해 왔으며 지금도 변화하고 있습니다. 그리하여 네덜란드같은 나라는 지금도 땅이 바다 속으로 조금씩 가라앉고 있고, 우리나라의 경우에도 서해안이 조금씩 가라앉고 있으며 동해안은 조금씩 융기(올라옴)하고 있습니다. 이처럼 우리가 사는 지구도 지금까지 끊임없이 변화해 왔고 지금도 계속 변화하고 있습니다.

 

생물의 경우에도 현재 지구상에 존재하는 생물이 먼 옛날부터 그대로 존재해 왔던 것이 아니라 현재의 생물과는 다른 과거의 생물이 환경에 따라 변화함으로써 오늘날의 생물로 된 것입니다. 지구상에 처음 나타난 생물이라고 할 수 있는 것은 아메바와 같은 단세포 생물이었습니다. 그런데 이것이 점차 진화하여 공룡과 같은 커다란 생물로 되었습니다. 공룡과 같은 파충류중에서 어떤 것은 시조새라는 것으로 변화하였는데 이것이 새(조류)의 조상입니다. 이 시조새는 파충류에서 변화한 것이기 때문에 3개의 발가락과 날카로운 발톱, 긴 꼬리, 얄팍한 가슴뼈 등 파충류와 비슷한 점을 많이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 후의 변화에 의하여 오늘날과 같은 새가 된 것입니다. 이처럼 오늘날 지구상에 존재하는 생물은 모두 변화(진화)의 산물이며 이러한 변화는 오늘날에도 일어나고 있습니다. , 본래 육식동물이던 고양이가 사람들과 함께 살면서 잡식성으로 변해 밥과 같은 식물성 음식도 먹게 된 것이 그 일례입니다.

 

그럼 인간의 경우에는 어떠할까요? 인간은 먼 옛날부터 현재의 모습과 같은 인간이었을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진화론이 가르쳐 주는 바에 의하면 인간의 조상은 원숭이라고 합니다. 고도로 발달한 일종의 원숭이가 인간으로 변화하게 된 가장 결정적인 계기는 직립보행, 즉 네 발이 아니라 두 발로 걷게 된 일입니다. 두 발로 걷게 되었다는 것은 앞발, 즉 두 손을 자유로이 사용할 수 있게 되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이 손은 인간이 자연에 대항하는 과정, 즉 노동 속에서 생긴 것입니다. 또 함께 모여 노동하는 과정에서 서로의 의사 소통이 필요하게 되었습니다. , 언어가 발생한 것입니다. 그리고 언어의 발달과 함께 노동을 하는 과정에서 점차 뇌도 발달하게 되고 감각기관도 발달하게 되었습니다. 현재의 인간은 이러한 변화의 산물입니다. 먼 옛날부터 현재의 모습으로 존재한 것이 아니라 원숭이가 점차 진화하여 오늘날에 이르른 것입니다.

 

사회의 경우도 마찬가지입니다. 먼 옛날에는 산이나 강에서 과일을 따먹고 물고기나 잡아먹는 원시공동체 사회가 있었습니다. 이것이 변화하여 노예소유주와 노예라는 두 계층을 중심으로 하는 노예제 사회가 발생하고, 또 이것은 봉건영주와 농노라는 두 계층을 중심으로 하는 봉건제 사회로 변화하였습니다. 봉건제 사회는 다시 변화하여 오늘날과 같은 자본주의 사회로 된 것입니다. 따라서 우리는 사회에 대해서도 앞의 경우와 똑같은 말을 할 수 있습니다. , 현재의 사회는 과거의 변화의 산물이며 현재의 사회 역시 끊임없이 변화하고 있다고.

 

우리가 우주니 지구니 생물이니 사회니 하는 거창한 문제는 접어두고 잠깐만 우리 주위를 둘러보더라도 모든 사물은 변화하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밤에 우리가 자고 아침에 일하러 나가는 집도 밤새 어딘가 한 부분은 조금이나마 변화하는 것이고, 아침에 출근하기 위해 타는 버스도 어제보다는 조금 낡게 되는 것입니다. 또한 회사에 출근하여 만나는 동료도 어제의 그와는 달라서 조금이나마 변화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러한 변화는 아주 조그만 변화이기에 우리는 이러한 변화를 무시하고 지내지만, 아주 조금씩이나마 변화하고 있다는 것은 엄연한 사실입니다.

 

앞에서 여러가지 예를 들어 설명한 것처럼 세계에 존재하는 모든 사물은 끊임없이 변화하고 있습니다. 만약 우리가 이러한 변화를 인정하지 않는다면, 즉 현재는 과거와 똑같은 것이고 미래도 현재와 똑같은 것이라고 생각한다면 우리는 새로운 사물이 발생하거나 본래 있던 사물이 변화하여 다른 것으로 되는 현상을 이해할 수 없게 됩니다.

 

사실 운동*이나 변화*는 사물의 본질적인 부분입니다. 일단 사물이 있고 거기에 운동이 첨가되는 것이 아니라 사물 그자체가 하나의 운동이고 변화인 것입니다. 이 세계에 존재하는 모든 사물은 완전히 만들어진, 변화가 없이 정지된 상채로 있는 것이 아니라 끊임없는 변화속에 있습니다. 그러므로 사물의 본질은 운동이고 과정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사물이란 과거로부터 현재에 이르기까지 변화해 왔고 현재도 변화하고 있으며 앞으로도 계속 변화해 나가는 하나의 과정인 것입니다.

 

* 운동.변화 : 운동은 장소의 이동만이 아니라 모든 형태의 변화를 가리키는 개념입니다. 따라서 `운동'이나 `변화'는 동일한 의미를 갖는 말입니다.

 

이처럼 "모든 사물은 변화한다"라는 생각, 사물의 본질은 운동이며 과정이라는 생각은 매우 종요한 것입니다. 우리는 이러한 점을 잘못 생각하여 잘못된 행동을 하는 경우가 많이 있습니다.

 

우리는 흔히 `국민성'이라는 말을 합니다. 국민성이란 한 국가의 국민이 갖는 성질.성격을 가리키는 것이지요. 그런데 흔히들 "우리나라 사람들은 국민성이 나빠 우리나라가 발전하지 못한다"라는 말을 합니다. 그러면서 국민성은 어쩔 수 없다라고 말합니다. 하지만 우리가 "모든 것은 변화한다"라고 생각한다면 이러한 생각이 잘못된 것임을 금방 알 수 있습니다. , 국민성이라는 것이 물론 존재하기는 하지만 이는 과거로부터 현재에 이르는 사회상황 속에서 끊임없는 변화를 거쳐온 것이며 지금도 변화하고 있습니다.그러므로 설령 국민성이 나쁘다 하더라도 `국민성은 어쩔 수 없다'라고 생각하는 것은 원칙적으로 잘못된 생각입니다.

 

또한 가난이나 이기심같은 것은 언제까지나 변할 수 없는 것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도 많습니다. 그리하여 어떤 사회에나 가난은 존재하며 인간인 이상 이기심은 누구나 가지고 있다고 생각하며, 이것은 언제까지나 변하지 않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과연 영원한 가난이라든지 영원한 이기심이라는 것이 존재할가요? 그렇지 않습니다. 가난이라는 것도 인간의 노력에 의하여 변화됨으로써 없어질 수 있는 것이고, 이기심이라는 것도 변화하여 이타심이 될 수 있는 것입니다. 외국의 소설에 나오는 구두쇠 영감 스크루우지의 이야기는 이것을 잘 말해 주고 있습니다. 그런데도 "가난은 어쩔 수없다. 가난이란 어떤 사회에나 존재하는 것이다"라고 말한다면 그것은 부자들이 가난한 사람들에게 가난을 합리화시키기 위하여 하는 말에 불과합니다. 영원한 가난이나 영원한 이기심이라는 것은 존재하지 않습니다.

 

노동조합과 같은 단체에서 회의를 열어 어떤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방법을 토의하는 경우 의견이 나뉘어져 결론을 내리지 못하고 의견상의 차이가 감정적인 것으로까지 발전하여 서로 파벌을 이루어 반목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그리하여 상대편에서 내놓은 의견이면 옳건 그르건 간에 반대를 위한 반대를 합니다. 이것은 하나의 파벌주의입니다. 파벌주의는 단체를 분열시키고 약화시키는 아주 해로운 것입니다. 파벌 때문에 올바른 의견인데도 채택이 되지 않는다든지 파벌 때문에 여러가지 의견의 장단점에 대한 충분한 토의가 이루어지지 않아 잘못된 의견이 채택된다든지 한다면 그 단체는 결국 약화되고 심한 경우에는 와해되기에 이릅니다. 또한 단체가 파벌로 나뉘어져 있으면 단체의 힘을 충분히 발휘할 수가 없습니다.

 

그러면 이러한 파벌주의는 왜 생기는 것일까요? 그것은 "모든 사물은 변화한다"는 것을 이해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설령 상대편의 주장이 옳지 못하다 하더라도 토론이나 대화, 설득을 통해 상대방이 자신의 주장의 잘못된 점을 인식함으로써 올바른 주장을 따를 수 있다는 것을 믿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상대방은 언제나 그렇고 그런 사람이기 때문에 앞으로도 계속 그럴 것이다라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이는 잘못된 생각입니다. 모든 사물은 변화하기 대문에 현재의 모습만을 보고 앞으로의 변화가능성을 보지 못한다면 결국 우리는 세계에 관한 잘못된 인식을 가지게 되는 것입니다.

 

지금까지 얘기한 것처럼 모든 사물은 변화합니다. 과거로부터 현재에 이르기까지 변화해 왔고 지금도 변화하고 있으며 앞으로도 계속 변화할 것입니다. 운동은 사물의 본질이며 따라서 사물은 하나의 과정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모든 사물은 변화한다"라는 것을 올바로 인식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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