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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고는 우리에게 무엇을 광고하는가

by 처사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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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고는 우리에게 무엇을 광고하는가

박 성 원

 

 

 

중절모, 지팡이와 헐렁바지, 그리고 판토마임.’

인류의 문화재라 감히 말할 수 있는 채플린이 토키영화(사람이 말을 하는 영화)를 거부하고 무성영화에 집착한 이유는 무엇일까? 그것은 아마도 영어라는 언어’(혹은 ’)를 사용함으로써 영어권 이외의 사람들에게 현대 문명의 비인간성을 고발하는 내용이 올바르게 전달되지 않을 수도 있는 가능성을 없애려는 의도인 것 같다. 이와 동시에 채플린의 판토마임은 곧 언어 이상의 언어로 전화된다. 물론 판토마임으로써 채플린이 전달하는 내용을 그 언어적 형태보다 훨씬 더 올곧게 받아 들일 수 있는 지의 의문은 남는다. 그래도 채플린의 무성영화를 언어의 오용 등의 한계를 뛰어넘으려는 시도로 일면 해석이 가능할 수 있다.

 

아침에 일어나면 신문을 보고, 지하철이나 버스를(혹은 승용차나 택시를)타고, 저녁에 귀가해서는 텔레비전을 보고, 다시 또 내일이면 똑같은 과정이 반복된다. 그러한 반복속에서 우리는 신문, 라디오, 텔리비전 등 각종 매체들을 통해서 우리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엄청난 수의 광고를 접하고 있다. 달리는 광고게시판이라고도 할 수 있는 지하철 역시 광고를 위한 훌륭한 매체역할을 한다. 그밖에도 잡지들, 신문에 끼워서 배달되는 DM으로 발송되는 백화점 등의 광고지, 각종 옥외 광고물, 점보트론 등등. 이제 광고를 접하지 않는다는 것은 곧 반문명이자 야만의 표식에 다름아닌 그러한 시대에 우리는 살고 있다.

 

이렇듯 도시의 불가피한 부분이 된 광고는 일상성이라는 틀 속에서 끝없이 반복되는 우리의 생활리듬에 맞추어 온갖 환상을 동원하여 반복에 반복을 거듭하며 우리를 공격하고 있다. 순수함, 기쁨, 행복, 고귀함, 강함, 젊음, 변신, 성적 매력, 사랑, 인간애, 사회적 성취 또는 성공 등 우리가 염원해 마지않는, 그러나 현실적으로 불가능한 모든 만족과 환상의 이미지들이 광고에서 마술적으로 실현된 현재의상황으로 등장한다.

 

썬키스트 패밀리쥬스를 마시는 것은 곧 가족의 행복을 맛보는 것이며, 일주일에 한 번 백화점에서 쇼핑을 하고 남편과 함께 퇴근하는 주부여야 행복하고, 퍼지줌 카메라를 구매하는 것이 곧 사랑을 얻는 것이며(“사랑하는 사람만 세 배로 당기세요”), 또 세피아 자동차를 타며 우리는 발전하는 신세대-젊은 엘리트가 된다. 바로 이것이 광고가 우리에게 제시하는 약속이자 보증이다. 그래서 우리의 욕망을 뒤흔들고 끝내는 우리를 소비자로 만들고 만다.

 

우리의 일상성에 깊숙히 파고 들어와 있는 광고. 이제 우리는 이러한 광고에 대해 다음과 같은 질문을 던져 본다. 도대체 광고라는 것이 인간에게 어떠한 작용을 미치는가, 좀더 구체화 시킨다면 광고가 전달하고자 하는 기호들은 사회 속에서 인간에게 어떠한 영향을 발휘하는가라는 물음이 그것이다. 그렇다면 우리의 관심은 광고가 전달하는 기호와 그 기호의 가장 유력한 형태인 광고 속의 언어에 좀더 집중될 수 있다.

 

 

2.

산업혁명 이후, 초기의 광고는 단순히 상품 정보의 소개와 구매자의 소비욕구를 충족하기 위한 것이었다. 그러나 기술력이 고도화된 현대 산업사회에서는 제품력의 평준화로 고만고만한 경쟁제품들이 자신만의 Sellingpoint 없이 싸우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이제는 자연히 광고에서 무엇을 말할 것인가(What to say)’보다 어떻게 말할 것인가(How to say)’에 대해 더욱 관심이 집중된다. 다른 제품과의 차별성을 최대한 부각시키기 위해 무엇이 아닌 어떻게의 문제가 중요하게 등장한 것이다. 채플린이 주제전달의 가장 좋은 도구로써 판토마임을 선택했던 것도 이러한 이유가 내재해 있을것이다. 또한 중요한 것은, 광고는 우리를 구매자, 즉 직접소비자로 만들지 않을 때에도 고유한 이데올로기적 효과를 가진다는 점이다. 이 두 가지는 광고카피를 분석하고자 하는 직접적인 이유이다. 여기서는 후자에 촛점을 맞추고자 한다. 첫번째 예는 굳이 말하지 않아도 알 수 있는 것이기 때문이다(“순간의 선택이 10년을 좌우합니다”, “고향가는 길 큰 기쁨이 달린다, 작은 차 큰 기쁨 티코”, “이것저것 첨가물로 만든 쥬스가 아닙니다”, “프리랜서는 프리랜서를 입는다등등).

 

세상은 생각보다 따뜻하다. 훈훈한 맛 맥심.” 이처럼 현재의 세상은 우리가 생각하는 것보다 따뜻한, 살 만한 세상이다. 훈훈한 맛의 맥심커피 한 잔에 현재의 모든 문제와 갈등은 스르르 녹아버릴테니 말이다. 또 풍요로움과 이웃사랑이 있고 사랑과 기쁨을 드리는 백화점이 있고, 행복이 넘치며, 자연과 인간을 생각하는 아파트가 있고, 뜨겁게 뛰는 남자, 지킬 것은 지켜가는 남자, 가슴이 넓은 남자들이 있고, 화려한 변신을 할 줄 알며 알고 보면 부드러운 여자, 흔들리고 있는 여자가 있는 현재의 세상. 우리는 가만히 있어도 시대를 먼저 읽고 시대의 변화를 이끌어주는 힘있는 신문이 있고, 자유와 개성, 성공과 성취, 아름다움과 고귀함 순수함이 있는 현재의 세상. 인간을 위한 테크놀로지로 우리의 미래를 밝은 전망으로 이끌어가고 있는 현재의 세상. 광고의 논리에 따르면, 이렇게 의미 부여된 광고 속의 세계는 단지 가상, 환상이 아니라 광고 속에서 현재화 된우리 사회의 모습이다.

 

이 가상적 이미지들은 상품의 구매와 소비에서 비롯된 소비이데올로기에 불과하다. 그러나 소비에만 정확히 초점이 맞춰져 있지는 않다. 오로지 어떤 상품을 구매할 것인가의 갈등 외에는 갈등도 문제도 없는 사회, 자유와 행복이 있고 많은 미래에 대한 전망이 있는 사회, 이러한 사회상을 암암리에 독자, 시청자에게 전파함으로써 광고카피는 소비의 조건인 현 상태를 존속시키는 의외의 효과를 발휘한다.

 

또한 광고가 현 체제에 필요한 인간을 재구성해 낸다는 것을 유의할 필요가 있다. 이는 바로 광고가 이성에 호소하는 초기의 방식에서 미적, 문화적 외관을 취하고 감성에 호소하는 전략으로 전환되어온 추이와 맥락을 함께 한다. 세련된 심리적 수법을 이용하여, 독자와 시청자의 정서적 불안을 조성함으로써 소비를 자극하는 현재는 매우 일반화된 광고카피들이 있는 것이다. 가상의 중산층을 미리 마련해 두고 그 중산층의 사람들이 전망하고 지향하는 상류층의 호사스럽고 풍요로움이 넘치는 혹은 고급스럽게 느껴지는 소비이미지를 제시하여 정서적 불안감을 제시하고 잠재된 욕망을 일깨워 당신도 이러저러한 상품을 구매하면 결국 선망받는 상류층 못지 않게, 혹은 중산층이 될 수 있다고 부추긴다. “잡음없이 삽시다”, “이런 아파트에서 살고 싶어요”, “8학군으로 갈 것인가? 완전학습을 볼 것인가?”, “얼마전까지만 해도 소수의 선택된 분들만이 썸씽스페설을 마실 수 있었습니다”, “칼스버그, 그 이름을 명예롭게 하라”, “니노세루치가 어울리는 사람이 있다등의 예에서 확인할 수 있다.

 

중산층이라는 환상을 이용한 것과 달리, 최근에는 도시 서민들이 일상적으로 겪는 생활감정의 심리적 불안으로 고착시키는 광고도 보이고 있다. 지하철에서 볼 수 있는 한 출판사 광고에서는 독자들이 광고를 보게 되는 장소인 지하철을 무대로 하여 바로 지금 이 자리에서 벌어지고 있는 실제의 상황을 언어로 재구성해내고 있다.

 

짜증스러운 출퇴근-1시간의 휴가와 맞바꾸십시요. 덜컹, 아야! 좀 내립시다. 이 복잡한 곳에서 신문을 펼쳐들고 보다니... 출퇴근 시간이면 어김없이 일어나는 사건 사건들, 짜증나시죠! 내일부터는 책 한권을 들고 집을 나서 보세요. 출퇴근 시간에 읽는 책 한 권으로 마음에 넉넉한 여유가 생깁니다. 당신의 가슴에 느낌표 하나를 새기십시요!”

 

자기네 상품을 사라는 촌스러운 주문은 하지 않는다. 단지 어떤 책이든 한 권을 들고 나와 지옥철1시간을 휴가로 바꾸어 보라는 여유있는 권고만이 있을 뿐이다. 그러나 이 권고 이면에는 피할 수 없이매일 겪게 되는 짜증스러움을 불안의 감정으로 고정시키고 불안감의 해소책으로 책을 등장시킴으로써 이왕이면 좋은 아이디어를 제공해준 자기네 출판사의 책을 사라는 함의가 담겨 있다. 또한 출근길의 지하철이 마음의 여유를 주고 가슴에 느낌표를 새겨줄 독서실로 둔갑해서 나타난다. 짜증스러운 현실은 당신이 어떻게 해 본다고 해서 현실적으로 바뀔 수 있는 것도 아니라는 메시지가 함축된 것이다. 그 현실은 오로지 상품의 소비자가 됨으로써 가상적, 상상적으로만 해결될 뿐이다. 이렇게 상상적 해결만을 제공함으로써 결국 현 상태를 존속시키는 작용을 하는 것이 바로 이데올로기적 효과인 것이다. 이런 면에서 광고란 곧 진실, 혹은 사실의 차원이 아니라 예언적차원에 속하는 것이라 할 수 있다. 일전의 휴거사태에서도 볼 수 있듯이 실현되지 않은 예언인 것이다.

 

주부는 역시 좋은 정보에 빨라야죠.” 시린 치아를 위한 치약 광고카피다. 그런데 주부가 역시좋은 정보에 빨라야 할 필요는 없었다. 밥 짓고 빨래하고 아이들 돌보고 남편 뒷바라지 잘 하는 것을 천직으로 삼은 전통적인 주부상에 비춰본다면 그렇다는 말이다. 그러나 시린 치아를 미리미리 예방해서 치과에 갈 필요도 없이 만드는 현명한 주부라면, 가족의 건강을 세심하고 광범위하게 돌보는 능력이 있는, 또 이러한 소양으로 하여 시대에 걸맞는 현대적인 주부라는 명칭이 어울릴 만한 주부라면 역시 좋은 정보에 빨라야죠. 이제 이 말은 당연한 것처럼 들리기도 한다. 그러나 정말 그런가. 이 카피의 역시라는 표현은 누구나 그리고 당연히 이런 정보에 빨라야 한다는 것을 강제한다. 물론 이 강제성은 아주 세밀하게 은폐되어 전혀 그렇게 보이지 않기 때문에 주부들은 이제는 좋은 정보에 정말 빨라야겠다고 스스로 자진해서 이런 생각을 가지게 된 것 같은 착각에 빠진다. ‘빨라야죠의 종결어미 ‘...야죠역시 마찬가지다. 정보에 빨라야 한다는 것이 아주 당연하다는 듯이 결정짓는 이 어미는 실제로 그 의미를 자세히 뜯어보면 분명히 이런 정보에 빠르지 않은 주부를 무능력한 주부로 현모양처의 세계에서 배제시켜 버리는 효과마저 발휘한다. 말하자면 이런 표현은 이런 광고카피가 설정한 세계 안에 예외없이 모든 주부를 몰아넣는 효과를 가진다는 말이다. 그런 효과로 인해 이제는 주부라면 당연히 이렇게 좋은 정보에 빨라서 가족들의 건강을 구석구석까지 살펴야 하지 않을까라는 생각이 그 광고를 보고 듣는 사람들에게 아무런 장애없이 받아들여진다. 이제 이 현대판 주부이데올로기가 유포되어 이런 생각을 당연시 여기는 사람들이 존재하게끔 된다.

 

그런데 여기서 말하는 주부는 가족의 건강을 세심하게 돌보는데 필요한 정보를 빨리 수집할 수 있을 만큼 우선 시간이 넉넉해야 한다. 그리고 그런 정보를 듣고 그 정보에 따라 움직일만한 재화 역시 풍부해야 한다. 이렇게 보면 그 정보는 시간이나 돈 또는 그밖에 자본주의에서 좋은 것이라 칭할 만한 여러가지를 가진 사람에게만 정보이다. 이런 것을 두고 볼 때, 이 담론은 결국 생산계급의 입장을 배제한 우익의 담론이다. 우리가 느끼고 있지 못한 사이에 이미 그 담론 안에서 일어났던 계급투쟁의 결과로 생산자의 입장은 전면 배제당하고 결국 어느 한 쪽의 입장만을 나타냈던 것으로 귀결되었다. 자본주의 담론 중 특히 광고담론은 이처럼 계급사회의 생활과 경험을 무계급적인 것으로서 꾸며냄으로써 실제로 현실에서 일어나고 있는 계급투쟁을 이미 끝난 것으로 치부하는 효과를 생산해 낸다. 이제 다음과 같은 말을 명제화 해도 될 것 같다. ‘모순된 지배구조의 재생산은 이데올로기에 의해 생산된 주체에 의해 항상 지속적으로 일어난다.’

 

하나 더 살펴보자. 이미 작년, 재작년 이야기인데, 연극배우 윤석화가 감각적인 육성으로 커피광고 파키를 내보냈다. “여자와 커피는 부드러울수록 좋은 거 아니예요라고. 현대 무용의 전형적 복장으로 보이는 검은 타이즈와 역시 타이트하게 몸에 달라 붙는 타이즈와 같은 질감의 동색 상의 차림으로, 마치 방금 가벼운 무용 동작을 끝낸 것 같은 부드러운 몸짓으로 알고 보면 저도 부드러운 여자에요를 덧붙인다. 독신으로 살아가는 이 연극배우의 마지막 카피는 마치 구혼의 말처럼 들리기도 해서 그 광고를 보는 뭇 여성 내지는 그 여배우 또래의 기혼의 중년여성들에게 알지 못할 우월감 내지 안도감을 가져다 주었다. 나는 부드럽기 때문에 여자답다든지, 독신 여성으로서 나름대로의 독자적 세계를 가졌던 것처럼 보였던 저 연극배우도 이제 와서 저런 소리를 하는 것을 보니 역시 여자란 부드러워야 해!”라는 일종의 평소의 생각, 믿음이 다시 굳건하게 확인된 까닭이다. 이 이데올로기는 부드러운 여성 주체, 순응하는 현모양처들을 안심시키면서 그네들이 이제까지 지켜왔던--여기에는 자주적으로 현모양처 입장을 고수한 경우도 있겠고 그 반대의 경우도 있을 수 있는데--현모양처 이데올로기에서 의구심을 일시에 제거해 주면서 그것을 더욱 굳건하게 하여 서슴없이 그런 여성 주체를 양산하는 효과를 가진다. 이런 이데올로기를 통해 자기 스스로 나는 그런 존재지, 나는 원래 여자지, 내가 여자구나 라고 생각하는 주체가 형성된다. 뿐만 아니라 자신이 가지고 있던 여자라는 존재에 대한 생각을 지원해 주는 존재로서 주체가 형성된다.

 

좀더 심화시켜 보자. 위에서 예로 든 커피광고의 후속 편으로 여자는 늘 변화를 원하잖아요, 맥심 모카 골드 커피처럼.. 커피와 여자는 새로와질수록 끌리지 않아요라는 카피가 나왔다. 이제 커피광고는 부드러운 여자에만 머무는 것을 거부해야 함을 가르친다. 사람들이 매력적이라고 생각하는 여자는 과감하게 변화를 추구하는 혁신적인 여자기 때문이다. 이건 물론 광고카피가 지시하는 세계에서는 그렇다는 말이다. “여자는 늘...”이라고 말할 때, 이미 그 여자는 늘 변화를 원하잖아요는 기정사실인 것처럼 되어 있고, 그 광고를 보고 듣는 사람들에게 다시 한번 다짐을 받는 정도의 의미만을 가진다. 광고카피가 이런 식으로 구조화되어 있어, 이제 새로운 여자일수록 끌리지 않아요 라고 되묻는 광고카피 앞에서 그 의미를 거역하기란 참 어렵다. 이런 결과로 이제는 여성들 스스로가 사람들이 매력적이라고 생각하는 여자는 늘 변화를 추구해서 새로와진 여자라고 생각하게 되지 않을까. 그리고 그 생각은 늘 새로와져야지 라는 각오도 갖게 해 줄 것이다. 이렇게 하여 광고 내에서 하나의 카피로 통용되던 생각들이 광고담론의 효과가 생산해 낸 여성 주체로 인해 광고 밖에서도 통용된다. 즉 광고담론의 효과로 이데올로기가 가동되면서 새로운 주체가 생산되고 또 그 생산된 주체에 의해 그런 내용의 이데올로기가 유지된다는 것이다.

 

광고담론은 가장 자본주의적 담론, 그러면서 그것을 고도로 은폐해야 한다는 점에서 이데올로기를 더욱 자연화시켜야 할 필요가 있는 담론이다. 따라서 그 어떤 담론에서보다도 광고에서는 명제적 표현이 많이 나온다. 가령 남자는 향기에 약해요”, “가구는 여자에요”, “주부는 행복해요”, “생활을 가꾸는 여자가 아름답다”, “시간을 아끼는 여자가 아름답다”, “주부는 가정의 연출자예요”, “그녀는 프로다, 프로는 아름답다”, “표현에 강한 여자가 아름답다”, “미인은 잠꾸러기?, 여성들이여 잠꾸러기가 되자”, “아내는 여자보다 아름답다”, “아내의 이름을 부르면 편안합니다등등. 이런 명제적 담론 형식이 구성하는 효과는 시간은 금이다’, ‘백지장도 맞들면 낫다등의 속담이나 격언들이 가진 것과 같은 일종의 자명성을 생산해 내는 데 있다. 이런 점에서 사실 속담이나 격언과 같은 것은 현대신화의 일종이며, 애매모호함과 여타의 가능성을 일소해 버린 영역인 이데올로기와 비슷한 구석이 있다. ‘시간을 아끼는 여자가 꼭 아름다울 까닭도 없는 것이고, ‘프로가 아름다울 필연성이 있는 것도 아니며, 잠을 많이 자야 미인이 되는 것도 아니다. 그러나 그 담론들이 이렇게 속담이나 격언식으로 명제화 되었을 때 우리는 그것에 대해 별다른 의문도 갖지 않는 것이 예사다. 그런 형식을 취함으로써 이데올로기와 같이 자연화(혹은 의식내에서의 자동화)되었기 때문이다.

 

 

3.

도널드 맥케이드에 의하면, “예전에는 사람들이 살아남기 위해 상품을 찾아 헤맸으나, 지금은 상품들이 살아남기 위해 사람들을 찾아 헤매는 시대가 되었고, 따라서 우리는 날마다 광고의 홍수와 압력 속에서 살고 있으며, 미국의 기업들은 한 해에 약 일천억 달러를 광고에 소비하고 있다고 한다. 우리의 경우에는 그 정도까지 심하지는 않겠지만, 그러나 광고에 의해 세뇌되고 조종되는 정도의 강렬을 생각해 볼 수 있다.

 

광고는 얼핏 다양한 상품들을 선전함으로써 소비자에게 선택의 기회를 넓혀주는 것 같다. 하지만 조금만 살펴 보면, 광고는 특정상품에 대한 구매를 강요함으로써 결국에는 소비자들로부터 모든 선택의 여지를 박탈해 간다. 그러므로 광고의 성공은 곧 소비자의 실패라는 패러독스가 성립된다. 한 예를 들어 보자. “대한민국은 자유 국가입니다로 시작하는 브랑누아 구두 광고를 기억할 것이다. 여기서 자유는 브랑누아 구두를 신을 자유이다. 이것은 많은 자유들 중의 하나이거나 혹은 자유가 있기 때문에 그것은 신을 수 있는 것이 아니라 단지 그것을 신을 수 있기 때문에 대한민국은 자유국가이다. 곧 이 자유의 성격은 소비의 자유이다. 후에 나타난 브랑누아 광고에서는 브랑누아-자유특별시민으로 제시된다. “이 도시에는 특별한 자유가 있다. 브랑누아 패션 자유.” 이제 자유특별시가 대신 등장하지만 그 도식의 우연성과 자의성은 고스란히 남아 있다. ‘서태지와 아이들이 등장하는 자유시간 광고 역시 여기서 한 치도 벗어나지 않는다. “정말 원하는”, “자유가 뭐 따로 있나요”--출출할 때 자유로운자세로 자유시간을 먹는 것!

 

여하간 광고에서는 언어와 문자, 영상이미지의 의미작용이 투명할 정도로 의도적인데, 이는 어떤 상징적 메시지나 함축적 이미지를 사용하더라도 결국 평균적인 독자, 시청자의 최상의 독해를 위해 선명하게 전달되도록 하기 위해 고도로 고안된 것이다. 즉 섬세한 배치를 통해 그들을 사전에 선택된 의미로 원격조정하는 것이다. 이렇게 볼 때 최상의 광고는 곧 의미를 고정화시킨것이다.

 

광고카피는 들여다 볼수록 자신의 폭과 깊이를 헤아릴 수 없게 만든다. 뒤집어 말하자면 그 강력한 흡인력, 편재성, 저변의 복잡성과 뒤얽힘 등에 의해 한없이 무기력해진다. 지금에 와서 이런 생각이 든다. 이 순간에도 우리는 저 가상의 외계인이 지도하는 황홀하고 아름다운 삶의 지침에 따라 비상구 없는 내일의 꿈을 꾸고 있지는 않은가. 여기서 꿈을 깨라는 자기최면적인 말이 과연 타당한가. 그러나 결국 우리의 진정한 꿈은 광고를 향해있는 것이 아니라 광고에 맞서있다. 그래서 더이상 우리가 광고카피를 매개로 하여 자본과 결부되는 것이 아니라 바로 우리들 자신을 매개로 하여 자본과 광고카피를 재구성할 수 있을 때, 비로소 이러한 광고카피 분석은 사라질 것이며, 또 마음놓고 광고 속의 세계를 즐길 수 있을 것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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