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어독서창고

나의 삶, 우리의 길

by 처사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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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연 초록 : 어느 무기수의 감옥이야기

 

나의 삶, 우리의 길

신 영 복 / 성공회신학대학 교수


 

(이 글은 쇠귀 신영복 선생님께서 지난 96623, 나우누리 사회비평 동호회 메아리5회 회원의 날 행사에 초빙되어 강연하신 내용을 녹취한 것입니다.)

 

부끄러운 관념성

 

이름이 정대의라는 친구가 있었어요. 나이가 한 30인데 전과가 4, 징역 사는 동안 기소중지건이 또 터져서 전과 5, 이름이 정대의입니다. 큰 대자, 옳을 의자. 대의에 살거나 대의에 죽거나 하라고 자기 어른들이나 누가 지은 것 같은데 나이 30에 전과 4, 5. 참 딱하다는 생각을 했어요.

 

그래서 훨씬 친해지고 난 뒤에 제가 물어 봤어요. "이름이 참 좋은데 누가 지었느냐"고 그랬더니 "이름 얘기하지 말아요. 창피해 죽겠어요"라고 그래요. "이 녀석아, 네가 창피한 거지, 이름이 창피하냐?" 그러니까 얘기가 그렇습니다. 자기는 고아래요. 이름을 지어줄 할아버지도 없고, 자기가 한 살도 채 되기 전에 부모가 자기를 버렸대요. 그런데 그 버린 장소가 광주 도청 앞에 있는 대의동 파출소 옆입니다. 그래서 당직 정순경이 자기 성에다가 대의동 파출소를 따가지고 고아원에 입적을 시켰대요. 그래서 정대의라고 했답니다.

 

제가 광주에 한번 내려 갔었죠. 일부러 대의동 파출소를 찾아갔습니다. 가 보니까 한 30년 된 건물 같더라고. 아마 그 건물 옆에서 그 애가 버려지지 않았나 하는 생각이 들었어요. 그 때 도청 광장 옆에 앉아서 다시 한번 그 친구를 생각하면서 느낀 게 지금도 마찬가지지만, 그 당시 '대의'라는

문자를 통해서 그 사람의 인생을 들여다 보려고 했던 그런 관념성이 참 부끄러웠던 기억이 있습니다.

 

옛날에 연편이라는 목수가 있었는데, 제나라의 환공이 대청에서 책을 읽고 있고, 그 연편이라는 목수가 마당에서 수레를 만들고 있었어요. 수레바퀴를 짜고 있었는데 바퀴를 짜다 말고 무엄하게도 제환공에게 질문을 했어요.

"지금 대감님이 읽고 계시는 책이 무슨 책입니까?"

"이건 성현의 말씀을 적은 책이다."

"그 성현이 지금 살아 계신 분입니까?"

"옛날에 돌아가신 분이다."

그렇게 답변했어요. 그러니까 목수가 하는 말이, "대감께서는 성현의 말씀 찌꺼기를 읽고 계시는군요."

 

그래서 환공이 대노했어요.

"무엄하게도 찌꺼기라니, 이유를 대봐라. 이유를 안 대면 무사하지 못할 것이다."

 

그랬더니 연편이라는 목수가 얘길해요.

"나한테는 자식이 있습니다. 지금 70 나이에, 머리가 희끗희끗한 이 나이까지 바퀴를 짜는 이유는 아들한테 말로써는 전할 수가 없는 것이 있어서 입니다. 그건 손으로 익히고 몸으로 느껴서 전하는 것이지, 말로는 도저히 전하지 못합니다. 그래서 이 나이에 내가 바퀴에 훌대를 깎고 있는 것입니

."

 

아마 훌대가 제일 어려운가봐요. 거기는 너무 빠르게 깎으면 헐겁고, 느리게 깎으면 그게 돌아가지 않아서 그 나이에도 직접 깎고 있는 것이지요.

 

무식이 통찰력?!

 

말이라는 것은 참 힘든 것 같아요. 여러분들도 80년대에 열광했던 논리와 개념과 이런 언어의 한계, 이것들을 최근에 상당한 정도로 반성하고 있을 것입니다. 그런데 내가 왜 오늘 잘 안 나오던 자리에 나와서 또 말하느냐? 여러분하고 저하고 지금 만나서 할 게 말밖에 없잖아요? 그래서 전 그렇게 생각해요. 우리가 새삼스럽게 무슨 말을 가지고 모른 걸 알고 또 새로운 걸 찾아내는 건 거의 불가능하다고 생각해요. 이미 아는 것들을 서로 꺼내서 한번 보는 겁니다.

 

지금부터 제가 드리는 말도 그런 겁니다. "나한테 이런 사진이 있다"라고 들어서 보여드리면 여러분들은 제가 들어 보이는 사진을 보는 게 아니라 얼른 여러분의 앨범을 뒤져서 ", 나도 그 사진 있어"하고 여러분들의 앨범을 찾는 겁니다. 한 사람은 알고 상대방은 모르면 절대로 공감할 수 없습

니다. 아는 이야기를 꺼내서 평소에는 바쁘니까, 먼지 앉은 앨범을 꺼내가지고 다시 보는 겁니다. 그래서 한번 확인하고, 약속하고, 위로하고, 격려하고 그런 자리로 저는 생각합니다.

 

나이가 70도 넘은 노인이 일요일 날 감방에서 독서를 했어요. 제가 학교에서도 학생들에게 반드시 해주는 이야기인데, 그 노인은 글도 잘 모릅니다. 하루종일 수필 한 편밖에 못 읽는 독서 실력입니다. 부지런히 읽었어요. 오전에 읽고, 점심에 한잠 자고, 오후에 또 읽고, 그래서 겨우 저녁밥 가져 오기 전에 수필 한 편을 읽었어요. 제가 그 노인이 주무실 때 얼른 봤죠. 겉장도 떨어져 나간 현대문학 옛날 잡지였는데, 상당히 유명한 여류수필가 수필을 하필 그 노인네가 어울리지 않게 택해서 읽었어요. 그래서 그 할아버지에게 가서 물어 봤죠.

"뭐가 쓰여 있습니까?"

독후감을 물었어요. 부끄러워서 이야기를 안해요.

"우리가 읽어서 뭘 아나?"

 

그랬습니다. 그래도 자꾸 끈질기게 물어 봤더니, 한마디로 "자기집 마당이 좁아서 꽃을 못 심는 게 참 안됐다. 그런 걸 썼어"라고 정확하게 얘길해요. 아마 여러분들이나 제가 읽었더라면 핵심을 그처럼 명쾌하게 꿰뚫어 보지는 못했을 거예요. ? 그 여류 수필가가 펼치는 현란한 언어의 잔치에 말려들어서 뭐가 뭔지 모르고 그냥 나왔을 거예요. 무식이 통찰력이 되는 아주 충격적인 경험입니다.

 

진정한 사상은 말이 아닌 발에 있다

 

문도득이라는 할아버지가 계셨어요. 글월 문자, 길 도자, 얻을 득자. 문도득. 별명은 물론 문도둑입니다. 뜻도 도둑하고 아주 가깝습니다. 길 도자 얻을 득자 길에서 얻는 거니까.

 

독립문 그러니까 서대문 구치소에서 출소해서, 독립문 옆 가게에서 물건 훔치다가 도로 잡혀 들어갔대요. 아마 출소하자 말자 다시 재구속되는 기록이라는데. 길에서 얻는 사람. 그래서 큰 득자 했으면 자기는 도둑놈 안됐을텐데 자기는 얻을 득자 해 가지고는 도둑놈 됐다고 해요.

 

목수였어요. 이분이 별로 알아주지 않는 할아버집니다. 영치금도 없고 접견오는 사람도 없고 그렇습니다. 제가 상당히 충실한 제잡니다. 옆에 앉아서 이야기 잘 들어주는 사람입니다.

 

그 양반이 그림을 그렸어요. 땅바닥에 집을 그리는데 저는 처음에 뭐 그리는지 몰랐죠. 다 그리고 나니까 집이더라고요. 내가 몰랐던 이유는 집을 그리는 순서가 나하고 틀려서 그래요. 여러분들도 비슷할 거예요. 집 그리라고 하면 지붕 그 다음에 문짝, 그리고 마루, 주춧돌을 그리는데, 그 할아버지는 주춧돌 먼저 그리고, 그 다음에 기둥 그리고, 마루, 문짝을 그리고 나서 지붕을 맨 나중에 그렸어요. 다 그리고 나서 그게 '아 집이구나' 하고 알았죠. 집을 짓는 순서대로 그리더라구요. 깜짝 놀랐어요. ', 나는 실제와 다르게 마음대로 그리고 있구나, 생각하고 있구나, 구상하고 있구나, 전망하고 있구나' 그런 충격을 받았습니다.

 

한비자에 비슷한 얘기가 있습니다. 제가 언젠가 신문에도 잠깐 쓴 적이 있었지만 차칠이라는 사람이 옛날 춘추시대 정나라 사람인데, 장에 신발 사러 가기 위해 신발 본을 떴어요. 아마 종이가 없었으니까 다른 걸텐데, 자기 발 본을 떠 놓았지요. 그걸 탁이라 그러죠. 시장 갈 때 갖고 갈려고 했는데 깜빡 잊었어요. 그래서 십 리, 이십 리 길을 걸어서 시장에서 신발을 막 사려고 하는데 보니까 본 떠 놓은 것을 마루에다 놓고 그냥 온 것이 기억났어요. "아차!"하고 부랴부랴 집으로 달려갔습니다. 가서 그 본 뜬 걸 다시 챙겨서 장에 왔더니, 장은 이미 파하고 두리번거리는데 사람들이 그 사람한테 왜 그러냐고 물었어요. 그러자, "내가 이 본 뜬 걸 가져오는 동안에 장이 그만 파했다." 고 말했습니다.

 

그래서 당연히 사람들은

"여보쇼 당신이 직접 신어보고 사지 뭐 그러냐"

고 했지요.

그랬더니, 이 사람은

"그래도 본 떠 놓은 것이 내 발보다는 더 정확하겠지요."

(웃음) 우스운 얘긴데 참 웃을 수가 없었어요.

 

다른 사람들이 써놓은 글을 갖다가 베껴놓고 조금 고치는 건 참 쉽습니다. 외국 이론들을 빌려오는 건 좋고 쉬운데, 막상 우리들의 현실, 구체적인 ''에 대한 이해, ''에 대한 신뢰는 참 적구나. 그런 걸 느낍니다.

 

저는 지금도 책을 읽다가 독서라는 단어를 만나면 그 할아버지가 머리에 떠오릅니다. 그리고 책을 읽다가 건축이라는 단어가 떠오르면 그 문도득 할아버지가 생각이 나요. 그래서 우리들의 사색이라는 것은 바로 그런 잠재의식으로 구성된 것이 아닌가, 자기가 읽고 암기해서 언술로서 표현하고 주장하는 그것이 사상이 아니라, 자기 속에 자기의 잠재의식 속에 박혀있는 그런 이미지가 그 사람의 진정한 사상이 아니겠는가 하는 생각이 들었어요. 건축이라는 단어를 보고 아파트를 생각한다거나 63빌딩을 생각하는 사람하고, 건축이라는 단어를 읽으면서 망치를 생각하고 포크레인을 생각하는 사람하고의 사상적 차이는 굉장히 현격하다고 믿습니다. 그래서 저는 한 때 내 모든 잠재의식을 점검해서 상당히 튼튼한 토대 위에 서기 위해 고독한 독방에 앉아서 혼자서 무진 애를 쓴 적도 있었습니다. 그런데 실패했어요.

 

동대문도 신설동에서 보면 서쪽에 있다

 

제가 징역 초년에 가장 충격적으로 받아드렸던 것은 지금 말씀드린 바와 같이 자기 자신에 대한 깨달음입니다. 자기가 어디에 서 있는지 알아야 동쪽인지 서쪽인지 알 수 있잖아요. 신설동에서 왜 동대문이 서쪽에 있느냐고, 아무리 잘못됐다고 우겨봐야 자기 서 있는 자리가 잘못됐으니까 그게 서쪽에 있는 거지요. 자기가 어디에 있는지 모르고는 대상을 바로 볼 수 있는 시점이 없어집니다. 그래서 사람들을 발견한다는 것은 먼저 자기를 정확하게 인식하는 행위, 이것이 먼저 앞서야 하지 않는가. 그래서 저는 징역 사는 동안에 내가 이전에 갖고 있던 그런 관념성이 엉터리였구나하는 생각을 했어요.

 

아마 여기도 교도소에 갖다 온 분들 더러 있을 겁니다. (웃음) 그래도 여러분들이 살았던 징역은 별로 징역답지는 못한 겁니다.

 

신입자가 한사람 들어오면 으레 그 사람 앉혀놓고 자기의 전성시대를 쭉 필림을 푸는 할아버지가 있었어요. 당일날, 또는 이튿날로 당장 시작해요. 왜냐하면 삼사일이 지나면 그 할아버지가 그 감방에서 차지하는 지위가 형편 없다는 걸 눈치채고 이야기를 끝까지 안 들을 수도 있는 우려가 있기 때문에 눈치채기 전에 빨리 시작합니다. 쭉 해요. 우리같이 그 할아버지하고 7, 8년 있는 사람들은 참 많이 들어야 합니다. 두번만 더 들으면 백번 정도였습니다. 젊은 사람들은 노골적으로 두번 들으면 백번 되니까 이제 그만하라고 그래도 얼른 끝까지 시작합니다. 그러면 빠지는 걸 우리가 옆에서 보충을 해 주죠. 왜 그 얘기는 안 하냐구요.

 

그런데 그 얘기를 반복해서 듣는 동안에 한가지 참 중요한 걸 발견하게 돼요. 얘기를 자꾸 각색해요. 이 노인네가 창피한 건 좀 줄이고, 미담이나 무용담은 좀 근사하게, 더 멋진 걸로 잘 만들어내요. 처음에 얘기할 때 하고 상당히 달라졌어요. 7, 8년 전에 얘기하고는 굉장히 달라져 있습니다. 그래서 젊은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저도 '저 노인네가 열등감을 저런 식으로라도 풀어야 되나 보다. 구라가 필요하긴 필요하겠다.'라고 생각했는데 언뜻 그런 생각도 들어요. '만약 저 할아버지가 다시 인생을 시작한다면 근사한 것으로 각색되어 있는 그런 삶을 살고 싶은 소망이 저런 식으로 표현될 수도 있는 게 아닌가.' 참 안됐어요. 그런 생각이 문득 드니까 '진짜 자기가 살았던 사실 대신에 저렇게 살고 싶은 생각이 속에 있겠구나. 어쩌면 지금 각색한대로 진짜 살고 싶었는데 사회가 그것을 각색한 사실로밖에 낙착될 수 없었지 않느냐. 사실은 무엇이고 진실은 무엇이냐.' 그런 걸 상당히 고민하게 하는 얘기를 합니다.

 

훨씬 가까이 친해져야 알 수 있는 진실

 

제가 이야기를 줄여서 간단 간단하게 하겠습니다. 밤중에 변소문을 꽝 닫는 친구가 있어요. 변소문에 고무줄, 정확하게는 자전거 튜브를 이렇게 대 놔서 끝까지 손을 잡고 있지 않으면 꽝 소리가 납니다. 밤중에 변소문은 더 소리가 크죠. 그래서 아침 기상만 되면 사람들이 난리지요.

 

"어제밤에도 꽝 하고, 그제 밤에도 꽝 하고."

 

그래도 그 친구는 묵묵부답 대답을 않습니다. 그냥 뭐 그대로 욕만 먹고 앉아 있습니다.

 

이 친구도 훨씬 가까이 친해진 다음에 물어 봤어요.

"너는 매일 쥐어 박히면서 왜 매일 밤 그렇게 변소문 꽝 소리를 내냐?" 그랬더니 하는 말이 옛날 후생주택 많을 때 나즈막한 집들이 쭉 빨간 지붕으로 펼쳐져 있는데 밤일(도둑질) 나갔다가 들키면 얼른 지붕으로 뛰어 올라갔대요. 지붕에서 지붕으로 건너뛰면 골목으로 따라오는 사람들을 따돌리기가 참 좋아서였죠. 그날도 지붕 몇 개를 건너 뛰어가지고 확실하게 따돌린 뒤에 땅으로 뛰어내렸는데 깜깜한 밤에 한참 내려가더래요. (웃음) 높은 축대 위에 있는 지붕에서 뛰어내렸던 거죠. 그래서 붙잡히고 다리는 부러졌대요. 그 후로 쪼그려 앉았다 일어나면 다리가 뻣뻣해져요. 그래서 그 사이에 변소문 줄을 놓치는 거래요. 그 얘기를 하면 병신이라고 그냥 욕만 먹을 거니까 아침에 점검 받을 때 그냥 야단을 맞는 게 낫다고 생각했던 거지요.

 

교도소에서 만기가 되면 만기인사를 합니다.

"그 동안 신세 많이 졌습니다. 곧 나라의 은전이 있어서 사회에 나오시길 바랍니다. 건강하게 계시기 바랍니다."

인사를 하고 가요. 소위 만기인사입니다. 그리고 또 들어옵니다. 들어와서 또 똑같은 공장에 출력해요. 어떤 때는 같은 감방에 또 들어옵니다. 옛날 자리를 비켜주는데 ", 너 저기 자리 비켜줘라. 맡아놓은 자리다" 그러고 만기되면 또 인사합니다.

"그 동안 신세 많이 졌습니다. 나라의 은전이 있어서 곧 나오시기 바랍니다. 건강하게 계시기 바랍니다."

그러고는 인사합니다. 또 들어옵니다.

 

제가 제일 오래 있었던 교도소가 대전 교도소인데 대전 교도소 15년 동안에 한 사람하고 제일 많이 만기인사를 나눈 사람이 몇번 나누었냐면 7번이었습니다.(웃음) 금방 금방 들어온 셈이죠. 아마 그 7번 기록을 깰 수 있는 기회가 앞으로는 드물 겁니다. 그 당시에는 징역이 싸서 8개월 짜리도 있고, 1년 짜리도 있고 그랬는데 요즘은 8개월, 1년이 잘 없습니다. 간통은 6, 8개월도 있는데 간통만 7번 들어오기 좀 어렵잖아요. (웃음) 그래서 기록 깨기가 어렵지 않겠나 생각이 듭니다. 저는 만기인사하면서 '이번에 나가거든 꼭 마음 잡아라. 착하게 살아라.'라는 얘기를 한번도 안했어요. 왜 안했는가 하면 저 사람이 나가서 어떤 처지에서 어떤 조건에 놓여서 살아갈지를 전혀 모르는 내가 감히 어떻게 살아라 주문하는 게 외람된 것 같아서 지금 돌이켜 보면 한번도 잘 살아라는 얘기를 한 적이 없어요. 이 얘기는 다른 사람을 이해할 때 사실과 진실, 그 개인과 그 개인이 처하고 있는 여러가지 조건들을 총체적으로 고려하는 것이 진정한 이해가 아닌가 하는 뜻이예요. 함께 이해해야 하는 것 같아요. 영화의 주인공은 대개 죽을 때 시간이 참 오래 걸립니다. 주인공이 아닌 사람은 참 빨리 죽습니다. 주인공한테는 애인도 있고, 기다리고 있는 어머니도 있는데 주인공이 아닌 사람은

그것도 없습니다. 참 불공평한 그런 구도입니다.

 

적어도 남을 이해한다는 것은, 그리고 다른 사람들을 발견하다는 것은 사실과 진실을 구별해서 이해해야 하고 그 사람이 처하고 있는 전제 조건을 그 사람과 함께 총체적으로 수용해내는 태도가 저는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먼저 자기가 어떤 관념, 어떤 사고, 어떤 정서를 갖고 있는가에 대해 투철하게 인식해야 하고, 다음에 다른 사람에 대한 발견도 사실과 진실, 그런 전제조건을 총체적으로 같이 수용하는 그런 태도가 필요하다는 생각을 거기서 느꼈습니다. 그런데 이렇게 발견한 사람들에 대해 아무리 그 사람의 진실을 수용해내고, 그 사람의 조건까지도 총체적으로 받아들인다 하더라도 그 사람과 내가 어떤 관계를 갖지 않으면, 오히려 만나지 않은 것만 또는 발견하지 않은 것만 못하다고 생각돼요.

 

우리는 객관적 인식을 참 중요하게 생각합니다. 상당부분 과학이라는 이름 밑에서 그런 인식에 열중했던 시절이 있었습니다. 객관을 거꾸로 뒤집으면 관객입니다. 상대를 자기하고 관계없이 객관적으로 인식한다는 것은 관객-구경거리로 비약하게 될 위험성이 있습니다. 관계가 더 중요하고 관계야말로 그 사람의 진실과 조건들을 꿰뚫어 볼 수 있는 그런 시점을 준다고 생각합니다.

 

문제는 발이 아니라 건빵이었다

 

지금은 공개된 얘기입니다. 밤에 건빵 먹는 조목사라는 사람이 있었어요. 물론 목사가 아니었을 겁니다. (웃음) 밤마다 건빵을 먹었어요. 혼자 이불 밑에서 먹었어요. 교도소의 겨울 밤은 길고 춥고 배고프픈 시간이지요. 그 사람은 건빵을 혼자서 다른 사람 잠들 때 조용하게 먹었어요. 건빵을 먹어 본 사람은 대개 알 수 있습니다만 세 개 네 개까지는 소리가 안 나게 깨물 수 있습니다. 침을 담뿍 적셔서 서서히 깨물면 소리가 안 납니다. 근데 그게 세개가 넘어가면 소리가 나기 시작합니다. (웃음) 침이 마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다른 사람들이 다 자고 있고 뭐 안 자는지도 몰라요. 아침에 기상해서 죽 점검대오로 앉을 때 젊은 친구가 내 옆구리를 찌르면서 그래요. "신선생님, 어제밤에 조목사가요. 건빵 27개 먹었어요." (웃음)

 

그 조목사가 어떤 젊은 사람 발을 밟았어요. 교도소 좁은 감방이니까 발 밟을 수가 있죠. 이불 덮어놓으면 발인지 머린지도 잘 모르는데 굉장히 험한 사람이 나이 40 먹은, 물론 가짜지만 목사행세를 하는 사람한테 젊은 사람이 먹물도 별로 없는 친구가 막 멱살잡이로 덤볐어요. 한바탕 싸움이 끝나고나서 그래도 방에서 하소연 할 사람은 나밖에 없다고 생각했는지, 나한테 와서 계속 얘기해요. 징역살이를 들어온 젊은 놈들 버릇없는 이야기에서부터 앞으로는 발을 안 밟기로 조심하겠다는 그런 각오에 이르기까지 말입니다. (웃음) 저는 발이 아니라 건빵이 아닌가, 그 얘기를 들으면서 내내

그 생각만 했어요. 물론 우리는, 지금 우리 사회는 건빵 씹는 소리가 옆집에 들리진 않습니다.

 

신입자가 한사람 들어오면 짖궂게 질문합니다.

", 뭐 강남에서 놀았다면서. 그럼 강남 거기 채플린 커피숍 옆에 있는 미장원 이름이 뭐야?"

(웃음) 그렇게 물어보면 잘 몰라요. 그러면,

"너 강남에서 안 놀았으면서 괜히 지금 꽁 까는 것 아냐?"

 

기어이 다마내기 껍질을 벗겨냅니다. 남한테 피해주는 거짓말 아니면 그냥 놔 두면 될텐데 대부분의 교도소 문화가 그걸 끝까지 파헤칩니다. 왜 그러냐면, 같이 여기서 살자는 거죠. 전 처음에는 말리다가 나중에는 제가 더 나서는 편이 됐어요. 참 점잖지 못하게 말입니다. 나는 물론 채플린 커피숍 옆에 무슨 미장원이 있는지 모르지요. 얘기 꺼냈다 하면 10, 20년 전의 얘기니까요. 모르는데, 제가 물어봐요. 옆방에 있는 사람까지 불러가지구요.

", 영동 어디서 놀았다 그랬잖아. 거기 채플린 커피숍 옆에 있는 미장원 이름이 뭐야? 누구 좀 나와 봐."

하고 제가 적극적으로 사회를 봅니다. 그래서 미리 다 까고 살자. 같이 세상에서 고생하다가 밀려서 밀려서 짓밟혀 여기 들어와 있는 사람들한테 가우잡아서 뭐 도움 되겠나 그런 거죠.

 

떡신자끼리 나누는 교감

 

제가 편지 글에서도 썼습니다만 대전교도소, 전주교도소에서 상당히 소문난 '떡신자'입니다. 떡신자라는 것은 불교 집회든, 기독교 집회든, 카톨릭 집회든, 위문품으로 떡만 갖고 오는 집회가 있으면 얼굴 두껍게 참가하는 신자를 떡신자라고 말합니다. 그걸 '기천불 종합신자'라고도 합니다. (웃음) 아침에 출력해서 작업반에 있으면 정보가 미리 옵니다.

"오늘 교회에서 떡 가지고 위문 오는데 이따가 교회연출 담당 오면 가자."

 

그래 교회 연출 담당이 오면 작업은 대충 치워 놓고 줄을 서요. 그럼 담당 교도관이 솎아냅니다.

"너는 기독교인 아니잖아."

 

그럼 도로 들어가 작업해야 합니다. 나한테도 그래요.

"신선생 기독교인도 아닌데 뭐 갈려고 그래요?"

"글쎄, 아무래도 징역살이를 오래 하니까 뭐 종교를 하나 갖기는 가져야 안 되겠습니까?"

 

그러니까 그 녀석들도,

"신선생님은 되는데 왜 나보고만 들어가라고 그래요?"

 

그리고 어떤 녀석은 아주 철학적으로 말합니다.

"요즘은 카톨릭에 대해서 회의가 생겨서 하여튼 기독교를 좀 가봐야 되겠습니다."

(웃음)

 

이래서 인제 전문적인 떡신자들이 참 신자들 대열에 끼여 가지고 교회당에 갑니다. 가서 앉으면 기독교 회장이 나와서 노래를 막 시키려고 하는데, 우리 가짜 떡신자들은 노래도 잘 모를 뿐만 아니라 관심이 젯밥에 있으니까 교회당 옆의 도로박스에 쌓아 놓은 떡 보고 현재 몇 명이냐? 잘하면 두 봉씩 돌아가겠다. (웃음) 그런 계산을 하던가, 아니면 오늘 그래도 합창단 중에서 누가 제일 삼삼하다고 생각하나? 특히 여자 신자들 중에서. 그런 걸 하고 있으니까 핀잔이 대단하죠. 그럼 우리끼리 또 움찔했다가 또 쓱 서로 눈 맞추고 윙크까지 하면서.

 

나는 그게 그렇게 흐뭇했어요. 떡도 떡이지마는 좀 천대도 받으면서 그래도 그게 무슨 떡신자들끼리의 그 무슨 공감이라는 게 뭐 무슨 이념적인 공감도 아니고 아무것도 아닌데, 그 때마다 그런 공감 같은 게 참 사람을 훈훈하게 해 주는, 아주 추운 교도소, 삭막한 교도소를 살맛나게 해 주는 게 아니었는가. 그 인간관계라는 것이 그런 것들도 담아낼 수 있는 그런 어떤 구석이 있어야 하지 않는가 하는 그런 느낌을 갖습니다.

 

마음 편하게 얘기하고 있지만 제 사색 편지 글도 대개 보면 75년부터인가 편지가 오고 있는데 그 전에는 편지를 제대로 쓰지도 못했어요. 왜냐하면 징역이 하도 힘들어서 안 붙여줘요. 나같은 사람은 자기들하고는 다른 부류로 분류가 되요. 자기들을 사회에서 모멸하고 천대하고 구박하고 하던 그런 부류에 속하는 사람으로 제가 분류가 되요. 그래서 겉으로는 적당하게 놀아주지만 실제로는 가까이 곁에 두지 않습니다. 그래서 참 힘들었어요. 저는 말단 소총소대에 내려가서 징역살이를 했는데 말이 소용없습니다. 그 사람의 생활로써 검증이 되어야 합니다. 그래야 받아들여집니다. 5년 내지 6년쯤 걸리는 것 같아요.

 

 

첫 빠따와 수제비

 

어느날 추운 저녁에 배식을 하는데 배식 당번이 알미늄 반 드럼짜리 국통을 끌고 들어와서 그 앞에서 연설을 해요. 벽돌 버터, 마가린 버터 두장을 까 들고는,

 

"이 버터로 말할 것 같으면 1공장 축구 선수들이 인쇄공장 축구선수들과 피나는 접전 끝에 3 2로 물리치고 현물 박치기 한 것이다. 버터 10개 중에서 오늘 저녁에 두 개를 까 넣는다."

 

그러면 와 박수가 나오죠. 그러면 옆에 앉은 축구 선수들 위로해요.

"우리는 창문으로 봤는데 멋있었다"고 얘기하고, 등도 두들겨 줍니다.

제가 그 사람들로부터 받아들여지지 못하고 있는 그런 시절에 참 부러웠어요. 그래서 저도 운동시간에 축구 실력을 의도적으로 자꾸 과시했어요. 그 덕분에 제가 축구 선수로 발탁이 됐어요.

 

이건 제가 축구를 잘한다는 것을 간접적으로 자랑하고 있는 셈이기도 한데, 왜냐하면 120명 중에서 축구선수가 6명입니다. 운동장이 좁아서 6명밖에 안되요. 11명이 아니예요. 징역 들어온 사람들, 교실에서는 우등생이 못 돼도 운동장에서는 아주 뛰어난 애들이 많아요. 도둑놈들 아주 미남들이 많습니다. 체격도 좋고 잘 생겼어요. 싸움도 잘해요. 물론 노인들도 있지만 120명 중에 6명 속에 뽑혔다는 것은 상당한 칭찬을 지금 하고 있는 것입니다. (웃음) 그래서 저도 국통에 버터가 까 넣어질 때 옆 사람들이 ", 신선생님. 아까 멋있게 했을 때 기분 참 좋데요."했을 때 기분이 참 좋았습니다.

 

그러다가 한 번은 잡혔어요. 내일 도박내기 축구 시합을 한다는 정보를 입수한 보안과 계장이 인쇄공장 운동 시간에 호루라기를 불더니 '전원집합! 앉아번호!'를 하니까 6명 인원이 더 남았어요. 우리가 몰래 빠져 나가서 그 사람들하고 섞여서 축구 시합을 했거든요. 그러니까 "이놈들 보안과로 보" 딱 한마디 지시를 하고 싹 사라졌어요. 그러면 인제 혼나고 매타작 하는 겁니다. 그런데 우리가 사실은 선수 6명뿐 아니라 현물박치기 하려고 버터 10개를 들고 뒤에 따라 왔던 젊은 애가 하나 더 있었어요.

 

애가 눈치가 빨라서 세탁공장 방화수통 뒤에 얼른 숨었어요. 눈치가 기통차게 빠릅니다. 보안계장 떴다 했을 때 '이거 인원 파악이다' 생각하고 재빨리 방화수통 뒤에 숨어서 한 사람 인원이 안 잡힌거죠. 이 녀석이 나보고 바꾸재요. "신선생님은 빨리 이 버터가 든 신발 주머니 들고 공장으로 빨리 달아나라", 자기가 가서 맞겠다는 거죠. 얻어 맞는 거라면, 매라면 자기가 끝내준다 이거죠. 창신코라 그러는데 창신동에서 옛날에 자랐어요.

 

그래서 나는 겁도 나고 해서 얼른 신발 주머니 들고 올라가다가, 가만 생각하니까 저녁에 국에 버터를 넣을 때 거기 앉아 있을 생각을 해 보니까 참 무참하더라구요. 그래서 도로 갔어요.

", 대가리 숫자에 내가 찍혔으니까 니가 올라가라. 내가 맞도록 할께."

"아후, 매도 못 맞으면서 따라 갈려고 그래요?"

"괜찮아, 나도 중앙정보부 다 거친 몸인데 괜찮아."

그래 가지고 인제 그 애를 돌려 보내고 같이 따라 갔어요. 그랬더니 내 앞에 가던 친구가,

"왜 창신코 하고 바꾸라 그랬는데 신선생님이 귀찮게 따라 오시냐?"

라고 하더군요. 내가 끼니까 걱정이 된 모양이지요. 그래서 할 수 없이 그 중에 한 녀석이

"할 수 없다. 내가 그럼 첫 빠따를 맞을께."

 

첫 빠따가 중요해요. 첫 빠따가 몇 대로 끝나느냐에 따라서 전체 형량이 결정되는 거니까. 그래 이 친구가 나서서 첫 빠따를 끊는데, 때리는 사람을 무한히 피곤하게 만들어요. 엎드리라고 약 열번쯤 얘기해도 안 엎드리고 방향만 바꿔 가면서 촛대뼈로 까이면서도 이유도 되지 않는 이유를 그냥 자꾸 얘기했어요. 얻어 맞는 것보다 훨씬 더 힘들게 자기가 해요. 인제는 맞을 듯이 엎드렸다가 몽둥이로 치게 되면 달아나고 한 대 맞고는 한 5분쯤 게기고, 이래서 3대로 낙찰을 받았어요. 아주 영웅적인 투쟁이었어요. (웃음) 그래서 우리는 감사하게 지체없이 세대씩 맞고 거기서 또 벌방으로 잡혀 들어갔죠. 그랬더니 아니나 다를까 밤중 되니까 남아있는 공장에서 몰래 수제비를 끓여 가지고 비닐 봉지에다 넣어서 6개 만들어 가지고 그것도 수소문해서 창문 바깥에서 넘어 들어오더군요. 그런 경험이 저에게 있습니다.

 

"선생님, 치약 하나 사 주세요."

 

자기에 대한 냉정한 인식과 다른 사람에 대한 이해, 그리고 다른 사람과 자기와의 관계 이런 것들이 사람을, 어떤 개인을 바로 서게 하고, 또 그 사람의 능력을 키워주는 가장 확실한 토대라고 생각합니다. 자기 혼자 잘난 사람들, 많이 있어도 별로 도움이 안됩니다.

 

집도 가난하고 마라톤도 별로 잘 하지 못하는 친구가 있었는데, 중학교 1학년 개교 기념일에, 전교생이 뛰는 마라톤이 있었대요. 그런데 하필 교문을 나서서 출발하는데, 자기가 짝사랑하던 문방구점 둘째딸인가 셋째딸이 문방구점 앞에서 지나가는 것을 봤대요. 그래서 그것 때문에 이 친구가 중간에서 아이스케키도 안 사먹고 끝까지 열심히 뛰었대요. 그래서 한번도 마라톤을 안했는데 당당 1등으로 골인했어요. 그런데 다시 돌아올 때는 문방구점 앞에 아가씨가 없었대요. (웃음) 사랑은 사람을 무한하게 힘있게 합니다. 자기 혼자 힘있는 그런 건 아무리 개인주의 세계를 살고 있어도 거대한

허구가 아닌가 생각해요. 그렇습니다.

 

굉장히 생각이 차고, 어두운 친구가 있었어요. 내가 쓰던 물건을 가지고 가요. 치약도 쓰던 것 갖고 가고, 비누도 갖고 가고, 칫솔도 갖고 가고. 같은 감방 내에서 갖고 가면 금방 눈에 뜨입니다. 그래서 힘도 별로 없어서 쥐어 터지기나 하고 얻어 맞아요. 그리고는 또 가져가요. 그냥 달라고 하면 되는데 그렇게 가져가요. 그래서 말했어요.

 

"너는 천상 징역체질이다. 바깥에서는 도둑질하더라도 여기 도둑놈끼리는 그러면 안되지 않느 냐."

그런데 또 가져가요. 그 친구와도 훨씬 친해진 다음에 이유를 물어봤어요. 자기는 계모 밑에서 자랐대요. 그래서 그 얼음장같은 계모한테 뭘 해 달라고 이야기 비치는게, 몰래 가져가서 얻어 맞는 것보다 훨씬 힘들대요.

 

그래서 몰래 갖고 가서 나중에 얻어 맞는 고통이 적다는 얘길 하더라구요. 그래서 몰래 가져간대요. 몰래 가져가서 얻어 맞는 걸 계속해요. 내가 딱해서 치약을 사 줘도 절대 안 받아요. 다른 사람들의 치솔을 갖고 가다 얻어 맞는 것을 보고서 치솔 사줘도 절대 안 받습니다. 치약도 안 받습니다. 탁비누를 치솔에 찍어가지고 양치질합니다. 딱해요. 남들 다 보게 딱 말입니다.

 

그런데 그 친구가 한번은 나한테 와서,

"선생님 치약 하나 사 주세요"

라고 그러더라고. 자기가 생전 처음 사달라고 그러는 거래요.

"원래 남이 줘도 안 받는 사람 아니예요?"

"신선생님한테는 사 달라고 해도 괜찮을 것 같아요."

굉장히 행복했어요.

 

관계라는 게 그런거라 생각해요. 능력도 신뢰도 그 관계 속에서 나온 게 아닌가 생각이 됩니다. 그래서 여러분들이 지금 어떤 관계로 이 자리에서 만나고 있는지 모르겠습니다만 이런 관계로 형성된 사람들의 무리가 있다면, 일 대 일이거나 또는 여러가지 중첩된 형식이 관계로서만 존재해서는 안됩니다. 어떤 방향으로 가야 할 것인가를 생각해야 합니다. 관계를 가진 것은 어떤 단체입니다. 어떤 단체는 반드시 성격이 있어야 합니다. 개성이 없는 개인이 없듯이 생각이 없는 인간관계, 관계의 집합체, 그건 있을 수 없습니다. 우리는 사회성과 역사성으로 이야기 하죠. 어떠한 사회적 위상으

로 자기를 세우는가? 어떤 역사적 맥락에서 어떤 미래를 행하고 지향성을 담보하느냐? 이런 의미 규정이 필요합니다.

 

여러분들이 과거에도 고민했고 지금도 고민하는 문제라고 생각하는데 저는 사실 오늘 시간이 많지 않은 것 같고, 너무 많은 이야기들을 여러분들하고 하고 싶어서 저도 얘기 안하다가 오랫만에 해서 자꾸 얘기하고 싶은데 이런 지향성, 이런 것들이 정확하게 지속적으로 추구되지 않는 한 그 관계는 붕괴된다고 전 생각해요. 자라지 않는 나무는 없듯이 어떤 방향으로 발전해 가지 않는 단체는 붕괴의 시작이라고 생각해요. 우정도 자꾸 길러야 되는 거죠. 오늘도 뒷풀이가 있다고 들었는 데 맨날 똑같은 뒷풀이는 정지 상태입니다. 똑같은 것이 반복되는 것은 시간적 계열이 다르다 해도 그건

정지죠. 운동 상태가 아닙니다. 그래서 이런 관계들을 어떻게 이끌고 나가야 될 것인가, 이게 아마 오늘날 우리들이, 여러분들이 고민하고 우리가 또 어떤 형태로든지 해결해 나가야 할 일이 아닌가 생각합니다.

 

자기개조는 함께 하는 것

 

저는 지금까지 제가 말씀드린 자기 자신에 대한 정확한 이해, 자기 자신의 새로운 발전, 다른 사람에 대한 이해, 또 다른 사람과 자기가 맺는 관계, 그 관계에 사회 역사적인 방향성의 문제, 이런 문제가 사실은 참 중요한 문제라고 생각합니다. 세는 불리면 된다. 저는 결코 그렇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특히 저의 오늘 이 이야기는 여러분들하고 그렇게 무게를 둬서 할려는 얘기는 아닙니다만 임종석 군이나 우소장하고 얘기도 나눴습니다만 "참 힘들다. 옛날보다 힘은 안들지만 어쨌든 정리되지 않는 것들 때문에 정확한 방향에 대한 그런 회의" 그런 얘기를 합니다. 그 문제에 대해서 저도 세상에 대해 잘 모르는 사람이지만 제가 겪었던 경험, 20년간의 경험은 방금 얘기한 그런 사회성과 역사성에 대한 상당히 중요한 경험이 저한테 있습니다.

 

저는 교도소를 한마디로 산이라고 얘기하는데, 왜냐하면 산이라고 하는 것은 임꺽정도 쫓겨 들어가고 장길산도 쫓겨 들어가고 천주학쟁이도 쫓겨 들어가고, 동학하던 사람도 쫓겨 들어가고 의병하던 사람도 쫓겨 들어가고, 빨치산하던 사람도 쫓겨 들어간 곳입니다. 기름진 평야에 살기 어려울 정도로 약한 사람들이 쫓겨 들어가는 곳입니다. 그래서 교도소는 여러분들이 생각하듯이 굉장히 무서운 사람들 사는 곳이 아닙니다. 가장 약한 사람들이 모여든 산입니다. 그 사람을 통해서 갖는 우리 사회에 대한 인식은 상당히 중요한 인식이라고 생각합니다.

 

그 다음에 저는 60년대부터 80년대까지 징역살이를 했기 때문에 그 시절에는 참 많은 사람들과 같이 살았습니다. 한때 빨치산 소설들이 나왔습니다. 그 사람들하고 같이 살았습니다. 읽어 보니까 잘된 소설도 있고 잘못된 소설도 있더라구요. 해방전후에 열띤 공간에서 살던 사람들하고 24시간 계속 살아갑니다. 저는 나이가 어려서 과분한 애정을 받았어요. 참 많은 얘기를 나한테 쏟아 놓을려고 그랬어요. 어떤 분들은 삼국지에 나오는 관운장이 눈뜬 중국산맥을 넘어 온 사람도 있었어요. ‘팔로봉’, ‘은표부대’, 동북 저 만주에서부터 고령선까지. 북경해방에도 참가하고, 상해 해방에도 참가하

. 많은 사람들의 얘기를 들었어요. 그래서 저는 까마득했던 해방 전후의 이야기들을 그 감옥살이를 통해서, 많은 사람들과의 생활을 통해서 복원해 낼 수 있었던 점을 참 귀한 경험이었다고 생각합니다.

 

세상의 가장 밑바닥에서 무릎으로 기면서 모멸과 천대 속에서 살아왔던 일반수들로부터 얻는 사회적 인식, 그리고 또 방금 얘기한 그 많은 사람들과의 얘기를 통해서 제가 느낄 수 있는 해방전후의 역사적인 여러가지 상황들, 그래서 저는 출소할 때 쯤에는 참 달라져 있다는 자부심이 있었어요.

 

제가 86년도든가, 어머님이 돌아가신다고 그래서 귀휴 나왔어요. 휴가 나왔을 때 저희 집에서 넥타이하고 와이셔츠 가지고 왔는데 그냥 수의(囚衣), 죄수복을 딱 입고 나왔어요. 죄수복이 다 파랑색은 아닙니다. 일급수, 우량수들이 입는 조금 노랑색이 있어요. 그걸 입고 나왔어요. 그거 입고 나와서 친구들하고 같이 롯데호텔 커피숍에서 굉장히 비싼 아이리쉬 커피 마셨어요. (웃음) 어떤 성취감이 있었어요.

 

남들은 그렇게 얘기합니다. 20년간 참 안됐다. 그런데 나는 사실 역대의 직업적인 많은 운동가들이 실패했다는 자기개조에서 상당히 성공한 것 같은 착각을 가지고 있었어요. 사실은 착각이지만. 그런데 저 보고도 참 안 변했다 그럽니다. 옛날하고 비슷하대요. 나는 나를 개조했다고, 성분개조 했다고 생각하는데 안 됐대요. 지금도 징역 오래 살았던 사람들이 여기저기 서울 구석에서 살고 있습니다. 그런데 그 사람들과 만나면 다 돼요. 그래서 자기 개조한 것도 자기 개인을 빌미로 해서 완성되는 그런 것이 아니라 같이 함께 되는 거다. 누구의 누구와 함께 어깨동무를 하고, 누구의 이웃에 자기를 세우는가에 따라서 가능할 수 있는 것이 자기개조라고 생각해요. 바로 이런 점이 오늘 여기 모인 여러분들에게 하고 싶은 얘깁니다.

 

혼자서는 잘 안돼요. 같이 하는 게 좋습니다. 전부 혼자할려고 그래요. 그래서 지금 이 어려운 시기를 견뎌내는 방법은 같이 모이는 거라 생각해요. 같이 모여서 처음에 얘기했듯이 위로하고 공감하고 확인하고 그래서 지키고 넓혀나가고 이런 노력들이 없는 한 여러분들이 느끼는 회의라든가 고통은 절대로 해결되지 못한다고 생각해요.

 

사람과의 관계를 튼튼하게

 

저는 우리 사회가 어떠한 방향으로 나아가야 될 것인가, 또는 나는 어떤 길을 살아야 될 것인가 이런 문제에 대해서도 지금 사회체제로는 도저히 안 된다고 생각합니다. 여기다가 어떤 소망을, 자기 자녀들의 미래를 걸어 놓을 사람 별로 없습니다.

 

교도소 사동에는 방이 열 개쯤 쭉 있어요. 한 방에 15명씩 있으면 150명이 있습니다. 150명이 있는데 그 사동 입구에 세면장이 있습니다. 수도꼭지가 6개 있습니다. 그런데 물을 많이 쓴다고 뼁찌로 잠궈 버렸어요. 그리고는 수도꼭지를 두 개만 달아놨어요. 그랬더니, 두 개가 이게 없어졌어요. 그래서 직원이 또 두 개를 채워놨어요. 또 없어졌어요. (웃음) 왜냐하면 그것만 있으면 다른 것도 다 틀어서 쓸 수 있으니까요. 그 다음부터는 이걸 아예 사동에 근무하는 담당 서랍 속에 넣어놓고 물 쓸 사람은 그걸 빌려서 틀어서 쓰고 다시 반납하는 제도로 바뀌었어요.

 

그랬는데 꼭지가 많이 돌아다닙니다. 우리 방에도 공용으로 한 개 있고, 우리방에서 잘 나가는 친구가 또 한 개 가지고 있습니다. 방 열 개 중에 대개 20개 있습니다. 그 다음 두 개 가진 사람도 있어요. 왜냐하면 한 개 잃어버리면 나중에 써야 되니까요. (웃음) 그 다음에 감방 수색에서 뺏기면 안되니까 한 개를 더 가지고 있는 방도 있어요. 그 다음에 복도에 왔다갔다 하는 좀 잘 나가는 애들은 한두 개 정도 더 가지고 자기한테 런닝 잘 사주는 사람한테 선물로 그걸 하나씩 주기도 합니다. 그래서 우리 사동에 돌아다니는 수도 꼭지가 몇 개쯤 됐냐면 약 40개 정도 됩니다. 어디서 왔냐하면 직원 변소 것도 없어지고, 공장 것도 없어지고, 온 데 다 없어지는 겁니다. (웃음) 6개만 있으면 되는 수도꼭지가 40개 있어도 부족합니다.

 

그래서 도대체 몇 개가 있으면 풍부하게 물을 마음대로 쓸 수 있겠나를 계산 해봤어요. 150명이 다 한 개씩 가지면 150, 한 개 가지고 잃어 버릴 수도 있으니까 비상용으로 한 개씩 더 가지면 한 300개쯤 있으면 되지 않겠나 하는 생각이 들었어요.

 

우리 사회가 그런 겁니다. 300개를 만들어내야 합니다. 수도꼭지 300, 거대한 생산력의 발전이 요구됩니다. 자본의 배분, 아주 이성적이지 않습니다. 야성적입니다. 인간자원이든, 물적자원이든 그렇습니다.

 

우리들의 사는 모습이 바로 그렇습니다. 그래서 저는 이념이 퇴색했는가 하는 여러가지 관점도 있습니다마는 어쨌든 이러한 현재 체제는 주관적으로도 수용될 수 없고 객관적으로도 그 운동과정이 보장될 수 없습니다.

 

이런 문제들을 오늘 제가 할 얘기로서는 조금 다른 얘기이기 때문에 더 이상 말씀드리지 않겠습니다. 중요한 것은 사람과의 사업입니다. 어떤 사람은 저 보고 '사람' 너무 강조한다고 그러더라구요. 어떤 후배가 "신선생님, 맨날 사람만 얘기하면 그럼 제도는 어떻게 됩니까?" 그러더라구요. 제도라는 건 사람과의 관계라고 생각해요. 그리고 저는 지금도 그렇습니다. 사람이 좀 기분이 안 좋으면 그 사람이 아무리 옳은 얘기 해도 잘 받아들이고 싶지 않아요. 아주 좋은 사람이 틀린 얘기하면 가서 틀렸다고 얘기하고 싶은데, 마음에 안 든 사람이 틀린 얘기를 하면 얘기해 주지도 않아요. 그래서 인간과 인간관계에 대한 새로운 시각, 이런 것을 가지고 사람과의 관계를 튼튼하게 꾸려나감으로써 앞으로 우리의 어떤 지향성의 근거로 삼아나갈 수 있지 않은가 하는 생각이 듭니다. 그래서 오늘은 그런 얘기에 촛점을 맞춰서 말씀드렸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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