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어독서창고

산은 강을 넘지 못하고 - 유홍준

by 처사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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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은 강을 넘지 못하고

유홍준

 

 

흐느끼는 국토, 신음하는 산하

루과이라운드 농산물협상에서 결국 쌀시장이 개방되어 전 국토가 흐느끼는 마당에 한가롭게 답사기나 쓰고 있다는 것이 몹시도 죄스럽기만 하다. 문화유산의 의미나 따지는 일을 전공으로 삼고 있는 내가 우리나라 쌀농사의 사회과학적 의미나 쌀시장 개방 이후에 나타날 향촌사회의 심각한 타격을 영민하게 예견할 소견이 있을 리 만무하다.

 

그러나 우루과이라운드로 야기된 일련의 사태를 지켜보면서 나는 안타까움을 금할수 없는 몇가지 의문점을 갖고 있다 첫째는 추곡수매량, 쌀값 인상폭, 배춧값 폭락의 문제를 당장 겪으면서 신통한 대안도 마련 못하는 처지에 쌀시장 개방만 막으면 마치 농촌이 살아날 수 있을 것 같은 분위기가 울화를 치밀게 한다. 그것은 농촌을 지킬 수 있는 마지막 보루의 함락을 의미할 뿐 농촌은 이미 피폐의 극한상황에 와 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의심케 한다.

 

농부는 오랫동안 정부에게 속아왔고 배신당해 왔다. 그리고 이제 또다시 속아야 한다는 슬픈 현실이다. 오늘날 우리 농촌이 이처럼 피폐해버린 원인은 60년대 근대산업 이후 제3공화국이 농민을 수출 제일주의의 희생양으로 삼은 데서 시작된다. 정부는 노동자의 값싼 인건비를 유지하기 위해 쌀값을 터무니없는 싼 값으로 동결시킴으로써 생산단가를 낮추어 수출상품의 국제경쟁력을 획득하고자 했다. 정부는 농업경제학자가 쌀값의 원가를 산출해보는 것 자체를 금지시켰다. 그러면서 정부는 농민을 구슬리기를 나라 경제가 펴지면 올려줄 터이니 조금만 참으라고 했다. 그러기를 자그마치 30년을 해 왔다. 중진국으로 도약했다느니, 국민 1인당 소득이 얼마로 됐느니, 구소련에 20억 달러를 원조해주느니 하며 세계 만방에 자랑할 만큼 나라경제의 형편이 펴졌지만 30년 전부터 해마다 해온 약속은 지켜지지 않았다. 그리고 이제 와서 그 약속은 까맣게 잊고, 새로운 획기적인 농업정책을 수립하겠다는 것이다. 이 점에 대하여 나는 책임있는 자의 답변이 듣고 싶다.

 

둘째는, 획기적인 농업대책을 마련하겠다면서 생산과정을 기계화·산업화하기 위한, 농지소유 상한선을 허물어버리려는 기세에 대한 당혹감이다. 지금 우리는 비록 제한적이지만 자작소농(自作小農)의 경자유전(耕者有田)원칙, 즉 농사짓는 사람이 농토를 갖는다는 향촌사회의 기본 골격을 갖고 있다. 이것을 그렇게 쉽게 허물어도 좋을 것인가? 그것이 어떻게 쟁취된 것인지 알기나 하고 하는 소리인가? 농부가 자기 땅을 갖고 농사짓기 위하여 얼마나 많은 희생을 치렀던가를 생각해보라. 멀리 올라갈 것없이 봉건사회 해체기에 혹심한 소작료에 시달리다 일으킨 이른바 민란과 일제시대 농장주들에게 당한 농부들의 서러움과 아픔은 역사의 큰 상처였다. 송기숙의 암태도에 나오는 소작쟁의는 분노와 눈물 없이는 읽을 수 없는 우리 농부들의 슬픈 과거사이다.

 

해방이 되고 유상매수 유상분배로 자작소농 중심으로 가는 토지정책이 결정되면서 간신히 뿌리내린 그 한맺힌 경자유전의 원칙이 이제 또 다시 대토지소유제로 넘어가겠다는 것이다. 서산의 대농장들은 이미 농민을 현대판 소작인으로 전락시켰다. 그리하여 희망이 없는 농촌은 결국 젊은이들로 하여금 고향을 떠나게 하였다.

그러나 우리네 농부의 저력은 아직도 살아 있다. 이농현상으로 즐비한 폐가들을 보면서 흐느끼는 국토와 신음하는 산하를 뼈저리게 느끼면서도 저기 지금도 저렇게 떠나지 않은 농부들이 있기에 국토는 죽지 않는다고 생각했다. 내가 만약 시인이 되었다면 문화유산의 아름다움보다도 그분들과 함께하며 떠나지 않은 분에게 보내는 경의를 읊었을 것이다. 그런데 세상은 이제 이 떠나지 않은 분들의 위대한 참을성마저 허락하지 않을 기세로 덤벼들고 있는 것이다. 그래서 우루과이라운드는 우리의 농부들을 두 번 죽일 것만 같은 불안을 지울 수 없다.

 

함부로 가지 못한 답사처

답사라는 명목으로 산천을 떠돌아다니면서 스스로 죄스럽게 생각되는 때는 비포장도로 흙길에서 버스바퀴가 일으키는 흙먼지를 길가로 비켜선 농부가 뒤집어쓰는 모습을 볼 때였다. 저분들의 음울한 심사를 따뜻한 말 한마디, 정을 얹은 술 한잔으로 나누어갖지 못할망정 그네들의 희생 속에서 얻은 부로 관광버스나 대절해서 싸돌아다니면서 흙먼지 날리는 나를 회의하고 미워할 때도 많았다. 바로 그런 이유 때문에 함부로 답사 가지 않은 곳도 있었다.

 

정선아리랑의 고향인 여량땅 아우라지강의 답사는 나에게 있어서 감추어둔 답사코스였다. 근래에 들어와 문화유산답사회원을 데리고 여기를 두차례 다녀왔지만 나는 얼마 전까지만 하여도 답사객이 가서는 안되는 금지된 답사처로 치부해 두었다. 아우라지강의 답사는 평창 봉평의 이효석 생가에서 시작하여 여량의 아우라지강에서 하룻밤을 묵고 정선읍내를 거쳐 사북을 지나 고한 정암사를 답사한 다음 영월로 나와 단종의 능과 단종의 유배처였던 육지 속의 섬인 청량포에서 잠시 머리를 식히고 시간이 허락된다면 김삿갓 묘소와 구산선문의 하나인 법흥사를 거쳐 원주로 나오는 일정으로 연결된다. 그것은 대관령 서쪽, 즉 영서지방의 산과 강을 누비는 답사의 별격(別格)인 것이다.

 

이 아름답고 의미깊은 별격의 답사처를 내가 함부로 가지 못했던 이유는 두 가지였다. 하나는 몇 년 전까지만 해도 전코스가 비포장 흙길인지라 감히 엄두도 못 낼 난코스였기 때문이다. 특히 평창에서 정선으로 들어가자면 속칭 비행기재를 넘어야 하는데, 그 고장 사람들 말로는 시외버스를 탈 때 생명보험 들어놓아야 한다는 농담이 생길 정도로 험한 고개다. 벼랑을 타고 오르는 버스 안에서 저 아래쪽을 내려다보면 그 아찔함에 현기증을 느끼지 않을 장사가 없다. 특히 운전석 쪽 창가에 앉아 있는 사람은 마치 허공에 떠서 가고 있다는 착각이 들기 때문에 비행기재라는 별명이 공연히 생긴 것이 아님을 절감하게 된다. 높기는 오지게도 높아 옛 고갯길 이름은 별을 만지작거릴 수 있다는 뜻으로 성마령(星摩嶺)이라 했다.

 

아질아질 성마령아

야속하다 관음베루

지옥같은 정선읍내

십년간들 어이가리

 

아질아질 꽃베루

지루하다 성마령

지루하다 성마령

누굴따라 나 여기왔나

 

정선아리랑에 나오는 이 가사는 특히나 자조적(自嘲的)인데, 그 내력은 정선사람들이 지은 것이 아니라 조선시대 한 군수(오홍묵이라고 함)의 부인이 남편 따라 오면서 부른 노래라 한다. 그 군수부인은 남편이 벽지로 부임했다고 울고, 고개 넘으면서 힘들어 울고, 나중에 해임되어 떠날 때는 산수좋고 인심좋은 곳을 떠난다고 또 울었다고 한다.

 

1982년 내가 직장에서 남의 출장을 대신 자원하여 이 비행기재를 넘어 정선군수를 만난 일이 있었다. 그때 그 군수 하는 말이 대한민국에서 군청소재지 들어오면서 비포장길을 거쳐야 하는 곳은 정선뿐이라며 하소연했다. 그런 험악한 길인지라 나는 홀로 다닐망정 답사회원을 인솔하여 책임 못질 일을 당하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다.

 

두 번째는 정선에서 정암사로 가자면 반드시 사북과 고한이라는 탄광촌을 지나야 한다. 행정상으로야 엄연한 읍이지만 그렇게 암울하고 시커먼 마을은 여기보다 더한 곳이 없다. 바로 그 읍내 한복판을 가로질러 가난에 찌든 탄광촌 사람들 사이를 헤집고 관광버스로 지나간다는 것은 죄악에 가깝다는 생각 때문에 자제했던 것이다.

 

그런 자제와 금기를 풀고 4년 전 처음으로 아우라지강의 겨울날을 공식적인 답사로 행하게 된 것은 또 두 가지 이유에서였다. 첫째는 그 비포장흙길이 이제는 몽땅 포장되었기 때문이다. 비행기재는 터널로 통과하게 되었고, 여량땅을 들어가는 데는 평창을 거칠 것도 없이 영동고속도로 하진부에서 곧장 질러갈 수 있게 된 편리가 생겼기 때문이다.

 

둘째 이유는 조금 심각한 얘기다. 사북과 고한을 거쳐야 함은 변함없는 일이고 탄광촌의 비참함은 날로 더해가는 것이지만, 나는 우리 답사회원같은 고급 도회인들이 그런 기회 아니면 탄광촌의 내음을 맛볼 수 없다는 생각, 그래서 현실을 머릿속에 그릴 때 농촌, 탄광촌은 안중에도 없고 도회적 풍광만 염두에 둘지 모른다는 생각에 결단내린 것이다. 탄광촌 사람들에 대한 미안함과 회원들의 체험 사이를 여러번 저울질하였다. 그때 내게 생각나는 것은 노신 선생이 인력거꾼이라는 글을 쓰면서 걸을 것인가 탈 것인가를 고민하는 모습이었다. 결국 노신은 그 노인의 인력거를 타고 눈길을 갔듯이 나는 답사객을 이끌고 탄광촌을 지나갔다.

 

감자바우,금바우

휴전선으로 인하여 윗동강이 잘려나갔건만 그래도 남한땅의 6분의 1을 차지하면서도 인구라고는 고작해서 170만 명에 머무르는 강원도, 그 강원도에 대한 타도 사람들의 인상이란 대개 여름날 동해바다의 해수욕장과 관동팔경의 수려한 경관, 소양강과 소양호로 어울어지는 호반의 정취, 가을날 오색단풍으로 물든 설악산의 화려함과 녹갈색 단일톤의 장중한 오대산, 겨울날이라면 양구·인제·원통에서 군생활을 보내야 했던 사람은 그 끔찍스런 추위를 생각하고, 팔자가 거기까지 닿은 사람이라면 대관령 용평스키장 따위를 먼저 머리에 떠올릴 것이다.

 

내남없이 강원도를 말할 때는 자기가 경험한, 정확히는 감성적 소비의 대상으로 되었던 추억으로서 강원도를 말한다. 여타의 지방을 말할 때면 거기에 둥지를 틀고 사는 사람이 이룬 향토문화를 먼저 말하는 것과는 사뭇 대조적인 것이다. 그것조차도 봄날의 강원도는 좀처럼 잡아내지 못한다.

 

그러나 잠시만 생각해 보아도 강원도는 국토의 천연자원이 대부분 여기에서 채굴되어 나라의 부를 일으키는 원동력이 되었고, 당신네들이 하루에도 몇모금씩 들이켜는 그 물의 수원(水源)이 거개가 여기서 발원하고 있음을 바로 알아차릴 수 있다. 그중에서 횡성, 홍천과 평창, 정선, 영월은 국토의 오장육부에 해당되어 때로는 어머니의 자궁 속으로 회귀하는 아득한 깊이를 느끼게 하는 곳이건만 세상사람들은 그저 궁벽한 산골로 치부하거나 냇물조차 시커먼 별유인생들의 징용처쯤으로만 생각하고 만다.

 

그것은 마치도 우리가 이목구비와 팔다리로 일상을 살아가면서 지금 내 뱃속에서 끊임없는 삭임질과 대동맥의 맥박이 뛰고 있음을 잊고 사는 것과 비슷한 형상이다. 속병이 나서 병원에 갈 때쯤에야 내 몸 깊은 곳을 생각해 보듯이 어쩌다 사북탄광에서 큰 사고가 났다는 신문기사를 접할 때에나 거기를 생각해 주는 것과도 같으니 세인들의 강원도에 대한 인상은 국토의 오장육부에 위치한 강원도의 팔자소관인지도 모르겠다. 더더욱 기묘한 것은 용평스키장을 다녀오고도 거기가 평창땅인 것을 모르는 사람도 많고 사북탄광과 사북사태는 알아도 사북이 정선땅인 줄 모르는 사람이 많으니 나의 논설에 큰 억지가 있어 보이진 않는다.

 

나 역시 강원도에 대한 인상은 그렇게 시작되었다. 그러나 두 차례의 큰 체험 후 나의 인상은 바뀔 수밖에 없었다.

19713월 어느 날 논산훈련소에 입대하여 수용연대에서 하룻밤을 자고 이튿날 조회에서 기간병이 어제 들어온 병력들을 모아놓고 지역별로 점호하는데 그 기간병이 장난기가 많아서 각 도에 별명을 붙여 부르면서 경상도 문둥이!” 하면 경상도 병력들은 !”하며 앉게 하는 것이었다. 이어 전라도 개똥쇠” “서울 깍쟁이” “멍청도 더듬수까지는 일없이 지나갔는데 강원도 감자바우!” 라는 호령에 이들은 !” 소리가 아니라 약속이나 했듯이 금바우입니다라며 맞받아쳤던 것이다. 그리하여 연병장은 금새 웃음바다가 되었다. 자신에게 부여된 별명을 거부하는 마음이란 곧 상처를 건드린 아픔으로 느끼고 있다는 뜻이다. 화전으로 일구어낸 돌밭에서 부쳐먹을 것이라고는 옥수수와 감자밖에 없는 그 한심함은 듣기 조차 싫다는 심정 같았다. 이후 나는 내 입으로 강원도 감자바우라는 농담을 내뱉은 적이 없다.

 

1972129, 나는 군대생활 중 두번째 휴가를 나왔다가 국립중앙박물관에서 열린 최초의 회화특별전인 이조회화 근오백년전을 구경가서 전시장 안의 유일한 민간인 관객인 한 여학생을 만났다. 수작을 부려 함께 구경한 다음 박물관 앞뜰 모과나무 밑 벤치에 앉아 통성명을 하고 나서 우리의 첫 대화는 이렇게 이어졌다.

 

고향은 어디세요?”

맞혀봐요. 이효석과 같아요.”

평창이군요.”

맞아요. 평창 어딘지도 아세요?”

대화든가······”

아니에요. 봉평예요.”

어쨌든 금바우군요.”

금바우? 왜 감자바우라고 그러지 않아요? 거기도 강원도인 게죠?”

아뇨, 서울요. 박물관 저쪽 백송나무 동네예요. 시간 있으시면 내고향 구경 가실래요? 묵은 동네 뒷골목을 나는 눈감고도 다녀요.”

결국 그녀는 나의 처가 되었으니 나는 이효석의 고향이 평창이라는 사실을 안 것과 금바우라는 애칭 덕분에 분에 넘치는 들꽃 같은 평창색시를 얻게 되었다. 그런 강원도이니 나의 상념이 남다를 수밖에.

 

메밀꽃 필 무렵의 고향, 봉평

끔찍이도 사고 많은 길이지만 영동고속도로는 여느 고속도로와 달리 싱그러운 여심(旅心)을 일으킨다. 여주, 원주를 거쳐 새말을 지나면 이제부터는 태백산맥의 허리를 지르는 첫 관문으로 둔내재를 넘어가게 된다. 횡성군 둔내면을 관통하는 이 큰 고개는 영동1호터널에 이르러 해발 890미터로 사실상 대관령보다도 더 높다. 둔내재를 넘어갈 때마다 나는 귀가 멍하다가 뻥 뚫리는 고막의 가벼운 고통을 느끼는데 남들도 다 그런지 물어본다는 것이 꼭 그때마다 잊어버린다. 그도 그럴 것이 차창 밖 고원지대에 무리지어 있는 낙엽송의 아름다움에 그런 시답지 않은 말붙임이 생기지 않는 것이다. 낙엽송은 이른 봄 여린 새순이 바람에 하늘거릴 때면 그 보드라운 촉감이 닿을 듯한 환상을 일으키고, 한여름에는 어느 나무보다도 싱그러운 푸르름이 줄지어 우산을 쓴 듯 이어지고, 가을날이면 다른 나무보다 늦게 낙엽이 지기 때문에 엷은 윤기를 머금은 황갈색 단풍이 그렇게 오롯하게 보일 수가 없다. 겨울날 눈밭에서는 그 꼿꼿한 자세로 열병식을 벌이는 정연한 자태를 발한다.

 

언제부터인지 나는 꽃과 나무를 보면서 한송이 한그루의 빼어난 아름다움보다는 낙엽송처럼 그 개체야 별스런 개성도 내세울 미감도 없지만 바로 그 평범성이 집합을 이루어 새롭게 드러내는 총합미를 좋아하고 있다. 개나리, 진달래, 들국화, 솔숲과 대밭······ 지난 늦가을 아우라지강을 찾아가는 길에 차창 밖으로 비껴선 낙엽송 군락을 하염엾이 바라보면서 나도 모르게 일어나는 한 의문이 있었다. 저 아름다움의 참 가치에 이제야 눈을 돌리게 된 것은 나이를 들어가는 연륜 덕분인가, 아니면 80년대라는 간고한 세월을 살아왔던 경험 탓일까.

 

달리는 차 속에 비스듬이 누워 차창 밖으로 스쳐가는 풍광을 바라보며 이생각 저생각에 잠길 때 나는 답사와 여행이 우리 시대 인간의 정서함양에 기여하는 공헌이 결코 예사롭지 않음을 새삼 느낀다. 그러나 이런 여유로운 사색이란 중년의 나이에 들어서야 맛볼 수 있는 낭만일 뿐 20대의 청년들에게는 그저 늙다리들의 궁상으로 비치기 십상이다.

 

10년도 더 된 것 같다. 80년대초 성심여대에 출강하고 있을 때 나는 국사학과의 유승원·안병욱·이순근 교수가 인솔하는 오대산 월정사 답사에 동참한 적이 있었다. 버스 속에서 학생들이 흥겨운 노래를 부르며 여행의 해방감을 만끽하고 있는 바람에 나의 싫지 않은 고독의 낭만을 즐길 수 없었고 간혹은 학생들이 철없어 보이기도 하였다. 그러나 학생시절의 나는 저애들보다 한술 더 떴다는 생각이 들면서 오히려 그런 젊음이 부럽게도 생각되었다.

 

우리의 버스가 둔내재를 넘어 지금은 영동1호터널이라고 불리는 둔내터널을 빠져나왔을 때 학생들은 출발부터 3시간의 흥타령에 밑천이 달렸던 것인지 식어가는 분위기를 일으킬 요량으로 나에게 마이크를 주면서 함께 어울릴 것을 요청했다. 나는 사양 않고 마이크를 잡고서 내 특유의 자세로 맨 앞좌석 등받이에 기대서서 뒤쪽을 바라보며 이렇게 말했다.

 

내 흥에 맞추어 노래를 불러야 제 맛이지 남의 흥에 끌려가는 것은 형벌에 가까워요. 지금 내게 일어나는 흥은 노래가 아니라 창 밖의 풍광입니다. 이제 막 우리의 버스는 봉평터널(영동2호터널)을 지나고 있습니다. 조금 더 가면 장평교차로가 나옵니다. 여기서 남쪽으로 내려가면 대화면을 거쳐 평창읍으로 빠지게 되고 북쪽으로 올라가면 봉평면이 되는데 바로 이 봉평은 이효석의 고향입니다. 고등학교 국어교과서에서 읽고 배웠던 메밀꽃 필 무렵의 무대가 바로 여깁니다. 그 소설의 상황설정은 봉평장에서 별 재미를 못 본 장꾼들이 이튿날 열리는 대화장을 기대하며 달빛 아래 밤길을 걸어가면서 주고받는 이야기로 되어 있지요. 그러니까 허생원, 조선달, 동이 세 사람이 지나갔던 그 길을 우리가 가로지르고 있는 것입니다.

 

 

나의 말이 이어지는 동안 학생들은 조금 전의 들뜬 분위기를 말끔히 씻어버리고 모두들 창 밖으로 눈을 돌리면서 혹시 메밀밭이라도 볼 수 있지 않을까 두리번거리면서 나의 이야기를 귀담아 듣고 있었다. 그때 땅의 의의와 역사성을 뼈 속까지 실감할 수 있었다. “모르고 볼 때는 내 인생과 별 인연 없는 남의 땅이지만 알고 보면 우리의 땅으로 가슴깊이 다가온다.” 는 표현을 자주 하는 것은 바로 이때의 경험에서 배운 것이었다. 그럴 때는 학생이 오히려 선생님처럼 느껴진다. 그래서 나는 곧잘 인생의 스승은 책이 아니라 사람이다는 말도 하고 있다. 그때 내가 좀더 준비성이 있는 친절한 교사였다면 당연히 메밀꽃 필 무렵의 그 아름다운 정경을 읽어 주었어야 했다.

 

이즈러졌으나 보름을 갓 지난 달은 부드러운 빛을 흐뭇이 흘리고 있다 대화까지는 팔십리의 밤길, 고개를 둘이나 넘고 개울을 하나 건너고 벌판과 산길을 걸어야 된다. 길은 지금 긴 산허리에 걸려 있다. 밤중을 지난 무렵인지 죽은 듯이 고요한 속에서 짐승 같은 달의 숨소리가 손에 잡힐 듯이 들리며, 콩포기와 옥수수 잎새가 한층 달에 푸르게 젖었다. 산허리는 온통 메밀밭이어서 피기 시작한 꽃이 소금을 뿌린 듯이 흐뭇한 달빛에 숨이 막힐 지경이다. 붉은 대궁(줄기)이 향기같이 애잔하고 나귀들의 걸음도 시원하다.

 

이효석의 생가와 문학비

이효석(李孝石)1907년 평창군 봉평면 창동리 남안동에서 태어났다. 호는 가산(可山). 평창공립보통학교를 졸업하고 경성제일고보에 입학하여 1년 선배인 유진오와 함께 수재(秀才) 소리를 듣는다. 1925년에 경성제대에 입학하여 영문학을 전공하고 22(1928)때 처녀작 도시와 유령으로 등단하여 1930년 졸업 때까지 많은 단편을 발표하며 경향문학의 동반작가로 지칭되었다. 193125세 때 결혼하고 총독부 경무국에 취직하였으나 주위로부터 지탄을 받자 처가가 있는 함경도 경성으로 낙향하여 교편을 잡으면서 창작활동을 계속한다. 27(1933)에는 구인회(九人會)에 가입하고 ()을 발표하면서 경향성에서 인간의 자연성에로 전환을 보이며 28(1934)에 평양 숭실전문학교로 옮겨 창작을 계속 하던 중 34(1940) 때 아내가 12녀를 남기고 세상을 떠나자 실의에 잠겨 만주를 여행하고 36(1942)에 뇌막염으로 세상을 떠났다. 그는 70여 편의 단편과 많은 수필을 남겼다.

 

이효석이 짧은 일생에서 1936조광(朝光)지에 고향을 무대로 한 메밀꽃 필 무렵을 발표한 것이 결국 평창 봉평땅을 아름다운 문학기행의 명소로 만들어 놓았다. 이효석의 남안동 생가에는 방명록이 비치되어 있는데 많은 사람들이 방문을 기념하는 한마디 말과 함께 이름을 적어놓고 있다. 얼핏 훑어본 기억으로 나의 인상에 남는 구절은 효석 선생님은 참으로 좋은 고향을 가졌네요향토의 아름다움을 그려준 선생님께 감사드리러 찾아왔습니다이다.

 

평창 봉평은 이효석의 메밀꽃 필 무렵으로 영원히 살아있는 마을이 되었고 스스로 문화마을임을 자부하게 되었다. 그리하여 우리는 이효석의 생가에 이르기까지 수많은 문학비를 만나게 된다.

 

둔내터널을 빠져 조금 내려오면 태기산 소풍휴게소라고 불리는 쉼터가 있다. 점포 하나 없이 고장난 차나 쉬어가기 알맞은 이곳 한쪽에는 1980, 유진오가 비석이름을 쓴 가산 이효석 문학비가 세워져 있다.

 

장평 로터리를 돌아 이효석 생가 쪽으로 향하면 봉평마을이 훤히 내려다 보이는 언덕마루 찻길 한쪽에는 커다란 자연석에 메밀꽃 필 무렵이라고 새긴 기념석이 두 그루 잣나무의 호위를 받으며 이 조용한 시골마을 봉평의 입간판이 되고 있다. 여기까지는 참으로 아름다운 정경이다.

 

그러나 봉평장터의 좁은 길을 헤집고 들어가 봉평중학교 앞에 당도하면 문학공원이라는 이름의 빈터에 세워진 이효석 동상은 절로 웃음을 자아내게 한다. 그 동상의 오종종함이란 도저히 이효석의 이미지에 다가서지 않으며 괜히 이효석에게 미안한 생각만 들게 한다. 귀공자상의 그의 얼굴이 꺼벙이로 바뀌었다. 문학공원에서 바로 보이는 남안교 긴 다리 앞에는 시범 문화마을이라고 새긴 기념석이 공무원 장식으로 무게를 딱 잡고 있는데, 다리 건너 산자락 바로 밑에는 메밀꽃 필 무렵기념조각과 물레방앗간이 세워져 있다. 물레방앗간을 만들어놓은 것은 여지없이 이발소 그림풍의 발상이고, 이유없이 유방을 뾰족하게 드러낸 조각은 관광지 기념타월의 디자인 감각과 같은 과에 속한다. 무얼 어쩌자고 이렇게 유치한 기념비를 곳곳에 세워야 했을까? 그것은 대단한 시각공해였다.

 

기념조각공원에서 왼쪽으로 난 시멘트 농로를 따라 이효석 생가로 가는 길로 접어들었을 때 우리는 비로소 그의 문학공간에 들어선 분위기를 가질 수 있다. 개울을 따라 난 길을 가다보면 비탈을 일구어낸 밭에는 감자와 옥수수만 눈에 띄고, 산자락마다 낮은 슬레이트집들이 차지하고 있어서 여지없는 강원도 산골을 느끼게 된다.

 

강원도 산골에는 외딴집이 많다. 다른 지역은 들판과 내다보는 동산을 등에 지고 양지바른 쪽에 옹기종기 모여 있는 것이 보통이다. 그러나 강원도 산골에는 그런 들판이 없다. 방풍을 위한 등받이 동산을 따로 찾을 이유도 없다. 그래서 저마다 자기 밭 한쪽 켠에 집을 짓고 산다. 이효석의 생가도 외딴집이다. 벌써 오래 전부터 성씨도 다른 분이 살고 있는데, 마당 한쪽에 세워놓은 동그란 흰 대리석만이 이 집이 이효석의 생가임을 알려줄 뿐이다. 그가 뛰놀았을 뒷동산엔 사슴목장이 들어서 있다. 모든 것이 이효석의 분위기와 달라 낯설기만 하다. 생가의 뒤란을 돌아보니 무뚝뚝한 강원도 산자락만이 그 옛날과 같아 보였다.

 

이효석의 고향상실증

이효석은 이처럼 오붓한 고향마을을 갖고 있건만 정작 그 자신은 이상하게도 고향을 고향답게 간직하고 살지 못했다. 그의 수필 영서(嶺西)의 기억을 보면 이효석은 메밀꽃 필 무렵의 작가답지 않게 고독한 고향상실을 말하고 있다.

 

···눅진하고 친밀한 회포가 뼛속까지 푹 젖어들 여가가 없었던 것이다. 고향의 정경이 일상 때 마음에 떠오르는 법 없고 고향의 생각이 자별스럽게 마을을 눅여준 적도 드물었다. 그러므로 고향 없는 이방인 같은 느낌이 때때로 서글프게 뼈를 에이는 적이 있었다.

 

이 점은 이효석에 대한 나의 큰 의문점이었는데, 나는 이상옥 교수가 쓴 이효석-문학과 생애(민음사, 1992)를 읽고 나서 그 까닭을 알 수 있었고, 그의 작가상과 인간상도 내 나름으로 잡아낼 수 있었다.

이효석은 5살 때 어머니를 여의고 계모 밑에서 자라게 되는데 계모는 효석을 별로 사랑하지 않아 심지어는 그의 결혼식에도 오지 않을 정도였다. 그래서 소학교는 집에서 백리 떨어진 평창읍내 평창국민학교를 다니고 그 어린 나이에 하숙생활을 했던 것이다. 나의 아내가 평창국민학교 출신임을 자랑하는 계기가 거기에 있지만 그것이 효석으로서는 고향을 가슴속으로 아름답게 간직하지 못한 이유였던 것이다.

그리고 성장해서는 줄곧 외지에서 살며 고향에 정붙일 일이 없었던 것이다.

 

이효석 소설에 대한 의문점

별다른 문학적 경험 없이 교과서에서 메밀꽃 필 무렵을 읽고 배운 사람에게 이효석이라는 작가상은 우리 현대문학사상 빼어난 시정과 맑은 문체, 짙은 한국적 서정과 세련된 지성의 문인으로서 깊이 인상지어져 있을 것이다. 특히나 문학 소년 소녀 취미에 빠져 있는 사람들이라면 가장 사랑스러운 작가의 한 사람으로 서슴없이 꼽을 것이다. 나 역시 그런 시절이 있었다.

 

그러나 우리 근대미술의 전개양상을 근대문학과 맞물려 이해해 보기 위하여 이효석의 초기 이른바 동반작가시절 좌파 경향성 작품의 대표작으로 지목되는 도시와 유령」「노령근해를 읽고는 저으기 실망스럽지 않을 수 없었다. 세상에 그런 관념적 이상의 모순과 횡포가 어떻게 가능했고 그게 무슨 소설인가 싶다. 그는 좌파의 이데올로기에 현실을 꿰어맞추기 급급하였다. 그래서 조동일 교수는 한국문학통사에서 도시와 유령의 상황설정이 어긋나는 것이 차라리 유령스럽다고까지 악평을 내렸다.

 

70여 편에 달하는 그의 단편을 내가 성심으로 읽을 열정은 없었지만 그의 소설로 높이 평가받을 만한 작품은 오직 메밀꽃 필 무렵하나 뿐이었고 그것은 이효석의 작품세계에서 예외 중의 예외였다는 인상을 버릴 수 없었다.

 

나는 그것을 또 이상하게 생각해 왔다. 이 궁금증을 풀기 위하여 문학사와 문학비평의 전문가들 견해를 점검해보니 김현·김윤식 공저의 한국문학사에서는 이효석이 아예 한 시대의 소설가로서 언급조차 되지 않고 있다는 사실을 알았다. 그 이유와 관련해서 김윤식 교수는, 한국근대문학사상비판(일지사, 1978)에서 [병적 미의식의 양상-이효석의 경우]를 논하면서 이효석 문학의 특징과 취약점을 자세하게 분석하고 그가 소설가로서 뚜렷한 장르의식이 결여되었다는 날카로운 비판을 가하면서 이효석이 문학가로 평가받을 부분은 소설이 아니라 산문, 수필이라는 매우 설득력있는 해석을 내리고 있었다.

 

그러나 어느 문학사가, 어느 문학평론가도 나의 의문에 답해주지 않는 문제가 하나 있었다. 그것은 고향에 대한 깊은 상실감에 젖어 있었던 이효석, 관념적 좌파문학에서 탐미주의로 빠진 흔적이 농후한 이효석이 어떻게 메밀꽃 필 무렵같은 짙은 향토적 서정의 세계를 그토록 아름답게 그려낼 수 있었는가이다. 칠피단화에 나비형상의 장식을 붙인 멋쟁이 차림에, 경기고에 서울대에 영문과를 나온 엘리뜨의식에, 커피는 모카와 퍼콜레이터를 찾아 마시고, 피아노는 쇼팽을 치고, 여자 좋아하기를 군것질하듯 했으며 이국취향의 동경에서 모더니즘적 세련을 추구하던 이효석이었다. 그가 단지 안똔 체홉이나 캐서린 맨스필드의 소설을 좋아했다는 이유만으로 이런 명작을 쓸 수 있었단 말인가.

 

나는 그저 물을 뿐이다. 그 물음이 반복되는 가운데 어렴풋이 떠오르는 추측은 하나 있다. 이효석이 메밀꽃 필 무렵을 쓴 것은 1936, 30세 때의 일이다. 서울을 떠나 부인의 고향인 함경도 경성에서 교사를 하면서 잃어버린 고향을 찾은 듯한 평온 속에 살다가 평양 창전리에 푸른 집을 짓고, 숭실전문학교 교수를 지내고 있던 시절이었다. 문학적으로는 관념적 좌파를 벗어나려고 안간힘을 쓰면서 자신의 노령근해단편집을 생각만 하여도 그 치편(稚篇)에 찬 땀이 난다는 준엄한 자기비판을 가하던 시절이다.

 

대개 현실에 뿌리를 두지 못하고 관념으로 무장한 이데올로기는 경직되고 과격하게 마련이다. 그 경직성과 관념적 과격성이 치기였다는 것을 자각한 이효석이 갈 곳은 어디였을까? 하나의 목표를 향해 치닫던 사람이 그 목표와 이상을 회의하여 잃게 되면 돌아갈 곳이 어디였을까? 이런 상황에서 갈 수 있는 곳은 오직 하나, 꾸밈없는 자기 본연의 자리로 원위치 하는 수밖에 없는 것이다. 그리하여 이효석은 일단 자연과 고향과 현실로 되돌아온 것이었다. 바로 그때 그는 메밀꽃 필 무렵을 쓴 것이다. 그리고 나서 그가 어디로 갔는가는 그 다음 문제이다. 메밀꽃 필 무렵의 끝마무리를 기묘한 인연으로 돌린 데에서 어느 정도 감지되듯이 그는 탐미주의로 빠지고 말았던 것이다.

 

이효석의 아름다운 산문

이효석의 소설은 그런 문제점이 있었다 치더라도 그의 산문과 수필은 동시대 누구도 따를 수 없는 아름다운 문체로 우리를 충분히 매료시킨다. 낙엽을 태우며」「청포도 사상같은 수필을 보면 내가 그 내용과 사상까지 동의하는 바는 아니지만 우리말을 그토록 아름답고 정겹게 구사하면서 이지적 사색과 따뜻한 감상을 절묘하게 조화시킨 언어구사력에 취하지 않을 수 없다. 그의 문장에 흐르는 보드라운 율동과 시적 정제성은 마치 동양화에서 뛰어난 필력과 능숙한 번지기 수법을 갖고 있던 한 필묵(筆墨)의 달인을 연상케 되는데 1930년대 우리 화단에는 그런 화가가 없었다. 그것은 이효석이 내게 가르쳐준 형식의 힘과 프로의 미덕이었다. 그래서 나는 이효석의 문학적 동지이자 곁에서 보기에도 시샘이 날 정도로 절친했던 벗인 유진오가 이효석이 불과 36세의 나이에 결핵성뇌막염으로 죽어간다는 기별을 받고 평양으로 달려가 그 임종을 보면서 회상한, 그의 소설 신경(新京)첫머리 이야기에 나오는 애정어린 이효석론을 액면 그대로 접수한다.

그의 투명한 머리, 섬세한 감정, 높은 교양, 그리고 그 모든 것이 빚어내는 이슬같이 맑고 아름다운 글. 지금 욱(효석)을 잃는 것은 조선의 문학을 위해 다시 얻을 수 없는 고귀한 고완품(古翫品)을 잃는 것이나 다름없었다.

 

팔석정과 봉산서재

평창 봉평땅의 인문적 가치를 드높여 준 이효석의 문학적 업적을 기릴 요량이었다면, 그 잡스러운 동상과 기념비를 세울 예산으로 이효석의 생가를 복원하고 거기에 눅진히 앉아 그를 기릴 작은 정자와 메밀이나 심어두었다면 우리의 답사길은 얼마나 포근했을까 생각해본다. 그런 편의와 그런 알찬 문화를 갖지 못한 우리는 봉평에 온 기분을 딴 데서라도 풀어야 한다.

 

봉평마을을 들어가는 길에는 그럴 만한 유적이 있다. 그것은 봉산서재(蓬山書齋)와 판관대(判官垈) 그리고 팔석정(八石亭)이다. 장평에서 봉평 쪽으로 들어가다 보면 바로 길가에 판관대라는 기념비가 서 있는 것이 보인다. 돌받침에 까만 오석의 비를 세우고 지붕돌을 자연석으로 모자 씌우듯 했는데, 이것은 소풍휴게소의 가산 이효석비’, 남안교의 시범 문화마을기념비와 똑같은 형식이어서 훗날 평창양식이라고 부를 일인지도 모르겠다.

 

판관대는 신사임당의 율곡 이이 잉태지이다. 당시 수운판관(水運判官)을 지내고 있던 율곡의 아버지 이원수(李元秀)가 말미를 얻어 이곳 백옥포리(白玉浦里)에 거주하고 있던 아내 신사임당을 보러 왔다가 그날 밤 율곡을 잉태하게 되는 용꿈을 꾸었던 자리이다. 사임당은 그해(1536) 강릉 오죽헌으로 가서 1226일에 율곡을 낳았다. 그 집터가 곧 판관대이다. 그뒤 이 얘기는 궁중에까지 알려져 현종 3(1662)에 사방 10리의 사패지(賜牌地)와 영정(影幀)을 내려주고 봄·가을로 제향케 했는데, 1906년에는 고을 유생들이 평촌리 덕봉산턱에 서재를 건립한 것이 봉산서재이다.

 

봉산서재의 건물이야 볼품이 있을 리 만무하지만 울창한 솔밭에 높직이 올라앉아 거기에서 들판을 질러가는 청강(淸江)의 유유한 흐름과 봉평사람들의 오가는 모습을 내려다보는 것은 피로한 여로의 군것질정도는 된다.

 

사실 길게 쉴 요량이면 팔석정 쪽이 낫다. 팔석정은 조선시대 명필 봉래(蓬萊) 양사언(楊士彦)이 강릉부사로 부임하는 길에 들러 이곳 천변의 풍경이 좋아 8일간 머물렀던 곳으로 훗날 이를 기념하여 팔일정(八日亭)을 지었던 곳이라고 한다. 바위에는 양봉래가 썼다는 석실한수(石室閑睡), 석대투소(石臺投笑), 봉래(蓬萊), 영주(瀛洲) 등 여덟 글자가 새겨 있는데 글씨는 제법 단정히 새겨져 있으나 양봉래의 웅혼한 초서체와는 거리가 멀다.

 

팔석정은 길가에서 보아서는 짐작도 되지 않을 만큼 푹 꺼진 천변에 준수한 바위와 소나무가 함께 어울리는 작은 명승지이다. 나는 한겨울 얼음이 얼고 찾아오는 이 없을 때 아내와 함께 이 수려한 경관을 단둘이 흠씬 즐긴 적이 있어 그때의 추억으로 다시 찾았더니 여름에는 입장료까지 받는 이 일대의 대단한 휴양지인지라 발도 못 붙이고 지나갔다. 팔석정의 정자자리는 지금 매운탕집 앞마당이 되고 만 것을 보고 명소를 명소답게 유지하지 못하는 그 얕은 안목들이 안타깝기만 했다. 그로 인해 우리는 이율곡과 양봉래를 오래 만날 수 있는 계기를 잃어버린 것이다.

 

산은 강을 넘지 못하고

정선아리랑의 고향, 아우라지강을 찾아가는 길에 이효석의 문학공간을 지난다는 것은 적지 않은 생각거리를 안겨주는 풍요로운 만남이다. 향토적 서정이 모더니즘의 세례를 받았을 때 이효석의 문체가 됐다면, 그런 근대적 세련을 스스로 이룩했을 때는 어떤 모습일 것이며, 프로의 도움 없이, 프로의 손을 거치지 않고 만들어진 문학과 예술의 원형질이란 어떤 것인가를 생각하며 그 서막으로 이효석을 생각게 한다는 것이 기묘한 인연이다.

 

이효석 문학공간을 답사하고 아우라지로 들어가는 길은 이제 굳이 평창을 거쳐 정선으로 들어가기를 고집해 본들 비행기재로 넘는 길이 끊어진 마당에는 큰 의미가 없는 것이다. 장평에서 다시 영동고속도로로 들어가 계속 타고 내려가다가 하진부에서 꺾어들어서면 정선군 나전리까지 장장 100리의 천변로를 타게 된다. 오대산 월정사에서 만났던 그 오대천 여울이 진부에 이르면서 제법 큰 내를 이루어 좌우로 12, 3백미터의 위용을 자랑하는 박지산, 잠두산, 갈미봉, 가리왕산, 오두치를 헤집고 나아가며 긴 협곡을 이룬다. 본래 길이란 강을 따라 생겼고, 또 강을 끼고 달릴 때가 가장 아름답다. 구례에서 하동까지 섬진강을 끼고 도는 길, 상주 낙동에서 선산에 이르는 낙동강변의 정감어린 강마을길, 경부선 기차를 타면 만나는 삼랑진에서 물금까지 이어지는 장대한 낙동강변의 철길, 원주 법천사지에서 충주 탄금대에 이르는 남한강변의 고즈넉한 시골길, 누구든 한 번쯤 가 보았을 경춘가도와 팔당에서 양평에 이르는 환상의 드라이브 코스.

 

그러나 하진부에서 나전에 이르는 협곡은 그런 강변길이 펼쳐주는 장쾌한 넓이가 없다. 마치 고개 숙이고 굴속으로 들어가듯이 산허리를 헤집고 나아가기 바쁘다. 찻길은 자로 돌다가 다시 자로 꺾어지면서 눈앞엔 언제나 거대한 산을 마주하고 달려야 한다. 기암절벽과 반석이 곳곳에 자리하며 비경을 이루고 솔밭과 외딴집들이 점점이 이어지며 인적의 체취를 느끼게도 하지만 오대천 깊은 여울을 끝없이 따라가는 형상이란 마치 자연의 모태 속으로 회귀하는 강한 흡입력을 연상케 된다. 어느새 나는 자연의 원형질로 원위치하고 있는 것이다.

 

왼쪽에 두고 온 오대천 여울이 점점 넓어지면서 나전교 다리를 건너면 냇물은 저쪽 아우라지에서 흘러온 조양강과 만나 정선읍내로 향해 힘차게 뻗어가고 우리는 그 강을 거슬러 여량땅 아우라지로 향하게 된다. 시퍼런 조양강 물줄기 위쪽으로는 구절리에서 증산을 잇는 정선선 외길철도가 우리의 찻길과 앞서거니뒤서거니 다투어 달린다. 어쩌다 객차 두 개를 붙인 기차와 만나기라도 한다면, 바로 그때 갈라진 대금소리 같은 기적이라도 들려준다면 우리는 이 아름다운 강마을에 서린 긴 역사와 한의 내력을 여운으로 잡을 수 있을 것이다.

 

여량땅 아우라지강가의 옥산장 여관에 짐을 풀고 사위를 살피니 강원도 땅치고는 제법 너른 들판이건만 그저 보이는 것이 산뿐이다. 산을 넘고, 비집고, 산속으로 들어왔으니 하늘과 맞닿은 산 이외에 무엇이 있겠는가. 어떤 수식도 치장도 없는 순수한 원형질의 산, 천고의 순수를 간직한 산이다.

 

이것은 나만이 갖고 있는 별스러운 감정이 아니었다. 지난 늦가을 내가 답사회원들과 여량에 간다는 사실을 알고 거기로 마중 나와 함께 합류한 태백시 황지의 화가 황재형이 우리 회원들에게 보낸 첫인사말이 꼭 그러했다. 그는 서툰 말솜씨로, 그러나 단호하고 자랑스런 어조로 이렇게 말했다.

 

 

여러분, 먼 길을 오시느라 고생 많았습니다. 그런데 여기서는 보여드릴 것이라고는 산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저 무표정한 산들을 잘 보고 가십시오. 설악산 같은 절묘한 구성도 없고, 남도의 능선처럼 포근히 안기는 느린 곡선도 없습니다. 오직 직선과 사선만 있습니다. 그러나 그게 산의 정직성이고 강원도 태백산 자락의 진국입니다. 맛있게 요리된 반찬이 아니고 밭에서 금방 뽑아낸 싱싱한 무 같은 것입니다.

 

그래서 영서지방 사람들이 갖고 있는 산의 개념은 아주 다르다. 우리는 보통 들판에 높이 솟아 있는 것이 산인 줄로 아는데 정선·평창 사람들은 산을 오히려 들판 같은 개념으로 삼고 그 비탈을 갈아 감자와 옥수수를 심고 살아왔다. 마치 서해안 어촌사람들이 갯벌을 밭으로 삼고, 제주도 어부들이 바다를 밭이라 부르듯이.

 

아우라지에서 정선에 이르는 산과 강은 국토의 오장육부가 아니고서는 세상천지 어디에서도 볼 수 없는 유장한 아름다움과 처연한 감상의 집합체이다. 그래서 고은 선생은 평창에서 비행기재를 넘어 비봉산 고갯마루에서 멀리 정선읍내를 바라볼 때 찾아온 감정은 뭐라고 말할 수 없는 도달감과 단절감이었다고 술회하였다. 나는 그때 고은 선생은 강을 넘어가지 못하는 산의 숙명을 본 것이라고 생각하고 있다.

 

사람들은 산자분수령(山自分水嶺)이라는 말에 익숙하여 산은 스스로 분수령이 된다며 산은 물을 가르고 물은 산을 넘지 못한다는 사실을 곧잘 말한다. 그러나 비록 산이 있어 물이 흐르고 물이 모여 강을 이루었지만 산은 절대로 강을 넘지 못함을 생각지 않는다. 오직 강이 있기에 그 산들은 여기서 저기로 떨어져 있을 뿐이다. 강이 아니라면 산은 여지없이 연이어 달렸으리라.

 

나는 여량땅 아우라지 강가에 서서 낙엽송 군락들이 줄지어 정상을 향해 달리는 저마다 다른 표정의 높고 낮은 산봉우리들이 수수만년을 저렇게 마주보면서 단 한 번도 만날 수 없음은 바로 그 자신들로 인하여 이루어진 강을 넘지 못함 때문이라는 무서운 역설(逆說)의 논리를 배우게 되었다. 한 시대를 이끌어가는 각 분야의 어떠한 거봉(巨峰)들도 결국은 역사라는 흐름, 민의(民意)라는 대세를 넘지 못하고 어느 자리엔가 멈출 수밖에 없는 지식인의 한계, 인간의 숙명 같은 것을 보았다.


유홍준. 영남대학교 미술대학 교수로 재직 중이며 저서로는 80년대 미술의 현장과 작가들, 미학에세이, 회화의 역사,나의 문화 유산 답사기 1, 2등이 있다.

 

 

개인별 탐구 과제

1. 필자는 쌀시장 개방의 의미를 어떻게 보고 있는가?

2. 필자가 말하고 있는 현재의 농촌 현실은 어떠한가?

3. 필자는 왜 아우라지 강을 함부로 가지 못하는 답사처라고 했는가?

4. 강원도의 참모습은 어떤 것들이며 일반인들이 오해하고 있는 것은 무엇인가?

5. 필자가 강원도를 국토의 오장육부에 비유한 근거는 무엇인가?

6. “모르고 볼 때는 내 인생과 별 인연 없는 남의 땅이지만 알고 보면 우리의 땅 으로 가슴깊이 다가온다.”는 말의 의미를 봉평땅과 관련된 필자의 경험을 바탕 으로 구체화 해보자.

7. 이효석 동상과 메밀꽃 필 무렵 기념 조각이 왜 대단한 시각공해가 되었을 까?

8. 이효석의 고향 상실증을 필자는 어떻게 해석하고 있는가?

9. 이효석은 자신의 단편집 노령근해생각만하여도 그 치편에 찬 땀이 난 다는 비판을 했는데, 그 비판의 근거는 무엇이며 이 후에 이효석이 관심을 가 진 것은 무엇이라고 했는가?

10. 소위 평창양식이란 어떤 것이며 여기에 대한 필자의 생각은 어떠한가?

11. ‘산은 강을 넘지 못한다는 말의 의미는 무엇이며, 이 말로 미루어 알 수 있 는 인간사는 무엇일라고 했는가?

 

 

 

모둠별 토의 과제

1. 필자가 문화유산을 대하는 태도는 어떠한지 정리해 보자. 아울러 답사 여행의 자세에 대해서도 토의를 하고 바람직한 것이 무엇인지 정리해 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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