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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시대의 선비정신 - 배종렬

by 처사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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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시대의 선비정신

배종렬

 

 

.머리말

 

조선 시대를 이끌어간 역사의 주역은 선비라고 할 수 있다. 국왕에서 천민에 이르기까지 이들 선비들의 영향을 받지 않은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이들이 때로는 치자(治者)의 입장에서 때로는 교화자(敎化者)의 입장에서 500년 역사에서 이룩한 정신적 유산을 현재를 살아가는 우리들에게 물려주고 있다. 그러나 많은 경우에 선비문화와 선비정신은 부정적으로 평가되고 있는 듯하다. 선비문화와 선비정신을 대변해야 할 조선 시대의 선비들은 남아 있지도 않고, 그들을 계승하고 있는 소수의 후예들마저도 급변하는 오늘날 상황에 의해 선비정신을 대변할 힘을 잃고 있다.

 

긍정적이든 부정적이든 선비정신은 현재의 우리들에게 많은 영향을 끼치고 있는 이상 이들 선비의 실체는 무엇이고, 그 유산은 무엇인지에 대한 검토가 필요하다. 선비정신에 대한 연구검토가 결국 한국인의 의식구조, 사회적 성격을 밝힐 수 있는 토대가 될 수 있을 것이다.

 

.선비의 개념

 

1. 선비의 연원과 성립 과정

순수한 우리말 선비를 가르키는 한자어는 ()’()’의 두 글자가 있다. 먼저 에 대해서 漢書에 보면 士農工商四民은 각각 업()이 있으니 학문을 익혀서 벼슬()에 있는 것을 라 하고----”, 최세진의 훈몽자회서는 조정에서 벼슬하는 자 뿐만 아니라 선현의 도를 배워 벼슬할 준비를 갖추고 있는 사람도 라고 한다.”라고 나와 있는 것을 보면 의 의미는 조정에서 벼슬하는 사람, 벼슬을 희망하는 사람, 도를 배워서 익힌 사람(學道之人)을 나타내는 말임을 알 수 있다.

 

에 대해서 漢書에 보면 임금을 도와 음양의 순리에 따르며 교화를 밝히는 것으로, 육경(六經) 가운데 1경에 능통하고, 육예(六藝) 중에 1예에 능통하며 뜻은 仁義에 있고, 요순을 근본으로 준수하고 문왕(文王)과 무왕(武王)을 명법(明法)으로 삼는다.”라고 나와 있다. 훈몽자회에서는 유교의 도를 지키며 학문을 하는 사람으로 말하고 있다.

 

한자어인 를 순수한 우리말 선비라고 부르게 된 것은 훈민정은 창제 이후부터이고, 문헌 속에 최초로 등장한 것은 용비어천가이다. 그러나 우리들은 를 구분하지 않고 함께 같은 의미로 사용하고 있다.

 

그렇다면 선비라는 사람들이 언제부터 생겨났다고 볼 것인가? 신채호에 의하면 조선시대의 선비가 신라의 화랑 또는 그 이전의 상고 시대의 무사에까지 연결되고 있다고 한다. 선비는 고대 국가를 이끌어간 지배층으로서 충효정신이 강하고 우애, 협동, 상무(尙武)정신이 투철한 정치사회의 지도층이라 할 수 있다.

 

한반도에 유교가 들어오면서 선비의 인간상은 유교적인 것으로 서서히 변화하지만, 고대의 선비정신은 강인한 생명력을 가지면서 사회 전반에 뿌리를 내리게 된다. 그러나 선비정신이 국가사회의 지도 이념으로 자리잡게 된 것은 유학자의 공로이다. 유교적 정치 사상으로서 조선 사회를 이끌어 간 사대부는 고려 공민왕 이후부터 등장한다. 고려말 성균관이 중수되고 과거제도가 정비되면서 성균관을 중심으로 젊은 선비들은 주자학을 받아들이고, 고려 시대의 중심 이념인 불교를 배척하고, 유교 이념을 옹호하는 운동을 일으켰다. 이들의 학풍이 조선의 건국에 이념적 기반을 제공하게 되고, 조선 왕조를 통해 주자학이 정통 이념으로 정립되었다. 이들 사대부의 등장은 고려 시대의 향리층을 그 여원으로 하고 있다.

 

 

2. 선비의 생활과 유형

선비는 科擧(과거)를 중심으로 형성된 유학자들이다. 과거 제도가 어느 정도 개방성을 기준으로 하고 있다고 본다면 선비가 되는 것도 어느 정도 개방되어 있다고 볼 수 있다. 아무리 권문세가의 자제라고 해도 학문과 언행이 올바르지 못하면 선비로 인정받지 못하고, “선비는 농부에서 나온다(士出於農)”라고 하여 어떤 신분이든지 학문과 언행을 갖추면 선비로 인정되었다.

 

선비가 되기 위해서는 어떤 삶을 살아야 하는가 하는 점은 소학(小學)에 잘 나타나 있다. 소학은 유교의 가르침을 전하기에 가장 적절한 책이다. 소학에 나와 있는 선비의 삶의 과정은 크게 4단계로 나누어진다. 출생에서 9세까지의 제1단계에서는 주로 가정에서 생활에 필요한 예절 등 가장 초보적인 가르침이 이루어지는 시기이다. 10세부터 39세까지의 제 2단계에서는 학문을 연마하고 예()를 본격적으로 연마하는 시기이다. 40세에서 69세까지의 제3단계에서는 벼슬에 나아가 배운 것을 실천한다. 마지막 단계인 70세 이후에는 벼슬에서 물러나 권력이나 지위를 탐내지 않는 단계이다. 즉 선비는 청소년기에 독서와 학문 연구를 통해서 사물의 이치를 탐구하고, 천하의 사리를 밝게 아는 능력, 다시 말해서 지성을 쌓는데 매진하고, 장년이 되면 이러한 지성을 바탕으로 사군이충(事君以忠)하고, 정치 사회가 평안하도록 힘을 다해야 했다.

 

한편 논어(論語)의 위정편(爲政篇)은 공자 자신이 삶을 술회하는 내용을 담고 있는데, “열다섯에 학문에 뜻을 두고, 서른에 뜻을 세우고(而立), 마흔에 사물에 혹하지 않고(不惑), 쉰에 천명을 깨닫고(知天命), 예순에 사물을 들으면 저절로 알게 되고(耳順), 일흔에 마음이 원하는 바대로 하여도 법도를 넘지 않는다.”라고 되어 있다. 선비의 일생이 바로 이와 같아야 한다고 본 것이다. 소학이나 논어 모두 선비의 이상적인 삶을 그리고 있다고 보면 될 것이다.

 

선비의 인간형은 크게 두 가지로 구분할 수 있다. 첫째는 벼슬길에 나아가 있는 상층계급으로서의 선비이다. 士農工商이라 할 때 계급으로서의 선비()이다. 지배계급으로서의 선비는 벼슬하는 것을 바람직하게 생각하고 있는 사람들이다. 둘째는 학문을 닦고 덕을 쌓는 사람으로서의 선비이다. 이러한 의미의 선비는 지위의 높고 낮음에 상관없이 단지 학문을 숭상하고 덕을 쌓으면 누구나 선비가 되고, 벼슬은 할 수도 있고 하지 않을 수도 있다. 대체로 이들은 벼슬을 탐탐치 않게 받아들이고 초야에서 학문을 연구하고 제자를 가르치는데 매진한 선비들이다. 특히 조선 중기를 넘어서면 선비가 벼슬길에 나사는 것 자체가 이미 선비로서의 자격을 읽게 된다는데까지 생각이 미치고 있는데, 이는 당시의 사회 상황과 밀접한 관계가 있다.

 

 

. 선비의 가치관

 

1. 선비와 인륜

선비란 양반 계급에 포함되는 계급이다. 박지원의 양반전독서하는 사람을 선비()라고 하며, 정치에 종사하는 사람을 대부(大夫)라 하며, 도덕을 지닌 사람을 군자(君子)라 하고, 무반이 되면 서쪽에 열지어 서고, 문반이 되면 동쪽에 차례로 선다. 이것을 양반(兩班)이라 한다,”라고 한 데서 보듯이 특히 독서인(讀書人)을 선비라 했다. 그러나 선비가 양반과 밀접한 관계에 있으나 선비가 곧 양반이라는 도식으로 일치시킬 수는 없다. 신분의 고하나 계급을 초월하여 학덕을 갖춘 하나의 인격체로 보면 좋을 것이다.

 

이러한 선비가 배우고 실천해야 할 내용이 바로 명인륜(明人倫)이다. 성균관이나 향교에서 明倫堂(명륜당)’이라는 편액을 걸어 놓고 수업을 한 것을 보아도 인륜을 밝히는 것이 선비들의 교육목표이자 삶의 목표였다. 인륜을 밝힌다는 것은 곧 인간관계의 본질을 밝히는 것이다. 인간관계의 본질이 규명되면 그것에 알맞는 각자의 직분이 나타난다.

 

선비들에게 중심이 되는 인륜은 삼강오륜(三綱五倫)이다. 인간관계의 측면에서 본다면 三綱五倫 속에 포함이 된다. 삼강에 장유(長幼)붕우(朋友)를 더하면 오륜이 된다. 그런데 삼강은 상하의 종속적 관계를 강조하는 것이고, 오륜은 상호간의 쌍무적 관계를 강조하는데 중점을 두고 있다. 엄격한 상하관계에 기반을 두고 있는 조선 시대에는 삼강을 당연히 더 중요시했다. 그 결과 삼강행실도의 편찬과 간행이 이루어졌으며, 경국대전에는 삼강행실을 국문으로 번역하여 모든 국민에게 가르치고, 행실이 올바른 사람에게는 시상을 하도록 하고 있다.

 

삼강 중에서도 선비들은 신하로서의 자식으로서의 가 특히 중시되었다. 그리고 선비들에게는 와 함께 스승에 대한 제자의 직분이 강조되었다.

 

그리고 선비들이 처신하는데 있어서 예의염치(禮義廉恥)를 가장 소중하게 생각했다. 이 네가지를 사유(四維)라 한다. 선비의 행동거지는 다른 사람의 모범이 되어야 하므로 거동하면 반드시 예()를 생각하고, 어떤 일을 행하면 먼저 의()를 생각해야 했다. 그러므로 선비는 부귀를 위해 불의를 행해서는 안 된다. 유교이념의 수호자로서 선비는 이해(利害)와 의리가 상충될 때 의리를 지켰다. 의리를 소중히 지키고자 하지만 위난에 처하여 의리의 실천을 회피한다면 의리는 관념속에 머물고 만다. 의리의 명분이 생명보다 더욱 중시되고, 위급을 당하면 목숨을 바치고 이로움을 보면 의를 생각한다(士見危致命見利思義)는 정신이 결국 임진왜란과 병자호란 당시 선비들의 국난극복 정신과 연결된다. 한편 선비는 염치를 저버리면 그 나머지는 볼 것도 없다고 했으며, 정약용도 선비의 청렴은 여인의 정결(貞潔)과 같아서 한치의 오점이 있어도 평생 흠이 된다고 목민심서에서 말 할 정도로 중시했다.

 

2. 선비의 신분관

선비들은 대체로 문()을 숭상하고 ()를 천시했다. 무예를 통한 관직 진출의 경우 선비로서의 자격을 상실하고 있다고 보고 기피했다. 흔히 문무를 겸비한 경우를 높이 평가하는데, 이 경우도 무인으로서 학문을 겸비한 것이 아닌 문인으로서 무예를 겸비한 것을 높게 평가했다. 특히 유교가 통치 이념으로 자리잡은 조선 시대에는 더욱 강했다. 그러나 임진왜란 후 국방의 필요성 등으로 다소 무인을 우대하는 듯 했으나 오늘날까지도 문인 우위의 생각은 남아 있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조선시대 양인(良人)이 할 수 있는 일로 농상이 대표적이다. 국가정책이 농업에 우선을 두고 있었기 때문에 선비들이 농업에 종사하는 것은 에 종사하는 것보다 관대했다. “선비는 에서 나오고 과 함께 하지 않는다.(士出於農而工商不與焉)라고 하여 선비가 농업에 종사하는 것을 긍정적으로 보았다. 그러나 선비가 공업과 상업에 종사한다는 것은 결코 용납되지 않았다. 또한 공업상업에 종사하는 사람이 벼슬에 나가는 것은 법으로 금지했다.

 

선비들이 계속해서 농업공업상업에 종사하는 것을 회피하는 이유는, 한 번 종사하게 되면 농사꾼이나 평민의 취급을 받아서 그들과 다를 바 없는 신분으로 전락하는 것을 바라지 않기 때문이다. 따라서 선비들이 농상에 종사하지 않고 살아갈 수 있는 길은 부정한 방법에 의존할 수 밖에 없었던 점도 있다. 그러나 임진왜란 이후 신분 구조가 와해되고 하층 신분도 여러 가지 방법으로 신분상승이 가능해지게 되자 양반의 신분관도 다소 변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지금까지 이런 선비들의 잔재가 남아 있어 힘든 일을 싫어하는 원인이 되기도 한다.

 

. 맺는 말- 선비 정신의 평가

 

선비들이 갖고 있는 가치관이 오늘날의 시각에서 본다면 긍정적인 측면도 있을 것이고 반대로 부정적인 측면도 있을 것이다.

 

대체로 바람직하다고 여겨지는 것들은 크게 4가지로 나누어 볼 수 있다.

 

첫째, 선비의 긍정적인 측면은 그들의 몸가짐이다. 선비가 거동하면 반드시 예()를 생각하고, 어떤 일을 행동으로 옮길 때는 먼저 의()에 합당한지를 살폈다. 이덕무는 선비의 몸가짐을 말할 때 마음 밝히기를 거울과 같이 해야 하고 몸 규제하기를 먹줄과 같이 해야 한다.”고 한 점을 보아도 그들의 처신이 어떠한가를 알 수 있다.

 

둘째, 언론의 중요성이다. 언론을 이끌고 간 선비들은 조정에서 임금에게 직접 진언하거나 재야에서 상소의 형식으로 간언하여 올바른 정치가 이루어지도록 하였다. 민주국가에서 역시 언론의 자유가 중요한 바탕이 됨은 물론이다.

 

셋째, 선비들의 학문 연구의 정신이다. 유학을 중심으로 수많은 서적과 문집을 간행하여 학문 발달을 도모하였다. 특히 15세기-16세기에 이르러 국내에서 성리학 연구가 절정에 달하여 이황, 이율곡 등과 같은 대학자를 배출하였다. 한편 18세기에 실학의 운동이 나타나고, 오늘날 우리의 근대적 사고의 원천을 여기에서 구하고 있지 않은가?

 

넷째는 국난 극복의 정신이다. 국가적 위기에 직면한 선비들이 의병을 일으켜 나라를 구하기 위해 앞장선 것은 개인의 평안보다 의()를 앞세웠기 때문에 가능했다.

 

 

한편 선비들의 유산 중에 부정적으로 평가받는 것도 없지 않다.

 

첫째, 그들의 신분 차별의 당위성이다. 대다수의 선비가 양반이고 보면 사농공상의 평등이 지켜질 리 없고 특히 노비들에 대해서는 재산으로 취급하여 매매까지 하였다.

 

둘째, 선비들이 학문에만 종사하고 농공상을 천하게 본 것은 결과적으로 산업 발전의 저하를 가져오고 문약(文弱)의 취약성을 가져왔다. 선비들의 사고는 현실성이 부족하고, 사회를 옳게 보려는 노력보다도 자기의 뜻한 바 신념대로 끌고 가려는 독단성이 강하였다. ()를 천시한 결과 외적의 침입에 효과적으로 대응하지 못한 것이다.

 

셋째, 선비들은 명분을 지나치게 내세우고 복고주의적 색채가 강하다. 한 번 벼슬에 종사했던 사람은 그 직책을 일생 동안 사용하거나, 조그만 회사에도 많은 중역이나 부장 등의 직책을 두는 것도 결국 헛된 이름과 직책만 좋아했던 잔재들이 아닌가 한다. 이와 함께 항상 고대의 학자나 정치가를 숭상하여 요순을 운운하는 것은 행복이나 번영의 표본을 장래나 새 세계에서 찾는 것이 아니라 과거에다 기준을 두고 있기 때문이다. 아마도 이것은 학문이 유학 일변도의 타성에 젖어 있기 때문이 아닌가 한다.

 

오늘날에 있어서 우리들의 정신의 근원을 선비정신에 두고 나름대로 계승하고 발전시켜서 현재의 지표로 삼는 것은 뜻있는 일이다. 신세대가 구세대를 완전히 부정한다면 설 자리를 잃게 된다. 선비정신이 우리들에게 무엇을 시사하고 있는 것인가를 살펴보는 것은 가치관의 혼란 속에 살고 있는 우리들에게 많은 교훈을 줄 것으로 생각한다.


 

배종렬. 경북대학교 사회학과를 졸업하고, 같은 학교 대학원에서 박사과정을 수료했으며, 현재 정동고등학교에서 일반사회를 가르치고 있다. 가족과 사회, 부모와 자녀 관계 등에 관심을 가지고 공부를 계속하고 있다.


개인별 탐구 과제

1. 이 글을 쓴 의도가 무엇인지 파악해 보자.

2. 선비란 어떤 사람인지 간단하게 요약하여 정리해 보자.

3. 글쓴이는 선비늬 삶의 과정을 4단계로 나눈다고 했다. 각 단계의 특징을 정리 해 보자.

4. 필자는 조선 중기를 넘어서면 선비가 벼슬길에 나서는 것 자체가 이미 선비 로서의 자격을 잃게 된다는 데까지 생각이 미치고 있다고 하면서 그 이유로 당시의 시대상황을 들고 있다. 역사 시간에 배운 것을 떠올려 당시 조선후기 의 시대상황을 구체적으로 말해 보자.

5. 삼강과 오륜을 우리말로 적어 보고 다음 설명에 대해 구체적으로 해설을 해 보자.

 

삼강은 상하의 종속적 관계를 강조하는 것이고, 오륜은 상호간의 쌍무적 관계를 강주하는데 중점을 두고 있다. 엄격한 상하관계에 기반을 두고 있는 조선 시대에는 삼강을 당연히 더 중요시했다. ”

 

6. 필자는 오늘날까지 문인 우위의 생각이 남아 있다고 했는데, 어떤 경우에 남 아 있는지 구체적으로 말해 보자.

 

모둠별 토의 과제

1. 선비정신의 긍정적, 부정적 측면을 고려하여 다음을 구체화시켜 보자.

 

오늘날에 있어서 우리들의 정신의 근원을 선비정신에 두고 나름대로 계승하고 발전시켜서 현재의 지표로 삼는 것은 뜻있는 일이다. 신세대가 구세대를 완전히 부정한다면 설 자리를 잃게 된다. 선비정신이 우리들에게 무엇을 시사하고 있는 것인가를 살펴보는 것은 가치관의 혼란 속에 살고 있는 우리들에게 많은 교훈을 줄 것으로 생각한다.”

 

2. 선비의 두가지 인간형(벼슬길에 나간 상층계층과 학문과 덕을 숭상하는 선비) 중 어느 쪽이 바람직한지 오늘날의 사회상과 관련하여 토의해 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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