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패러디를 통한 시창작 교육 - 유영희

by 처사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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패러디를 통한 시창작 교육

유영희

 

 

1.문제 제기

 

내가 단추를 눌러 주기 전에는/ 그는 다만/ 하나의 라디오에 지나지 않았다.// 내가 그의 단추를 눌러 주었을 때/ 그는 나에게로 와서/ 전파가 되었다.// 내가 그의 단추를 눌러 준 것처럼/ 누가 와서 나의 / 굳어버린 핏줄기와 황량한 가슴 속 버턴을 눌러 다오./ 그에게로 가서 나도 / 그의 전파가 되고 싶다.// 우리들은 모두/ 사랑이 되고 싶다./ 끄고 싶을 때 끄고 켜고 싶을 때 켤 수 있는/ 라디오가 되고 싶다.

(장정일, 라디오 같이 사랑을 끄고 켤 수 있다면-김춘수의 을 변주하여)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 주기 전에는/ 그는 다만/ 하나의 몸짓에 지나지 않았다.//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 주었을 때/ 그는 나에게로 와서 꽃이 되었다.//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 준 것처럼/ 나의 이 빛깔과 香氣에 알맞는/ 누가 나의 이름을 불러다오/ 그에게로 가서 나도/ 그의 꽃이 되고 싶다.//우리들은 모두/ 무엇이 되고 싶다./ 너는 나에게 나는 너에게/ 잊혀지지 않는 하나의 눈짓이 되고 싶다. (김춘수, )

 

문학이 음악이나 미술, 사진 등과 다른 점은 그것이 언어로 되어 있다는 점이다. 언어는 늘 변화한다. 그런데 변화는 아무 것도 없는 속에서는 일어나지 않는다. 그것은 늘 있음을 전제로 해서 일어난다. 그래서 언어는 재창조된다.

물론 음악이나 미술 등의 분야에서도 재창조가 이루어진다. 그러나 개별 작품들은 언어에 비해 휠씬 독립적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각각의 작품들은 작가나 유파 속에 집단을 이루어 존재할 수밖에 없다. 그림의 부분부분과 질료는 그런 것들을 벗어나 따로따로 존재할 수 없기 때문이다.

 

조각조각 나누어 보면 언어는 모두 일상 생활이나 기존의 텍스트 속에 녹아 있다. 그리고 그 각각이 나름대로의 독특한 기능을 담당하고 있기도 하다. 이러한 언어적 특성을 작가의 경우에 한정시켜 살펴보면, 한 작가는 그만의 독특한 문체를 가지고 있음을 발견하게 된다. 그리하여 그것은 일종의 경향을 이루게 되고, 때로는 문단 전체에 막강한 영향력을 행사하는 권위를 부여받아 일군의 세력을 형성하기도 한다.

 

그런데 그 독특한 문체라는 것도 내면을 주의깊게 들여다 보면 모두 우리가 사용하는 언어의 조합임을 알 수 있다. 다만 어떤 어휘들을 즐겨 사용하고, 어떤 통사적 구조를 선호하는가가 문제의 외면적인 성격을 규정할 뿐인 것이다.

그렇다면 어떤 작가의 독특한 문체가 다른 작가의 작품 속에서도 드러날 때, 그것을 어떻게 인식해야 할 것인가. 지금까지는 이에 대해 상호 텍스트성(간텍스트성)이라는 개념을 사용하여 왔다. 한 텍스트는 전 텍스트의 영향을 받을 수밖에 없고, 그래서 그 텍스트에는 이전 텍스트들의 흔적이 곳곳에서 감지된다는 것이다. 그러나 상호 텍스트성은 다분히 우연적이고 비의도적인 측면이 강하다. 그것은 문화의 일반적인 속성에 의거하며 필연적으로 그렇게 될 수밖에 없음을 피력한다. 그러므로 상호텍스트성이라는 개념은 창작자의 의도가 개입된 모방 단계에 이르러서는 그 영향력을 잃어버리고 만다.

 

이제 위의 두 시를 살펴보자. 장정일의 시는 작가가 밝히고 있듯이, 김춘수의 <>을 변주한 작품이다. ‘변주라는 용어가 주는 낯설음은 그것이 주로 음악에 사용되어 온 개념이기 때문이다. ‘변주의 사전적 의미는 어떤 주제를 바탕으로 하여 리듬, 가락 따위를 바꾸고 꾸며서 연주하는 일이다.

 

장정일의 시를 살펴보면 리듬이나 가락, 즉 시의 형식적인 측면은 거의 김춘수의 작품과 동일하다. 오히려 주제, 즉 내용의 측면에서 새로운 것으로 바꾸고 꾸미는 일을 하고 있다. 물론 형식과 내용이 어우러져 하나의 작품을 이루고 그것이 문학으로, 음악으로 장르를 형성해 간다는 측면에서는 동일한 인식에 기초해 있다고 할 수 있다.

 

그런데 작가가 교과서에도 나오는 익히 알고 있는 시를 바꾸어서 새로운 시로 쓴 까닭은 무엇일까? 아이러니하게도 그것은 이미 김춘수의 시가 널리 알려져 있다는 사실과 관련을 맺고 있다. 시조의 경우, 우리는 그것이 지니고 있는 형식적 자질 및 내용적 특성에 대해 잘 알고 있다. 그래서 시조나 한 수 지어보게.” 하고 누군가가 권한다면 그 말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그 사람이 어떤 형식의 것을 원하는지 곧 인지하게 된다. 만약 그 사람의 말을 거절할 의사가 없다면 그 형식적 자질을 망가뜨리지 않는 범위 내에서 일정한 내용을 담아 그가 요구하는 형식의 것을 제시하게 된다. 마찬가지로 김춘수의 시는 대분의 독자들에게 이미 어떤 형태로든 인지되어 있다. 그러므로 변주를 한다면 가장 효과적으로 그 의도를 드러낼 수 있는 작품이 되는 것이다.

 

이 글에서는 장정일의 시에 드러나는 것과 같은 기법을 패러디로 범주화하고 그것의 개념과 의의를 살펴보고자 한다. 그리고 그것이 작가에게는 독자로서의 시쓰기 행위이며 독자에게는 작가의 비평 의식과 창작 의식의 일면을 엿보게 하는 텍스트 기능을 담당한다는 측면에서 검토해 보고자 한다.

 

 

2.표절, 모방, 그리고 패러디

표절이나 모방에 대한 논란은 예술사 곳곳에서 발견된다. 특히, 미술 분야에서 표절에 대한 시비는 위조 문제와 관련을 맺으면서 끊임없이 쟁점화되어 왔다. 미술에서의 위작의 역사는 미술사와 더불어 시작되었으며 그리스 시대의 미술가들은 팔리지 않는 동료나 제자의 작품에 자신의 서명을 기입하여 도와주었다는 위작 기록도 전해지고 있다. 사실, 그 당시에 그것은 사회성을 갖는 사실로서 문제가 되지 않았다. 그것이 사회성과 관련을 맺으면서 문제가 되기 시작한 것은 19세기의 일이다. 이는 고고학, 미학, 역사학, 등의 여러 학문들이 발전하기 시작하면서 예술에 대한 체계적인 정리가 가능해졌고, 귀족 중심의 문화가 서서히 깨어지기 시작한 때문인 것으로 추정된다.

 

문학의 경우에도 이미 기원전 7,8세기의 그리스에서부터 명작의 시구나 문체를 모방하는 표현기법들이 성행하였다고 한다. 문학사를 살펴보면 고대 로마 시대의 시인 베루길리우스를 비롯하여 제프리 초서, 윌리엄 셰익스피어, 존 드라이든, 존 밀턴, 새뮤얼 테일러 코울리지, 로렁스스턴과 같은 영국 작가들에 이르기까지 표절이나 도용의 혐의를 받지 않은 작가는 단 한 사람도 없다.

 

그러므로 이제 표절과 모방의 범주를 확실하게 규정할 필요가 있음을 느끼게 된다. 표절과 모방은 그야말로 아주 미묘한 차이를 가지고 있는 것이므로, 그것에 접근하는 시각에 따라 코에 걸면 코걸이 귀에 걸면 귀고리가 되고 말기 때문이다.

표절이 사회적인 문제로 대두되기 시작한 것은 ’90년대 초반의 일이다. 91년 대한민국 미술 대전의 서양화 부문 수상작과 관련된 미술 분야의 표절 논쟁과 92년 이인화의 소설 내가 누구인지 말할 수 있는 자는 누구인가에 대해 제기된 문학에서의 표절 논쟁이 그것이다.

 

여론에서 문제삼기 시작하여 평론가들 사이의 지상 논쟁으로까지 발전한 이번 표절 시비의 쟁점은 표절 여부와 작가의 윤리성에 대한 논란보다는 이 작품의 표절 여부에 대한 심사위원들의 공식적인 태도와 이들의 입장을 지지하는 평론가들이 근거로 제시하고 있는 미술사적 논거 자체의 합당성 여부에 놓여 있다고 볼 수 있다,

 

한 평론가의 올바른 지적처럼 이제 표절 문제는 윤리성과 관련된 문제가 아니라, 입장의 차이에 근거한 논쟁의 성격이 짙어지고 있다. 원작 텍스트를 전용한 어떤 작품이 표절시비의 대상이 되었을 때 비판론자는 이를 표절이나 도용으로 규정하지만 옹호론자는 이를 다른 개념으로, 인용이나 차용’, ‘패러디’, ‘패스티쉬((혼성모방)’ 등으로 규정되도록 진술한다. , 어떤 의미에서는 같은 행위로 볼 수 있는 것들을 의도의 차이에 따라 상이한 방식으로 규정하는 것이다.

 

작가의 의도는 표절에 대한 명백한 판단 기준이 되기 어렵다. 중요한 것은 그 작품의 전체적 맥락인 것이다. 이렇게 표절이나 도용의 혐의를 두는 데 미시적 측면보다는 거시적 측면이 고려되어야 하는 까닭은 문학 작품이 매개로 삼고 있는 언어의 특수성 때문이다. 언어는 시중에서 무수한 사람들이 사용한 다음에야 비로소 나의 손에 들어오는 화폐와 같아서 내가 사용하는 언어에는 항상 다른 사람들의 가치나 이데올로기가 침윤되어 있게 마련이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텍스트의 내용이나 형식적인 측면이 고려되지 말아야 한다는 의미는 아니다. 그것에 대해서도 엄밀한 판정을 내려야 할 뿐 아니라, 작품 자체의 문학적 완성도에 대한 평가도 함께 이루어져야 한다. ‘복사조립’, ‘베끼기’, ‘빌려오기등으로 규정되고 있는 예술 작품의 창작 방법에 대한 용인은 작품의 미적 수준과 일정한 관련을 맺을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그렇다면 이제 문제는 자연스럽게 예술 창작의 한 방법론으로 규정되고 있는 모방의 개념으로 넘어가게 된다. 모방은 단순히 견습 작가들이 창작 방법을 습득하는 과정에만 국한되지 않고, 더 나아가서는 고대인들이 이룩했던 예술적 탁월성을 성취하기 위한 방법이라는 관점에서도 큰 의미와 의의를 부여할 수 있는 행위이다. 이러한 관점에서 본다면 남의 작품을 모방하거나 흉내내는 것은 결점이나 약점이 아니라 오히려 미덕으로 간주되었을 뿐 결코 표절이나 도용으로 간주되지 않았음을 알 수 있다.

 

전통적인 미술에서 말하는 모방은 일상 경험의 대상이나 사건에 대한 충실한 복제인 단순 모방뿐 아니라 본질의 모방 또는 이념적인 것의 모방까지를 포함하는 광범위한 범주를 갖는다. 문학에서의 모방도 내용이나 형식적인 측면뿐만 아니라, 세계관이나 창작 방법과 관련된 포괄적인 것으로 규정되어 왔다.

 

오늘날 모방을 가정 적극적으로 수용하는 창작 방법은 패러디이다. 패러디는 모방의 한 형식이지만 항상 패러디된 작품을 희생시키는 것이 아닌 아이러닉한 전도에 의한 모방이다. 그러므로 근대적 패러디에는 오늘날의 예술을 정확하게 반영하기 위해 아이러닉하며 비판적인 차원에서의 거리감이 가미되어야 한다. 이를 통해 차이를 둔 반복으로서의 패러디는 비평적 거리를 확보하게 되는 것이다.

 

패러디는 당대의 문화적 조건과 여러 모로 결부되어 있다. 현대 예술에서 자아 반영의 양식에 대한 관심이 최근에 증대되고 있으며, 비평적 연구에서 텍스트의 상호 관련성이 강조된다는 측면에서 패러디는 주목받고 있는 것이다. 사실 패러디가 쟁점이 되고 있는 것도, 대중 문화의 홍수 속에 쏟아져 나오는 많은 작품들에 대한 가치 기준이 명확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리고 다양한 창작 방법을 인정하는 현대의 예술 풍토 때문이다. 그리고 다양한 창작 방법을 인정하는 현대의 예술 풍토 때문이기도 하다. 중요한 것은 이 모든 패러디 사가(historian)들이 문화적으로 세련이 되어서 패러디 작가들로 하여금 패러디 독자의 능력에 의존할 수 있게 해 주는 시대에 패러디가 번성했다는데 동의하는 것이다.

 

당대의 문화에 대한 문화적 믿음은 우리가 지각하고 사유하는 행동방식에 영향을 줄 뿐만 아니라, 우리의 정서적심리적 반응들을 조건지우고 수정한다. 우리의 근본적인 믿음들은 우리의 감각, 정서, 지각에 영향을 미치기 때문에 우리가 알고 있는 지식은 예술 작품에 대한 우리의 반응을 변화시킨다. 그러므로 이중적 기호화를 통해 아이러닉한 전언을 보내고 있는 패러디는 독자의 다양한 반응을 유도할 수 있다는 측면에서 긍정적인 창작 방법이라고 할 수 있다.

 

이제 패러디는 창작 방법으로서뿐 아니라, 창작의 추동력으로서 상정되어야 한다. 그것은 패러디가 작가의 의도와 관련된 단선적인 성격을 지니고 있는 것이 아니라, 독자, 관객, 청자 등의 모든 수용자와 전체적인 연관을 맺고 있는 다층적인 성격의 것이기 때문이다. (이하 생략)

(함께여는 국어교육, 1996년 봄. 전국국어교사모임)

 

 

농무(農舞)

신경림

 

징이 울린다. 막이 내렸다.

오동 나무에 전등이 매어달린 가설무대

구경군이 돌아가고 난 텅 빈 운동장

우리는 분()이 얼룩진 얼굴로

학교 앞 소줏집에 몰려 술을 마신다.

답답하고 고달프게 사는 것이 원통하다.

꽹과리를 앞장 세워 장거리로 나서면

따라붙어 악을 쓰는 건 조무래기들뿐

처녀애들은 기름집 담벽에 붙어 서서

철없이 킬킬 대는구나.

보름달이 밝아 어떤 녀석은

꺽정이처럼 울부짖고 또 어떤 녀석은

서림이처럼 해해대지만 이까짓

산구석에 처박혀 발버둥친들 무엇하랴

비료값도 안 나오는 농사 따위야

아예 여편네에게나 맡겨두고

쇠전을 거쳐 도수장 앞에 와 돌 때

우리는 점점 신명이 난다.

한 다리를 들고 날라리를 불거나

고갯짓을 하고 어개를 흔들거나

 

*꺽정이: 임꺽정, 조선 중종 때의 의적, 홍명희의 소설 임꺽정에서 인물로 형상화됨.

*서림: 임꺽정 도적굴의 유일한 선비로 지략을 제공해주나 나중에 배신한다.

*쇠전: 소를 팔고 사는 우시장

*도수장: 도살장

*날라리: 태평소의 속칭

 

 

개인별 탐구 과제

1. 김춘수의 시 과 이 시를 패러디한 장정일의 시를 읽고 난 뒤에 그 느낌이 어떻게 다른지 말해 보자.

2. 장정일 씨가 김춘수의 시를 변주한 까닭은 무엇이겠는가?

3. 이 글의 내용을 토대로 하여 표절, 모방, 패러디의 개념을 정리하고 서로간의 관계를 파악해 보자.

4. 글쓴이는 이제 표절 문제는 윤리성과 관련된 문제가 아니라, 입장의 차이에 근거한 논쟁의 성격이 짙어지고 있다.”고 했는데 이 말의 의미와 근거를 밝혀 보자.

5. 신경림 씨의 시 농무를 읽고 다음 물음에 답해 보자.

1) 시에서 말하는 이는 누구인가?

2) 우리는 누구의 이야기를 하고 있는가?

3) 우리들은 지금 무엇을 끝냈는가? 그것을 알 수 있는 부분은?

4) 그러면 그 상황을 정리해볼까?

5) 공연이 끝난 뒤 우리들은 무엇을 하는가?

6) ‘우리가 이러한 행동을 하면서 자신들의 삶에 대해서 어떻게 보고 있는 가? 긍정적으로 보고 있는가? 부정적으로 보고 있는가?

7) 그것을 알 수 있는 시구는?

8) 그런데 시의 마무리 부분에 가면 우리는 어떻게 되나?

9) 보통 신명난다고 하면, 그 신명은 즐거움, 흥겨움에서 오는 것인데 위에 서 자신들의 삶을 부정적으로 보면서 이렇게 신명나는 이유는 무엇일까?그 문제를 생각해보자.

9-1) 신명나기 전까지의 그들이 한 행동을 살펴보자. 어떤 것이 있나?

9-2) 이로 볼 때 여기에서 신명은 어떤 의미로 봐야 하겠는가?

10) 자 그럼, 이 시의 화자, 주체는 누구라 했나?

11) ‘가 아니고 우리라 한 이유는 무엇일까?

 

모둠별 토의 과제

1. 이 시는 1973년에 발표된 것이다. 오늘날의 농촌의 어떠한가? 이렇게 역설적 이나마 신명을 낼 수 있는 상황도 되지 못하고 있다. 왜 그런가, 생각해보자.

2. 이 시를 읽는 우리들은 이렇게 신명을 내 본 적이 있는지 이야기를 나누어 보자. 그리고 서로 주고 받은 이야기를 바탕으로 하여 신경림의 시 농무를 패러디한 작품을 써 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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