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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과 더불어 살아간 위대한 보통 사람 공자와 <논어> - 김교빈

by 처사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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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과 더불어 살아간 위대한 보통 사람 공자와 <논어>

 - 김교빈

 

 

공자가 제자들과 더불어 길을 가고 있었다. 도덕과 예의로 백성을 다스려야 한다고 설득했지만 부국강병의 논리가 아니라고 받아들여주지 않는 무도한 임금에 실망을 느끼고 나서 다시 자신의 뜻을 받아들여 줄 새로운 임금을 찾아가는 고단한 여행길이었다. 얼마를 가자 그들 일행 앞에 큰 강이 나타났다. 하지만 일행 가운데 나루터가 어디 있는지를 아는 사람이 아무도 없었다. 마침 저만치에 밭을 가는 두 사람이 보였다. 혼탁한 세상을 떠나 숨어 사는 장저와 걸닉이었다. 공자는 제자 가운데 자로를 불러 그들에게 가서 나루터 가는 길을 묻도록 했다. 자로가 두 사람에게 다가가서 나루터 가는 길이 어디냐고 묻자 장저가 되물었다.

 

"저기 수레에 올라 앉아 점잖게 고삐를 쥐고 있는 사람은 누구냐?"

자로가 대답했다. "공구이십니다."

"노나라의 공구란 말이냐?"

", 그렇습니다."

"그렇다면 그는 나루터 가는 길 쯤은 알고 있을텐데?"

 

말을 마친 장저는 더 이상 대꾸도 않고 부지런히 제 할 일만 했다. 답답해진 자로가 이번에는 걸닉에게 물었다. 그러자 걸닉도 자로에게 되물었다.

 

"나루터를 묻고 있는 너는 누구냐?"

"중유입니다."

"노나라 공구란 사람의 제자인가?"

", 그렇습니다."

"온 세상이 흐르는 물처럼 거세게 흘러가는데 누가 감히 고칠 수 있단 말이냐. 그러니 자네도 나쁜 사람이나 피해 다니는 그런 공자 같은 사람을 따라다니지 말고 차라리 어지러운 세상을 피해 사는 우리들과 같이 지내는게 어떠한가?"

 

말을 마친 걸닉도 더 이상 자로를 거들떠 보려 하지 않았다. 머쓱해진 자로가 하릴 없이 돌아와서는 공자에게 그들이 한 얘기를 아뢰었다. 말을 다 듣고 나서 공자가 탄식하면서 말했다.

 

"날짐승이나 길짐승과 더불어 살 수는 없지 않겠는가? 내가 세상 사람들과 더불어 살지 않는다면 누구와 더불어 살겠느냐. 온 세상에 질서가 잡혀 있다면 내가 구태여 바꾸려고 애쓰지도 않을 것이구나."

 

공자가 살던 춘추시대는 엄청난 혼란기였다. 그 혼란은 경제적 변화로부터 왔다. 당시 이미 주 산업인 농사에 소를 쓰기 시작했고 새롭게 발견된 쇠가 농기구로 등장했다. 거기에다가 비료를 만들어 쓰기 시작했고 관개시설이 훨씬 좋아져서 농토에 물을 대기가 쉬워졌다. 이러한 변화는 고도의 경제성장을 가져왔으며 아울러 농업, 공업, 상업의 분업을 활발하게 했다. 이같은 경제발전은 토지를 잠시 점유하고 이용한다는 생각에서 영원히 소유한다는 생각으로 나아가게 했다. 따라서 힘이 센 나라들은 더 많은 토지와 그 토지에서 일할 수 있는 더 많은 사람을 구하게 되었고, 이 욕심을 채울 수 있는 방법으로 전쟁을 택했다. 땅과 사람을 빼앗기 위한 전쟁이 계속해서 일어났다. 이러한 상황은 신분제를 비롯한 기존의 많은 제도를 무너뜨렸고, 그 결과 엄청난 혼란이 일어났다. 대부분의 군주들은 부국강병을 위한 온갖 정책을 동원하여 민중으로부터 가혹하게 세금을 거두어 들이면서, 그들을 전쟁터로 내 몰았다. 힘이 약한 나라는 금방 무너졌고, 신하들이 틈을 보아 제후를 쓰러뜨리고 땅을 나누어 갖기도 했다.

 

이처럼 마치 홍수가 나서 뻘건 흙물이 거세게 흘러가듯이, 도도하게 흐르는 춘추시대의 엄청난 사회경제적 변화와 여기서 생겨난 어마어마한 혼란을 보면서, 세상을 바로잡아야만 한다는 일념으로 살아간 위대한 보통 사람이 공자였다. 그는 살면서 당시 세상을 버리고 숨어살던 바로 장저와 걸닉과 같은 여러 사람들로부터 비난을 받기도 했다. 하지만 어떠한 평가도 "아침에 온 세상이 질서가 잡혔다는 소리를 듣는다면 저녁에 죽어도 좋겠다"는 공자의 바램을 막지는 못했다.

 

불우했지만 복받은 삶 : 인간 공자

 

동양에 살면서 공자를 모르는 사람은 없다. 공자는 소크라테스, 예수, 석가와 함께 세계 4대 성인 가운데 하나라고 한다. 그런데 성인이라고 하면 인간과는 거리가 있는 것 처럼 느껴진다. 설령 그렇게까지 보지는 않는다 하더라도 보통 사람과는 어딘가 다르다는 생각을 갖는다. 그러나 사실 공자는 지극히 평범한 사람이었다. 아끼던 제자가 먼저 죽었을 때 정신을 잃고 통곡하기도 했고, 못된 인간들에 대해서는 불같이 성을 내기도 했다. 그는 지극히 뜨거운 가슴을 지닌 사람이었으며, 아주 평범한 일상 생활 속에서 진리를 찾았던 사람이다. 그래서 알고 보면 매우 친근한 느낌이 드는 사람이다.

 

공자는 짧았던 삶에도 불구하고 2500여년에 걸쳐 인류에게 엄청난 영향을 남겼다. 특히 우리나라를 비롯하여 동아시아 여러 나라의 중심문화가 된 유가사상의 대표자이다. 공자는 중국문화의 출발이었고, 주류였다. 한 때는 한나라에서 신격화된 적도 있었다. 그러나 그 뒤 사마천이 <사기>에 공자의 생애를 기록하면서 다시 인간으로 끌어내렸다. 공자의 위대성은 그가 성인이라는데 있는 것이 아니라 보통사람이었다는 데에 있으며, 공자의 생각은 오늘까지도 여전히 인간관계에서 지배적인 자리를 차지하고 있다.

 

공자는 기원전 551년에 나서 479년까지 73세를 살았다. 당시는 주나라가 어지러워지기 시작한 춘추시대였다. 공자는 주나라의 여러 제후국 가운데 힘이 약한 나라였던 노나라 창평향의 추라는 마을에서 태어났다. 그 곳은 지금 중국의 산동성 곡부에 해당한다. 본래 노나라는 주나라 초기의 공신 주공의 후손에게 주어진 땅이었다. 주공은 주나라의 문물제도를 완비하여 통치 기반을 다진 사람이었으며, 공자가 꿈에라도 보고 싶어했던 인물이었다. 따라서 곡부가 비록 작은 땅이기는 했지만 상당한 문화수준을 가지고 있었다. 공자사상의 성립은 이러한 문화적 토양과 무관하지 않다.

 

우리가 공자라고 부르는 까닭은 성이 공씨이기 때문이며, 뒤에 붙은 자()자는 선생님이라는 뜻으로 붙이는 존칭이다. 공자의 이름은 구()였다. 공자의 어머니가 니구산(尼丘山)에 빌어 공자를 가졌기 때문에 붙여진 이름이라고 한다. 공자의 집안은 몰락한 귀족이었고 아버지인 숙량흘은 하급무사였다. 공자의 출생에 대해서는 많은 이야기가 있다. 공자에게는 열명이라고도 하는 많은 누나들과 몸이 성치 못한 형이 있었던 것 같다. 공자가 성인이 되었을 때 붙여진 또 다른 이름이 중니(仲尼)인데 중()은 둘째라는 뜻이며 니()는 앞에서 말한 니구산에서 따온 것이다. 공자의 아버지는 튼튼한 자식을 갖고 싶어서 뒤늦게 안징재라는 여자에게서 공자를 얻었다고 한다. 그 때 숙량흘은 70세가 넘었고 안징재는 나어린 소녀였던 모양이다. 그래서 사마천은 공자의 출생에 대해 야합해서 낳았다(野合而生)고 하였다. 야합이란 말 그대로 들에서 합쳐 태어났다는 뜻이다. 오늘날도 야합은 몰래 만난다는 의미와 아울러 옳지 못하다는 뜻이 담겨 있다. 사마천이 야합이라고 한 것도 정상적 관계가 아니었음을 말한 것이다. 그래서 공자는 사생아였다는 소리를 듣기도 한다. 예전 학자들은 차마 공자를 사생아라고 할 수가 없어서 온갖 주장을 통해 미화하려고 하였다. 그러나 사생아였다고 해서 공자의 위대성이 줄지 않는다. 오히려 그런 어려움을 딛고 일어선 점에서 위대성이 더 돋보인다.

 

3살 때 아버지를 잃은 공자는 일찍부터 홀어머니 밑에서 자랐다. 어떤 일본 사람은 공자의 어머니가 무당이었거나 아니면 잔치자리에서 춤추는 무녀였고, 맹인이었을지 모른다고 했다. 그리고 집이 가난했기 때문에 먹고 살기 위해 의례적인 행사가 있는 곳들을 찾아 다녀야 했는데, 어려서부터 공자가 맹인인 어머니 손을 잡고 잔치 자리들을 돌아다녔기 때문에 일찍부터 예절에 밝았던 것이라고도 했다. 아무튼 공자가 어린 시절 가난하게 자랐던 것은 사실이다. 그래서 젊었을 때 정원을 관리하고 가축을 돌보는 일도 했고, 또 창고에서 물건을 내주고 받는 일을 하기도 했다. 사마천은 {사기}에서 공자가 가축을 돌보는 일을 했을 때 가축들이 살지게 잘 자랐고, 창고 출납을 맡았을 때 됨질이 정확했다고 했다. 이런 경험은 당시 백성들의 어려움을 직접 체험할 수 있는 좋은 기회가 되었을 것이다. 그러면서도 공자는 꾸준히 자학 자습을 했던 모양이며 20세 무렵부터 제자들이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공자가 살던 당시의 혼란은 주나라 초기의 굳건했던 신분제가 엄청나게 흔들리면서부터 시작되었다. 주나라는 농경이라는 사회적 조건이 만들어 낸 강력한 가족제를 국가에 확대 적용한 봉건제 국가였다. 중국은 일찍부터 농경으로 자리잡았다. 농경에는 씨를 뿌릴 땅이나 열매를 맺도록 돕는 비와 햇빛도 필요했지만 이것은 인간이 어쩔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인간이 할 수 있는 일은 노동이었다. 그런데 농업은 많은 노동력을 요구했다. 따라서 많은 노동력을 제공하기 위해서는 집단화가 필요했으며 이를 위한 가족제도가 바로 대가족제였다. 하지만 사람만 많다고 농사가 잘 되지는 않는다. 따라서 농업중심의 대가족제는 효율적인 노동 통제가 중요했고, 농업노동의 효율적 통제란 사실 대가족제의 효율적 통제였다. 그런데 농업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농사 경험이었고 가장 많은 농사 경험을 가진 사람은 노인일 수 밖에 없었다.

 

그래서 효율적인 통제를 위해 노인 중심의 대가족제 윤리인 종적 윤리, 즉 가부장적 윤리가 자리 잡는다. 물론 여기에는 모계사회로부터 부계사회로의 사회변화도 있었다.

이같은 부자 중심의 종적 윤리를 국가에 그대로 적용한 것이 봉건제였다. 기원전 1100년 무렵에 은나라를 무너뜨리고 등장한 주나라는 하늘의 아들, 즉 천자라고 불리는 종가집을 중심에 놓고서 정복한 여러 땅에 집안의 형제, 작은 아버지, 조카 같은 친척이나 아니면 결혼으로 맺어진 사돈네 식구들을 제후로 임명했다. 각각의 제후들은 자기가 받은 땅에서 다시 자기 집을 작은 종가집으로 놓고 자기의 형제, 친척들에게 땅을 나누어 주었습니다. 그래서 통치의 꼭대기에 천자의 친족인 종가집을 두고, 다시 그 종가집과 피의 관계를 바탕으로 한 제후들의 작은 종가집이 있고, 또 제후들의 작은 종가집과 혈연관계로 연결된 귀족들을 둠으로써 통치체계 전체가 가족관계를 이루는 강력한 지배력을 가진 국가를 만들었다. 이러한 가족관계를 튼튼히 하기 위해서는 당연히 효제관계, 즉 부모와 자식 사이의 효와 형제들 사이의 공경을 의미하는 제가 강조될 수 밖에 없었다.

 

그러나 이 제도는 시간이 갈수록 피로 맺은 관계가 멀어지면서 점점 흔들리기 시작하였다. 땅을 처음 나누어 가진 것은 형제였지만 2-300년 지나 10대를 내려가서는 남과 다름없는 20촌이 되었다. 따라서 피의 관계가 더 이상 힘을 가질 수가 없었다. 공자가 태어난 제후국 노나라도 예외가 아니었다. 노나라는 노나라 왕실로부터 땅을 나누어 받았던 세명의 대부집안이 정권을 틀어쥐고 있었다. 계손씨 집안이 자기 집 뜰에서 천자의 의식에서나 출수 있는 팔일무(八佾舞)를 추게 하는 것을 본 공자는 더 이상 그 무도함을 참고 볼 수가 없어서 고향을 떠난다. 그 때가 공자 나이 35세 무렵이었다.

 

제나라를 시작으로 공자는 여러 나라를 돌아다니면서 많은 왕들을 만났고, 그 왕들이 자기의 사상을 받아들여서 세상을 바로 잡아주기를 바랐다. 그러나 그 사이 죽을 고비를 여러 번 넘기기도 했지만 아무에게서도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고생스러운 여행길에서 불현듯 고향생각이 난 공자는 51세 무렵 아직 익지도 않은 생쌀을 챙겨서 급히 자신이 태어난 노나라로 돌아 온다. 아마도 노나라가 어느 정도 질서 회복 기미를 보이고 있었던 듯하다. 고향으로 돌아 온 공자에게 계손씨는 지금의 법무장관이나 대법원장에 해당하는 대사구라는 높은 벼슬을 맡겼다. 공자가 그 일을 맡은 지 얼마 안 가 노나라는 서서히 강한 모습을 되찾아가고 있었다. 공자가 생애에서 거의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자신의 뜻을 펼쳐 보이려는 순간이었다. 그러나 공자 때문에 노나라가 강해지는 것을 두려워한 이웃 제나라가 몹시 방해를 했고, 공자는 다시 고향을 떠나 여러 나라를 떠돌게 된다. 그리고 68세 무렵에 고향에 돌아와 제자들을 가리키고 책을 편찬하다가 죽었다.

 

공자는 참으로 불행한 삶을 살았다. 공자는 정말 사생아였는지도 모른다. 또 공자의 어머니는 무당이었거나 춤추는 여자였는지도 알 수 없으며, 게다가 맹인이었는지도 모른다. 어려서는 집이 가난하여 하찮은 직업들을 가졌었다. 공자의 외아들은 공자보다 먼저 죽었다. 더구나 공자가 가장 아꼈던 제자인 안회와 자로도 공자보다 먼저 죽었다. 공자의 부인이 도망갔다는 얘기도 있다. {논어} [향당편]에는 음식이 간이 맞지 않거나 반듯하게 썰려지지 않았으면 먹지 않았고, 옷도 법식에 맞지 않으면 입지 않았으며, 자리도 반듯하지 않으면 앉지 않았다고 하는 공자의 평소 생활 모습이 그려져 있다. 어쩌면 공자의 부인이 그 까다로움을 이기지 못해 도망갔는지도 모르겠다. 게다가 공자는 무려 삼십여년 동안 72명의 임금들을 만나고 다니면서 자신의 의견이 받아들여지기를 바랐지만 아무도 받아들여주지 않았다. 그래서 중국에서 도가 실현되지 않으니 뗏목을 타고 바다로 나가겠다고까지 했다. 그렇게 돌아다니는 동안 죽을 고비를 만나기도 했고 굶주림에 처하기도 했다. 이처럼 애쓰는 공자를 당시 어떤 사람은 되지 않을 줄 알면서 애쓰고 다니는 사람이라고도 비웃었다. 참으로 불행한 삶이었다고 할 수 밖에 없다.

 

그러나 공자의 사상은 그가 남긴 책들과 그가 기른 제자들을 통해 오늘까지 이어져 오고 있다. 공자에게는 3천의 제자가 있었다고 한다. 3천은 과장이겠지만 아무튼 많았던 것은 틀림없다. 그들은 전국 각지에서 새로운 지식을 갈구하면서 공자를 찾아왔다. 어떤 이는 공자를 비난하기 위해 찾아왔다가 감복하여 제자가 되기도 했다. 그리고 공자가 죽은 뒤에는 대부분 공자 무덤 옆에서 삼년상을 지낸다. 삼년상이 끝난 뒤 일부가 남아서 선생님을 차마 잊지 못해 다시 3년상을 지내지만 대부분은 제각기 고향으로 돌아가 제자들을 길렀다. 바로 그 제자들에 의해 공자의 사상은 중국 각지로 퍼져갔다. 이것이 공자사상을 중국사상의 주류로 만든 힘이었다.

 

동양의 지혜 : <논어>

 

공자 이전의 교육은 전적으로 국가가 틀어쥐고 있었고, 교육을 받을 수 있는 사람은 귀족 뿐이었다. 이 점은 책의 경우도 마찬가지여서 민간에서는 책을 만들어 낼 수 없었다. 그러나 공자는 당시의 달라진 사회적 조건에 힘입어 일정한 예를 갖추고서 배움을 청하는 사람이면 누구나 받아들여 가르쳤다. 따라서 중국에서 처음으로 사립 학교를 세운 셈이었고, 아울러 보통교육, 평등교육을 행한 사람이었다. 공자학당의 교과서는 주로 공자가 편찬한 <시경>, <서경>, <주역>,<예기>등이 쓰였다. 이밖에도 공자는 당시 242년간의 역사를 옳고 그름이라는 관점으로 다시 기록한 <춘추>라는 역사책을 짓기도 했다.

 

하지만 공자사상이 가장 잘 나타나 있는 책은 <논어>이다. 반고가 지은 <한서예문지>에 따르면 <논어>'의논해서 편찬한 말'이라는 뜻이다. 진시황의 분서갱유를 지낸 한나라 초기에는 세 종류의 논어가 있었다고 한다. 하나는 제나라 사람들 사이에 전해온 것이고, 다른 하나는 노나라 사람들 사이에 전해 온 것이며, 나머지 하나는 공자가 살던 옛 집의 벽 속에 분서갱유를 피하기 위해 숨겨두었던 것을 찾아 낸 것이라고 한다. 그리고 오늘날 전해지는 <논어>는 그 가운데 제나라 본과 노나라 본을 합친 것이라고 한다.

 

지금의 <논어>는 모두 20편으로 되어 있다. 각 편의 이름은 첫머리에 나오는 두 글자 또는 세 글자를 따서 붙인 것이다. <논어>는 송나라 때 이르러 <대학>, <중용>, <맹자>와 더불어 한데 묶어 4서라고 하였다. 내용은 대체로 공자의 말씀과 행동, 공자와 제자 또는 당시 사람들과의 대화, 제자의 말, 제자들 사이의 대화 등으로 이루어져 있다. 지은 사람이 누구인지는 분명하지 않으나 제자들 또는 제자들의 문인들일 것으로 짐작된다.

 

본래 한문으로 쓰인 대부분의 동양 고전들이 그렇듯 <논어>도 많은 함축을 지니고 있다. 막스 베버는 <논어>를 읽으면 마치 인디언 추장의 말을 보는 것 같다고 했다. 우리가 많이 쓰는 '살신성인'이라든가, '극기복례' 같은 교훈적인 말들은 대부분 <논어>에 들어 있는 경우가 많다. <논어>는 도가사상이 휩쓸던 위진남북조시대에도 노장, 주역과 더불어 삼현(三玄)으로 높여졌고, 예전 우리나라 승려들도 논어를 필독했다.

 

사람답게 사는 길 : ()

 

공자의 중심사상은 인이다. <논어>에는 인이라는 글자가 무려 106번이나 나온다. 인은 보통 어질다는 뜻으로 새기지만 사실 어질다는 풀이만으로는 공자가 말한 인이라는 글자의 뜻을 다 담을 수가 없다. 서양 사람들은 인을 자비심, 인정, 박애로 해석되는 Benevolence라고 쓴다. 그러나 이 단어도 마찬가지로 공자가 말한 의미를 다 담지 못한다. 역대 학자들은 인에 대해 나름대로 해석을 했다. 맹자는 '사람이 사는 편안한 집'이라고 했고, 주자는 '하늘과 땅이 만물을 만들어 내는 마음'이라고 했다. 근대 학자인 강유위는 '사랑의 힘'이라고 했고, 호적은 '사람이 가야할 길을 다하는 것'이라고 했다. 그 밖에도 풍우란은 '완전한 덕'이라고 풀었고, 채원배는 '완성된 인격'이라고 했다. 그러나 대부분 현대적인 어감이 아니어서 쉽게 이해되지 않는다.

 

그렇다면 인을 어떻게 새겨야 공자의 사상이 잘 살 수 있겠는가? 공자는 어떤 점에서는 그리스의 철학자 소크라테스와 비슷하다. 소크라테스 이전의 철학은 소아시아 대륙을 중심으로 한 자연철학이었다. 당시 철학자들의 관심은 자연에 모여 있었으며, 그들은 만물의 본질을 자연에서 찾으려고 했다. 대표적인 학자는 만물의 본질을 물이라고 했던 탈레스 같은 사람이고, 그 밖에도 여러 사람들이 물, , , 공기 등을 가지고 자연의 본질을 설명하려고 했다. 자연에 대한 이같은 당시의 관심을 인간에 대한 관심으로 돌려 놓은 사람이 바로 소크라테스였다. 소크라테스는 비록 자신이 만든 말은 아니었지만 '너 자신을 알라'라는 유명한 명제를 제기함으로써 문제의 핵심을 바꾸어 놓았다.

공자도 그 점에서 마찬가지였다. 공자 이전의 관심은 자연 또는 귀신에 있었다. 그런데 공자가 문제 중심을 인간으로 돌려 놓았던 것이다. 이 점은 [선진]편에 잘 나타나 있다. 어느날 자로가 공자에게 물었다.

 

"죽음에 대해 알고 싶읍니다."

"삶도 아직 다 모르는데 어찌 죽음을 말하겠는가?"

자로가 다시 물었다.

"귀신 섬기는 법을 말씀해주십시오"

"사람도 다 못 섬기는데 어찌 귀신을 말하겠느냐?"

 

이 대화를 통해 공자의 관심이 귀신이 아니라 사람에 있었으며, 사람에서도 죽음이 아니라 삶에 있었음을 알 수 있다. 공자가 주의를 기울였던 문제는 사람의 삶이었다. 그리고 여기에서 공자가 얻은 해답이 인이었던 것이다.

 

<논어>에 보이는 인은 대부분 공자 스스로가 말한 것이거나 남의 질문에 대답한 것이다. 그러나 어떤 경우도 철학적인 말을 쓰면서 어렵게 설명하지 않았다. 다만 이렇게 또는 저렇게 행동하라고 했을 뿐이다. ()은 사실 두 이()자와 사람 인() 자를 합쳐 놓은 것으로, 두 사람 사이의 관계를 나타내는 말이다. 사람 사이의 관계는 앞에서 공자가 길짐승이나 날짐승과 더불어 살 수 없다고 했던 것처럼 짐승과의 관계가 아니다. 공자의 관심은 사람 이상이나 사람 이하에 있지 않았다. 그런 의미에서 철저히 신본주의가 아닌 인본주의이다.

 

중용에서는 인을 사람이라고(仁者 人也) 풀었다. 이 말은 맹자에도 나온다. 그런데 사람이라는 말이 무슨 뜻일까? 여기서는 사람이 아니라 사실은 사람답다는 뜻이다. 앞서 말한 것 처럼 인을 어질다고 풀어서는 의미가 제대로 살지 않는다. 인은 사람다움이라고 풀어야 한다. 공자의 관심은 어떻게 사는 것이 사람다움을 실현하는 길()인가에 있었던 것이다.

 

그렇다면 공자가 추구한 사람다운 사람은 어떠한 사람일까? 공자는 사람을 4단계로 나누었다. 가장 아래가 소인이고 그 다음이 군자이다. <논어>에서는 군자와 소인을 여러 곳에서 대비시키고 있다. 소인은 이로우냐 해로우냐를 따지는데 밝은 사람이다. 그러나 군자는 옳으냐 그르냐를 따지는데 밝은 사람이다. 그래서 공자는 이로움이 될 만한 일을 보면 반드시 먼저 그 일이 옳은 일인가를 생각해 보라고 했다. 또 소인은 남들과 같아지는 일은 잘하지만 남들과 어울리지는 못한다. 그러나 군자는 남들과 잘 어울리되 남들과 같아지지는 않는다. 남과 같다면 자신의 존재 의미는 없다. 자신이 참답게 가치가 있다면 자신의 역할을 누구도 대신할 수 없어야 한다. 군자는 바로 그런 사람이다. 그러나 소인은 누구라도 그 사람을 대신 할 수 있다. 사실 남들과 참답게 어울린다는 것은 모든 사람이 주체가 될 때만 가능하다. 그 가운데 어느 한 사람이라도 주체를 잃고 남에게 얽매인다면 그것은 참답게 어울리는 것이 아니다.

 

본래 군자는 다스리는 계층 즉 군주의 자식이라는 뜻이다. 따라서 본래는 지배계층을 의미한다. 그러나 공자는 군자의 의미를 지배계층이 아니라 덕을 쌓는 사람으로 바꾸어 놓았다.

 

그런데 공자는 군자가 되려고 하는 사람도 때로 사람답지 못한(不仁) 짓을 하는 경우는 있지만 소인으로 살아 가는 사람이 사람다운() 일을 하는 경우는 없다고 했다. 그렇다면 군자도 항상 사람다운 것은 아니며 군자 위에 사람다운 사람(仁人)이 있다는 얘기가 된다.

 

군자가 되기도 어려울텐데 그 보다 한 차원 더 높은 사람다운 사람은 과연 어떤 사람일까? 공자는 [이인편]에서 오직 사람다운 사람만이 정말 남을 좋아할 수도 있고 남을 미워할 수도 있다고 했다. 이 말은 예수가 부끄러운 짓을 한 여인을 둘러 싸고 돌로 치는 사람들에게 너희들 가운데 죄 없는 사람만이 이 여인을 돌로 치라고 했던 말과 비슷하다. 정말 사람다운 사람은 자신의 사리사욕이 없다. 그렇기 때문에 남을 좋아하거나 미워하더라도 치우치지 않을 수 있는 것이다.

공자는 또 사람다운 사람은 반드시 용기가 있지만 용기있는 사람이 반드시 사람다운 것은 아니라고 했다. 사람다운 사람의 용기는 참 용기이다. '진정한 용기란 아니다라고 말해야 할 때 아니다라고 말 하는 것'이라는 서양 속담이 있다. 일상을 살면서 보통 사람은 분명히 그것이 옳지 않다는 것을 알면서도 그렇게 말하지 못하는 경우를 많이 겪는다. 그러나 사람다운 사람은 정말 그 일로 해서 피해를 입거나 또는 죽을 수 밖에 없는 상황에 처하더라도, 아니라고 해야 할 자리라면 아니라고 하는 사람이다. 이처럼 참다운 용기를 갖고 있기 때문에 사람다운 사람은 맞설 사람이 없다(仁者無敵)고 하는 것이다.

 

그래서 공자는 뜻있는 선비와 사람다운 사람은 구차스럽게 살기 위해 사람다움을 포기하지 않으며, 몸을 죽여서라도 사람다움을 이룬다고 했다. 세상에서 참된 용기를 지닌 사람은 일생에 딱 한번 죽을 뿐이다. 그의 숨이 끊어지는 날이 정말 죽는 날이다. 그러나 비겁한 사람은 일생에서 두고두고 죽는다. 그가 사람답기를 포기할 때마다 그의 존재의미는 없는 것이며 따라서 죽은 것과 마찬가지이다. 사람다움이란 개인에게는 자신의 존재 이유이다. 그러므로 자기다움의 포기는 자신의 존재 이유를 잃는 것과 다름 없다. 이처럼 인을 실천하는 일, 즉 사람다움을 실천하는 일이 중요하기 때문에 공자가 사람다움을 실천하는 일에서는 스승에게도 양보하지 말라고 했던 것이다.

 

공자의 인은 사람다움을 구현하는 과정이다. 공자는 사람이 사람답지 못하면 예절을 갖추어야 무슨 소용이 있겠으며, 사람이 사람답지 못하면 음악을 잘 연주해야 무슨 소용이 있겠느냐고 했다. 우리는 사람답지 못한 사람들을 낮추어 짐승들에 비유해서 개 같다던가 돼지 같다던가 하는 표현을 쓴다. 사람이 사람답지 못하면 아무리 겉이 번드르르해도 아무 소용이 없으며, 사람이 사람 같지 못하면 아무리 아름다운 예술 작품을 만들거나 훌륭한 글을 쓴다고 해도 기교에 지나지 않는다. 과거 일제하에서 훌륭한 글을 쓴 사람들이 한편으로 정신대나 학도병에 지원하라고 열심히 외치고 다녔던 사실이 있다. 그렇게 좋은 일이고 옳은 일이라면 남에게 권하기 앞서 자신이 먼저 했어야 할 것이다. 그렇지 않다면 그것은 거짓임이 분명하며 또한 사람다운 행동일 수가 없다. 그래서 공자는 사람다움을 실천하는 일이 자신의 임무이며 죽은 뒤에나 그만둘 수 있다고 했다.

 

공자는 사람다운 사람 위에 다시 성인을 두었다. 어떻게 보면 사람다움의 완성이 성인인 것이다. [옹야]편에는 공자와 자공의 대화가 나온다.

 

"만일 백성들에게 널리 베풀어서 모든 사람을 구제할 수 있다면 사람다운 사람이라고 할 수 있겠읍니까?"

"어찌 사람답다고만 말할 수 있겠느냐. 반드시 성인의 경지일 것이다. 요순도 오히려 그렇지 못할까봐 항상 근심했다"

 

이 대화를 통해 공자의 목표가 성인에 있으며, 성인이란 현실을 떠나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현실의 실천에서 나오는 것임을 알 수 있다.

 

사람다움을 실천하는 길 : 효제와 충서

 

공자는 사람다움의 출발을 부모에 대한 효와 형제 사이의 우애라고 보았다. 그리고 구체적인 실천 방법으로 충()과 서()를 말했다. 먼저 효와 제를 보자. 공자는 부모의 몸을 받드는 것을 효라고 보지 않는다. 그런 것은 짐승도 다 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 보다는 정성을 다해 부모의 뜻을 받드는 것이 중요하다고 한다. 어느날 재아라는 제자가 공자에게 3년상이 너무 길지 않느냐고 하면서 1년만에 상을 마치면 어떻겠느냐고 물었다. 공자는 재아에게 다시 물었다.

 

"그렇게 하고서 쌀밥과 비단 옷을 입더라도 편하겠는가?"

", 편할 것 같읍니다."

"군자가 상을 입었을 때는 기름진 음식을 먹어도 맛있지 않고, 음악을 들어도 즐겁지 않으며, 거처가 편하지 못하기 때문에 3년상을 하는 것이다. 네가 편하다면 그렇게 해라."

그리고 나서 재아가 나가자 다른 제자들을 향해 말했다.

"재아는 어질지 못하구나. 자식이 태어나서 3년이 지나야 부모 품을 벗어날 수 있다. 3년상은 세상이 모두 다 지내는 상이다. 재아도 부모에게서 3년동안 사랑을 받았는가?"

 

공자가 말하는 효는 인간의 감정에 기초한 것이다. 부모의 마음을 헤아려야 편하기 때문에, 또 부모의 은혜에 보답해야 편하기 때문에 나오는 것이다. 그러므로 효와 제는 자연스러운 인간의 감정에 바탕을 두고 있다.

그렇다면 그 실천방법인 충과 서는 어떠한 것인가? 어느날 만년의 공자가 제자들과 함께 있다가 나이 어린 제자 증삼을 불렀다.

 

"(), 내 도는 하나로 꿰뚫어져 있다."

", 알고 있읍니다."

 

공자가 나가자 다른 제자들이 증삼에게 조금 전 선생님의 말씀이 무슨 얘기인가를 물었다. 그러자 증삼이 말했다.

 

"선생님의 도는 충과 서일 뿐입니다."

 

증삼은 공자보다 나이가 46살 아래인 제자였다. 하지만 후에 공자의 학문을 정통으로 이은 사람으로 평가를 받았다. 충이란 무슨 뜻인가? 충의 본래 뜻은 국가에 대한 충성이 아니다. ()은 중()자 밑에 심()자를 붙인 것이다. 글자 모양에서 알 수 있듯이 마음 속에 중심을 하나만 가지고 있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전혀 흔들리지 않는다. 그 반대는 환()이다. ()자는 중()자를 두 개 겹쳐 놓고 그 아래 심()자를 쓴 것이다. 즉 마음 속에 중심이 둘이나 되어서 어느 것이 옳은 지 모르기 때문에 근심하는 것이다. 이처럼 충은 무엇이 옳은지를 확실히 알고 있기 때문에 전혀 흔들림이 없으며, 그렇기 때문에 성실할수 있고, 자기 자신을 제대로 다 발휘할 수 있다.

 

()는 어떤 글자일까? 서는 여()자 아래 심()자를 쓴다. 즉 남의 마음과 같아져 보는 것이다. 내가 배고픈데 저 사람은 얼마나 배고플까. 내가 힘든데 저 사람은 얼마나 힘들까. 이처럼 남의 입장을 생각해 보는 것이 서이다. 물론 이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그러나 공자는 자식이 내게 이렇게 해 주었으면 하는 마음을 가지고 부모를 대하고, 반대로 부모가 내게 이렇게 해주었으면 하는 것을 가지고 자식을 대하라고 했다. 그러므로 인(), 즉 사람다움의 실천은 충서의 실천이며, 충서의 실천이란 내면적으로는 자기 자신을 다하는 일이고 밖으로는 남과의 관계에서 내 마음을 미루어 남의 마음을 헤아려 보는 것이다. 그리고 그 때 가장 중심이 되는 것은 부모와 형제 관계이다. 따라서 효와 제가 사람다움을 실천하는 근본이었다.

 

답게 하는 정치 : 정명론

 

공자는 사람다움의 사회적 실현을 통해 당시의 혼란을 바로 잡을 수 있다고 여겼다. 따라서 공자에게 정치란 사람답게 되도록 바로 잡는 일에 지나지 않았다. 그렇다면 구체적으로 무엇을 바로 잡는 것일까? 제나라 임금이 공자에게 정치가 무어냐고 물었을 때 공자는 "임금은 임금답고 신하는 신하답고, 아버지는 아버지답고 자식은 자식다운 것"이라고 답했다. 정치에 대한 질문의 답변치고는 참으로 추상적이다. 그러나 각각이 자신의 다움을 실현할 수 있는 맡은 일을 다할 때 질서는 저절로 잡힐 것이다. 실제 윗 사람이 윗사람 답게 아랫 사람을 대하면 아랫 사람은 목숨을 다해 윗사람을 섬기는 법이다. 공자는 도둑이 많아서 걱정이라는 임금의 이야기를 듣고서 "당신이 백성들의 물건을 욕심내지 않으면 백성들은 상을 준다고 해도 도둑질하지 않을 것"이라고 했다. 공자는 정치란 질서를 바로 잡는 것이며 그 질서는 위에서부터 아래로 내려가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지배계층을 중심으로 사람 됨됨이와 사람 사이의 관계를 바로 잡으려고 했던 것이다.

 

[자로]편에는 정명에 대한 유명한 대화가 나온다. 어느 날 위나라 임금의 초청을 받은 공자가 제자들과 위나라를 향해 가고 있었다. 가는 길에 자로가 공자에게 물었다.

 

"위나라 임금이 선생님을 모시고 정치를 해보려고 하는데 선생님께서는 어떤 일을 먼저 하시겠읍니까?"

"반드시 명분을 바로잡겠다."

"선생님은 사정에 너무 어두우십니다. 어째서 명분같은 것부터 바로잡으려고 하십니까?"

"거칠구나, 자로여. 군자는 자기가 알지 못하는 일에는 함부로 나서는 것이 아니다. 명분이 바르지 못하면 말이 순할 수 없고, 말이 순하지 못하면 일이 이루어질 수 없고, 일이 이루어지지 못하면 문화가 일어나지 못하고, 문화가 일어나지 못하면 형벌이 맞을 수 없고, 형벌이 맞지 않으면 백성들이 손발을 둘 데가 없다."

 

이 대화는 작은 일 같아 보이지만 명분을 바로잡는 일이 얼마나 중요한가를 말하고 있다. 사실 우리 사회에서 쓰는 말 가운데 선생님이라는 호칭만큼 좋은 말도 드물다. 그런데 언제부턴가 교육자들의 권위가 땅에 떨어지면서 선생이라는 호칭도 값이 내려갔다. 그래서 아무에게나 대놓고 선생이라고 부르게끔 되었다. 그뿐인가, 선생의 부인을 부르는 호칭인 사모님은 제비족들도 애용하는 말이 되어 버렸다. 마찬가지로 운전수면 족한데도 기능인으로 대접한답시고 운전기사라고도 하고 더 나아가서는 운전 기사양반이라고도 부른다. 말의 인플레이다. 호칭이 바르지 못하면 그런 호칭을 가진 사람의 말이 권위가 없어진다. 말이 권위를 잃으면 그가 한 말대로 이루어지기가 어렵다. 그런 사회는 문화가 바를 수 없으며 그런 문화에 바탕을 둔 법이 제대로 될 리가 없다. 그리고 그 피해는 마침내 대다수 민중이 입게 된다는 것이 공자의 생각이었다.

 

그러나 공자는 법이나 힘으로 강제해서 바로 잡으려고 하지 않았다. 오직 덕과 예절로 바로 잡으려 했을 뿐이다. 그래서 정치와 형벌로 이끌면 잘못을 저지르고도 처벌만 받지 않으면 부끄러워할 줄을 모르지만, 덕으로 이끌고 예절로 다스리면 잘못을 하더라도 저절로 부끄러워지기 때문에 벌 주지 않아도 스스로 잘못을 바로 잡는다고 했다. 실제 실정법 만능사회에서는 양심에 부끄러운 짓을 하고도 법에만 저촉되지 않으면 죄인이 아니다. 공자는 법에 앞선 도덕을 말했으며 실천에서는 윗 사람이 모범을 보일 것을 강조했다. 그래서 윗 사람의 몸가짐이 바르면 명령하지 않더라도 아래서 행하지만 윗 사람의 몸가짐이 바르지 않으면 비록 명령을 내리더라도 따르지 않는다고 했다.

 

물론 공자의 생각에는 당시 시대적 한계 때문에 귀족제 옹호라는 형태가 그대로 들어 있다. 그러나 공자사상의 가치는 보편적인 인간의 도덕성 강조에 있다. 공자는 사회관계가 사람 사이의 신뢰에 바탕을 둔다고 생각했다. 섭나라 임금이 공자에게 자기가 다스리는 어떤 마을에서 아버지가 남의 양을 훔쳤는데 그 아들이 증인을 섰다고 하면서 자기 나라 백성들의 정직함을 자랑삼아 이야기 하자, 다 듣고난 공자는 정색을 하고서 대답한다. "우리 마을의 정직한 사람은 그렇게 하지 않습니다. 아버지는 자식을 위해 숨겨주고 자식은 아버지를 위해 숨겨줍니다. 정직이란 바로 그 속에 있읍니다." 이런 생각은 [안연]편에 보이는 제자 자공과의 대화에도 잘 나타나 있다.

 

"정치를 어떻게 하는 것이 좋겠읍니까?"

"경제를 풍족하게 하고, 국방을 튼튼히하고, 백성들이 믿을 수 있도록 해야 한다."

"그 세 가지 가운데 어쩔 수 없어서 하나를 포기해야 한다면 무엇을 포기하시겠읍니까?"

"국방을 포기하겠다."

"둘 가운데 다시 하나를 포기한다면 무엇을 포기하시겠읍니까?"

"경제를 포기하겠다. 예로부터 사람이면 누구나 죽는 법이지만 믿음이 없으면 아예 사회가 성립될 수 없는 것이다."

 

이처럼 서로 간의 믿음을 바탕으로 각각의 역할을 다하는 사회, 이것이 공자가 바라던 대동사회였다.

 

공자사상의 가치 : 보상을 바라지 않는 실천

 

공자사상은 동서양을 가리지 않고 뒷 세상에 많은 영향을 주었다. 동양에서의 영향은 한나라 때부터 유학을 공부한 사람들을 등용한 정책과 무관하지 않다. 특히 송나라에서 성리학이 나오고 주자가 해설을 붙인 4서와 5경이 인재를 뽑는 과거시험의 기본 교과서가 되면서부터 더 큰 영향력을 발휘하였다. 그러나 공자의 영향은 동양에만 머물지 않았다.

Reichwein은 공자사상이 18세기 서구 계몽사상을 뒷받침했다고 했다. 뿐만 아니라 오늘날 중국에서도 문화혁명기 동안 비판받았던 공자가 개혁개방과 더불어 다시 조명을 받고 있다. 한국, 일본, 싱가폴, 대만, 홍콩 처럼 유교 문화권에 들어 있는 국가들의 수준 높은 자본주의적 발전을 보면서, 유교가 비록 전근대에서 나온 사유체계이기는 하지만 자본주의에서도 여전히 이바지할 점이 있다고 주장하는 유교자본주의론도 있다.

 

역사적으로 공자사상은 봉건제사회의 전제군주제를 합리화하는 강력한 이데올로기로 이용되어 왔다. 어떤 면에서는 현대에서까지도 계층간의 질서를 강조함으로써 사회적 모순을 감추고 경제적 지배를 확고히 하려고 하는 사람들에 의해 이용되고 있다. 그러나 사실 공자사상의 가치는 인문정신의 극치라는 점에 있다. 그의 사상은 신본주의가 아닌 인본주의였다. 공자에게는 인간다움의 회복을 통해 사회적 혼란을 바로 잡으려는 열정이 있었고, 그 열정이 교육을 통해 열매맺음으로써 오늘날까지 인류의 도덕의식에 영향을 주고 있다. 또한 공자 사상은 정치적으로 이용한 많은 이데올로그들이나, 이론을 좀더 치밀하게 다듬어 낸 이름난 사상가들에 의해 맥을 이어 온 것이 아니다. 오히려 공자의 가르침에 따라 인간답게 살려고 한 무수히 많은 사람들의 실천을 통해 끈질긴 생명력을 가지고 역사속에서 쉼 없이 이어져 온 것이다.

 

그런데 그러한 실천이 자기 마음 속의 만족 이외에 달리 보상받는 것이 없다는 점에 공자사상의 비극이 들어 있다. 공자사상에는 내세가 없다. 따라서 왜 그렇게 해야만 하는가를 묻는다면 그렇게 하는 것이 인간다움을 실현하는 길이기 때문이라는 대답 밖에 들을 수 없다.

 

부하들을 살리기 위해 흉노에게 항복하여 포로가 되었던 장군이 릉을 변호하다가 남자로서 가장 수치스러운 형벌을 받았던 사마천은, 그가 지은 {사기}를 통해 유교의 밑바닥에 숨어 있는 비극적인 면을 잘 드러내 보였다. 사마천은 공자가 사람다움을 실천함으로써 사람다움을 이루었다고 평한 백이숙제에 대해, 옳은 일을 하고서도 불우한 삶을 살았다고 평가했다. 또 공자의 가장 뛰어난 제자인 안회도 끼니를 잇기 어려울 정도로 가난했음을 지적한다. 그러나 이름난 도적 도척은 온갖 못된 짓을 다하면서도 수천의 부하를 거느리고 부귀영화를 누렸다고 한다. 이러한 예를 들면서 사마천은 하늘의 도라는 것이 과연 옳은 것인가라는 문제제기를 하고 있다. 이 점이 바로 유교의 낙관주의에 대한 비판인 셈이다.

 

그러나 바로 여기에 공자사상의 강점이 있다. 어떤 일이 할 때면 그 일이 결과적으로 내게 이로울 것인가 해로울 것인가를 따지지 말고, 오직 옳으냐 그르냐를 따지라는 것이 공자의 생각이다. 그리고 옳다면 비록 그 일을 하다 해를 입더라도 해야만 하는 것이 사람다움을 이루는 길이다. 공자사상에는 행위에 대한 인과응보가 없다. 다만 스스로 부끄럽지 않아야 한다는 당위가 있을 뿐이다. 그 당위는 사람이 마땅히 갖는 책임이나 사명의식일 수도 있다. 당위일 뿐임에도 그 당위를 따라 간 많은 실천들은 불의에 맞선 굽히지 않는 비판정신으로 이어져 왔다.

 

우리나라 학자들은 전통적으로 학문의 정맥을 사림파에 두었다. 그 까닭은 사림파가 앎과 실천을 일치시켜 간 사람들이기 때문이며, 옳고 그름을 따라 행동한 사람들이기 때문이다. 한말 의병운동이나 항일 무장투쟁도 마찬가지였다. 그들은 현대식 화력으로 무장한 외세와 맞서 싸우면서 이길 수 있다고 생각하지 않았다. 다만 사람답게 살기 위해서는 그렇게 해야만 한다고 생각했을 뿐이다. 바로 이처럼 보상을 바라지 않는 실천이 공자사상의 알맹이인 것이다.

 

 

개인별 탐구 과제

1. 장저와 걸닉이 자로에게 한 말의 의미는 무엇인가? 그리고 그 말을 듣고 난 공자가 탄식한 이유는 무엇인가?

2. 춘추시대 공자가 각 나라를 떠돌아야 했던 이유는 무엇인가?

3. 공자의 위대성은 그가 보통사람이었다는데 있다고 했다. 보통사람으로서의 특성이 나타난 부분을 찾아 보자.

4. 주나라에서 노인 중심의 대가족제 윤리인 종적 윤리, 즉 가부장적 윤리가 자리 잡게 된 원인은 무엇이며, 이것은 다시 어떤 형태로 바뀌어 가는가?

5. 이 글의 필자는 공자의 삶이 불행했다고 한다. 그 내용을 구체적으로 정리해 보자.

6. 공자 사상의 중심이 인본주의라고 한 것은 무엇 때문인가?

7. 공자가 제자 증삼에게 내 도는 하나로 꿰뚫어져 있다고 했을 때, 증삼은 그 의미를 로 풀이했다. 이 때 충과 서의 의미는 무엇이라고 했는가?

8. 공자의 사상은 철저하게 귀족제를 옹호하는 입장에 있다는 비판이 있다. 이러한 비 판의 근거는 무엇인가?

9. 현대에 들어와 중국의 문화혁명기에 공자의 사상은 비판의 도마에 올랐다. 왜 비판 을 받아야 했는지 글의 내용을 통해 짐작해 보자. 아울러 그러한 비판을 극복할 수 있었던 것은 공자 사상의 어떤 측면 때문인지도 정리해 보자.

10. 사마천은 왜 하늘의 도리라는 것이 과연 옳은가라는 의문을 제기했는가?

 

모둠별 토의 과제

1. 이 글에서는 공자의 사상을 다양한 측면에서 조명하고 있다. 모둠원끼리 토의를 하 여 그 내용을 간략하게 정리하고, 그 현대적 의미를 밝혀 보자.

2. 공자는 사람을 4단계로 나누었다고 했다. 그 내용을 구체적으로 정리하고 이들 단계 에 대해 비판적으로 검토해 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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