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어독서창고

문학의 갈래, 사랑의 궤적 - 김상욱

by 처사21
728x90
반응형

문학의 갈래, 사랑의 궤적

김상욱

 

 

더러 삶을 살면서 감동적인 순간을 마주칠 것이다.

코끝이 찡하거나, 목젖이 아려오거나, 가만히 가슴 한 켠이 아파올 때가 있을 것이다.

그러면 생각해 볼 일이다.

그것이 어떻한 형식에 가장 적합할지.

하나의 체험이 시로도, 소설로도, 희곡으로도 쓰일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체험의 성격에 꼭 맞는 문학의 갈래가 앞질러 존재한다.

 

발레리였던가? 시가 무용과 흡사하다고 말한 이가. 산문이 목적지를 향해 걷는 것에 비유될 수 있다면, 시는 하나하나의 몸짓이 명확한 의미를 향해 치닫지 못할지라도 그 자체로 아름다울 수 있다고 말한 이가. 나는 발레리의 설명에 전적으로 공감하면서, 다만 뭉뚱그려 산문으로 지칭된 나머지 문학의 갈래들을 다소 구체화할 수 있을 따름이다.

 

시가 무용이라면 또 다른 주요한 문학의 갈래인 희곡은 단거리 경주와도 같다. 희곡은 바람을 거스르며 세계와 대립하고 갈등하면서 목적지를 향해 달려 나간다. 그리하여 마침내 목표지점에 도달하든지, 결국 중도에서 좌절하여 실패하든지, 오직 두 가능성만이 존재할 뿐이다. 반면 소설은 여행과 같다. 하나의 목적지, 곧 생에 내재된 의미를 찾기 위해 떠나는 여행. 루카치가 말한 대로, 비록 길이 시작되자 여행이 끝나버릴지라도 소설의 주인공들은 지금 여기에서 어떻게 살 것인가라는 다소 거창한 문제를 껴안고 길을 떠나는 것이다. 그렇다면 또 다른 문학의 갈래인 수필은? 그것은 어쩌면 산책에 비견될 수 있을 터이다. 시의 압축된 아름다움, 희곡의 대립이나 갈등, 소설에서 찾을 수 있는 생의 둔중한 의미 등은 없을지라도, 생을 뒷전에 두고 누리는 여유와 사색을 동반하는.

 

그러나 이들 설명은 지나치게 단편적이다. 애초 비유란 대상의 일면만 선명하게 드러낼 뿐, 나머지 전체적인 특질들은 교묘하게 은폐되기 십상이다. 하여 더 한층 근원적 탐구를 위해서는 애초 문학이 왜 인간적 작업으로 안착하였으며, 또 왜 전세계적으로 이들 서정, 서사극 등의 커다란 갈래로 분리되었는가를 살펴보지 않으면 안 된다.

 

적어도 문학은 인간의 삶을 표현한다. 먹고 싸고, 자고, 생각하고, 사랑하고, 싸우고, 노동하는 인간의 삶이 곧 문학이다. 삶과 분리된 문학은 어디에도 존재하지 않는다. 심지어 동물이 주인공으로 등장할지라도 그 이면에는 완강하게 여우처럼 간교한 인간, 돼지처럼 탐욕스럽고 어둔한 인간이 숨어 있다. 심지어 신화처럼 전혀 비현실적인 이야이기서조차 인간의 욕망이 감추어져 있다.

 

예컨대 단국신화에서 곰과 범의 겨루기 역시 다르지 않다. 농경사회에서 요구되는 여성상인 우직하고 근면하며, 계절의 순환에 기꺼이 순종하는 곰이 이겨내는 것을 통해 신화는 농촌공동체에서 현실적인 생활상의 요구를 상징적으로 표현한다.

 

낭만적인 모험담으로 점철된 고대 소설인 구운몽에서 주인공 양소유는 당대 사회를 주도했던 양반 계급의 모든 욕망을 남김없이 실현하고 있다. 재산과 명예와 권력과 심지어 여덟 명에 달하는 여자까지. 입신양명의 길에서 승승가도를 달리는 양소유의 생애는 현대인인 우리에게도 , 옛날이여!’ 라는 향수를 불러 일으킨다. 물론 그때에 태어났더라면 아마 하나 있는 마누라까지 아전 등속에게 빼앗길 노비로 태어날 위험 부담도 있지만. 여하튼 현세적 삶에서 마주치는 욕망의 최대치를 이들 낭만적 소설들은 유감없이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모든 문학이 모든 인간의 삶을 두루두루 표현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용기가 달라지면 그 내용물도 덩달아 달라지게 마련이다. 소주잔과 막걸리잔에는 소주와 막걸리라는 상이한 내용물이 담겨야 제대로 맛이 나는 법이다. 소주를 듬성듬성 이가 빠진 사발에 혹은 막걸리를 말간 소주잔에 마실 수는 있으나, 그 맛이 젬병일 것은 불보듯 뻔한 노릇이다.

문학의 갈래 또한 다르지 않다. 문학의 갈래가 나뉜 것은 특정한 인간적 체험들이 각기 더욱 적절한 스스로의 형식을 모색한 결과이다. 시적 체험이 소설이나 희곡으로, 극적 체험이 소설이나 시로 표현될 수는 있으나, 그것은 마치 몸에 맞지 않은 옷가지를 걸친 것처럼 어정쩡할 따름이다.

 

내용과 형식의 조화, 삶의 특정한 체험과 그 체험의 문학적 표현은 문학이 가장 즐겨 선택하는 제재인 사랑을 통해, 그 사랑의 변모 과정을 통해 쉽게 들여다 볼 수 있다.

 

, 사랑에 눈뜨기 시작한 이들의 언어

먼저 시는 이제 막 사랑에 눈을 뜨기 시작한 이들의 체험과 긴밀하게 결부되어 있다. 불현듯이 찾아든, 규정할 수 없는, 이 해일과도 같은 감정의 격랑이야말로 시가 담고 있는 세계의 전부다. 홀로 지내던 때와 누군가와 사랑에 빠졌을 때는 토마스 쿤이 말한 패러다임의 전환이라고 명명해도 좋을 만큼 세상을 보는 눈이 확연히 달라진다.

 

사랑에 빠진 이는 결코 평범한 사람들의 눈으로 세상을 보지 않는다. 눈에 콩깍지가 씌였는지, 그 남자의 튀어나온 광대뼈에도 복이 들어 있는 듯하고, 작달막한 키도 자신만만하고 안정감있게 보이며, 두툼하게 솟아오른 배도 인품이 들어찬 것으로 보인다. 이 놀라운 주관성, 대상의 객관적 본질을 멀찌감치 밀쳐두고, 오직 자신만의 독특한 눈길로 세상을 들여다 보는 것, 이것이야말로 시적 세계의 본질이다.

 

게다가 그 감정은 결코 논리적으로 설명할 수 없다. 다만 어렴풋한 느낌으로만 감지할 수 있을 따름이다. 그가 왜 좋은지 말할 수 없다. 그저 좋을 따름이다. 마음이 온통 그에게 몰두하고, 그가 없는 곳은 텅 빈 적막감으로 가득차고, 그가 들어서는 공간은 환한 빛살로 눈이 부실 지경이다. 힘겹게 자신의 감정을 무어라고 규정하는 순간, 그 실체는 이미 손사래 사이로 물이 빠져나가듯 달아나고 없다.

 

무어라고 딱히 명명할 수 없는, 명명하는 순간 이미 그것이 아닌 다른 무엇으로 변질되어 버리는 느낌, 사랑으로도 표현할 수 없는, 표현하는 순간 그저 범속한 사랑이 되어 버리는 절망감. 다 함께 쓰는 화장실 수건 마냥 쉰내가 뿜어져 나오는 언어.

 

공동 변소와도 같은 통속적인 사랑이란 단어로 결코 자신만의 설렘과 두근거림을 표현할 수 없다는 안타까움, 하여 3벌식 자판으로 바꾼채, 2벌식으로 두들겨보는 ㅓ ㄱ ㅏ ㅅ ㄱ ㅁ ㅈ ㅕ ㄱ 라는 고백. 그러나 자신만의 정갈한 모시 수건 같은 이 새로운 단어는 언어의 소통적 기능을 조금도 수행하지 못한채, 씁쓸함을 안겨 준다는 그 허망한 깨달음. ‘사랑합니다ㅓㄱㅏㅅㄱㅁㅈㅕㄱ의 사이, 그 어디쯤에 자신만의 독특한 질감과 서정으로 아로새겨진 동일한 의미의 언어를 징검다리인 양 놓겠다는 열망, 그것이야말로 시의 본질인 것이다.

 

사랑이란 범속한 단어, 그 근처에서 그 기미라도 알아차리게 만드는 단어를 결코 사용하지 않는다는 조건으로 자신만의 고유한 사랑을 전해 줄 언어를 모색하는 지난한 과정, 그것이 시적 글쓰기의 심부에 맞닿아 있는 작업인 것이다.

 

그리고 사랑에 빠졌을 때, 이 주체할 수 없는, 나 아닌 또 다른 존재를 향한 갈망 또한 시와 조금도 다르지 않다. 시 역시 다른 존재를 향한 짙은 그리움을 담고 있기 때문이다.

 

꽃에 대하여, 바람에 대하여, 또는 사랑하는 그대에 대하여 끝닿은 데 없이 이어지는 이 갈망의 도저한 깊이와 폭이야말로 시와 사랑의 공통분모인 것이다.

 

오직 자신만의 관점으로 세계를 보는 완벽한 주관성, 자신의 세계를 방기할 정도로 타자에 몰두하는 전적인 몰아(沒我), 그 어떤 언어로도 자신을 드러낼 수 없다는 절망과 모색 등이야말로 시와 사랑의 교차지점이다. 이들 특성은 견고한 세계의 질서를 모두 자신의 열망안으로 끌어들이며, 외적 대상 자체로부터 사유를 시작하는 바탕을 이루며, 직접적인 제시 대신 함축적인 은폐를 기도하게 만든다.

 

 

다음 한 편의 시는 이 모든 시적 본질을 들여다 보는 데 손색이 없다.

 

 

그 순간

 

기차는 마침내 빼액 소리를 지르며

저 산모퉁이를 돌아 사라져 가고

사내는 그녀가 마지막 건네주고 간

구리반지 하나를 일그러뜨리며

털썩 철로변에 주저앉는 그순간

사내의 가슴속에 가득 출렁이던 눈물이

왈칵 쏟아지기라도 한 듯

그 앞에 흰 들국화 서리서리 피어났습니다.

<고재종날랜 사랑,창작과비평사>

 

이 시는 여느 시가 그러하듯 삶의 체험들 가운데 가장 고양된 한 순간을 포착하고 있다. 사라져가는 사랑을 보내고, 망연자실 주저앉아 기다렸다는 듯 눈물이 왈칵 쏟아지는 바로 그 순간, 그 고양된 한 순간이 매달려 있다. 그 순간 흰 들국화의 꽃무덤과 눈물은 비유에 힘입어 날카롭게 하나로 연결되어, 화자의 주관성을 여지없이 드러낸다. 뿐만 아니라 감정의 곡절과 흐드러진 꽃자리를 동시에 서리서리 피어났습니다.’로 길어올림으로써, 사랑을 놓쳐버린 한 사내의 절망적인 가슴속 무너짐을 탁월하게 형상화하고 있는 것이다.

 

 

희곡, 격렬한 육체적 사랑의 표현

 

그러나 모든 사랑이 서정시가 갖는 미묘한 울림으로 한없이 지속되지는 않는다. 그 망설임과 두근거림은 어느새 격렬한 갈등으로 탈바꿈한다. 이른바 시적 단계가 끝나고 희곡의 단계에 돌입하는 것이다. 아마도 남녀가 손을 마주잡는 순간부터 이 충동적인 단계는 시작될 터이다. 단순히 먼 발치에서 설렘으로, 가슴을 아련하게 스쳐가는 동통으로 마주하는 남녀가 아닌, 자타가 공인하는 연인으로 돌입하는 그때부터 서정시 특유의 고양된 감정은 정서적인 막연함을 넘어 구체적인 육체가 대신한다. 이들 연인의 관계는 손을 잡고, 팔짱을 끼고, 입을 맞추는 행위가 사태를 주도한다. 희곡의 본질 역시 다르지 않다. 희곡의 주체는 언어라기보다 행위이다. 희곡은 인물과 인물의, 혹은 인물내면의 대립과 갈등 속에서, 햄릿의 독백처럼 ‘To be, or not to be, That is the question!' 이라는 극단적인 선택항 속에서 행위의 충돌을 문제 삼는다. 관계를 더욱 진전시킬 것인가 아니면 여기쯤에서 끝장을 낼 것인가라는 두 극단만이 선택 가능하다. 어정쩡한 중간항이란 애초에 존재하지 않는다.

 

더욱이 이 과정에서 인물들 자신의 냉철한 판단과 사색은 어떠한 역할도 하지 못한다. 극을 중도에서 멈추게 하는 방편은 극중 인물들의 판단과 사색이 아닌 주체의 힘으로는 어쩔 수 없는 운명적 장애에 부딪히는 수밖에 없다. 남자가 군대를 가거나, 극심한 부모의 반대에 봉착하였을 때에야만 신발을 바꾸어 신을 수 있을 따름이다. 아무쪼록 이 기회를 최대한 활용해야 한다. 이 때를 놓치면 희곡의 단계로 돌입한 남녀가 헤어질 방도는 그리 쉽지 않다.

 

그만 만나야겠다는 생각만으로 헤어질 수 있는 남녀 관계란 시적 단계에서나 가능할 뿐이다. 이미 희곡의 단계로 접어든 다음에는 결코 관계를 순탄하게 정리할 수 없다. 결혼이란 남녀 관계의 형식적 완결을 선취하거나, 도중에 서로에게 지독한 고통을 안겨주며 파멸할 수밖에 없다. 그렇지 않을 경우에는 생일이나 보내고 헤어지자거니, 이번 크리스마스는 함께 지내고 새해부터 만나지 말자거니 하는 비합리적인 다짐들만 난무할 따름이다.

 

시적 단계가 거의 정지된 시간 안에서 이루어지는 데 반해, 이 희곡의 단계는 짧은 시간 안에 지극한 높낮이를 바삐 오르내리며 격렬하게 사건이 진행되는 것도 특징이다. 내 사랑의 정점이 여기겠거니라는 생각은 그 다음날 어느새 갱신된다. 이전 사랑의 경험을 끊임없이 훌쩍 뛰어넘으며 사태가 전개되는 것이다. 터미네이터를 완전히 궤멸시켰다고 생각했는데 슬금슬금 조각난 팔과 다리가 다시 모여 새로운 투쟁을 감행해야만 하는 할리우드 영화처럼 새로운 사랑의 정점이 기다리며, 새로운 갈등과 충돌이 내연하고 있는 것이다.

 

헴릿의 비극,오셀로는 희곡의 본질을 유감없이 보여준다. 오셀로는 질투라는 인간적 결함으로 인해 자신의 운명을 비극 속에 빠뜨린다. 데스데모나를 살해한 직후 그 모든 불행이 자신의 오해를 끊임없이 넘나들면서 정점을 향해 달려가고 마침내 파멸적인 종국에 도달하는 것이다. 사랑을 매개항으로 결혼과 이별이라는 극단적인 대립항을 넘나들며 진행되는 사랑의 궤적과 희곡은 확연히 조응하는 것이다.

 

고단한 일상 속 사랑의 언어, 소설

시가 내밀한 정서적 울림에, 희곡이 운명적인 육체의 충동에 좌우된다면, 그 다음 사랑의 단계는 지극히 소설적이다. 아마 두 남녀가 만나 결혼을 하고, 깨소금이 됫박으로 쏟아지던 신혼이 지나 아이를 낳을 때쯤이 될 것이다. 그렇게 휘황하던 둘의 사랑은 이 즈음에 이르면 누추한 생활로 뒤덮인다. 이전의 설렘, 격렬함은 생활의 더께 속에서 조금씩 감추어져 버린다.

 

아내란 여자는 더 이상 예전의 그녀가 아니다. 찻집의 문을 밀며 환하게 얼굴을 들이밀던 그녀도, 눈썹을 파르르 떨며 입술을 내밀던 그녀도, 잠자리 날개같은 잠옷에 보일 듯 말 듯 휩싸인 채 속살을 붉히던 그녀도 더 이상 아니다. 사내 역시 다르지 않다. 두근거림 속에서 그녀를 향해 전화를 걸지 않는다. “, 오늘도 좀 늦는다. 먼저 자라라는 극히 사무적인 정보만 전달하고 전화를 끊는다. 마땅히 할 말이 없어도 마냥 수화기를 들고 그녀의 옅은 숨소리나마 들으려고 부심하던 그가 아닌 것이다. 황지우가 어느 시편에서 묘사한 그대로다.

 

잠든 식구들을 보며

 

아내는 티비를 켠 채로 잠들어 있다.

마지막 뉴스 보도, 24

오늘은 아무 일도 없었다. 한미 장병 15명을 태운 헬기, 합동군사훈련중 동해에 침물, 오늘은 아무 일도 없었다.

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이, 아내는 티비를 켠 채로, 아직도 티비 속에서 잠들어 있다.

김숙희, 십여년 전 영치금을 넣어 주고 간 중산층의 딸,

잘못 내려온 선녀, 철없는 부르조아.

나는 너의 온몸에 가난의 문신을 그려 놓았다.

나의 욕망이 낳은 두 아이들을 양 팔에 안고

너는 이 세상에 자고 있는 그러나 이 세상 사람 같지 않다.

아이들을 안고 승천하는 그대가 이 지상에 드리운 옷자락 끝 질긴 인연이구나.



나는 두 아이들을 떼어 놓고 두 팔로 아내의 가슴에 포개어 준다. 옻나무 관에 그대 입관하듯,

그리고 너와 나, 누구든 하나가 먼저 가겠지만 어느날 네가 죽으면, 내 가슴 지하 수천 M에 너를 묻으리.

 

<황지우,겨울나무로부터 봄나무에로민음사>

 

 

마지막의 엉큼한 시적 진술이 없다면, 이 시에서 묘사된 아내야말로 생활의 피로에 지쳐 나가 떨어진 거의 모든 아내들의 면모인 것이다. 그 지루한 일상성의 세계야말로 고단한 생활의 세계이며, 소설의 본질적인 세계인 것이다.

 

소설의 언어도 이러한 생활의 면모와 다르지 않다. 격렬함도 설렘도 소설을 이루는 하나하나의 문장들에는 찾을 수 없다. 생활의 쳇바퀴 안에서 거듭 어제와 다르지 않은 오늘이, 또 아무 일도 없는 내일이 전개되듯, 수없이 지루한 문장이 거듭되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안다, 소설의 마지막 문장을 읽는 그 순간, 책을 덮는 그 순간 우리들의 가슴은 둔중한 망치질을 당한 듯 울렁거리게 된다. 생활의 일상성 속에 깃든 삶과 존재의 의미가 확연히 모습을 드러내는 것이다.

 

적어도 연애를 하고, 결혼을 하는 그 즈음은 결코 생활이 아니다. 그것은 마치 어린 시절 생일날 먹는 이밥과 미역국처럼 특별한 체험일 뿐이다. 이 특별한 체험이 삶의 일부분이기는 할지라도 삶 그 자체일 수는 없다. 삶은 삶은 달걀처럼 조금은 비루하고 조금은 폭폭한 생활속에서야 비로소 알 수 있다. 그 누추한 생활이야말로 인생의 의미를 길어올리는 유일한 시간들이며, 두 팔에 각기 한 아이씩 거느리고 곯아떨어진 아내의 일상이야말로, 직장에서 혹은 거리에서 사람들과 부대끼느라고 파김치가 되어 돌아온 그 고단함이야말로 삶의 진정성과 맞닿아 있는 것이다. 적어도 이들 부부의 사랑은 겉으로 보아 권태로운 듯이 보이나, 일상적 삶 속에서 튼튼히 뿌리 내린 사랑이며, 출산과 양육이란 사랑의 고유한 의미를 그대로 견지하고 있는 사랑이 아닐 수 없다.

 

소설은 일상적 삶을 삶 그 자체의 형식인 처음과 중간, 그리고 끝을 가진 이야기로 다룬다. 그것은 특별한 경험도 아니며, 그저 범속한 우리들이 지루한 나날들 속에서 겪는 일들일 따름이다. 그럼에도 그 일상은 삶의 내밀한 본질을 엿보게 하는 확실한 단서가 된다. 소설은 삶의 형식을 빌어 삶 그 자체를 탐구하고 있는 갈래인 것이다

 

물론 일상이라고 해서 모험이 없는 것은 아니다. 삶에서 언제나 새로운 기투가 필요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서사의 현재적 형태인 소설은 모험담과는 거리가 멀다. 소설은 꿈이나 환상이 아니라,현실을 탐구한다. 심지어 이 끈덕진 일상으로부터 벗어난 여행담조차 현실을 비추어 보기 위한 것에 불과하다. 염상섭이 만세전을 통해 동경에서 서울로, 다시 동경으로 되돌아가기까지의 경험을 탐구하고 있다면, 소설의 주인공은 여행하는 이인화가 아니라, 그 여행길에서 마주치는 조선 민족의 궁핍한 삶이 주인공이다. 이인화의 행로는 일상적 삶으로부터의 일탈이 아니라. 일상적 삶 전체를 포괄하고자 하는 장치에 불과하다.

 

최근 들어 많은 소설들이 외국에서의 독특한 경험을 즐겨 다루고 있다. 그러나 이 이국적 경험도 궁극적으로는 지금 여기에서의 삶을 해명하고자 하는 노력에 불과하다. 윤후명이 하얀 배에서 모국어를 감동적으로 체득하고 있는 한 소녀를 그려내고 있는 것은 엄밀히 모국어를 홀대하고 영어 조기교육으로 어줍잖게 세계화를 꿈꾸고 있는 지금 여기에서의 언어적 현실을 조감하기 위한 정치인 것이다.

 

몰론 소설의 세계가 일상적 삶의 세계이며, 그 속에서 생의 의미를 발견하고자 하는 노력이기는 하나, 시나 희곡의 세계와 소설의 일상성이 어떠한 접점도 지니지 않는다는 것은 아니다. 잘 알려진 이효석의 메밀꽃 필무렵은 전형적인 서정적 소설이다. 이 작품이 시적인 것은 이 작품에 내재된 인물들의 생활이 빈약하며, 순간적으로 마주치는 봉평으로 넘어가는 고개마루에 흐드러지게 핀 메밀꽃의 풍경이 소설 전체를 압도하기 때문이다. 반면 김동인의붉은산은 극적인 소설이다. ‘이란 주인공은 처음에는 마을 사람들과 대립하며, 다음으로는 마을 사람들과 중국인 지주, 삵과 중국인 지주의 대립과 갈등으로 시시각각 갈등이 첨예화되는 가운데 파국을 향해 서사가 축조된다. 그러나 대부분의 소설에서 아름다운 풍정이나, 날카로운 갈등은 부차적일 수밖에 없다. 현실속에서 아름다움에 팔려 넋두리를 늘어놓거나, 첨예하게 세계와 충돌하는 것은 그다지 바람직하지 못하며, 어른스럽지도 못하다.

 

소설은 그 어떤 충격에도 직수굿이 자신의 할 일을 지속해 나가는 장년기의 형식이다. 이립(而立)의 삼십대, 불혹(不惑)의 사십대, 지천명(知天命)의 오십대의 지루한, 그러한 의미있는 삶이 소설 형식의 대상이자 특질인 것이다.

 

노부부의 사랑의 언어인 수필

그렇다면 생활의 일선에서 물러난 육십대의 삶, 노부부의 사랑은 수필의 특성에 걸맞는 내용일 것이다. 이들 노부부에게는 지금 여기에서의 삶이 그다지 중요하지 않다. 이들 부부는 삶의 격정에 떨거나 아름다움에 진저리를 치지 않는다. 그들에게는 살아가는 삶과 살아내야 할 삶보다 지나온 삶의 징검다리를 하나하나 들추어 보는 것이 삶 그 자체일 것이다. 그들은 어이, 그때 생각나? 그때 이녁은 그저 아무 말 없이 눈을 내리깔고는 옷고름만 만지작거리고 있었더랬지.” “이녁도 마찬가지지 뭐. 자꾸만 아무것도 걸린 게 없는 사방벽만 두리번거리고 있었잖아라고 고시랑거리며 대화를 나눌 것이다. 이 과거 회상의 형식, 삶을 살아낸 이들만이 갖는 삶에 대한 확신, 선명한 자신만의 눈길로 세상을 들여다 보는 분명함, 이 모든 것을 드러내는 문학의 갈래가 수필인 것이다.

 

끝으로 문학인지 아닌지 묘하게 걸려 있는 문학의 갈래는 비평이다. 아마도 서로 죽을 때까지 함께 할 수 없어, 앞질러 함께 살던 아내나 남편을 떠나 보낸, 홀로 남게 된 이가 그래, 그 남자와의 삶은 개판이었지, 늘 술에 절어 있었고, 자신만 아는 아주 이기적인 사람이었어라거나, ‘그래, 아주 행복한 삶이었어. 아마 다시 태어나도 그이랑 살았으면 싶어라고 가만히 읊조리게 될 것이다. 비평은 홀로 남은 청상이나 홀아비의 탄식인 것이다. 그러나 이미 상황은 끝나버린 다음이다.

 

문학적인 형식을 예비하는 문학적 체험

더러 삶을 살면서 감동적인 순간을 마주칠 것이다. 그러면 생각해 볼 일이다. 그것이 어떠한 형식에 가장 적합할지, 하나의 체험이 시로도 소설로도, 희곡으로도 쓰일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체험의 성격에 꼭 맞는 문학의 갈래가 앞질러 존재한다.

 

저물녘 서해로 지는 해가 빚어내는 아름다움에 흡뻑 도취되었다면, 그것은 시로서만 표현할 수 있다. 대상을 지각한 그 순간의 아름다움이기 때문이다. 한 여자를 만나고 헤어지는 아주 슬픈 사랑을 이야기라면 그것은 의당 소설로 옮겨져야 한다. 처음과 중간과 끝이 있는 시간의 흐름위에 이야기는 서 있기 때문이다. 이 남자를 선택할 것인지 저 남자를 선택할 것인지 귀로에 놓여 있다면, 결국엔 어느 남자도 얻지 못한 채 홀로 빈 집을 지키게 되었다면 그것은 소설이라기보다 희곡이 더욱 적절한 처소일 것이다. 어느 사람의 일화를 접하고 그것이 바로 인생이구나라는 깨달음이 동반한다면 그 경험은 수필이 되어야 한다. 수필은 삶이 무엇인지를 들추어본 이들만이 쓸 수 있는 글이기 때문이다.

 

형식은 내용의 형식일 뿐, 내용과 무관한 형식이란 어줍잖은 실험에 불과하다. 삶의 아름다움과 슬픔을 체험하는 그 순간, 문학의 갈래는 이미 예비되어 있는 것이다. 사랑의 궤적 속에 앞질러 감동의 유형이 존재하듯, 왜 내 아내에게는 시적 감동이 없는가라는 질문 자체가 갈래의 본질을 몰각한 어리석은 질문이다.


김상욱. 대방여중에서 국어를 가르쳤다. 저서로 시의 길을 여는 새벽별 하나와 편역서로 코페르니, 작은 철학자등이 있다.

 

 

 

개인별 탐구 과제

1. 단군신화에 나타나는 현실적 생활상의 요구는 무엇인가?

2. “홀로 지내던 때와 누군가와 사랑에 빠졌을 때는 토마스 쿤이 말한 패러다임 의 전환이라고 명명해도 좋을 만큼 세상을 보는 눈이 확연히 달라진다.”는 밀 의 의미를 생각해 보고 그러한 경험이 있느면 정리해 보자.

3. 본문에 나오는 시와 사랑의 관계를 핵심적인 내용만 간추려 요약해 보자.

4. 희곡은 사랑의 어느 단계에 비유하여 설명하고 있는가?

5. 사랑의 시적 단계와 희곡의 단계가 어떻게 다른가?

6. 소설을 사랑에 비유한다면 어느 단계에 해당한다고 볼 수 있는가?

7. 시나 희곡의 세계와 소설의 일상성이 지니는 접점은 무엇인가?

8. 노부부의 삶의 모습을 생각하며 수필의 특성을 정리해 보자.

9. 사람의 일생을 그래프로 그리고 문학의 갈래를 그래프 위에 그려 넣어 보자.

 

모둠별 토의 과제

1. 윗글에 인용된 고재종의 시 날랜 사랑과 황지우의 시 겨울나무로부터 봄나 무에로를 읽고 시인의 주관성과 대상을 바라보는 독특한 눈길이 나타난 부분 을 찾아서 정리해 보자.

 

 

 

 

 

728x90
반응형

블로그의 정보

국어독서창고

처사21

활동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