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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사의 보편성과 특수성 - 이기백

by 처사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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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사의 보편성과 특수성

이 기백

 

 

1. 개별성과 특수성

역사의 연구는 개별성을 추구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즉 구체적인 과거의 사실 자체에 대한 구명을 꾀하는 것이 역사적인 것이다. 가령 고구려의 한족과의 투쟁을 고구려라든가 한족이라든가 하는 구체적인 요소들을 빼 버리고, 단지 자주적 대제국이 침략자와 투쟁했다.” 고만 서술해 버린다면 그것은 한국사일 수가 없다. 요컨대 일정한 시대에 활약하던 일정한 인간 집단의 구체적 활동에 대한 서술을 빼면 그것은 역사일 수가 없는 것이다. 이것은 사회적인 현상에 있어서도 마찬가지이다. 가령 화백회의를 설명하는데 있어서 귀족 회의가 있었다.” 라고만 한다면 그것이 바람직한 설명일 수가 없는 것이다. 이것은 문화적인 현상에 있어서도 다를 바가 없다. 석굴암의 미술을 설명하면서, 신라의 경덕왕대라든가 김대성이라든가 조각의 기법이라든가에 대한 설명을 빼고, 그저 우수한 미술품이 만들어졌다.” 고만 한다면, 이것은 물론 무의미한 서술임이 분명하다.

 

그런데 이 같은 역사의 개별성이 특수성으로 이해되는 경우가 있다. 그리고 이 특수성은 흔히 고유성과 상통하는 것으로 생각되어 왔던 것이다. 민족주의 사학의 경우가 그러한 예에 속한다. 가령 신채호가 한국사의 성쇠를 한국의 고유 사상이었다고 생각한 낭가 사상(郎家思想)’ 의 성쇠에 의하여 좌우되었다고 이해한 것은 그러한 예가 될 것이다. 또 최남선이 조선 정신에 의해서 한국사를 이해하려고 한 것도 그러한 예에 들 것이다. 전자가 낭가 사상이라는 구체성을 띤 사상 체계를 가지고 한국사를 설명하는 논리적인 일관성을 지니고 있는 데 대해서, 후자는 역사 뿐만 아니라 자연 속에서까지 찾을 수 있다고 믿은 추상적인 조선 정신으로써 설명하려는 초논리적인 면을 드러내고 있다. 이 이지적인 것과 낭만적인 것과의 차이는 중요한 것이며, 신채호가 끝내 민족을 위하여 순()할 수 있고 최남선이 변절을 하게 되는 분기점을 나타내 주는 것이라고 믿는다. 그러나 특수성을 강조한다는 관점에서 볼 때에 양자는 같은 입장에 서 있었다고 하겠다.

같은 민족주의 사학자라도 박은식이나 정인보의 경우에는, 비록 그러한 표현을 쓰고 있지는 않으나, 보편성의 기초 위에서 한국사를 보고 있다. 박은식이 역사의 근본으로 생각한 <>’ 혹은 정인보가 강조한 은 인류 공유의 것이었다. 그러므로 그것은 보편성의 성질을 띤 것이었다. 따라서 이들은 인간의 보편성을 토대로 하고 한국사를 이해하려고 한 것이다. 그러나 박은식에 의하면 혼은 민족마다 다 있지만 또 각기 다른 것이었다. 가령 중국의 혼은 문학에 의탁을 하였고, 돌궐의 혼은 종교에 의탁하는 등의 차이점이 있다고 본 것이다. 또 정인보에 있어서는 로서의 분발이라야 힘이 있는 것이라고 강조하고 있다. 그러므로 이들은 보편성을 토대로 한국사의 특수성을 생각하고 있는 것이 분명하다. 다만 이 양자의 관계에 대한 이론적인 해명은 되어 있지가 않으며, 결국은 특수성 내지는 고유성이 보다 강조되는 듯한 인상조차 받게 된다.

 

이러한 특수성이라기보다는 고유성의 강조는 일제의 침략 속에서 민족 정신을 고취하려는 것이었으며, 따라서 그럴 만한 역사적 의의가 있는 것이다. 그러나 이 이론은 한국 민족을 인류로부터 고립시키고 한국사를 세계사로부터 유리<遊離>시키는 결과를 가져올 것이다. 또 결국은 민족의 우열론<優劣論>으로 기울어져 독일의 나치즘이나 일본의 군국주의를 자라나게 한 것과 같은 온상<溫床>을 제공해 주는 결과를 가져올 염려도 있다. 그러므로 이것은 결코 바람직한 이해 방법이라고는 할 수가 없다.

 

 

2. 보편성의 추구

앞에서 살펴본 바와 같은 특수성 이론을 비판하고 한국사의 보편성을 강조한 것이 백남운이었다. 그는 일제의 식민지 관리들이 내세운 조선 특수 사정을 독점적 정치적인 특수성 이론이라 규정하여 배척하는 한편, 한국 문화사를 독자적인 소우주<小宇宙>로서 특수화 하려는 기도를 신비적<神秘的> · 감상적<感傷的>인 특수성 이론으로서 또한 배척하였다. 그리고 이들은 모두 인류 사회 발전의 역사적 법칙을 거부하는 점에서 한가지로 반동적인 것으로 생각하였다. 그에 의하면 한국사도 세계사적인 일원론적 역사 법칙에 의해서 다른 민족과 거의 동궤적<同軌的> 발전 과정을 거쳐 왔다. 즉 원시 씨족 사회 ·노예제 사회 ·동양적 봉건 사회 ·이식<移植> 자본주의 사회의 발전 과정이 그것이다. 이같이 그는 세계사적인 일원론적 역사 법칙이라는 보편성에 입각해서 한국사를 이해하려고 하였으며, 따라서 이 보편성을 인식하는 것이 한국사 연구의 기본적인 과제라고 생각하였던 것이다.

 

이렇게 보편성을 강조하고 있지만, 그렇다고 그가 특수성을 전혀 문제삼지 않은 것은 아니다. 가령 지리적인 조건, 인종학적인 문화 형태의 외적 특징 등 소위 외관적인 특수성을 인정하고 있다. 또 본질적인 특수성이 아니라는 단서 아래 발전 과정의 완만한 템포라든가, 문화 제상<諸相>의 특수적인 농담<濃淡>이 있다는 것도 인정하고 있다. 이 같은 그의 주장에 따르는 경우, 한국사의 연구에서 문제가 되는 것은 실은 그가 중요하지 않다고 강조한 특수성에 놓여지게 되는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든다. 왜냐하면 일원론적인 발전 과정을 서술하는 것은 세계사이지 한국사는 아닐 것이기 때문이다. 한국사를 세계사 속에 해소시키면 모르거니와, 그렇지 않은 이상 왜 한국사의 발전은 다른 나라에 비해 늦어졌는가 하는 등의 그 특수성에 더 관심이 쏠릴 것이기 때문이다.

 

가령 실제로 그가 주장한 다음과 같은 구체적인 예를 검토해 보기로 하자. 그는 고려 사회를 봉건 사회로 규정하고 있으며, 그 고려 봉건 사회의 특징을 집권 봉건제적 토지 국유제의 특수성에 두고 있다. 이것은 봉건제라는 점에서는 세계사적인 보편성을 지니고 있지만, 집권적이고 토지 국유제였다는 점에서는 특수성을 지니고 있다고 생각한 것으로 이해된다. 이러한 특징을 지닌 고려 사회를 그는 전형적인 아시아적 봉건 국가라고도 부르고 있다. 아시아적 봉건 국가로서 전형적이라는 것은, 바꾸어 말하면 유럽의 전형적 봉건 사회에 대해서 변형적인 봉건 사회라는 뜻이 되는 것으로 이해된다.

이상에서 소개한 것과 같은 백남운의 의견을 살펴볼 때, 다음과 같은 몇 가지 의문에 부닥치게 된다.

 

첫째는 그가 보편성을 강조하고 있지만 결국은 어쩔 수 없이 새로운 특수성 이론에 빠져 들어간 것이 아닌가 하는 점이다. 그것은 예컨대 고려 사회가 집권적 토지 국유제였다는 것은, 어떤 독자적 특수성을 전제로 하지 않고, 다만 일원론적인 발전 법칙만에 의지해서는 설명할 길이 없기 때문이다. 그는 아마 본질적 특수성이 아닌 지리적 조건, 인종학적 골상<骨相>, 발전 과정의 완만한 템포, 문화 제상의 특수적인 농담<濃淡> 등으로 이를 설명하려고 할지 모르겠다. 그러면 그가 말한 이들 외관적인 특수성은 아무 법칙성이 없이 자의적으로 작용한다고 생각한 것이었을까. 만일 이러한 무법칙한 요소들에 의해서 한국사의 특수성이 나타난 것이라면, 더구나 발전 과정의 완만성 같은 것이 초래되는 것이라면, 문제는 심상하지가 않다고 생각한다. 때로는 발전의 후진성이 한국사의 운명을 결정짓는 중요한 계기가 되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것은 나아가서 한국사가 무법칙한 우연에 의하여 좌우되었다는 결론을 이끌어낼 것이기 때문이다. 이것이 그의 이론에 대한 둘째 의문이다. 그리고 셋째로는 일원론적 발전 법칙을 주장하는 경우에 어떤 형태의 것이건 특수성이 개재할 여지가 없는 것이 아닌가 하는 보다 근본적인 의문이다. 비록 외관적이요 비본질적이라 하더라도, 역사에 작용하는 다른 요소들을 인정하는 경우에, 이는 결국 일원론적 발전 법칙을 스스로 부정하는 것은 아닐까 하고 생각한다.

 

 

3. 보편성과 특수성의 이론적 조화

그러면 민족적인 고유성에 의해서도, 또 일원론적인 보편성에 의해서도 한국사의 올바른 이해가 불가능하다면, 이 문제는 어떠한 방법으로 해결되어야 하는 것일까. 이에 대한 해답을 얻기 위하여는 역사학의 본질이 어디에 있는가에 대한 문제부터 알아보는 것이 좋겠다.

 

앞서 필자는 역사학이 개별성을 추구하는 학문이라고 말하였다. 그러면 역사학은 구체적인 과거의 사실을 추구하는 것만으로써 만족한다고 할 수가 있을까. 예컨대 광개토왕이 어디어디를 언제 정복하고 한군<漢軍>과 왜군<倭軍>을 어디서 격파하고 하는 등의 구체적 사실들을 기록함으로써 역사학의 임무가 끝났다고 할 수가 있을까. 또 화백<和白>의 경우에, 법흥왕 14년에 불사<佛寺>를 건립하겠다는 것을 반대하여 왕을 궁지에 몰아넣고 끝내는 이차돈을 사형에 처하게 했다든가, 혹은 또 진지왕을 몰아내고 진평왕을 새로 왕으로 추대했다든가 혹은 또 진덕여왕 때 알천공<閼川公> 등이 남산 우지암에서 회의를 하였다든가 하는 구체적 사실만을 나열해 놓았댔자, 그것이 바람직한 화백에 대한 서술일 수가 있는 것일까. 지난날에는 단순한 사실의 나열만 가지고서도 역사라 했었다. 그러나 이것은 하나의 기록은 되겠지만 학문일 수는 없는 일이다. 학문으로서의 역사학은 물론 기록 이상의 것이어야 한다. 즉 역사학은 과거의 사실에서 어떤 의미를 찾아보는 데 가치가 있는 것이다.

 

필자는 앞서 한국사는 한국 민족이 겪은 과거의 구체적인 사실을 서술하는 것이 그 임무라고 하였다. 그러나 이것은 약간 수정 되어야만 하게 되었다. 즉 한국사의 서술은 한국 민족이 겪은 과거의 사실에서 어떤 의미를 찾아보는 데 궁극의 목표가 있다고 해야만 하겠다. 그리고 이 목표를 달성하기 위하여는 사실의 탐구와는 차원을 달리하는 작업이 필요한 것이다.

 

역사적 사실이 지니는 어떤 의미란 우리가 보통 역사적 의의라고 부르는 것이다. 이 역사적 의의를 찾는 것이 사실의 탐구와는 차원을 달리한다고 해서 누구나 멋대로 그 의의를 규정할 수 있다는 것은 아니다. 종교가나 철학자들도 그들의 신념에 따라서 이러한 작업을 할 수가 있겠지만, 그것은 신앙이나 철학일 수는 있겠으나 역사학이라고는 할 수가 없다. 역사학에서 말하는 역사적 의의의 추구란 것은, 시대적 · 사회적인 관련성을 캐내는 작업을 말하는 것이다. 이같이 시대적 · 사회적 관련 속에서 과거의 사실들이 지니는 위치를 밝히는 것이 역사학의 과제인 것이다. 그러므로 이 관련성을 훌륭히 설명해 내면 그것이 곧 역사학의 본질에 육박하는 것이 되다고 믿는다.

 

그러면 시대적 · 사회적 관련을 어떻게 찾아낼 수가 있는가. 이 경우에 역사가들은 일차적으로 사료<史料>에 나타난 증거들을 찾아보게 된다. 이것은 물론 역사가들이 제일 먼저 해야만 할 중요한 작업임에는 틀림이 없다. 그러나 또 이것만으로써 모든 문제를 해결할 수 없는 것도 분명한 일이다.

 

가령 신라에서 불교를 받아들여 절을 짓는 데 반대한 대신의 말을 들어 보면, 흉년이 들어서 백성들이 불안하고 이웃나라 군대가 침입하여 전쟁이 멎지 않는데 어느 겨를에 백성을 괴롭히어 무용한 집을 짖겠는가 하는 것이었다고 한다. 그러나 이렇게 표면에 내세운 것이 그들이 불교를 반대한 진정한 이유가 될 수 없다는 것은 명백하다. 만일 그러한 식으로 당사자들의 말을 따른다면, 이완용도 애국자가 될지 모르고, 이등박문도 한국의 독립 수호자가 될지 모른다. 그리고 이러한 표면에 내세운 말만을 따르는 사람은 이미 역사가가 아니라 그들 정치가의 비서나 대변인으로 전락했다고 할 밖에 없다.

 

역사적 인물들이 표면에 내세운 이유만으로 사실과 사실 사이의 관련성을 설명할 수가 없다면, 무엇으로 이것은 가능하게 되는 것일까. 그것은 다름아닌 인간 사회를 지배하는 보편적인 법칙이라고 믿는다. 불교를 믿고자 한 법흥왕이나 이를 반대한 귀족들의 태도는 모두 왕권 중심의 중앙 집권적인 귀족 국가가 성장하는 과정에서 국가 종교에 대하여 일으키는 이 양자의 반응이라는 일반적인 현상과 관계가 있다. 그러한 현상을 꿰뚫고 있는 보편적인 법칙이 신라의 경우에도 작용하고 있다고 보는 것이 불교 수용의 실제를 훨씬 더 잘 설명해 주는 것이다.

 

이렇게 인간 사회에서 일어나는 사실과 사실 사이의 관계는 일정한 보편적 법칙의 지배를 받고 있다. 이러한 보편적 법칙은 개인의 심리적 반응이라든가 자연 환경의 영향이라든가 하는 데서부터 시작하여, 석기 · 청동기 · 철기 등의 도구의 발달에 따르는 사회의 변화라든가, 자연 경제로부터 화폐 경제로 발전한다는 따위의 경제적인 변화라든가, 무력의 강약에 따르는 강대국과 약소국 사이의 관계라든가, 선진 문화와 후진 문화 사이에 벌어지는 전파 · 수용 관계라든가, 신분의 고하에 따르는 지배층의 특권 의식과 이에 대한 피지배층의 갈등이라든가 등등 이루 셀 수 없이 많은 법칙들을 생각할 수 있는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법칙들의 도움을 받지 않고는 역사적인 사실과 사실 사이의 관련성을 해명해 낼 수가 없다.

 

한국사도 물론 다른 세계의 모든 민족사의 경우에서와 꼭 마찬가지로 인간 사회를 지배하는 많은 법칙들의 지배를 받고 있는 것이다. 한국사는 결코 한국 민족에게만 적용되는 어떤 특별한 법칙의 지배 밑에 놓여 있는 것이 아니다. 도시 우리는 그러한 법칙이라는 것을 상상할 수가 없다. 따라서 우리는 한국사를 이러한 보편성을 토대로 하고 보아야만 한다. 적어도 한국 사학이 신화나 종교가 아닌 학문으로서 존립하는 이상, 이것을 부정하는 것은 그 자신의 뿌리를 뽑아 버리는 것이나 마찬가지 일이다.

 

역사가 보편적인 법칙에 의해서 지배된다고 하면 모든 민족의 역사는 동일해야 하지 않을까 하는 의문이 생길 것이다. 만일 역사를 지배한 법칙이 단 하나밖에 없다는 일원적인 입장에 선다면 이것은 당연한 논리적인 귀결이 되겠다. 그런데 실제에는 그렇지가 못하여 여러 민족의 역사는 각기 다른 양상을 지니고 있는 것이다. 학문에 있어서 논리적 일관성은 그 생명인 것이며, 이 논리의 귀결이 역사의 실제와 일치하지 않는 경우에 그 이론에는 잘못이 있다는 것을 말하여 주는 게 된다. 그러므로 일원론적 법칙에 의한 역사의 이해는 배격될 수밖에 없다. 요컨대 역사를 지배하는 법칙은 여럿인 것이며, 이 다원론적 법칙들이 여러 민족의 역사를 다양한 것으로 만들었던 것이다. 즉 민족사의 특수성은 다원적인 법칙들이 결합하는 양상이 서로 다르기 때문에 생긴 결과인 것이다. 그러므로 한국사의 특수성은 한국사에 작용한 법칙들의 결합 양상이 다른 나라의 경우와는 달랐기 때문이라는 결론을 얻게 된다.

 

이러한 다원적 법칙의 이론에 대하여서는 종종 회의와 불만을 표시하는 경우를 찾아보게 된다. 그것은 다원론을 제시함으로 해서 역사의 발전에 대한 방향 감각을 흐리게 하고 따라서 문제의 소재를 밝히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모호하게 하는 결과를 가져오지 않을까 하는 의구에서이다. 그러나 이것은 전혀 오해인 것이다. 무엇보다도 이것은 엄연한 객관적인 진리에 대하여 인간의 태도를 겸허하게 할 것이다. 역사에 작용하는 법칙의 진리에 대한 외경심이야말로 인간에게 가장 필요한 것이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어떤 하나만을 고집하고 밀고 나가면 모두가 자연히 해결될 수 있다는 안이한 고정 관념 때문에 얼마나 많은 역사상의 죄악이 저질러졌는가를 생각하면 족하다고 믿는다.

 

당면한 역사상의 문제를 어떤 하나의 법칙에 입각해서 해결하려고 시도하는 것은 때로 필요한 일이다. 그러나 당면한 그 문제는 그런 방향에서 해결할 수가 있겠지만, 그 결과 우리가 미처 생각하지 못한 다른 방향에서 새로운 문제가 제기될 수 있다는 생각을 역사에서 배운다는 것은 현명한 일이다. 공업화를 절대적인 것으로 생각하여 이루어 놓은 근대 문명의 결과로 발생한 공해 문제가 인류의 생존 자체를 위협하고 있다는 하나의 사실만을 생각해 보더라도 이 점은 짐작이 가리라고 믿는다. 이야기가 엉뚱한 곳으로 흐른 것 같으나, 여기서 분명히 해두어야 할 것은 객관적인 진리에 충실해야 한다는 사실이다. 이것은 곧 학문의 생명이다. 그리고 객관적인 진리에서 벗어나면, 민족도 망하는 것이고 인류도 망하는 것이다.

 

4.특수성 속에서의 보편성의 발견

앞 장에서 한국사의 특수성은 결국 한국사에 작용한 법칙들이 결합하는 양상이 다른 나라의 경우와는 달랐기 때문이라고 하였다. 법칙 자체는 보편적인 것이지만, 그 결합하는 양상이 다른 나라의 경우와 달랐다고 한다면, 다른 나라의 역사에서는 희미한 면들이 한국사에서는 분명히 드러나는 국면도 있다고 보아야 하지는 않을까. 또 한국사의 경우를 다른 나라의 경우와 아울러 연결지어서 생각해야만 보편적인 법칙이 완전한 모습을 드러낸다고 보아야 하지는 않을까.

 

우리는 물론 다른 나라의 역사에서 얻은 법칙들을, 구체적인 사실과 일치하는 한, 한국사의 이해를 위하여 주저없이 적용해야 한다. 가령, 신라의 혈연 조직을 이해하는 데 아프리카의 탈렌시족<>이나 누어족의 그것이 도움이 되기 때문에, 최근 이를 적용한 연구가 행해지고 있고, 그 결과 큰 성과를 거두고 있다. 이 사실은 반면에 한국사의 구체적 사실에 대한 체계적 이해가 다른 나라의 역사 이해에도 도움을 줄 수 있으리라는 결론을 얻게 한다. 모르긴 하지만 신라의 골품제에 대한 지식은 이웃 여러 나라의 고대 신분제를 이해하는데 적지 않은 도움을 주리라고 믿는다. 이런 관점에서 본다면 좀더 한국사의 구체적 사실들을 정리해서 그 나름의 법칙을 발견해 보려는 노력이 필요한 것이 아닐까 하고 생각한다.

가령, 이것이 꼭 적합한 예가 될는지 어떤지는 모르지만, 한국사에서의 정치적 지배 세력의 변천 과정을 살펴보면 대략 다음과 같은 것으로 믿어진다. , 처음 신석기 시대에는 특권을 지닌 정치적 지배자가 없는 씨족 공동체 사회였다. 그것은 성읍<城邑>국가가 되면 종래의 부족장 가족과 씨족장 가족을 중심으로 한 지배 세력이 형성되었다. 그런데 삼국 시대가 되면 왕족의 지배자적 지위가 강화되고, 거기에 왕비족이 참여하는 정도로 지배 세력군이 축소되었다. 그러다가 신라 통일기가 되면 김씨 왕족 일족에게 권력이 집중되고, 게다가 왕권은 전제화<專制化>하였다. 이 신라 통일기의 전제 정치 시대를 정점으로 하고, 그 이후는 반대로 정치적 지배 세력의 저변이 점차 확대되어 가는 경향을 나타내었다. 중앙의 육두품과 지방의 호족<豪族>들의 세력은 드디어 신라의 왕족 중심의 골품 제도를 타도하고 고려의 귀족 사회를 건설한 것이었다. 그러므로 고려 귀족 사회는 이성<異姓> 귀족을 기반으로 하고 성립하였다. 그러나 고려에서 정권에 참여한 귀족은 개경을 중심으로 한 근기<近畿> 지방 출신의 귀족에 한하였고, 거기에 경주 출신이 참여할 정도였다. 그러던 것이 이조의 양반 사회가 되면, 그 주인공인 사대부들의 사회적 기반은 전국적으로 확대되었고, 다만 평안도와 함경도가 제외될 뿐이었다. 고려 시대와는 비길수 없을 정도로 지배 세력의 수적인 증가를 초래하였다. 그러다가 20세기에 들어서면 이제 문벌이나 신분 제도는 폐지되고 지방 차별도 없어졌다. 상공업자나 농민을 포함한 거족적인 운동을 일으킬 기반이 이러한 과정에서 닦아져 갔던 것이다.

 

이렇게 보아 올 때에 정치적 지배세력은 신라 통일기를 분기점으로하여 흥미있는 변화를 겪어 왔다고 할 수가 있다. 물론 이것은 하나의 역사적 현상에 불과한 것이며, 따라서 법칙이라고 할 수는 없을지 모르겠다. 그러나 가령, 지배층을 형성한 여러 세력들 중에서 유력한 세력이 권력을 독점하는 방향으로 가던 것이, 이어 최고 지배층의 바로 밑의 계층이 점차 지배자로 대두하여 결국은 지배 세력의 기반을 확대시키는 현상을 초래한 것은 켤코 우연만으로 돌릴 수가 없을 것 같다.

 

필자는 위의 현상이 반드시 다른 나라의 역사에도 그대로 적용되는 것인지 어떤지를 단정할 자신이 없다. 그러나 외국사<外國史>의 이론을 일방적으로, 때로는 억지로 적용하는 것에 스스로 만족해 하는 것보다는, 이러한 체계적 이해의 노력이 훨씬 값진 것이 되리라고 믿는다. 그리고 이러한 점은 사회나 정치뿐 아니라 사상이나 미술, 혹은 그 밖의 다른 모든 방면에서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5. 맺는말

결국 한국사라 하더라도 그것은 한국사만을 움직이는 어떤 고유한 특수성에 의해서 지배된 것은 아니다. 그것은 세계 모든 나라의 역사에 한결같이 적용될 수 있는 보편적인 법칙 밑에 놓여 있는 것이다. 따라서 한국사와 세계사와는 서로 뗄 수 없는 긴밀한 관계에 있다. 서로가 도움을 받고 주어야 하는 것이다. 최근 우리 나라에서는 한국사의 중요성을 강조하는 나머지 이를 세계사와 떼어 놓으려는 경향의 농후인데, 이것은 결코 환영될 성질의 것이 아니다. 서양사의 연구 수준이야 어떻든 한국사의 연구만은 발전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은 분명히 어리석은 잘못된 생각이다.

 

한국사를 지배하는 보편적인 법칙은, 그러나 하나가 아니라 여럿인 것이다. 즉 일원론적인 법칙의 지배밑에 있는 것이 아니라 다원적인 법칙의 지배 밑에 있는 것이다. 그리고 이 법칙의 다원성이 한국사의 특수성을 창조하는 원인이 된다. 그러므로 결국 한국사의 특수성을 보편적 법칙과의 관계 속에서 밝히는 것이 한국사를 올바로 이해하는 길이 된다.

과거에는 때로 역사 발전이 전형적이니 변형적이니 하는 말을 하여 왔다. 이 경우에 한국을 포함해서 동양 여러 나라의 역사는 변형적인 것으로 치부되는 것이 일쑤였다. 그러나 이것은 정당한 이해가 되지 못한다. 우리는 그런 관념에서 떠나서 우리의 역사를 차분히 이론적으로 구명하도록 노력해야 할 것이다. 그 과정에서 우리는 정치 · 경제 · 사회 · 문화 등 여러 면에서 한국의 그것과 세계 다른 나라들의 그것과를 비교해 보아야 한다. 그리고 그 결과로 나타나는 차이점들이 어떠한 데서부터 말미암았는가를- 지금까지의 논리로 한다면 어떠한 법칙의 어떠한 작용에 의한 것인가를- 밝혀 내야 할 것이다. 이것은 물론 멀고도 험한 길이라는 것을 알고 있다. 그러나 이것이야말로 한국사를 올바로 이해하는 정당한 길이라고 믿는다. 이렇게 함으로 해서 한국사로 하여금 세계사에서 올바른 위치를 차지할 수 있게 할 것이며, 나아가서는 한국사가 세계사에 공헌할 수 있게도 할 것이다.


 

이기백. 사학자로 한림대학 교수로 재직 중이다. 저서로는 한국사 신론, 민족과 역사, 신라 정치 사회사 연구등이 있다.

 

 

 

개인별 탐구 과제

1. 역사의 연구에서 개별성을 추구한다는 것은 어떤 연구 방법을 말하는 것인 가?

2. 신채호와 최남선의 역사 연구 태도의 공통점과 차이점은 무엇인가. 그리고 그 러한 차이에 의해 나타난 결과는 어떻게 다른가?

3. 역사 연구에서 고유성을 강조하는 것이 일정한 역사적 의의를 지니고 있으면 서 동시에 바람직하지 못한 방법이 될 수 있다고 했다. 이 때, 역사적 의의는 무엇이며 바람직하지 못한 방법이 될 수 있다고 한 이유는 무엇인가?

4. 보편성에 입각하여 한국 역사를 인식한다는 것은 어떻게 한다는 것인가?

5. 보편성을 강조하는 백남운씨의 견해에 대해 제기할 수 있는 의문은 무엇이라 고 했는가?

6. 학문으로서의 역사학은 그 방향을 어떻게 설정해야 한다고 했는가?

7. “신라의 혈연 조직을 이해하는 데 아프리카의 탈렌시족()이나 누어족의 그 것이 도움이 된다.”고 한 것은 역사 연구의 어떤 특성을 설명하기 위한 예인 가?

 

 

모둠별 토의 과제

1. 이 글 전체의 내용을 바탕으로 하여 바람직한 역사 연구의 방법에 대하여 토 의를 하고 그 내용을 발표해 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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