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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기 도취” 시대의 노래방 - 강 준 만

by 처사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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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기 도취시대의 노래방

강 준 만

 

 

나르시시즘은 자기 자신이 관심의 대상이 되는 자기 도취 상태를 말한다. 노래방에서의 자기 도취는 나르시소스의 행태와 어찌 그리 닮았는지 놀랄 지경이다. 노래방의 나르시소스들은 밀폐된 노래방에서 성대의 떨림을 한껏 만끽하고 육성을 기계음으로 전환시키는 고성능 마이크의 진동으로 하여금 귀를 애무케 하고 노래에 맞게 난무하는 화려한 영상 이미지로 하여금 눈을 간지럽히게 하는 자위 행위를 통해 자기 도취에 빠져 든다.”

 

노래방 이야기를 시작하면서 엉뚱하게 서울의 교통 문제를 거론한 데에는 그럴 만한 곡절이 있다. “거리 두기”, 또는 낯설게 하기의 자세를 가져 보자는 것이다. 그래야만 노래방이 보인다. 서울 사람은 서울을 잘 알 것같지만 한 달에 한두번 서울에 가는 지방 사람보다 모르는 부분이 있다. 특히 서울의 전체 모습을 잘 모른다. 그건 마치 외국인의 눈에만 우리의 모습, 우리가 미처 깨닫지 못했던 것이 있는 것과 마찬가지다.

 

노래방도 그러하다. 지난 구십일년 부산에 처음으로 등장한 뒤로 전국으로 퍼져 나간 노래방은 구십삼년 현재 전국에서 이만몇 군데가 번창하고 있으며, 그 매출액만도 한해 몇조원에 이른다. 이미 구십이년 십일월의 갤럽 조사에선 우리나라 국민의 육십일 퍼센트가 노래방이 건전하다는 평가를 내렸고, 구십삼년 구월에 서울 와이더블유시에이에서 조사한 바에 따르면 서울 시내 직장인이면 적어도 주마다 한 번씩 노래방을 찾는 것으로 나타났다.

 

서울과 지방, -녀 노소를 가릴 것없이 선풍적인 인기를 끌고 있는 노래방은 삼년도 채 안 돼 우리의 대중 문화이자 생활 문화의 일부인 것으로 굳게 뿌리를 내렸다. 그런 상황에서 노래방의 참 모습을 제대로 보기는 매우 어렵다. 그렇지만 잠시 시치미를 뚝 떼고, 노래방을 처음으로 보듯이 전국적인 노래방 열기를 냉철하게 관찰해 보자.

 

필사적으로 노래를 부른다.

노래방 이야기만 나오면, 많은 사람들이 우리 한국인은 본디 노래를 좋아하는 민족이라는 말을 한다. 그러나 뽕짝에서 랩에 이르기까지 남-, 노소할 것 없이 노래에 빠져드는 한국인의 노래 열기를 오로지 민족성으로만 설명하려 드는 것은 무언가 부족하다. 서울대 서우석 교수에 따르면, “술자리에서 노래 부르는 습관은 개화기에 들어 비로소 생겨났다고 한다. 개화기로부터 망국의 설움을 은유적으로 해소하는 방안으로 일본 엔카풍의 가요가 유행하기 시작했고 그 풍습이 여태까지 이어져 내려오고 있다는 것이다.

 

돌이켜보건대 우리의 눈부신 경제 성장은 철저히 문화를 희생으로 한 것이었다. 최근에 들어 놀이 문화라는 말이 자주 사용되지만 과거엔 놀이라고 하는 단어 자체가 흔히 부정적인 의미로 사용되었음을 상기할 필요가 있다. 새마을 노래가 우렁차게 울려퍼지는 경제 건설의 현장에서 문화는 한마디로 사치가 되었다. 정부는 놀이 문화의 건전한 육성에 투자는커녕 관심조차 기울이지 않았다.

 

그러나 인간이 놀지 않고 살 수 있을까? 그럴 수는 없을 것이다. 그렇다면 대중이 갈 길은 이미 예정돼 있었던 셈이다. 놀이 공간이 아예 없는 상황에서 최소한의 비용, 아니, 아예 비용이 거의 들지 않는 종류의 놀이로 무엇을 택할 수 있을까? 그것은 노래였다. 대중 가요였던 것이다. 그래서 소풍을 가서도 노래를 불렀고 술 좌석에서도 노래를 불렀다. 하여튼 사람만 몇 모여 오락을 한다하면 빠지지 않는 것이 노래였다. 그야말로 필사적으로 노래를 불렀다.

그런데 노래로만 놀자니 좀 허전한 감이 없지 않았을 것이다. 학생이 교수에게 노래를 강제로 시켜도 아무런 흉이 되지 않는 한국의 풍습에 경악을 금치 못했다는 서양 사람들이 적지 않은 것을 보더라도. 우리에게 노래는 즐기는 것말고도 일종의 집단주의를 확인하려는 통과 의례의 성격이 강하다. 실제로 노래를 부르기 싫어하는 사람, 노래를 잘못 부르는 사람에게 노래를 시켜 놓고 그것을 들으려고 하는 사람은 거의 없다. 하기 싫은 걸 억지로 시킴으로써 재미를 느끼는 데에 주된 의미를 둘 뿐이다.

 

공중 전화 박스 옆에도 노래방

사실 우리는 노래를 즐기기보다는 입과 성대 운동을 즐겨 한다는 것이 더 적합할지도 모른다. 누구에겐가 노래를 시켜 놓고 조용히 감상하는 것이 아니라 무턱대고 같이 따라 부르는 것이 보통 노래하는 술자리의 풍경이다. 일상적 삶에선 입과 성대로 배출해야 할 에너지를 충분히 발산하지 못했기 때문일까? 일제 통치에서부터 군사 독재 정권을 거치면서 침묵을 강요 당해 온 역사가 너무 길었기 때문일까?

 

그 어떤 이유에서나 확실히 우리들은 입으로 배출해야 할 에너지가 늘 배안에 가득 차 있는 듯하다. 우리 사회에서 침묵이 미덕으로 통하는 문화가 여자보다는 남자에게 더 적용되고 있는 것과 여자보다는 남자들이 노래 부르기에 더 열성인 것은 서로 결코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 노래방이 일본에서 건너 온 문화의 소산이고 중국을 위시한 동양권에서 강세를 보이고 있는 것도 그런 사회적 요인에서 비롯된 것인지도 모른다.

 

말이야 바른 말이지. 일본인들은 이 지구 위에서 가장 통제된 삶을 살고 있는 사람들이다. 전체주의적 권위와 규율에 맹종하는 의식이 가장 강한 사람들이다. 자기 해방의 환상을 바라는 욕구가 가장 강한 사람들이라는 말이다. 그래서 그 사람들은 모든 것을 기계적으로 축소시켜 통제하고자 하는 열병을 앓고 있다. 노래방은 바로 그런 열병이 만들어 낸 산물인지도 모른다. 공중 전화 박스 옆에까지 노래방을 설치했다는 일본 사람들의 비상한 꾀도 그런 열병에서 비롯된 것이 아닐까?

 

노래방이 사회적 산물인 만큼 일본이 원조일망정 일본의 노래방 문화와 우리의 노래방 문화가 같을 수는 없다. 우리가 한 수 더 떠 발전시킨 측면도 있고 우리의 실정에 어울리게 개조한 측면도 있다. 우리나라에선 공중전화 박스 옆에 노래방을 설치한다 해도 일본처럼 장사가 잘 되지는 않을 것이다. 무어라 설명할 수 없어도 그만큼 문화가 서로 다른 것이다. 노래방이 중국의 조선족들 사이에선 길거리에 노래판을 벌리는 노상 노래방으로 발전된 것도 노래방은 수입되는 나라의 문화와 사회적 실정에 맞게 변형되기 마련임을 잘 말해 주는 사례나 다름 없을 것이다.

 

무엇이 사람들을 매료시키나?

비교 연구도 좋겠지만, 우리의 노래방 문화에만 이야기를 집중해 보자. 우리나라에서 노래방은 그야말로 다양화의 시대를 맞고 있다. 노래도 가요뿐만 아니라 동요와 가곡까지 부를 수 있게 다양화되고 있고, 텔레비전 노래방과 컴퓨터 노래방에서 전화 노래방과 자동차 노래방까지가 생긴 만큼 매체와 공간을 초월해 전방위적 노래방의 시대로 접어 들었다.

노래방의 무엇이 그렇게 사람들을 매료시키는 것일까? 얼른 보자면, 늘 대중 가요의 수동적 소비자로만 존재하던 사람들이 노래방을 통해 그 능동적 생산자의 위치로 격상될 수 있다고 하는 것은 이만저만한 매력일 수밖에 없을 터이다. 한두평 남짓한 밀폐된 공간에서 서너명 또는 예닐곱 명이 모여 앉아 손장단을 맞추거나 몸을 흔들어 가며 최첨단 영상 반주에 맞춰 가수노릇을 하는 것은 쾌락과 더불어 보람을 안겨주는 일일지도 모른다.

 

또 친절하게도 가사까지, 그것도 박자까지 맞춰서 화면에 내보내 주니 그 치열한 서비스 정신에 매료된 사람들도 적지 않을 것이다. 어디 그뿐일까? 자기를 위해 존재하는 것만 같은 모델들이 노래 분위기에 맞춰 포즈를 취해 주는 가운데 자기가 좋아하는 노래 한곡 불러 제끼는 값이 단돈 오백원이니 꽤 싸다고 여겨질 법도 한 일이다.

 

노래방을 자주 찾는 사람들은 한결같이 스트레스 해소를 위해 그런다고 말한다. 대중 음악 평론가인 김창남 씨의 조사에 따르면, 노래방의 주요 고객인 아낙들은 노래할 때에 예외없이 몸이나 발을 움직인다고 한다. 김 씨는 이를 두고 노래방이 억압돼 온 욕구를 육체적으로 표현하는 공간 역할을 하고 있다고 분석했다. 청소년이 노래할 때에 육체적으로 심하게 움직이는 것은 억압에 대한 저항이지만, 가정부인의 경우에는 가족 품에 되돌아가려는 의식을 전제하고 있는 점에서 의미가 다르다는 것이다.

 

대화 단절 세태의 상징물

가정에서 시달리는 아낙들의 경우 노래방이 스트레스 해소의 차원에서 매우 긍정적인 역할을 하는 것은 분명한 것 같다. 그러나 노래방은 우리 사회에서 사람들 사이의 만남의 전술이라고 하는 측면에서도 생각할 필요가 있다. 노래방을 찾는 진정한 동기로 스트레스 해소말고도 당사자들도 말로는 설명할 수 없는 그 무엇이 있다는 말이다.

 

우선 요즘 노래방의 주요 고객으로 부상했다는 가족 손님의 경우를 보자. 가장으로서 가족을 데리고 놀러 갈만한 곳이 우리 사회에 있나? 특히 서울이나 부산 같은 대도시에서 주말에 가긴 어딜 가나? 길거리에서 시간을 다 허비하고 말 텐데. 모처럼 야외에 나갔다 한들 그것이 고생길임을 알 만한 사람은 다 안다. 그래도 가장 체면에 무언가 실컷 놀았다는 포만감을 주긴 줘야겠는데, 그런 환상을 심어 주기에 가장 적합한 곳이 지리적으로 보거나 경제적으로 보거나 바로 노래방이다.

 

친구들끼리 술 한잔 먹고 노래방을 찾는 것도 꼭 노래가 좋아서만은 아니다. 주머니 사정이 뻔한 월급쟁이들이 만나서 뭔가 하긴 해야겠는데 노래방처럼 좋은 데가 어디에 있나. 술까지 몰래 갖고 들어가 마실 수 있으니 일석이조다. 게다가 나날이 보는 직장 동료들과도 그렇거니와 오랜만에 만난 학교 동창들끼리 나눌 대화라는 것이 그리 신통치 않다. 무슨 정열을 갖고 민주화를 논하던 때도 지났다. 민주화 열기가 한참이던 몇 년 전에 노래방이 등장했다면 노래방은 결코 성공할 수 없었을 것이다. 요컨대, 노래방은 대화 단절의 세태를 웅변해 주는 바로미터이다.

 

노래방의 음성 고객이지만, 무시하지 못할 존재의 청소년들은 어떨까? 그 사람들에겐 노래방엘 가는 것 자체가 훈장이다. 구십삼년 십일월에 청소년 대화의 광장에서 서울 시내 남녀 중고생들에게 물어 조사한 결과에 따르면 나는 노는 아이라고 답한 응답자들이 자주 가는 곳 일 위는 노래방인 것으로 나타났다. 노래방을 못 간다고 어느 여중생이 비관해 자살을 한 거야 극단적인 경우이겠지만, 중고교생들이 인지하는 노래방의 의미는 성인들이 인지하는 것과는 좀 다른 것임이 분명하다.

 

기계가 사람을 데리고 논다

스트레스 해소라는 것도 그렇다. 그렇게 입버릇처럼 말하는 스트레스라는 것의 정체를 곰곰이 뜯어 보면 알다가도 모를 것이 하나, 둘이 아니다. 노래방에 가서 악을 써 목이 쇠는 사람들도 적지 않다니 무슨 스트레스 해소가 그렇단 말일까? 입과 성대의 에너지를 발산하는 것도 일종의 스트레스 해소라면 할 말은 없지만, 진정한 의미의 스트레스 해소와 노래방은 아무래도 무관한 것 같다.

 

노래방이 오히려 적지 않은 사람들에게 새로운 스트레스를 주고 있음에도 주목해야 한다. 노래방에 못 가 자살을 한 여중생은 스트레스가 폭발한 경우이다. 그러나 일행과 같이 노래방을 찾는 사람이 모두 노래방을 즐기는 것은 아니다. 다수의 횡포에 이끌려 가 내키지 않는 노래를 해야 하는 사람도 많다. 누구는 노래방에서 스트레스를 해소한다지만 누구는 무리없이 같이 어울려야 하는 스트레스를 받는 것이다.

 

점수 때문에 스트레스를 받는 사람들도 많다. 그 점수라는 것이 허무맹랑하기 짝이 없는 것이지만, 그래도 사람들은 점수와 팡파레의 미련을 버리지 못한다. 노래방의 점수는 무작위로 작성된 점수표를 입력시켜 차례대로 나오는 엉터리 방식, 음의 높이에 따라 점수가 나오는 박수계 방식, 기계적인 박자를 잘 맞추는 데에 따른 박자 카운트 방식 해서 크게 세 가지인데, 노래 실력과는 거의 무관한 것이다. 감정이 풍부한 것은 높은 점수를 얻는 데에 절대 금물이다. 직업적인 가수들이 오히려 노래방에서 큰 점수를 얻지 못하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그런데도 사람들은 그 점수에 큰 신경을 쓰면 돈내기까지 하고 있으니 기계가 사람을 데리고 노는 것인지 사람이 기계를 갖고 노는 것인지가 알다가도 모를 일이다. 높은 점수가 안 나온다며 짜증을 내면서 마이크를 놓지 않고 버티는 사람들도 없지 않으니, 업소 주인들은 손님 기분 맞춰 준다고 웬만하면 팡파레가 나오게끔 기계를 조작해 인심을 쓸 일도 아니겠나.

 

사실 우리는 스트레스의 대량 생산 시대에 살고 있다. 스트레스가 자기의 일에서 비롯되는 것이 아니라, “너는 스트레스를 느껴야 한다.”는 외부의 유혹과 최면에 따라 받는 것일 수도 많다는 것이다. 스트레스란 엄밀히 따지자면 상대적인 것이다. 원래 그러려니 하고 생각하면 스트레스라는 것이 생길 리 만무한데도 원래 그런 것이 아니지 않느냐는 생각 때문에 스트레스를 받을 때가 많다.

 

광고는 상대적인 스트레스를 주는 전형적인 스트레스 산업이다. 멀쩡한 사람에게 결핍을 느끼게 만들어, 상품을 구입함으로 그 결핍으로부터 벗어날 수 있다는 생각을 갖게 만드는 것이 요즘 광고의 주요 기능이다. 광고는 끊임없이 묻는다. “너는 아름다우냐? 너는 건강하냐? 네 인생은 따분하고 무의미하지 않느냐?” 광고는 늘 불만족스럽고 안절부절못하며 불안해하고 지루해하는 소비자를 만들어 낸다. 도대체 무슨 수로 광고 속의 모델처럼 아름답고 건강하고 만족스럽게 살 수 있겠는가 말이다.

 

노래방이 이십만개가 되면?

광고는 이윤 추구를 절대 사명으로 삼는 자본의 얼굴에 불과하다. 꼭 광고가 아니라 하더라도 자본은 이윤 증식에 도움이 될 만한 것이 나타나면 그걸 절대로 놓치지 않는다. 수요를 인위적으로 만들어 내고야 만다. 자동차만 하더라고 그것이 생활 필수품이기 때문에 급증하고 있다고 생각하면 큰 오해다. 자동차를 생활 필수품으로 느끼게끔 만든 건 다름 아닌 자동차 회사들이다. 내 자동차를 가졌기 때문에 엄청나게 편리해졌다고 믿을 사람이 적지 않겠지만, 적어도 서울에서 그렇다는 실질적인 증거는 전혀 찾아볼 수 없으며, “편리라는 건 습관과 가치의 산물임을 잊어서는 안 된다.

 

노래방이 이만개가 되는 오늘의 우리 국민은 노래방이 없던 시절에 비해 스트레스 해소를 잘해서 정신이 더욱 건강해진 것일까? 노래방이 이십만개가 되면 더더욱 건강해질까? 알 수 없는 노릇이다.

 

그러나 한가지 분명한 것은 전자 업체들이 노래방을 사막에서의 오아시스처럼 반겼다고 하는 점이다 구십 이년 한해에만도 전자 업체들의 노래방 기기 매출액이 오조원이나 되는 것으로 추산되고 있다. 전자 업체들의 직-간접적인 부추김에 따라 노래방 사업에 뛰어 든 사람들 가운데엔 속된 말로 막차를 탄 사람들이 많다. 그래도 투자한 거액의 돈이 있어 울며 겨자먹기로 사업은 계속해야 하니 수요를 창출해 내려고 안간힘을 다해야 하지 않겠나.

 

전자 업체들은 목돈 좀 갖고 있는 사람들이 노래방이 사업에 뛰어들 만큼 뛰어들었다고 본 것인지. 이젠 가정용 노래방 기기를 파는 쪽에 전력을 기울이고 있다. 사람들이 집에서 갈고 닦은 솜씨를 자랑하려고 노래방 업소를 더 찾을 것인지 아니면 노래방 업소를 찾는 대신에 집에서 대충 해치울 것인지는 분명하지 않지만, “막차를 탔다는 일부 노래방 업소 주인들의 한숨소리가 적잖이 일고 있는 것은 분명하다. 그래서 노래방 고객을 모시려는 경쟁은 더욱 치열해지고 있다.

 

세계 최초라는 노래방 텔레비전

요즘에 전자 업체들은 일반 텔레비전에 연결하면 바로 노래방을 즐길 수가 있다고 열심히 광고한다. 그것도 거개가 값비싼 전면 광고다. 노래방 기기 생산의 선두 주자라 할 삼성 전자의 전면 광고는 노래방 텔레비전으로 바꾸세요. 생활을 즐겁게 바꾸세요. 텔레비전을 구입하실 때, 이왕이면 텔레비전 한 대에 천곡이 들어 있는 노래방 텔레비전으로 장만하십시오라고 부르짖고 있다. 천곡이 내장된 노래방 텔레비전은 세계 최초라고 하니 우리가 일본을 능가했다고 뿌듯하게 생각해야 할까? 광고에 따르면, 그 밖의 보조 기능도 나주 다양하다. “다섯 곡까지 예약해 놓고 순서대로 편하게 즐길 수 있습니다. 에코, 점수, 팡파르, 박자/음정 등 다양한 기능으로 더욱 실감납니다. 별도의 팩만 삽입하면 최신곡을 추가로 즐길 수 있습니다.”

 

전자 업체들은 노래방 기기 판매로 호황을 누리고 있는데, 그야말로 춘추전국시대를 방불케 한다. 삼성 전자의 독주 체제가 대우전자, 인켈, 금성사, 해태전자, 태광전자, 태광산업, 롯데전자, 한국샤프, 태진음향, 아남전자 들에 의해 분할되고 있는데, 서로 새로운 기능을 자랑하느라 이만저만 바쁜 것이 아니다. 태태전자의 다음과 같은 광고 문구도 노래방 팬들의 가슴을 설레게 만들기에 충분하다.

 

노래를 부를 때 무대 기분. 사십팔인조 오케스트라의 시디음을 즐긴다. 기존의 컴퓨터 노래방 시스템은 전자 악기로 구성된 밴드 반주에 불과합니다. 해태 시디지 노래방 시스템은 사십팔인조의 오케스트라 반주를 시디에 담아 생생하게 재생하며, 백코러스까지 갖춰져 마치 무대에서 노래하는 듯한 현장감을 느낄 수 있습니다.”

 

그런가 하면 대우전자는 노래하는 내 모습까지 보여준다 - 대우 시디지 콤포넌트라는 구호로 맞서고 있고 또 어느 업체는 텔레비전 자막과 점수. 팡파레가 휴대용 유, 무선 마이크 하나에라는 구호를 내걸고 기존 휴대용 노래방과 차별화됨을 선언하고 나섰다. 휴대용 마이크 하나로 일천이백여곡의 노래에 생생한 반주와 영상을 제공한다니 그것도 놀랍지만 보조 마이크로 뚜엣 기능까지 한다니 그 아이디어가 기특하기 짝이 없다.

 

나도 가수”, “나도 한 번

전자 업체들이 그렇게 지성으로 탁월한 서비스를 제공하니 노래꾼들이 그걸 마다할 리 없다. 온 국토의 노래방화가 진행되고 있다. 집에 손님들이 놀러 와서도 이야기는 뒷전으로 미루고 마이크를 잡고 노래하기에 바쁘다. 하긴 컴퓨터 앞에 마주 앉았으면 키보드나 두드릴 일이지 갑자기 웬 노래 타령일까? 기업들마다 사내 노래방을 설치하기에 바쁘다. 노래방은 서울을 거처 지방 텔레비전 방송사의 고정 프로그램으로 뿌리를 내리고 있다. 노래방처럼 싼 값으로 시간 때우기 좋은 것도 없을 것이다.

 

어디 그뿐일까? 유원지는 말할 것도 없고 호젓한 산속에서까지 노래방 판을 벌리지 않나? 달리는 버스 속에서까지 노래방 반주가 없으면 노래를 할 수 없다니 기가 찰 노릇이다. 하기야 관광 버스만 타면 노래를 부르는 그 지겨운 꼬락서니에서 오십보 백보이긴 마찬가지인데, 예전과는 달리 너무 시끄러워서 창밖을 내다보는 것도 여의치 않으니 문제다.

 

그렇다고 기죽을 데가 노래방 업소들이 아니다. 들인 돈이 얼마일까! 갈수록 기발한 사업 아이디어가 속출하고 있다. 탬버린과 스탠드 마이크는 기본이고 거의 모든 노래방들이 카메라를 장착해 노래를 부르는 모습을 볼 수 있게끔 배려했다. 녹음도 해 주고, 즉석 사진도 찍어 주고, 할인 카드도 발행한다. 모든 업소들이 녹음을 해주니까 손님을 더 끌려고 더 잘 녹음할 수 있는 별도의 방을 갖춘 업소도 많이 생겨났다. 사진도 즉석 사진이면 이천원을 받지만 일반 사진이면 무료다. 사진을 찾으러 다음에 또 올테니까 말이다. 노래방의 초기 가격 정책도 성공 사례에 속한다. 한 곡에 오백원이라는 처음의 가격 방식이 꽤 산 것처럼 여겨졌지만, 이젠 거의 모든 노래방이 시간제로 운영된다. 단 돈 오백원의 유혹이 한 시간 일만원에서 일만오천으로까지 뛴 것이다.

 

노래방의 급격한 확산은 사실 전자 업체나 노래방 업소들의 마케팅의 승리이다. 심지어 가요 반주의 녹음까지 손님들 기분 맞춰 준다고 아주 단순화시킨다. 그래서 노래방이 가요 문화를 해치고 있다고 생각하는 일부 작곡자들은 자기 노래를 노래방에서 연주하지 못하도록 음악 저작권 협회에 음악 저작권 계약을 불허하도록 요청하고 있으나 불법 복제가 계속해서 성행하고 있다. 그것마저도 노래의 민주화로 좋게 보아 넘겨야 할까?

 

분명히 노래방은 노래를 잘 하는 전문가들에 의해 노래 부르기의 독점을 타파했다고 하는 점에서 긍정적인 평가를 받을 부분이 있다. 또 그 누구든 나도 가수나도 한 번을 외칠 수 있는 점에서 민주적이고 자주적인 측면을 갖고 있기도 하다. 그러나 오늘날 우리의 노래방 문화는 분명히 그 선을 넘어 섰다.

 

자기 이미지와의 사랑

노래방의 고객이 노래를 노래를 듣는 주체에서 부르는 주체로 돌아섰다는 것은 환상이다. 노래방의 노래는 반주가 중심적인 것이지 육성이 중심적인 것이 아니다. 육성도 마이크를 통해 전자음으로 변질되는 것이고, 사람들이 그 변질된 것에서 쾌락을 느낄 뿐이다. 노래방은 우리 시대가 앓고 있는 정신 질환의 일면을 극명하게 드러내 보여주고 있다.

 

정신 질환자연적인 것에 대한 거부감이다. 요즈음 사람들은 기계적인 것이 가미될 때에 편안해 한다. 언론은 전기 플러그를 꼽지 않고 하는 이른바 언더플러그드 음악이나 반주없이 부르는 아카펠라 음악이 유행한다고 호들갑을 떨지만, 그것은 그만큼 진기한 뉴스 가치가 있다는 것일 뿐이다.

 

가정용 노래방이 거의 모든 가구에 다 보급될 때쯤이면 어떤 일이 벌어질까? 그때엔 영상 반주와 고성능 마이크와 화려한 조명의 도움 없이 순수한 육성으로 노래를 부르는 것은 맨발로 길을 걷는 것처럼 매우 이상한 행위로 여겨질 것은 아닐까?

 

사람들은 스스로 신바람을 내는 법을 잊어버린 것인지도 모른다. 기계가 흥을 돋구어 주어야만 비로소 원시적인 감정의 상태로 몰입하는 것이 가능할 정도로 기술 문명은 이미 인간의 일부로 자리를 잡은 것일까? 노래방은 전자 오락과 너무도 닮아 있다. 그 닮은 점은 기계와 하는 투쟁이다. 모든 것이 다 프로그래밍 되어 있는 기계와 맞붙어 기계의 인정을 받아 보겠다는 싸움이다.

 

우리 시대의 고독한 군중이 처절하게 겪고 있는 소외가 노래방에서 하는 투쟁으로 그 일부나마 극복될 수 있다면 누가 노랫방을 두려워하겠나? 고도 산업 사회에서 거대한 기계의 부속품의 위치로 전락해 가는 대중이 교묘하게 만들어진 기계 장치의 이용으로 자기의 능동성을 회복하고 안정감을 만끽할 수 있다는 환상을 누리고자 하는 역설이 존재함을 지적하고자 할 따름이다.

 

그 환상은 결국 자기 도취나 다름없다. 노래방은 철저한 자기 도취의 공간이다. 노래방은 노래하는 내 모습까지 보여준다. 노래방을 여러 사람이 같이 간다곤 하지만 사람들의 모습을 자세히 관찰해 보라. 그 사람들은 낯선 사람들처럼 서로 격리되어 있다. 남이 노래할 때에도 자기가 노래할 곡의 번호를 찾기에 바쁘다. 흥을 낸다고 소리를 질러대긴 하지만 그건 자기의 노래를 위한 워밍업일 뿐이다. 노래방에서 부른 자기의 노래가 녹음된 테이프를 차속에서 듣고, 스타처럼 무대에서 노래하는 듯한 포즈를 잡은 자기의 사진을 안방에 걸어 놓는다면 그건 이미 단순한 재미를 넘어선 것이다. 우리나라가 세계에서 최초로 개발했다는 일반인들 대상의 녹음 스튜디오에서 자기의 노래를 시디에 담는 것은 자기 도취의 극치이다.

 

우리 시대 사람들은 끝없는 자기 복제에서 삶의 의미를 발견하는 자기 매몰증에 빠져 있다. 커뮤니케이션 기술의 발달 덕분이라곤 하지만, 사진으로 하는 것이거나 비디오로 하는 것이거나 자기 복제에 대한 집착은 영상 속의 자기가 진짜인지 영상밖에서 움직이는 생명체가 진짜인지를 구별하기 어렵게 만들 정도이다. 우리는 우리 자신의 이미지와의 사랑에 빠져 있는 것이다.

 

나르시소스와 에코

아주 옛날 옛적 그리이스에 나르시소스라고 하는 잘 생긴 젊은이가 살고 있었다. 숲 속의 요정 에코는 그 사람을 사랑하였지만 거절당했다. 에코는 크게 상심하다 못해 야위어 가다가 마침내 목소리만 남아 메아리가 되고 말았다. 어느 봄 날에 나르시소스는 사냥을 하다가 지쳐 샘물 곁에 누워 있었다. 그 사람은 목이 말라 목을 축이려고 샘물을 마시다가 샘물에 비친 아름다운 자기의 모습을 발견하고 그 모습을 사랑하게 되었다. 자기 모습에 마음이 홀린 그 사람은 한 발자국도 그 꽃을 떠나지 못한 채로 그 자리에서 탈진해 죽고 말았다. 그 사람이 죽은 자리에서 꽃이 피어 났는데, 그 꽃에 나르시소스의 이름이 붙여졌다.

 

수선화에 얽힌 이 그리이스 신화에 최초로 정신 분석학의 의미를 부여한 사람은 독일의 정신과 의사 네케다. 네케는 자기 육체를 이성의 육체를 보듯하면서 스스로 애무하여 쾌감을 느끼는 자기애를 가리켜 나르시시즘이라고 불렀는데, 나중에 정신 분석학의 대가라 할 프로이트는 이 개념을 더욱 발전시켰다.

 

나르시시즘은 자기 자신이 관심의 대상이 되는 자기 도취 상태를 말한다. 노래방에서의 자기 도취는 나르시소스의 행태와 어찌 그리 닮았는지 놀랄 지경이다. 노래방의 나르시소스들은 밀폐된 노래방에서 성대의 떨림을 한껏 만끽하고 육성을 기계음으로 전환시키는 고성능 마이크의 진동으로 하여금 귀를 애무케 하고 노래에 맞게 난무하는 화려한 영상 이미지로 하여금 눈을 간지럽히게 하는 자위 행위를 통해 자기 도취에 빠져 든다.

 

그러나 노래방에서의 자기 도취는 에코의 운명만큼이나 슬프기 짝이 없다. 에코는 노래방의 생명이다. 에코가 들어가야 시원치 않은 노래도 그럴듯하게 들린다. 많은 사람들이 자기의 발성이 끝난 뒤에도 그 남은 소리를 듣는 기분을 즐긴다. 변비에 걸린 사람이 어렵게 배설을 하고 나서 배설물을 보며 대견해 하는 기분이라나? 그리이스 신화에 나오는 에코로 말하자면 헤라의 저주를 받아 다른 사람의 말을 반복만 하고 아무 말도 할 수 없게 된 불쌍한 요정이다.

 

그런데 노래방의 애호가들이 그렇게 심혈을 기울여 부르는 노래의 가사는 자기들의 말이 아니다. , 감명은커녕 자기가 전혀 공감하지 않는 내용의 노래도 기계의 지시에 따라 붙는 화면은 어떨까? 화면 속의 남-녀가 벌이는 그 진부하고 촌스러운 행태란 육십년대의 한국 영화를 연상케 해 이십세기 말의 첨단 전자 기술과 묘한 불균형을 이룬다. 노래방 속의 사람들은 마치 그 불균형을 바로 잡기라도 하겠다는 듯이, 마이크의 조작에서부터 제스츄어에까지 필사적인 노력을 기울인다.

 

가상 현실이 따로 없다. 세계 최초로 노래 천곡이 내장돼 있는 노래방 텔레비전을 개발해 냈다고 주장하는 한 전자 회사의 전면 광고엔 노래방에 흥겨워 춤추는 온 식구의 그림을 담고 있는데, 사람의 얼굴도 몸통도 없다. 사람의 몸이 빠진 채로 세 개의 옷이 춤을 추고 있을 뿐이다. 노래방의 본질을 꿰뚫어 보는 소름끼치는 상징이 되지 않을 수 없다. (샘이깊은 물 946월호)

 

강준만. 전북 대학교 신문 방송학과 교수

 

 

 

개인별 탐구 과제

1. 우리 민족이 노래를 즐겨 부르는 이유는 무엇이라고 했는가?

2. 우리나라에서 노래방이 성행하게 된 이유는 무엇인가?

3. 현재 우리 나라에 퍼져 있는 노래방에는 어떤 유형의 것들이 있는가?

4. 노래방이 왜 대화단절의 세태를 웅변해 주는 바로미터라고 했는가?

5. 노래방으로 스트레스를 해소할 수 없다는 것은 무엇때문인가?

6. 노래방이 왜 철저한 자기도취의 공간이 될 수 있는가?

7. 그리스 신화에 나오는 나르시소스 이야기를 요약하고 노래방 문제와 어떤 관 련이 있는지 말해보자.

 

모둠별 토의 과제

1. 이 글의 필자는 노래방에서 스트레스를 풀 수 없다고 말하고 있다. 오히려 스 트레스가 쌓인다고 했는데, 과연 그런지에 대하여 모둠원끼리 토의를 하고 그 결과를 발표해 보자.

2. 이 글을 읽어보면 노래방에 대하여 상당히 부정적인 입장을 취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그렇다면 노래방이 건전한 공간으로 자리잡을 수 있는 방법은 없 는지 토의해 보고 그 결과를 발표하자.

3. 노래방에 가 본 경험들 중 인상적인 내용에 대해 의견을 나누고 정리해 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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