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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야마 미쓰로의 거짓 증언- 송기숙

by 처사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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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각하며 읽기


가야마 미쓰로의 거짓 증언

- 송기숙

 

 

하루라도 빨리 황민화(일본 천황의 신민화)가 될 수록 우리 조선 민족에게는 행복이 온다. 이것을 아직도 인식하지 못하였다면 우자(愚者)일 것이요, 만일 인식을 하면서도 스스로 나서지 못하고 좌우고면(左右顧眄)하며 남들 하고 있는 양을 보고 있는 것은 민족애도 없고 용기도 없는 이기적이요 비열한 자라 아니할 수 없다. 금후 조선 민족 운동은 황민화운동이어야 한다. 하루라도 속히 황민화가 될 수록 조선 민족에게는 행복이 온다. 편협하고 착오된 민족관념을 깡그리 버리고 천황을 내 임금으로 모시고 일장기를 나와 내 가족들이 피로 지킬 국기로 사랑하면서 나는 작품을 썼다.

 

우리 천황이 사용하는 말을 우리들의 국어로 하여야 한다. 조선인은 혼상례를 일본식으로 하고 의례준칙을 일본화 하여야 한다. 한 번 병역을 치르고 나야 완전한 국민이 된다. 병역을 안 치른 국민은 반편 국민이다. 그러므로 병역이 고맙다. 지금으로부터 26백년 전 신무천황께옵서 어즉위를 하신 곳이 강원인데 이곳에 있는 산이 향구산이다. 뜻깊은 이 산 이름을 성씨로 삼아 향산이라 한 것인데 그 밑에다 광수의 광()을 붙이고 수()자는 내지(內地, 日本)식의 낭()으로 고쳐서 내 이름을 향산광랑(香山光郞)으로 지은 것이다.

 

이상의 글은 가야마 미쓰로, 즉 향산광랑이란 사람이 1940년에 쓴 글 가운데서 발췌한 것이다. 이 사람이 바로 한국의 문호라 추앙되고 있는 춘원 이광수라 하면 놀랄 사람이 많을 것이다. 이 사실에 아직도 놀라는 사람이 많다는 점에 문제가 있는데, 이것이 해방후 지금까지 한국 역사의 중요한 특징의 하나다. 이런 의미에서 해방 이후를 식민지잔재시대라 부르는 것이 어떨까 하는 생각까지 해 본다.

 

이야기를 잠깐 되돌려, 당시 이광수의 이런 태도를 일본 사람들은 어떻게 보았는가 한 번 살펴보자. 이광수는 1937수양동우회사건으로 주요한과 함께 검거되어 재판을 받았는데, 그때 법정에서 서슴없이 자신을 일본 천황의 적자(赤子)라 진술했다. 그러자 일본인이었던 검사가 멸시에 가득찬 표정으로 이광수를 노려보면서 고함을 질렀다.

 

이놈아! 네가 어째서 천황폐하의 적자란 말이냐? 러시아 사람 앞에서는 공산주의자라고 하겠지? 이놈아! 너는 여태까지 민족주의자라고 행세를 하지 않았느냐. 네가 그렇게 지도하던 조선 청년들에 대한 책임으로 보더라도 어떻게 뻔뻔스럽게 천황폐하의 적자라고 하느냐?”

 

해방 후 이광수는 친일 거두 최남선, 최인 등과 함께 반민족행위자 특별조사위원회의 조사를 받았다. 이 때 최남선, 최인 등이 눈물로 참회한 것과는 반대로 이광수는 되레 자신이 친일을 한 것은 민족을 위해서였다고 궤변을 농했다. 나는 민족을 위해서 친일을 했소. 내가 걸어온 길이 정경 대도는 아니었소마는 그런 길을 걸어 민족을 위하는 길도 있다는 것을 알아주오.”라고 되잖은 소리를 하며 끝내 반성의 기미를 보이지 않았다. 희한하기 짝이 없는 애족의 방법도 있는데, 이런 말도 안 되는 소리를 바탕으로 해서 그 뒤에 이광수를 변명하러 드는 얼빠진 사람들도 있었다.

 

이광수가 반민족 친일 행위를 한 것도 괘씸하지만 반성을 하지 않은 것이 도저히 용납할 수 없는 일이었다. 그런데 이광수의 이런 작태보다 더 한심한 것은 이광수의 이런 행위를 민족의 이름으로 응징하지 못한 것이고, 한층 더 한심한 것은 이런 인간을 마치 한국의 톨스토이나 되는 양 대문호로 떠받든 점이다.

 

미군정 3년이 끝난 뒤 일제 때의 반민족 행위자들을 검거하기 시작했다. 제헌국회에서 제정한 반민특위법에 의한 것이다. 그런데 반민특위를 덮쳐 위원들을 모두 잡아다 경찰국 지하실에 감금을 해 버렸다. 대한민국 정부가 수립이 되었다고 하지만 경찰은 그대로 일본제국주의 경찰이던 자들이 그 자리를 지키고 앉아 있었으므로 반민특위가 제대로 기능을 발동하는 날에는 거개가 잡혀가 목이 달아날 사람들이 태반이었기 때문이다.

 

그들은 미군정 3년 동안 군정의 비호아래 막강한 세력을 구축하고 있었으므로 그들에 대항할 만한 세력이 없었다. 이 세력을 어떻게 할 수 없음을 안 이승만은 그들에 동조하여 그들을 비호하고 나왔다. 따라서 반민특위는 사실상 기능이 마비되고 말았다. 국방경비대란 명칭의 군대도 마찬가지였다. 일제 때 제 스스로 장교가 되기를 지원하여 천황에게 충성을 맹세했던 일본 군대의 장교들이 중추세력을 이루고 있었기 때문이다. 총칼을 든 사람들이 모두 이런 사람들이었으니 민족 진영의 세력은 맥을 출 수가 없었다.

 

군경뿐만 아니라 다른 분야도 마찬가지였다. 특히 중요한 것은 교육계였는데, 여기도 마찬가지였다. 일제 때의 식민지 사범학교란 식민지 백성들을 황국신민으로 만들기 위한 그 첨병의 양성기관이었다. 더구나 군국주의 이념에 따라 철저한 세뇌교육을 받은 이들은 다른 어느 분야보다 오래오래, 그러니까, 지금까지도 일선의 교장을 비롯해서 교육행정의 간부로 교육을 좌지우지하고 있다. 해방 후 미국의 교육사조가 들어왔다고 하지만 그것은 거개가 교육의 테크닉 문제였으므로 정신은 그대로 군국주의 정신이 남아 있었고 그 위에다 가르치는 기술만 세련이 되었을 뿐이다.

 

문화, 문학의 경우에서도 이광수의 그런 행적 하나 따지고 가릴 만한 세력이 없었다. 대부분의 문인들이 자기 구린데 가리기에 전전긍긍이었고, 적극적인 친일은 하지 않았더라도 나라야 경딴이 나든 말든 세상을 위해 제 잔털 하나 뽑지 않을 매가리 없는 위인들이 문단의 주류를 이루고 있었으므로 문학의 자기 목적성이 어떻고 되잖은 소리나 나불대며 이광수 같은 자를 대 문호로 추앙했던 것이다. 지금도 국정 교과서에 노천명 같은 사람이 대시인인 양 널리 찬양되고 있는 것만 보아도 저간의 사정을 충분히 짐작하고도 남는다.

 

제국주의 당사국인 일본에서는 패전 뒤 군국주의를 통렬하게 반성하는 기간을 가졌다. 그런데 우리는 그런 기간을 갖지 못하고 두리뭉수리 외국에서 불어오는 민주주의라는 풍문에만 건들거렸을 뿐이다. 미군정 3년은 그대로 식민지 통치의 연장선상에 있었다 할 수 있고, 그 뒤의 정치세력들은 항일투사라고 하는 이승만까지를 포함해서 일제시대에 얻은 기득권을 바탕으로 독재체제를 구축하는 데만 급급했다.

 

특히 일반 지식인들은 독립투사들을 치켜세움으로써 상대적으로 느껴지는 자신들의 죄책감이나 사회적 위치의 격하 때문에 묵시적으로 독재세력들에 동조했다. 해방 뒤 지금까지의 이 기나긴 독재체제는 일본 군국주의자들이 식민지 한국에 다져놓은 이런 기반 위에서 가능했다 할 것이다. 따라서 통치세력이 그들 존립의 기틀인 군국주의 잔재를 청산할 리가 없다. 오히려 그런 기반을 더 강화했다고 할 수 있는데, 그 단적인 예가 국민교육헌장같은 것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동안 독립유공자들을 포상을 해왔고 또 해방 후 40년이 가까운 지금에 와서야 독립기념관을 세운다고 하고 있는데, 바로 독립을 방해하고 독립투사들 탄압에 앞장섰던 민족반역자에 대한 응징이 어떤 방식으로든지 이루어지지 않은 상태에서 행해지는 포상이나 기념관의 설립이란 넌센서라 생각한다. 그들을 포상하는 것은 민족정기를 성양하자는 것인데, 그러기 위해서는 상과 함께 벌이 있어야 상식적인 균형이 이루어진다고 보기 때문이다.

 

우리는 민족정기, 아니 민족적 자존심을 회복해야 한다. 역사에서 우리는 양심과 정의의 편에 섰던 사람들이 수없이 탄압을 받았던 예는 볼 수 있지만 그들을 응징하여 우리 역사가 교훈적으로 작용한 예는 별로 보지 못하였다. 해방 후 지금까지 정치, 경제, 사회, 문화, 교육, 언론, 종교 등등 각 분야에서 이광수와 같은 작태가 비슷하게 되풀이되고 있다. 역사가 이들에게 교훈적으로 작용하여 그 악순환이 그치는 날, 이 날이 바로 민족적 자존심이 회복되는 날이라 생각한다.


송기숙. 전남대에서 국문학을 가르치고 있으며, 소설을 쓰고 있다. 암태도,자랏골의 비가,녹두장군등의 소설집을 냈다.


개인별 탐구 과제

1. 글 앞부분에서 인용한 이광수 주장의 핵심 내용은 무엇인가?

2. ‘이 사실에 아직도 놀라는 사람이 많다는 점에 문제가 있는데라고 말한 이 유는 무엇인가?

3. 이광수는 민족을 위해서 친일을 했다고 주장하고 있다. 이 주장에 대해 당 시의 시대 상황을 고려하여 비판해 보자.

4. 해방 후 반민특위가 제대로 기능을 발휘하지 못했던 이유는 무엇인가?

5. 해방이 되고 난 후 현재까지 전개된 우리 교육의 가장 큰 문제는 무엇인 가?

6. 해방 후 기나긴 기간 동안 독재체제가 가능했던 근본 이유를 필자는 무엇 으로 보고 있는가?

7.독립 유공자 포상이나 독립기념관 건립에 대하여 필자는 왜 넌센서라고 생 각했는가?

 

 

모둠별 토의 과제

글의 내용과 개인별 탐구 과제를 중심으로 다음 내용에 대하여 토의해 보 자.

1.개인별 과제 3에서 각자 비판한 내용을 토대로 모둠별 토의를 해 보자.(이광 수가 필요에 의해 친일을 했으니 죄가 아니다라고 강변한 것에 대해 그 주장이 타당한가 토의할 것)

2.해방이 되고 난 후 일제의 잔재를 확실히 청산했더라면 우리의 역사가 어떻 게 달라졌을까? 주어진 글을 읽고 또 상상력을 발휘하여 모둠별로 정리해 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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