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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 러브 아메리카- 안 종 관

by 처사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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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각하며 읽기


아이 러브 아메리카

- 안 종 관

 

 

고등학교 3학년 '현대문학' 시간에 박완서의 단편 무서운 아이들을 소개해줄 때입니다. 즐거운 소풍날, 출발에 앞서 출석을 부르는 장면입니다.

 

"……그 아이를 확인하려고 눈을 들었다. 아이들이 일제히 기성을 지르며 웃기 시작했다. ……을희는…… 새로 산 티셔츠를 입고 있었다. 색상과 바탕이 조악한 것까지는 참아 주겠는데, 마치 운동선수의 번호처럼 앞뒤로 달고 있는 알파벳이 문제였다. 노랑 바탕에 검은 글씨로 선명하게 'PLAY GIRL'이라고 쓴 티셔츠가 아이들을 그렇게 웃기고 있었다.

바로 '플레이 걸' 대목에 이르자, 아이들은 책상을 치고 발을 구르며 웃어젖히는데 교실이 떠나갈 듯합니다. 한눈 팔다 놓친 애는 옆 친구한테 물어보고는 뒤늦게 웃기 시작하고, 다시 합세해서 또 한바탕 웃고 폭소의 파도가 세 차례쯤은 계속되었습니다.

 

사실은 아이들의 폭소가 저로선 좀 뜻밖이었습니다. 왜냐하면 그 소설은 그 바보스런 아이를 비웃는 주위 아이들의 어른스런 위선과 우월감을 날카롭게 해부하고 있는 데다가, 그 아이를 보호하려는 담임 여교사의 애정이 학생들에게 전해지기를 바라고 있었고, 그 다음으로 이어지는 "그 여자는 자기가 영어선생이면서도 이 땅 도처에 범람하는 꼬부랑 글씨에 격렬한 혐오감을 느꼈다. 웃지 마. 아무도 이 아이를 비웃을 자격이 없어. 제발 웃지 마"라는 대목을 막 읽어줄 참이었기 때문입니다.

 

"왜 웃나?"

나는 책을 접어두고 입을 열었습니다.

"우습잖아요?"

 

한 녀석이 소리칩니다.

"뭐가? 난 슬픈데."

"에이, 선생님도 다 아시면서……"

 

아이들은 같은 공범이면서 혼자만 발을 빼려 한다는 투로 조소하듯 빙긋거립니다.

`그 정도야 알 만한 나이 아닙니까` 하는 식으로, 그 말에 풍기는 음탕한 느낌을 흉물스럽게 즐기면서 그런 흔한 영어도 모르는 주인공과 무식하게 저질스런 옷을 사 입힌 부모를 맘껏 웃어준 것이겠죠. 주인공 아이가 점심끼니를 거를 정도의 도시 빈민 계층이라는 사실에는 관심이 없습니다.

 

"나는 플레이 걸입니다 하고 광고하는 게 우습지 않아요?"

"그러는 너희들은?"

정말인지 아이들을 훈계할 생각은 전혀 아니었는데, 어쨌든 문학수업이 좀 이상스런 방향으로 빠져버립니다. 나 역시 소설 속의 여교사처럼 울화가 치밀고 만 것입니다.

"어이,저기 저 친구. 목에 두른 건 뭔가?"

영어 글씨로 목을 두르고 있는 학생을 가르킵니다.

"목 폴라라고 하는 거예요."

"프로 섹스라고 광고하고 다니나?"

"에이, 그게 스펙스지 어디 섹스예요?"

"너 운동화는, 아 섹스구나."

"식스예요. 선생님은 영어도 못 읽으세요?"

"내가 정확할 수도 있어. 그 정도는 상업광고의 상식이란 말이다."

상표나 광고가 성을 암시할 때의 광고 효과 그리고 화장품, 아이스바 등의 텔레비전 광고를 예로 들어 그 외설스런 암시를 하나하나 설명해줍니다.

"저 친구는 가슴에 뭐라고 썼지?"

커다란 영어 대문자로 아담과 이브, 또 뭐라고 썼는데 얼른 두 팔로 가슴을 가립니다. '히스테릭'이라고 쓴 친구도 덩달아 가슴을 감춥니다. 하지만 등짝에 새빨간 글자로 '캠프 비버리 헬즈' 등등 가득 써놓은 옷을 입은 친구는 어떻게 가릴수 없어 그냥 계면쩍게 웃기만 합니다. '그래머, 스트로베리……'라는 대문자를 등에 지고 있는 녀석도 어쩔 줄을 몰라 합니다.

"넌 샌프란시스코 폴리스냐? 그렇게도 미국 순경이 되고 싶어?"

 

팔뚝에 견장을 붙인 친구에게 묻습니다. '아이 러브 아메리카' 위 러브 죠다쉬' '댄디'……어떤 친구는 군대 계급장까지 달고 있습니다.

 

잠바 깃에도 영문자가 크게 쓰여 있습니다.

"메고 다니는 너희들 가방도 보렴."

큼직한 영문자가 안 박혀 있는 가방은 거의 하나도 없습니다. 아이들이 쑥스러워하는 걸 보면서도 나는 고삐를 늦추지 않습니다.

"너희들 책받침을 좀 볼까? 공책도 꺼내 보구. 필통도 보자. 그 화상들은 뭐냐,누군지 가르쳐주지 않을래?"

"소피 마르소요, 피비 캐이츠요, 마돈나요, 전영록이요, 아하요, 비너스요, 보이 조지요……"

 

몇몇이 큰소리로 읊습니다. 서양 여자 배우들의 사진을 즐비합니다.

여잔지 남잔지 이상한 옷차림에 도깨비 같은 얼굴의 가수들, 연주자들에 섞여 간혹 벌거벗은 여자 사진도 보입니다.

이왕 벌이기 시작한 김에 누구 하나 대표로 나와서 한 몸에 몽땅 모아보자고 살살 구슬렀더니, 그래도 딱딱한 수업보다야 훨씬 낫겠다는 속셈인지 가슴에 영문자를 달고 있는 녀석이 선뜻 나섭니다. 상표를 목에 두르고,등에 글자 박힌 잠바도 빌려 입고 팔뚝에 견장도 붙이고, 어깨엔 큼직한 외국 상표가 선명한 가방을 멥니다. 마침 청바지를 입었는데, 궁둥이엔 가죽 상표가 붙어 있어 잘됐고, 또 한 녀석이 플레이 보이라고 쓴 운동화를 들고 나와 신겨줍니다. 그리고 책받침 몇개를 오른손에 부채처럼 펄쳐들고 모델 흉내를 내며 걸어봅니다.

 

아이들이 좋다고 웃습니다.

"내친 김에 노래도 불러보지."

"저 앤, 보이 조지 노래를 잘해요, 남자는 배 여자는 항구도 잘해요, 주현미 블루스 잘 불러요, 흐느끼는 섹스폰 소리 잘해요……"

여기저기서 한 마디씩 거듭니다. 완전히 저질스러운 영문자 속에 갇혀 흐느적거리는 모습입니다. , 하나님! 이것이 바로 우리의 자녀들, 학생들, 제자들의 모습입니다.

"모양이 어떠냐?"

"멋있어요."

아이들은 아직 농담조입니다.

"저게 개성 있는 옷차림이냐? 상품 광고하는 샌드위치맨이지. 그것두 자원 봉사로 말이다."

하긴 그렇네요."

몇 녀석이 고개를 끄덕입니다.

"저게 어디 우리나라 사람이냐? 서양 거지이지."

앞에 나왔던 녀석이 슬그머니 몸에 걸쳤던 것들을 임자에게 돌려주면서 제자리로 들어가 앉습니다.

"플레이 걸 정도는 상대도 안되지? 어때? 똥 묻은 개가 겨 묻은 개 비웃은 격이 아닌가?"

 

입을 삐죽거리는 친구도 있고, 고개를 숙이는 친구도 있고, 뭔가 항의하려고 몸을 움찔거리는 친구도 있습니다. 나는 거대한 소비경제 구조가, 텔레비전이나 온갖 잡지, 신문을 통해 어떻게 반복적으로 소비자를 세뇌시키고 마취시켜 소비와 향락 속으로 몰아넣는가를, 혼을 빼 버린 로봇이나 꼭두각시처럼 인간 그 자체를 어떻게 상품화시키는가를 애기해줍니다.

 

또한 이런 식의 저질 외래문화와 외국 풍속의 모방이 민족의 얼과 우리의 고유한 정서와 문화의 근본을 허물어뜨리면서, 끝내는 외래문화의 노예로, 정치적 경제적 예속으로 이끌어가는지를 말해줍니다.

"하지만 어른들이 이렇게 만들어놓구선, 왜 우리들만 탓해요?"

"선생님도 어른이니까 책임지세요."

"엄마가 이런 걸 사주시는데, 버리란 말예요?"

기어코 몇몇이 불평하고 항의합니다.

"그래, 너희들 말이 옳다. 나도 반성할게."

교사로서 이 지경이 된 데 대한 책임을 지라는 말은 옳습니다.

"하지만 너희들 역시 소비자니까 그런 상품을, 문화를 거부할 수 있어야지. 그런 걸 사주시는 부모님한테 충고드릴 의무도 있어."

"알았어요"

"각자 부끄러워해야 한다."

"알았다니까요, 이제 그만 하세요."

아이들은 약간 풀이 죽은 소리로 대답합니다. 조금은 유쾌하지 못한 수업시간이기도 했습니다.


 

안종관. 숭문고교에 재직했으며, 현재는 극작가로 활동하고 있다. 늙은 수리 나래를 펴다, 토선생전등의 작품을 썼고, 산문집 우리는 스스로 자란다를 냈다.


개인별 탐구 과제

1. 아이들의 어른스런 위선과 우월감의 구체적인 내용은 무엇인가?

2. 소설 속의 여교사가 화가 난 이유는 무엇이며 필자는 왜 소설 속의 여교사처 럼 울화가 치밀었다고 말했는가?

3. 학생들이 말하고 있는 어른들의 책임은 무엇인지 구체적으로 말해 보자. 그리 고 그런 학생들의 항의가 정당성을 지니는 것인지 검토해 보자.

4. 글쓴이는 왜 유쾌하지 못한 수업시간이 되고 말았다고 했는가?

 

 

모둠별 토의 과제

1.여러분들은 이 글을 쓴 사람의 생각에 동의하는가? 만약 동의할 수 없는 부분이 있으면 충분한 논거를 가지고 반박해 보자.

2.성과 관련된 외설스러운 암시가 들어 있는 광고에는 어떤 것이 있는지 조사해 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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