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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행일치로서의 약속

by 처사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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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행일치로서의 약속

 

 

우리는 수많은 약속을 하면서 살아간다. 그 중 어떤 것은 지켜지고 어떤 것은 지켜지지 않고, 어떤 것은 아예 잊혀져 버린다. 약속은 말로 이루어지는 것이기 때문에 말을 할 수 있는 사람은 누구나 다 약속을 할 수 있다. 그러나 약속에서 중요한 것은 약속을 하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지키는 것이다. 약속을 행하는 것은 언어이고 약속을 지키는 것은 행동이다. 따라서 행한 약속을 지키는 일이야말로 언행을 일치시키는 일이다. 약속을 지키지 않으면, 그 약속을 했던 당사자의 인격과 신용이 추락되고 상대방은 피해를 받게 된다.

 

약속은 크게 두 가지가 있다. 하나의 회합의 약속으로 만날 시간과 장소를 미리 정하는 그런 약속이다. 다른 하나는 어떤 구체적인 행위를 하거나 하지 않을 것을 선언하는 그런 약속이다. 영어에서는 회합의 약속은 어포인트먼트(appointment), 어떤 구체적인 행위의 약속은 프라미스(promise)로 구별한다. 프라미스는 흔히 법적인 구속력을 갖춘 약속을 지칭하기도 한다. 영어에서는 행위의 약속 중에서 특별한 경우로, 엄숙한 서약을 하고 스스로에게 윤리적 의무를 지우는 인게이지먼트(engagement)라는 단어가 별도로 존재한다. 우리의 약속이라는 말은 이들을 모두 포괄하는 함축적인 단어라고 할 수 있다.

 

우리 한국인들은 회합 약속을 정확히 지키지 않는 편이다. 그 까닭은 한국인들의 시간관념이 좀 박약하기 때문이라고나 할까. 그런데 이런 시간 관념의 불철저는 어쩌면 정착 생활을 하는 농경 민족의 특징 가운데 하나일지도 모른다. 왜냐하면, 농사란 절후와 날씨에는 민감해야 하지만 하루를 세분하는 그런 적은 단위의 시간에는 별로 신경을 쓸 필요가 없고 대개 세끼의 시간만 알면 족하다. 따라서 시간을 세분하는 데 익숙하지 못하다.

 

그러나 유목민이나 해양 민족들은 그렇지가 않다. 항상 이동하거나 움직여야 하는 그들에게는 정확한 시간을 알아야 할 필요가 있을 것이다. 특히 노략이나 약탈 행위, 또는 해적 행위를 하기 위해서는 시간상의 정확성이 요구되므로 세분된 시간에 신경을 쓰지 않으면 안된다. 해양 민족인 영국인이나 일본인들이 시간 관념이 뚜렷하고 정확한 것은 이런 행동 양식이 대대로 체질화한 때문인지도 모른다. 게다가 이들 나라에서는 일찍부터 산업화하여 모든 것을 시간으로 측정하는 산업 사회의 버릇에 익숙해진 때문이기도 할 것이다.

 

그렇다고 철저한 시간 관념을 약탈이나 해적 행위 또는 산업 사회의 비인간성에서 비롯된 것이라고 비난하면서 소위 '코리언 타임'을 여우와 평화를 상징하는 시간 관념이라고 자랑할 수는 없다. 한국도 이제는 산업화되어 시간이 돈인 사회가 되었기 때문이다. 이제 한국도 '코리언 타임'은 용납되지 않는 세상이 되었다. 따라서 이제 우리도 원하든 원하지 않든 뚜렷한 시간 관념을 갖지 않으면 안되게 되었다. 시간에 정확하지 못하면 사람들의 원성을 사게 되고 문제 있는 사람으로 낙인찍히게 된다.

 

서양인들은 회합의 약속을 하는 데, 그리고 그것을 지키는 데 정확하고 철저한 편이다. 오 헨리의 단편 소설에는 이런 이야기도 있다. 한 사람은 범법자로서 다른 또 한 사람은 그 범법자를 좇는 경찰로서 서로를 모르는 채 서둘러서 같은 시각에 같은 장소에 이른다. 그런데 그들은 20년 전에 그 시각에 그 장소에서 만나기로 약속한 절친한 친구였던 것이다.

 

회합의 약속이 정확하지 않으면 낭패를 보는 수가 많다. 로맨틱한 두 남녀가 어떤 장소에서 달이 뜨는 시각에 만나기로 했다. 그런데 여자는 바닷가에 살았고 남자는 산 속에 살았기 때문에 그들 각각이 알고 있는 달뜨는 시각에는 상당한 차이가 나서 결국 만나지 못했다고 한다. 희랍 신화에는 약속 시간의 막연성으로 인한 차질 때문에 열렬히 사랑하는 피러머스와 씨스비라는 젊은 연인들이 비극적인 종말을 맞게 되는 얘기가 있다.

 

 

일반적으로 회합의 약속을 지키지 않으면 상대방을 애태우기도 하고 속상하게도 하고 시간을 허비하게도 하고 금전적, 물질적인 손해를 줄 뿐 아니라 때로는 큰 불행을 초래하게도 한다. 옛날 중국에 미생이라는 젊은이가 있었다. 하루는 다리 밑에서 애인과 만나기로 했으나 애인이 나오지 않았다. 그러나 그는 자리를 뜨지 않고 계속 기다렸다. 그런데 홍수로 강물이 불어났다. 그래도 그는 다리 난간을 붙잡고 자리를 뜨지 않았다. 그러던 중 강물이 다리 위까지 넘쳐 그는 난간에 꼭 매달린 채 마침내 익사하고 말았다. 만나기로 한 약속의 불이행이 한 젊은이를 애타게 하다가 결국 죽이고 말았다.

 

이제 행위의 약속에 대해 살펴보기로 하자. 이 경우 약속이란 장래 할 일에 관해 상대방과 서로 언약하여 정한다는 뜻이다. 그런데 약속의 ''자는 당사자를 묶는다. 즉 구속한다는 뜻으로 또 ''자는 제약한다는 뜻으로도 풀이할 수 있다. 약속은 직접적인 이해 관계에서 맺어지는 계약과 같이 법적인 구속력을 갖는 것도 있다. 그러나 그런 외형적, 물리적인 구속력은 없어도 양심과 도덕의 구속력은 다 갖고 있다. 따라서 약속을 한다는 것은 그 약속에 따르는 제약과 구속을 감수하겠다는 것이며, 약속을 이행치 못했을 때는 법적인 구속을 받지 않더라도 양심상의 가책을 느끼고 도덕적인 규제를 받는 것이다. 그런데 웬일인지 우리 사회에서는 많은 약속이 지켜지지 않을 뿐 아니라 지키지 않고도 양심의 가책이나 도덕적인 규제를 받지 않는 것 같다.

 

행위에 대한 약속 중에서 가장 흔한 게 결혼 상대자를 평생의 반려자로 죽을 때까지 사랑하겠다는 결혼의 서약일 것이다. 그러나 이런 결혼 서약의 상당수는 깨어지고 만다. 또 선거에 출마한 사람이 뽑히면 하겠다고 내놓는 공약(公約)도 중요한 행위의 약속이라 할 수 있다. 이들 공약의 다수는 공약(空約)이 되어 버린다. 또 친구간의 결의도 중요한 행위의 약속이다. 예컨대, 경주 어느 자갈밭에서 발견된 돌조각에는 나라가 불안하고 어지럽더라도 용납될 수 있는 행동만을 할 것을 맹세하면서 열심히 학문을 닦을 것을 기약한 두 젊은이의 결의가 담겨 있었다.

 

이러한 행위의 약속에는 성실한 것과 불성실한 것이 있다. 성실한 약속에서는 약속을 행한 사람이 약속을 지킬 수 있다고 믿고 또 약속한 행위를 실천하려고 의도한다. 이에 반하여 불성실한 약속에서는 약속을 행한 사람이 약속을 지킬 수 있다고 확신하지 않으면서도 약속을 행하고 약속한 행위를 실행하려고도 하지 않는다. 말할 것도 없이 약속이란 약속자가 지킬 수 있다고 확신하고 지킬 의도가 있는 성실한 것을 말한다.

 

그런데 우리 사회에는 불성실한 약속들이 범람한다. 약속을 지킬 수 있는가의 여부는 염두에 두지 않고 또 약속을 지키려는 의지도 없이, 약속함으로써 생기는 이익에만 관심을 갖는 사람들이 많기 때문이다. 그런 사람들은 애초부터 자기의 약속을 이행하겠다는 의사나 의지가 없이 또 약속의 이행이 가능한지는 개의치 않고 단순히 언약을 할 뿐이다. 그런 사람들은 자기들이 행한 약속을 이행치 않음으로써 타인에게 어떤 피해를 주더라도 양심의 가책이나 도덕적인 구속감을 느끼지도 않는 경우가 많다.

 

특히 우리 나라의 정치가들은 국민들에게 화려한 약속들을 하지만 제대로 지키는 정치인은 별로 없다. 아예 처음부터 실행의 가능성도 없는 정략적인 공약을 내세우는 수가 많다. 단지 표만을 모으기 위한 일시적인 수단이다. 행정 기관의 국민에 대한 약속도 너무 쉽게 반복되고 또 제대로 이행되지도 않는다. 가장 공신력이 커야 할 곳에서 약속을 지키지 않는 것이다. 공익 사업을 하겠다고 커다란 재단 법인을 세워놓고 속으로는 세금이나 포탈하는 재산가들도 이런 예에 속한다. 이런 약속들은 개인과 개인끼리의 약속이 아니 데에 더 큰 문제가 있다. 때로는 국민의 일부, 때로는 국민 전체에 대한 약속이다. 다수에게 한 약속일수록 더 잘 지켜야 하지만, 고약하게도 "약속의 구속력은 약속이 행해진 사람 수에 반비례한다"는 토마스 드 퀸시의 역설이 적용된다. 이런 약속들이 지켜지지 않음으로써 사회에 불신풍조를 만연시키고 국민의 양식을 마비시켜 결국 도덕의 혼란마저 일으킨다.

 

우리는 불성실한 약속을 판별할 수 있어야 한다. 약속을 행하는 사람이 그 약속을 이행할 수 있는 능력과 의지가 있는지를 잘 살펴야 하는 것이다. 그래서 불성실한 약속에 속아 넘어가지 않도록 해야 한다. 그리고 지킬 수 있는 약속만을 하고 행한 약속은 꼭 지키는 사람을 존경해야 한다. 우리 자신도 약속을 하는 데에 신중해야 한다. 그리고 행한 약속은 반드시 지켜야 한다. 그것이 우리 사회를 신뢰와 정의가 지배하는 좋은 사회로 만들 수 있는 첫걸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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