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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쟁을 부추기는 실적 원칙의 사회

by 처사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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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쟁을 부추기는 실적 원칙의 사회

 

 

정신분석학에는 쾌락 원칙(the pleasure principle)이라는 것이 있다. 이것은 불쾌한 긴장을 감소시키고 쾌락을 산출하는 방향으로 행동하려는 인간의 본능적 경향을 일컫는다. 쾌락 원칙을 좇는 이러한 본능적 경향은 쾌락을 추구함에 있어서 어떠한 방해도 받지 않으려 하고 욕구를 즉각적으로 만족시키려 한다. 이런 동물적 충동은 오늘날에도 인간의 무의식 속에 남아 있는 원시적 본능이다. 이 동물적 충동에 따르는 쾌락 원칙은 쾌락만을 얻으려 한다. 그러나 인간의 환경 즉 자연의 사회는 쾌락만의 추구를 허용하지 않는다. 즉 통제되지 않는 쾌락 원칙은 현실이라는 자연적인위적 환경과 조화될 수 없다. 사람들은 이 사실을 +곧 깨달았다. 말하자면 욕구의 고통 없는 완전한 만족은 불가능하다는 사실을 알게 된 것이다.

 

그래서 사람들은 순간적이고 불확실하고 파괴적인 쾌락을 억제하거나 포기하고 대신 지체되고 제한적이지만 확실한 만족을 추구하게 되었다. 크지만 불안하고 짧은 만족보다는 작지만 안정적이고 오랜 만족을 선택한 것이다. 인간의 현실에 기초한 이런 합리적 경향을 프로이트는 현실 원칙(the reality principle)이라 불렀다. 눈앞의 단기적이고 즉각적인 쾌락을 포기하거나 자제함으로써 미래의 안정적이고 장기적인 만족을 확보하려 한 것이다. 이것은 현실 원칙이 쾌락 원칙을 통제하게 된 것을 뜻한다. 그러나 현실 원칙은 쾌락 원칙을 폐위시킨 것이 아니라 보호하고, 쾌락 원칙을 거부한 것이 아니라 수정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인간이 욕구의 즉각적인 만족을 추구하는 동물적 충동에만 좇아 행동했다면 인간의 영속적인 결속과 보존을 보장하기 위한 문명을 이룩할 수 없었을 것이다. 그리고 만일 문명을 이룩한 다음에라도 인간이 쾌락 원칙만을 좇았다면 이미 이룩된 문명은 유지되기 어려웠을 것이다. 왜냐하면 이 동물적 충동은 맹목적으로 만족 그 자체를 추구하는데 그러한 충동은 문명을 파괴할 수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문명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그러한 충동에 의한 쾌락 추구는 인정하기 어려운 것이다. 인간의 보존과 번영을 위해서라면 맹목적으로 쾌락만을 추구하는 동물적 본능은 치명적이다. 따라서 문명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쾌락만을 좇는 이 동물적 충동을 억압하고 변형시킬 필요가 있다. 프로이트에 따르면, 현실 원칙에 의한 본능의 이러한 억압적 변형 이것을 정신분석학적 용어로 승화라 한다 '영속적인 본원적 생존 투쟁'에 의해 강화되고 유지된다. 이런 억제에 의해 인간의 동물적 충동이 순화된다. 이런 본능의 순화에 의해 동물적 인간은 사회적 인간 또는 문명적 인간으로 변형된다.

 

인간은 존속하기 위해서 쾌락 원칙을 억제하고 현실 원칙에 따를 수밖에 없다. 말하자면 문명 또는 사회의 유지를 위해서 억압은 필수적이라는 것이다. 프로이트는 인간의 문명은 쾌락 원칙을 좇는 본능적 충동을 효과적으로 제어했을 때부터 비롯되었고 문명이 존속하는 한 그 충동을 계속 억제할 수밖에 없다고 보았다. 인간은 인류의 존속을 위해서는 본능의 억압을 피할 수 없다는 것이다. 프로이트의 이런 주장은 현실 원칙의 배경에 결핍이라는 기본적인 사실이 있는 한 즉 계속적인 억제, 포기, 천연이 없어 인간의 욕구를 다 만족시키기에는 너무나 부족한 세상에서 생존 투쟁이 전개되는 한 정당화된다.

 

그러나 그 결핍이 진정한 자연적인 결핍이 아니라 인위적인 역사적 결핍일 때 그런 주장은 정당화될 수 없다고 하버트 마르쿠제는 말한다. 그런데 대부분의 사회에서의 자원은 개인들의 필요에 의해서만 분배된 것이 아니고 또 필요 충족을 위한 물품의 조달도 개인들의 필요를 가장 잘 충족시키려는 목적으로만 조직된 것이 아니다. 대신 자원의 분배와 결핍의 극복을 위한 노력은 특정 집단이나 개인의 특권적인 지위를 유지하거나 향상시키기 위해서 개인들에게 강요된다. 말하자면 결핍의 많은 부분은 자연적인 것이 아니라 지배라는 인위의 결과이며 그에 다라 결핍을 극복하려는 노력도 대부분 지배를 위한 것이라는 뜻이다. 현실 원칙은 자연적인 결핍에 따른 본능의 억압을 필요로 하지만 지배는 현실 원칙에 따른 피할 수 없는 억압 외에 가외의 억압을 더 요한다는 것이다.

 

마르쿠제는 지배 때문에 필요해진 이러한 가외의 억압을 잉여 억압(surplus repression)이라 지칭하고 그것은 상이한 사회에 따라 상이한 모습을 취하게 된다고 보았다. 그리고 잉여 억압을 요하는 현실 원칙은 본래의 현실 원칙과는 질적으로 달라지기 때문에 거기에는 상이한 이름을 붙여야 한다고 하면서 현대사회 특히 자본주의 사회에서는 경쟁적인 경제적 실적에 따라 사회가 층화된다는 점을 강조하기 위해 잉여 억압을 포괄하는 현대 사회의 현실 원칙을 실적 원칙(the preformance principle)이라 명명했다. 그리고 현실 원칙에 따른 기본적인 억압은 사회의 존속을 위해서 수용되어야 하지만 소수 지배 세력의 특권을 유지하고 강화하기 위해서 강요되는 잉여 억압은 폐지되어야 한다고 강조하였다.

 

현대 자본주의 사회의 실적 원칙 아래서 사람들은 자신들의 노동 실적에 의해 평가된다. 그들의 만족의 범위와 양식도 그들 자신의 노동 실적에 의해 결정된다. 그런데 대부분의 사람들에게 노동은 그들 자신이 통제할 수 없는 자본주의적 질서에 따라 소외된 형태로 수행되며 그 실적의 상당 부분이 경제적정치적 지배 세력을 위해 착취된다. 그러나 그들은 생존을 위해서 그 소외된 노동과 실적의 착취를 감수해야 한다. 이런 메커니즘 속에서 인간은 자신의 삶을 사는 것이 아니라 체제에 의해 이미 수립된 기능을 수행하는 것에 불과하다고 할 수도 있다. 그리고 그들의 노동은 그들의 욕구와 능력을 충족시키지 못한다. 그들의 노동은 그들 스스로 통제할 수 없는 소외된 것이며, 그 실적의 상당 부분은 착취되기 때문이다. 따라서 사람들은 당연히 그런 소외되고 착취되는 노동을 회피하거나 소외나 착취가 덜한 직업에 종사하려고 한다.

 

 

그러나 소외된 노동을 회피하거나 소외나 착취가 덜한 직업에 종사할 수 있는 길이 너무 좁아서 경쟁이 치열하다. 경쟁이 치열하면 치열할수록 경쟁이 어려서부터 시작된다. 그리고 그 경쟁은 학교에서의 학업 실적으로 표출된다. 실적 원칙이 학생 시절부터 나타나는 것이다. 학생들은 그들에게 어울리는 거의 모든 활동, 즉 쾌락과 욕망 충족을 포기하고 오로지 학업실적을 올리는 데에만 전념해야 한다. 학생들은 오직 학업 실적으로만 평가된다. 그래서 학업 실적이 부진한 학생이 주위로부터 받는 차별 대우와 냉대와 멸시 그리고 스스로에 대한 비하감은 엄청나다. 그러한 그들이 감수성이 예민한 시기에 처해 있으므로 자살이나 탈선의 유혹에 넘어가기 쉽다.

 

그렇다면 왜 어린 학생들이 학업 실적을 올리기 위해 그토록 모든 것을 희생해야 하고 학업성적이 부진한 학생들은 왜 그토록 냉대를 받아야 하는가? 학업 실적이 부진한 학생은 경쟁에서 낙오되고 대체로 장차 소외되고 착취당하는 노동에 종사해야 하기 때문이다. 실적 원칙이 지배하지 않는다면 행복은 성적순이 아니지만 그러나 실적 원칙이 지배하는 한, 행복이 성적순으로 결정되는 현실을 부인하기 어렵다. 이 점은 우리의 학생들도 잘 알고 있다. 그래서 때때로 학생들은 "공부 잘하는 사람이 잘 사는 사회"를 원망하면서 스스로 목숨을 끊곤 한다.

 

우리 사회는 해마다 많은 학생들이 성적 부인이 원인이 되어 자살하거나 자포자기하는 일이 계속되고 있다. 어린 학생들이 그들에게 어울리는 욕망을 포기한 채 답답한 방에 갇혀 학업 실적을 오르지 않는 학생은 절망해야 한다. 그런 감내하기 어려운 현실의 억압에 대해 학생들은 죽음으로 또는 범죄나 환각제 복용 등 탈선으로 항거하거나 탈출구를 찾는다. 시한부 종말론에 빠진 학생들이 많은 현실도 이런 맥락에서 이해될 수 있다. 이러한 사실은 우리 사회가 어린아이들에게까지 가혹한 실적 원칙을 강요하고 있음을 단적으로 보여준다.

 

학생들까지 실적 원칙으로 옭아매어 절망과 죽음으로 몰아가는 이런 억압적인 사회 구조를 바꾸지 않으면 안 된다. 그래서 학생들은 학업 실적순으로 그리고 어른들은 경제 실적순으로 행복이 결정되는 가혹한 실적 원칙에 지배받지 않고도 행복할 수 있도록 해야 한다. 학력이나 직업이나 직종에 따른 수입의 격차가 너무 커서 발생하는 빈곤을 없애야 한다. 학력과 직업과 직종에 상관없이 열심히 일하는 사람은 누구나 생계와 노후 대책을 걱정할 필요가 없도록 해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학력이나 직업이나 직종에 따른 과도한 임금격차를 줄이고 정의로운 분배 구조와 인간적인 복지 정책을 실시해야 한다. 반면에 불로 소득은 철저히 가려 세금으로 환수하여 노동하지 않으면서도 잘살고 거들먹거릴 수 없도록 해야 한다. 한마디로 노동의 소외와 착취가 적은 그런 제도를 개발하고 시행해야 한다.

 

우리 사회는 이미 우리 모두가 만족할 수 있는 만큼의 재화를 생산해내고 있다. 그럼에도 많은 사람들이 불행한 빈곤상태에 있다. 소수가 욕심 많게 너무 많은 양을 차지하여 다수가 너무 적은 양밖에는 가질 수 없기 때문이다. 절대적이든 상대적이든 너무 적은 양을 가진 사람들을 불행할 수밖에 없다. 우리의 재화를 임금 정책, 조세 정책, 복지 정책 등으로 정의롭게 분배하면 잉여 억압을 수반한 가혹한 실적 원칙에 지배받지 않고 우리들 모두가 행복해질 수 있을 것이다. 그것이 계급계층간의 갈등을 줄이고 국민간의 화합을 다지는 첩경이며, 폭력적인 혁명을 방지하는 길이 될 수 있다. 그렇지 않으면 실적 원칙에 따라 잉여억압 속에서 많은 사람들이 계속 고통받게 되고 많은 학생들이 학업 때문에 끊임없이 절망해야 한다. 그런 상태는 많은 사람들의 불행에 빠뜨리고 따라서 사회에 불만이 넘치게 만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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