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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북 협상

by 처사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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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북 협상

 

 

1948년의 남북 협상은,

 

1) 해방 전 민족 운동 전선의 연합 전선 운동의 연장선상에서 이해할 수 있다. 김규식은 여운형과 함께 통일된 민족 국가를 수립하기 위한 좌우 합작 운동을 펼쳤고, 그 연장선상에서 남북 협상에 나아갔다. 김구는 해방 후 이승만과 함께 우익 세력을 이끌면서 적극적으로 반탁 운동을 펴다가 이승만이 단독 정부 수립 노선으로 나아가자 다시 남북 협상에 참여하여 민족 통일 전선에 복귀했던 것이다.

 

2) 좌익의 경우, 민주주의 민족 전선(民戰)이 중심이 되었는데, 우 합작 운동에는 반대했으나 분단 국가 수립 방향으로 나아가자 통일 전선을 지향하고 있었다.

 

3)한편, 미국의 대 한반도 정책은 1947년까지는 좌우 합작 운동을 지원하는 것이었으나 트루만 독트린 이후에는 한반도 문제를 UN으로 이관하여 남한 단독 정부 수립으로 방향이 바꾸었다.

 

이 시기의 가장 중요한 문제인 한반도 문제의 UN 이관에 대한 입장은 좌익의 경우 단정수립으로 연결되는 UN 이관 자체를 반대하였다. 우익의 경우는 미소 공위의 실패를 이유로 들어 UN이관을 지지하며 단정 수립을 획책하였다. 한편 남북 협상파는 한반도 문제의 UN 이관에 일단 찬성했으나 단독 정부 수립에는 반대했다. 그들이 유엔 감시하의 남북한 총선거를 찬성한 것은 그것이 단정 수립으로 연결될 것이라는 사실보다 신탁 통치 없는 독립 정부 수립의 길이었기 때문이다.

 

 

한편, 한반도 문제가 미국에 의해 유엔에 이관되었다. 이에 따라 유엔 총회가 194711월 총선거안, 유엔 조선 위원단 설치안, 정부 수립 후 미소 양군 철군안을 가결하였다. 그러나 19481월에 소련이 유엔 위원단의 입북을 거부하자, 유엔 소총회는 남한만의 선거를 결의하였다. 이에 남한의 정계는 단정 수립을 찬성하는 우익 세력과 김구김규식, 민주주의 민족 전선 중심의 좌익 세력의 단정 수립 반대로 나뉘어졌다. 김구김규식의 남한 단정 반대론의 근거는 민족 분열의 방지였다. 특히 김구의 경우 단독 정부의 수립은 남한 정부가 미국의 예속 아래에 들어가는 것이라 이해하였다.

 

한편, 김구김규식을 중심으로 하는 정치 세력의 남북 협상 논리는 미소 공위, UN을 통한 통일안은 타협적이고 비주체적이라고 인식한 주체적인 평화 통일론이었으며, 통일 운동 세력의 통일 전선론이었다.

 

김구김규식 등의 남북 협상론이 민족 주체적평화적민족 통일 전선적 통일 민족 국가 수립 운동의 일환이었다면, 그 전제 조건으로서의 미소 양 점령군의 철수 문제는 당연한 것이었다.

 

남북 협상의 과정을 살펴보면, 김구김규식이 불참한 19484월의 '전조선 정당 사회 단체 대표자연석 회의'에서는 남북한 외군 철수가 주장되었고, 이어 열린 '남북 조선제정당사회단체지도자회의'에는 김구김규식 등 15이 참석하여 외군 철수내전불인(內戰不認)전 조선정치회의 소집단정반대 등을 내용으로 하는 공동 성명을 발표하였다.

 

협상의 결과, 제일 먼저 해결되어야 할 문제가 미소 양군의 철수 문제였다. 소련은 미군과의 동시철수를 주장하였고, 미국은 유엔의 결정을 따른다고 하여 정부 수립 후 철수를 주장하였다. 한편, UN의 결정에 따라 남한에서는 510선거가 실시되고, 717헌법이 공포되기에 이르렀다.

 

510선거 후 북측에서는 제2차 남북 협상을 제의하였으나 김구김규식은 불참하였다. 평양에서 '2차 남북제정당사회단체지도자협의회'가 개최되어, 조선 최고 인민 회의를 창설하고, 외국군의 즉시 동시 철거를 요구하였다.

 

남북 협상을 추진한 세력에게는 남북 협상이 이미 정치적 협상이라기보다 독립 운동민족 운동의 연장으로 인식되었었다. 하지만 이후 남북한이 각각 단독 정부를 수립함으로써 민족 분단이 확정되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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