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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양한 윤리관에 대하여

by 처사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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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양한 윤리관에 대하여

 

 

 

현대 산업 사회에서 사람들이 가치관의 혼란을 느끼고 도덕적 타락이 늘어가는 것을 단순히 과학 기술의 발달에 따른 필연적인 결과로 돌려버릴 수만은 없다. 거기에는 산업 사회로의 변화를 이끌어 내고 지금까지 행동 양식을 정당화해 온 지난 시대의 사고 방식들이 오늘날 상당 부분 왜곡되게 표출되고 있다는 것도 중요하게 작용하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사고 방식이 기반하고 있는 몇 가지 윤리관의 입장들을 살펴 보자.

 

 

쾌락주의와 물질 만능주의

 

쾌락주의란 쾌락이 유일한 선이자 가치이며, 이것을 인생의 목표로 삼는 것, 그리고 쾌락을 추구하고 고통을 피하는 것을 도덕의 원리로 삼는 윤리설이다.

 

쾌락주의는 소크라테스의 제자이며 키레네(Cyrenaics)학파*의 창시자인 아리스티포스(Aristippos)에 의해 비롯되었다. 그는 인생의 목적을 쾌락 추구에 있다고 보면서 될 수 있는 대로 계속해서 보다 강도가 높은 쾌락을 추구할 것을 주장하였다. 또 에피쿠로스(Epikuros)도 쾌락이야말로 인생의 궁극적 목표라고 주장하면서 물질적이고 육체적인 쾌락보다는 흔들리지 않는 마음의 평정을 얻는 데서 인생의 참된 행복이 실현되는 것이라고 하였다. 쾌락주의는 더 나은 쾌락이 어떤 것이든, 사람들이 각자 어떤 쾌락을 추구하든 쾌락이야말로 인생의 목표라고 설명한다.

 

(J.S. Mill)은 모든 쾌락을 동등하게 취급함으로써 쾌락주의가 '돼지의 철학'이라고 비판받는 점을 감안하여 쾌락을 양적 쾌락과 질적 쾌락으로 구분하였다. 비록 어떤 두 쾌락이 양적으로는 똑같다 할지라도 한 쾌락이 질적으로 더 큰 가치를 가질 수 있다는 것이다. 그리하여 밀은 "만족한 돼지보다는 불만족한 인간이 낫고, 만족한 바보보다는 불만족한 소크라테스가 더 낫다"는 유명한 말을 남겼다.

 

쾌락주의는 자기 자신의 쾌락만이 가장 중요하다는 이기주의와는 거리가 멀다. 이기주의자는 다른 사람의 쾌락이 자신의 쾌락을 증진시키는 수단으로서 도움이 될 때만 다른 사람의 쾌락을 고려한다. 그러나 쾌락주의는 모든 사람의 쾌락을 동등한 가치가 있는 것으로 간주한다. 따라서 쾌락주의는 개인의 쾌락이 아니라 공동체 전체의 쾌락을 중요시한다.

 

한편으로 쾌락주의는 어떤 쾌락이든 똑같이 그 자체로서 추구될 만한 가치가 있다고 생각한다. 따라서 육체적 쾌락, 감각적 쾌락만이 중요하다고 주장하는 것은 결코 아니다. 쾌락주의는 다만 쾌락의 다원주의를 함축할 뿐인 것이다.

 

그런데 현대 산업 사회의 인간들은 쾌락주의의 의미를 변질시키고 단지 물질적 가치와 육체적이고 감각적인 쾌락의 추구에만 빠져들고 있다. 나아가 쾌락의 추구가 철저히 이기적인 방식으로 이루어져도 아무런 문제가 없다고 생각하는 경향조차 있다.

 

물론 어느 누구도 무엇이 인간이 추구해야 할 최고의 가치인가에 대해 다른 사람에게까지 강요할 수 있을 정도의 궁극적인 표준을 제시할 수는 없을 것이다. 그러나 타락한 쾌락주의, 물질 만능주의와 향락주의에 대한 반성은 새로운 가치관을 모색하는 데 있어서 출발점이 될 것이다.

 

* 키레네 학파

그리스 소크라테스 학파 가운데 하나. 기원전 400275년 경까지 북아프리카의 키레네에서 아리스티포스와 그의 딸 아레테(Arete), 손자인 아리스티포스 등이 중심이 되어 발전한 쾌락주의 학파.

 

 

 

공리주의와 이기주의

 

공리주의는 영국의 산업 혁명기를 배경으로 18세기 말부터 19세기까지 영국에서 널리 퍼진 사상으로서 흄(David Hume)이 그 이론적인 기초를 마련하였고, 벤담(Jeremy Bendam)에 의해서 체계화되었으며, 밀 부자(James Mill John Stuart Mill)에 의해 발전되었다.

 

공리주의는 인간은 본래 자기 자신의 이해에 관한 한 가장 정확한 판단자이며, 또한 타인을 해치지 않는 한 자기가 바라는 대로 행동할 자유를 가지고 있다고 주장한다. 모든 인간 행동의 동기는 필연적으로 쾌락을 추구하고 고통을 피하는 데 있으며, 인간 행동의 선악을 판단하는 기준은 어떤 행위가 개인과 전체 사회의 쾌락을 증대시키느냐 그렇지 않느냐에 달려있다고 본다. 도덕이나 법률도 사람들이 그것을 지킨 결과 보편적 행복을 실현할 수 있느냐 그렇지 못하느냐에 따라 좋고 나쁨이 결정된다. 따라서 입법자의 사명은 사회 전체의 쾌락을 정확히 계산하여 인간 행위를 합리적으로 규제할 수 있는 규칙을 마련하는 데 있다는 것이다.

 

이러한 공리주의는 모든 사람의 고통과 쾌락을 공통적인 것으로 취급함으로써 개개인을 평등하게 취급하는 근대 민주주의의 발전에 중요한 기여를 하였다. '최대 다수의 최대 행복'이라는 벤담의 공리주의 원칙은 사람들 사이에 어떤 질적인 차이가 있다는 논리를 배격하고 평등한 다수의 행복을 지향하는 것이었으며, 보통 선거 제도를 비롯한 여러 제도의 개혁을 가능케 했다. 그런데 벤담의 원리는 '최대 다수'를 강조할 때 많은 사람들을 생각하는 민주 정치의 원칙에 관심의 초점이 맞추어지지만, '최대 행복'만을 강조할 때는 개인의 권익만을 옹호하게 될 위험이 있다.

 

근대 자본주의는 개개인의 자유로운 이익 추구가 '보이지 않는 손'의 작용에 의해 결국 전체 사회의 이익을 가져올 것이라는 믿음에 기초한 것이었다. 그러나 자본주의가 발달하고 자유 방임 경제의 여러 가지 폐해가 드러나면서 자본주의 경제 원리는 한편으로는 개인의 권리에 제한을 가하고, 다른 한편으로는 국가의 역할을 강화하는 방향으로 수정되었다. 이러한 수정을 가능케 하는 데도 공리주의는 중요한 기여를 하였다.

 

공리주의는 개인과 공동체의 조화를 실현하기 위한 구체적 방안이 쾌락의 계산을 통해 마련될 수 있다는 믿음을 표현하는 것에 불과하기 때문에 구체적인 대답은 상황의 변화에 따라 얼마든지 달라질 수 있는 것이다. 그럼에도 공리주의가 최초로 표방했던 '개인의 자유로운 이익 추구'라는 논리는 사람들에게 끊임없이 이기심을 조장하고, 개인의 배타적인 이익 추구를 정당화하는 것으로 종종 왜곡되고 있다.

 

 

자연권 사상과 권리 만능주의

 

인간은 개개인의 자질의 차이에 관계없이, 또 신분적, 계급적 차이에 관계없이 만인이 인간으로서의 천부적 권리를 갖고 있다는 사상이 자연권 사상이다. 모든 사람은 자유롭고, 권리에 있어서 평등하게 태어났으며 결코 남에게 양도할 수 없는 권리를 부여받고 있다는 것이다. 이는 인간의 존엄과 자유를 존중하는 정신에 기반을 둔 이념으로서 민주주의, 자유주의, 그리고 개인주의와 밀접한 관계를 가지고 있다. 그리고 오늘날에는 모든 사회에 통용되어야 할 기본 윤리로서 인권 보장의 기초가 되고 있기도 하다.

 

자연권 사상에 담겨진 중요한 의미는 인간은 그 자체로서 존엄한 존재라는 것, 그리고 사회 계약에 의해 수립된 정부나 국가가 그 계약을 위반했을 때 개인의 저항권*을 인정하는 것으로 특징지을 수 있다. 그런데 이러한 자연권 사상은 대중 민주주의 시대에 들어와서 개인의 권리만을 강조하고 사회에 대한 개인의 의무와 책임을 소홀히 하는 방향으로 왜곡되고 있다.

 

오늘날과 같은 대중 사회에 있어서는 정치적 권리뿐 아니라 사회적, 경제적인 권리의 충족도 크게 요구됨에 따라 개인의 자유 보장과 일반 대중의 복지 실현과의 균형이 매우 중요한 과제로 등장하고 있다. 그런데 자연권 사상은 자주 개인의 배타적인 권리만을 보장받으려는 권리 만능주의로 퇴색하고 있는 것이다.

 

인간의 권리는 공동체에 소속되어 자신의 의무를 수행하는 과정에서만 보장될 수 있는 것이다. 인권과 같이 침해될 수 없는 개인의 권리란 공동체의 구성원 모두에게 핵심적인 가치를 지니고 있어서 결코 어떤 이유로도 침해해서는 안 되는 권리에 한해서만 적용시켜야 할 것이다.

 

한편, 사회 계약 사상은 마치 개인이 상행위에 있어서의 계약과 같은 방식으로 사회의 일원으로 된 것 같은 착각을 낳았다. 그 결과 사회 계약 사상은 개인의 사회적인 책임이나 사회인으로서의 의무를 상거래와 같은 방식으로 바라보게 하는 문제를 안고 있다. 사회와 개인의 관계는 마치 부모와 자식, 혹은 친구들 사이의 의리 관계처럼 단순히 계약의 문제로서만 처리하여 생각할 수 없는 면이 많다. 우리는 태어날 때부터 이미 어떤 공동체에 소속되어 그 공동체의 보호 속에서 양육되고, 그 공동체의 가치관을 전수 받는다. 따라서 개인과 공동체와의 관계는 상거래와 같은 관계를 넘어서 어떤 공동 운명체로서의 속성도 지니게 되는 것이다.

 

그런데 개인과 공동체의 조화를 실현하려는 사회 계약 사상의 참 의미가 왜곡되면 개인의 배타적인 권리만을 강조하게 되고, 공동체에 대한 개인의 의무를 소홀히 하게 된다.

 

* 저항권

기본적 인권을 침해하는 등의 부당한 국가 권력의 행사에 저항할 수 있는 국민의 권리.

 

 

윤리적 상대주의, 회의주의

 

현대 사회의 가치관의 혼란과 도덕적 타락의 이면에는 궁극적으로 윤리적 상대주의와 회의주의가 자리잡고 있다.

 

윤리적 상대주의란 각 개인과 사회는 그 자체의 도덕 규범을 갖고 있으므로 한 개인 또는 사회에서 적용되는 도덕은 다른 개인이나 사회에 그대로 적용될 수 없다는 주장이다. 즉 도덕이란 어떤 객관적이고 보편적인 표준이나 원리가 있을 수 없다는 것이다.

 

윤리적 상대주의는 '서로 다른 문화권은 그 나름의 도덕 규범을 가진다'는 문화적 상대주의를 통해 정당화된다. 우리 나라 사람들이 개고기를 먹는 것이나 힌두교 문화권에서 소를 숭배하는 것 등은 문화의 차이에 의한 것이다. 따라서 어떤 문화권의 도덕 규범을 가지고서 다른 문화권의 행위를 도덕적으로 평가하는 것은 정당하지 못하다는 것이다. 문화적 상대주의는 사람들이 서로 다른 규범을 받아들이기 때문에 세계의 모든 사람들에게 적용될 수 있는 보편적 규범은 없다는 윤리적 상대주의로 이어진다.

 

한편으로 윤리적 상대주의는 사회마다 도덕적으로 '옳다' 또는 '그르다'는 말의 의미가 다르기 때문에 한 사회의 도덕 판단이 다른 사회의 도덕 판단보다 우월하다고 결정할 어떤 기준도 없다는 논리를 통해 정당화되기도 한다. 어떤 사회에서는 '좋은 사람'이라는 말이 온순하고 관대한 사람을 가리키는 데 반해, 어떤 사회에서는 복수하는 데 재빠르고 적에게 무자비한 사람을 가리킬 수도 있다는 것이다.

 

이러한 윤리적 상대주의는 결국 윤리적 회의주의를 낳는다. 윤리적 회의주의란 무엇이 도덕적으로 선하고 악한지를 궁극적으로 판단할 수 있는 기준은 결코 존재할 수 없다는 입장을 말한다. 윤리적 회의주의는 윤리적 존재로서의 인간의 본성을 상실하게 하며, 그 결과로 현대 산업 사회의 가치관의 혼란과 도덕적 타락을 더욱 심화시키고 있다. 그러나 문화적 상대주의는 문화권마다 서로 다른 문화와 도덕 규칙을 갖고 있다는 단순한 사실만을 밝혀 주고 있을 뿐이다. 그것은 단지 사실에 대해 설명하는 것일 뿐 결코 당위에 대해 설명하는 것은 아니다. 때문에 문화적 상대주의를 가지고 윤리적 상대주의를 정당화하는 것은 논리적 비약이다. 예를 들어 두 사회가 대량 학살이 옳은가 그른가에 대해 서로 의견이 다르다는 사실로부터 이런 도덕 문제에 대해 정당하고 합리적인 의견이 없다는 결론을 도출할 수는 없는 것이다.

 

사회에 따라 어떤 구체적인 행위에 대한 도덕적 평가는 물론 달라질 수 있지만 그러한 행위들을 판단하는 궁극적인 도덕 원리는 존재하기 마련이다. 어느 사회에서나 인간은 공통적인 본성을 가지고 있으며, 인간이라면 누구나가 인간다운 가치와 존엄성을 실현할 수 있는 사회를 꿈꾸기 때문이다. 물론 인간이 어떤 존재인지를 우리가 완전하게 밝힐 수 없듯이 어떤 가치와 행동이 올바른 것인지에 대해 완전 무결한 해답을 제시할 수는 없을 것이다. 그러나 '인간의 존엄성'을 비롯하여 인류가 예로부터 추구해 왔고 앞으로도 변함없이 추구해 나가야 할 보편적 가치의 의미를 되새겨보는 일은 현대 산업 사회의 가치관의 혼란과 도덕적 타락을 극복해 나가는 데 있어서 중요한 일이라 하지 않을 수 없다.

 

 

윤리적 절대주의

 

절대론적 윤리설에 대해 살펴보면 이것은 그리스의 소크라테스에서 20세기의 칸트에 이르기까지 발달되어 온 윤리설로서, 가치 판단의 기준은 불변하는 이성에 있고 언제나 변하지 않는 연속성을 지니고 있다는 것이다.

 

이 윤리관의 장점은 명확한 기준으로 인해 사회의 안정에 기여하는 것이다. 이는 물질적 풍요로 주관적 지표인 개개인의 개성과 인격 완성이 점점 중요시되면서 이 절대론적 윤리설은 명확하게 윤리가 나아갈 길을 제시한다.

 

그러나 사회의 변화의 적응에 어렵다는 단점도 있다. 이 윤리설 자체의 불변적이고 연속적인 성격은 하루가 다르게 변화하는 현실에 적응이 어렵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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