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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마스 쿤 '과학 혁명의 구조'

by 처사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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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마스 쿤의과학 혁명의 구조

 

 

오늘날 과학은 특별한 지위를 누리고 있다. 흔히 '비과학'이란 말은 근거도 없고 얼토당토 않다는 뜻으로 받아들여진다. 반면에 '과학적'이란 말은, 어떤 주장이나 연구가 논리적이고 믿을 만하다는 의미를 지닌다. 그래서 많은 학문들이 자연 과학, 인문 과학, 사회 과학처럼 '과학'이란 이름을 얻으려 하는지도 모른다. 하지만 오늘날 우리가 알고 있는 의미에서의 과학은 그 역사가 그렇게 오래된 것은 아니다. 서양의 경우, 실질적인 과학의 발달은 근대에 이르러 비로소 이루어 졌다. 즉 갈릴레이 및 케플러에 의해 시작된 과학 혁명이 뉴턴에 의해 완성됨에 따라 근대 과학이 꽃 필 수 있었던 것이다. 베이컨은 이러한 근대 과학의 목적을 '인간의 부를 증대'하는 데 있다고 했다. 그러면서 그는 체계화된 관찰을 통해 사실을 수집하고, 그 사실을 토대로 하여 이론을 도출함으로써, 근대 과학의 목적을 달성할 수 있다고 믿었다.

 

이같은 베이컨의 과학관은 그 후 다른 사람들에 의해 수정되고 개선되어 오늘날까지도 그 골격을 유지하고 있다. 이것을 전통적 과학관 또는 정통적 과학관이라고 한다. 그런데 1960년에 이르면 여러 과학자 및 철학자들에 의해 새로운 과학관이 대두되어, 전통적 과학관이 위기에 직면한다. 이 새로운 과학관을 주도하는 사람이 바로 토마스 쿤이다.

 

전통적 과학관과 쿤의 새로운 과학관의 차이는 무엇일까? 전통적 과학관에 의하면, 과학은 '입증된 지식의 체계'이다. 즉 과학 이론은 관찰과 실험을 통해 얻어진 경험적 사실을 토대로, 엄격한 방법을 거쳐 이끌어 내어진다. 그러므로 과학은 객관적이다. 이처럼 전통적 과학관에 의하면, '과학적 지식은 객관적으로 입증된 지식'이므로, 믿을 수 있는 지식이다. 과학에 대한 이러한 생각은 17세기 갈릴레이나 뉴턴, 베이컨 등에 의해 일반화되기 시작했는데, 오늘날에는 이를 귀납주의 과학관이라고 한다. 이것을 귀납주의 과학관이라 부르는 이유는 과학적 지식이 '귀납 추리'에 의해 얻어지기 때문이다. 그런데 쿤은 구체적인 과학사에 대한 이해를 토대로 하여, 이러한 전통적 과학관을 정면으로 부정한다. 첫째, 과학의 변화와 발전은 누적적으로 이루어지지 않고 혁명적으로 이루어진다. 전통적 과학관에 의하면, 과학에서 뒤이어 나타나는 이론은 그것보다 앞선 이론을 포함한다. 즉 과학은 항상 이전의 업적이 누적되어 변화와 발전을 이루어 왔다고 주장하는 것이다. 하지만 쿤은 과학 이론의 변화가 연속적으로 전개되어 온 것이 아니라, 불연속적으로 이루어져 왔다고 주장하고 있다.

 

둘째, 쿤은 과학자 공동체의 사회적 성격을 강조한다. 흔히 진리는 독립적으로 존재하며, 우리는 단지 이러한 진리를 발견할 수 있을 뿐이라고 생각하는 경향이 있다. 그러나 쿤에 의하면, 진리는 과학자 공동체 달리 말하면 전문가 집단의 협의에 의해 결정된다는 것이다. 그리고 셋째, 둘째와 관련된 것으로, 과학적 지식의 객관성은 전문가 집단의 상호주관성에서 찾아진다. 일반적으로 우리는 개별적인 과학자들의 주관을 뛰어넘는 객관적인 지식이 존재한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쿤은 과학적 객관성을 과학자 개개인의 주관이 서로 의견을 교환하고 토론하는 가운데 확보되는 것으로 보고 있다. 패러다임과 정상 과학에 대해 살펴보자.

 

어느 한 시기에 있어 특정 분야에 대한 역사를 조사해 보면, 여러 이론의 개념, 관찰, 장치에 적용되는 설명이 반복됨을 발견할 수 있다. 이들이 교과서와 강의 실험 등에 나타나는 과학자 집단의 '패러다임'이다. 이러한 패러다임에는 과학에 기본이 되는 이론과 법칙들, 그리고 이 법칙을 다양한 상황에 적용하는 표준적인 방법 및 기술과 형이상학적인 원리가 모두 포함된다. 그뿐 아니라 그러한 이론을 선택하고 평가하고 비판하는 데 관계된 원리 등도 모두 속하는 개념이다. 이처럼 쿤이 내세우는 패러다임이라는 개념은 그 의미가 매우 포괄적이다. 게다가 쿤은 이 패러다임이란 개념을 여러 가지 뜻으로 사용하며, 애매함과 오해의 소지를 남겨 놓았다. 그래서 그 후 그는 이점을 시인하고, 재판을 위해 1969년 쓴 후기에서 패러다임이란 뜻을 다음과 같이 두 가지로 구분하여 밝히고 있다. 즉 패러다임이란, 첫째 '특정의 공동체 구성원들이 공유하고 있는 신념, 가치, 기술 등의 총체를 가리키는 개념'이며, 둘째 '이러한 총체 가운데 한 구성 요소를 의미하는 것으로, 구체적인 퍼즐 놀이에 사용되는 모델과 실례를 의미하는 개념'이다. 한편 하나의 패러다임이 자리를 굳히게 되면, 그것은 정상 과학의 단계로 접어들게 된다. 여기서 정상 과학이란 하나 또는 그 이상의 과학적 업적에 확고한 기반을 둔 연구를 의미한다. 이들 업적은 일정 기간 동안 어떤 특정한 과학자 집단이 연구의 기초로 인정한 것들이다. 그리고 이러한 업적은 끈질긴 신봉자 집단이 이와 대립되는 자신들의 과학 활동을 버리고 전례 없이 그것에 매혹될 만큼 탁월한 업적이다. 동시에 그 업적은 새로 구성된 연구 집단에게 여러 가지 문제들을 제기할 수 있을 만큼 개방적이기도 하다. 이렇게 볼 때, 패러다임과 정상 과학은 매우 밀접한 관계를 가지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정상 과학은 하나의 패러다임 안에서의 연구 활동을 뜻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공통된 패러다임에 기반을 둔 연구자들은 그 과학 연구에 있어서 동일한 원칙과 기준을 가지게 된다.

 

 

과학 혁명의 구조라는 그의 책, 1장에서 쿤은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역사를 일화나 연대기 이상의 것을 포함하는 것으로 본다면, 그 역사는 현대 우리가 가진 과학관에 결정적인 변혁을 가져다 줄 것이다. 과학자 자신들도 이제까지 그러한 과학관을 주로 완성한 과학적 성과로부터 도출해왔다. 이 말을 통해 쿤이 과학 연구에 있어서 역사적 방법을 얼마나 중요시하고 있는지 알 수 있다. 그래서 그는 이 책의 목적을 '실제 연구 활동 자체의 역사적 기록에 근거한, 전혀 새로운 과학의 개념을 찾는 데 있다'고까지 말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면서 그는 과학에 대해 다음과 같은 질문을 제기한다. 과학은 누적적으로 발전하는 것일까, 아니면 그 반대일까? 쿤에 의하면, 이러한 물음에 대부분의 교과서에서는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과학이란 개별적인 발견이나 발명이 누적되어 발달한다. 그리고 관찰과 경험만을 중요시하여, 개인적이고 역사적인 우연과 뒤섞인 자의적인 요소를 배제한다. 즉 교과서에서는 과학적 방법을 적절한 자료의 수집기술, 그리고 이들 자료들을 이론덕으로 일반화시키는 논리적 조작 방법이라 말하고 있다.

 

이처럼 과학이 누적적으로 발전하고 객관적 성격을 가진다는 견해에 대해, 쿤은 근본적인 물음을 제기한다. 2장에서 쿤은 정상 과학이 나타나기 이전의 상태, '전과학'에 대해 설명하고 있다. 정상 과학이란 하나의 패러다임 안에서의 과학 활동을 가리키는 말이다. 그리고 이러한 패러다임이 출현하기 이전을 가리켜 전과학 단계라고 한다. 쿤은 전과학 단계를 전패러다임의 단계나 미성숙의 단계라고 말하고 있다. 이러한 단계에서는 어떤 현상에 대해 하나의 보편적인 견해가 존재하지 않는다. 그래서 '패러다임 또는 후보 패러다임도 없는 경우에는, 과학의 발전에 관련되는 한 모든 사실들이 똑같이 적절한 것으로 보인다.'

 

모든 과학의 초기 단계는 몇 가지 특이한 자연관 사이의 계속적인 경쟁으로 특징 지워진다. 그런데 이들 여러 학파간에 차이가 나는 것은 그 방법이 틀렸기 때문이 아니다. 이른바 세계를 보는 방향과 그 방향에서 과학을 실행하는 방법이 달랐기 때문이다. 그러나 한 개인 또는 한 집단이 다음 세대 연구자들의 대부분을 매혹시킬 수 있는 업적을 내놓았을 때, 그 이전의 학파들은 점차 소멸하게 된다.

 

18세기 전반, 전기 연구의 역사는, 과학이 보편적으로 받아들여지는 최초의 패러다임이 나오기 이전에 어떻게 발전되어 왔는가를 구체적으로 보여 주는 좋은 예가 된다. 당시에는 중요한 전기 실험가의 수만큼이나 전기의 본질에 대한 다양한 견해가 있었다. 즉 헉스비, 그리에, 데자귤리에르, 뒤페, 놀레, 왓슨, 프랭클린 등이 모두 나름대로 전기의 본질에 대해 독창적인 견해를 주장하고 있었던 것이다. 이들 사이에는 약간의 공통점밖에 존재하지 않았다. 그러다가 전기의 다양한 현상을 포괄적으로 설명할 수 있는 하나의 이론이 등장함으로써, 전기 현상에 대한 하나의 패러다임이 성립하게 되었다. 이렇게 하나의 패러다임이 등장함으로써 전과학의 단계가 끝나고 정상 과학의 단계가 나타나는 것이다.

 

3장에서 5장까지는 정상 과학에 대해 설명하고 있는 부분이다. 하나의 패러다임이 자리를 굳히게 되면 정상 과학의 단계에 접어들게 된다. 그리고 공통의 패러다임이 기반을 둔 정상 과학의 연구자들은 과학 연구에 있어서 동일한 원칙과 기준을 가지게 된다. 그리하여 패러다임은 과학 안에서 이루어지는 연구의 정당성을 결정 짓는 기준을 제시한다.

 

하나의 패러다임이 그 지위를 얻게 되는 것은 전문가 집단이 중요하다고 인정한 몇 개의 문제를 해결하는 데 다른 경쟁 이론들보다 우수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다른 이론보다 우수하다고 해서 그 패러다임이 한 문제를 완전히 해결한다거나, 다른 많은 문제들을 모두 다 설명할 수 있다는 것은 아니다. 패러다임의 성공은 그 초기에 선정된 몇 개의 불완전한 사례에서 발견될 수 있는 성공의 약속에 불과하다.

 

정상 과학은 그러한 약속이 실현되는 그 실현의 과정은 패러다임에 의해 특히 명료해지는 사실에 관한 지식을 확대시킴으로써, 그러한 사실과 패러다임에 의한 예측간의 조화를 증대시킴으로써, 그리고 패러다임 자체를 좀더 명확히 정비함으로써 이루어진다.

 

그리고 정상 과학은 새로운 종류의 현상을 추구하는 것을 목적으로 하지 않는다. 패러다임이 이미 제공한 현상이나 이론을 명확히 하는 데 집중할 뿐이다. 패러다임이 효과적으로 기능을 발휘하는 동안, 전문가들은 그 패러다임이 없었다면 상상도 하기 어렵고 문제시하지도 않았을 문제들을 해결할 수 있게 된다. 쿤은 정상 과학에서 과학 활동을 퍼즐 놀이에 비유하고 있다. 여기서 퍼즐은 일상적인 의미로, 해결 과정에서 독창적인 기술을 시험할 수 있는 특수한 종류의 문제를 뜻한다. 즉 퍼즐은 해결 과정에서 독창력과 기술을 요구하지만, 거기에는 패러다임의 규칙이 포함되어 있다. 그러므로 패러다임의 규칙을 잘 이용하기만 하면 곧 풀어지게 된다.

 

패러다임의 존재는 그 문제의 해결을 전제하고 있다. 암 치료나 영구 평화에 대한 문제는 그것에 대한 어떠한 해결도 있을 수 없기에 퍼즐이 될 수 있다. 한편 정상 과학에 종사하는 과학자들은 그가 활동하고 있는 패러다임에 비판적인 장을 취해서는 안 된다. 그렇게 해야만 패러다임을 세밀하게 만들기 위해 정신을 집중하여 노력할 수 있으며, 깊이 있고 면밀한 자연을 조사하는 연구를 수행할 수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정상 과학은 보수적이며 성공적인 기술을 확장하고, 기존의 체계 안에 존재하는 문제들을 제거하기 위해 힘쓸 뿐이다. 정상 과학에서 '패러다임과 일치하지 않는 연구 결과는 과학자의 실수로 생각되며, 문제에 대한 해결책을 찾지 못할 때에는 그 이론에서 잘못을 찾지 않고 과학자에게서 잘못을 찾는다.' 따라서 과학 전체는 그렇지 않으나, 정상 과학의 발전은 누적적이다.

 

6장에서 8장까지는 변칙 사례의 발견과 정상 과학의 위기 문제를 다루고 있다. 정상 과학은 사실이나 이론에 있어서 새로운 것의 발견을 목적으로 삼지 않는다. 그러나 새로운 미지의 현상은 계속해서 나타나며, 혁신적인 새로운 이론도 발명된다. 그러다 어느 단계에 이르면 패러다임의 기본 이론과 모순되는 변칙 사례가 나타난다. 하지만 그러한 변칙 사례가 관찰되는 상황에서도 처음에는 예측된 정상적인 상태만 경험된다. 그러나 조금 더 시간이 지나 더 많은 변칙 사례가 나타남에 따라 무엇인가 잘못되었다는 것을 알게 되고, 그 전에 잘못되었던 것들과 연관 짓게 된다.

 

그런데 변칙 사례가 위기를 초래하려면, 그것은 일반적인 변칙 이상의 것이어야 한다. 다시 말해서 변칙 사례를 조사할 만한 가치가 있다고 인정할 수 있는 요소가 존재해야만 한다. 그러므로 변칙 사례가 패러다임의 역할을 전면적으로 부정하게 될 때에만 위기가 온다. 즉 모든 위기는 패러다임이 모호해지고, 그 결과 정상 과학 연구를 위한 규칙이 상실됨으로써 시작되는 것이다.

 

변칙 사례에 직면하면 과학자들은 과거의 패러다임을 불신하고, 그 대안을 생각하기 시작한다. 하지만 자신들을 위기에 처하게 한 패러다임을 공식적으로 포기하지는 않는다. 대체 패러다임을 채용하지 않고 하나의 패러다임을 버리는 일은 과학 그 자체를 포기하는 일이기 때문이다.

 

일단 과학 이론이 패러다임의 지위를 얻으면, 그 이론이 대체될 다른 후보 이론이 나타날 때에만 무용하다고 선언된다. 그렇다면 과학자들은 이러한 위기에 어떻게 대처할까? 쿤은 다음과 같은 세 가지 경우로 구분되어 나타난다고 본다. 첫째, 위기를 일으킨 문제가 정상 과학에 의해 해결될 수 없는 것으로 판명 나는 경우가 있다. 둘째, 변칙 사례가 현대의 발전 상태로는 해결할 수 없는 것으로 드러나, 다음 세대에서 해결해야 할 과제로 넘겨지는 경우가 있다. 셋째, 새로운 후보 패러다임이 출현하여 위기가 끝나는 경우가 있다. 그리고 이 셋째 경우처럼 새로운 패러다임이 출현하여 과학자들에게 수용되면 과학 혁명이 일어나게 되고, 그 패러다임 안에서 정상 과학이 전개된다.

 

9장과 10장은 과학 혁명과, 거기에 관련된 문제를 다루고 있다. 위기를 해결하기 위한 패러다임이 나타나고, 이 패러다임을 과학자들이 받아들이면 과학 혁명이 일어난다. 쿤은 대표적인 과학 혁명 사례로, 코페르니쿠스, 뉴턴, 라부아지에, 아인슈타인 등이 제시한 이론의 변화를 들고 있다. 그러면서 쿤은 과학 혁명을 정치 혁명에 비유하여 설명한다. 정치 혁명은 현재의 제도가 환경에 의해 제기된 문제들을 적절하게 해결할 수 없을 때 시작된다. 과학 혁명도 마찬가지이다. 과학자 집단이 현재의 패러다임이 자연 현상의 어느 측면을 적절히 설명하는 기능을 상실하게 되었음을 느낄 때 시작되는 것이다. 그런데 이러한 과학 혁명은 공통의 전제가 변하기 때문에 세계관의 변화를 수반한다. 새로운 패러다임에 의해 과학자들은 새로운 기구를 사용하고, 새로운 문제 영역을 보며, 그들이 연구에 종사하는 세계를 다르게 보게 되기 때문이다. 과학 혁명은 새로운 패러다임으로의 전이이다. 그런데 새로운 패러다임으로의 전이는 낡은 패러다임을 정비하거나 확장함으로써 성취되는 누적적인 과정이 아니다. 그것은 패러다임의 방법과 적용은 물론 가장 기초적인 이론적 일반화의 일부까지도 변화시키는 하나의 재구성인 것이다. 패러다임의 전이가 완료되면, 그 분야에 관한 관점, 방법, 목표 등이 모두 변화된다.

 

과학 혁명은 낡은 패러다임이 전적으로 혹은 부분적으로 양립할 수 없는 새로운 패러다임에 의해 대치되는 비()누적적인 발전 과정이다. 그러면서 11장에서 쿤은 오늘날 과학 교과서에서는 과학이 누적적으로 발전해 왔다고 묘사하고 있다는 사실을 거부한다. 교과서는 학생들이 보다 빨리 현대 과학자 집단이 알고 있는 것에 익숙해지는 것을 목표로 삼기 때문에, 정상 과학의 실험, 개념, 법칙, 이론을 가능한 한 분리해서 하나씩 다루고 있다.

 

그렇게 함으로써 건물을 지을 때 벽돌을 하나하나 쌓아 올리는 것처럼, 과학이 현대의 기술 지식 전반을 구성하는 일련의 개인적 발견과 발명에 의해 지금의 상태에 이른 것 같은 인상을 준다는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과학이 발달하는 길이 아니라고 쿤은 반박한다.

 

12장에서 쿤은 공약불가능성 문제를 논의하고 있다. 이 개념은 수학에서 유래한 용어로, 직각 이등변 삼각형의 빗변은 그것의 옆변과 공약이 불가능하다는 뜻이었다. 그러므로 공약 불가능성이란 말을 좀더 쉽게 쓴다면, 어떤 두 개념이 있을 때 그 둘 사이에는 어떠한 공통적인 성격도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쿤은 만약 두 패러다임이 있다고 가정할 때, 이 두 패러다임은 서로 단절되어 있으며, 두 패러다임을 평가할 수 있는 공통의 기준은 존재하지 않는다는 의미로 이 공약 불가능성 개념을 사용한다. 이런 까닭에, 서로 다른 패러다임 안에서 연구하는 사람들은 우주를 다른 시각으로 보고, 해결해야 할 문제가 무엇인가에 대한 의견도 다르다. 그리고 비록 동일한 의사 소통이 불가능하다 하더라도 서로 다른 의미를 나타내기 때문에 의사 소통이 불가능하다. 그래서 쿤은 한 패러다임을 신봉하다가 다른 패러다임을 신봉하는 것은 일종의 '종교적인 개종의 체험'이라고까지 말하고 있다. 그만큼 서로 다른 패러다임 사이에는 공통의 기준이 없다는 뜻이다.

 

13장에서 쿤은 과학적 진보의 문제를 다루고 있다. '과학'이라는 말은 대체로 명백한 진보를 보이는 분야에 한해 사용된다. 하지만 쿤의 입장에서는, 진보라는 것이 명백하고 확신할 수 있는 것으로 보이는 것은 정상 과학의 시기뿐이다. 이 때에는 개별적인 학파의 목표와 표준에 의문을 제기하는 경쟁 관계에 있는 학파가 없다. 그런 까닭에 정상 과학의 진보를 매우 쉽게 알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과학 혁명을 통해 과학이 진보한다고 할 수 있을까? 서로 대립 관계에 있는 두 진영들 중에 어느 한쪽의 승리가 완전해졌을 때, 그 승리가 진보라고 할 수 있을까? 이 문제에 대하여, 쿤은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패러다임의 변화에 의해 과학자들과 그 제자들이 진리에 한 걸음 더 접근해 갈 수 있다는 관념을 표명하거나 암시하는 일을 우리는 포기해야 할지도 모른다. 그러면서 쿤은 과학의 진보가 특정한 목표 아래에서만 논의되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특정한 목표 없는 진화, 발전, 진보가 무엇을 의미할 수 있는가? 많은 사람들에게 그와 같은 용어들이 갑자기 자기 모순적인 것으로 보여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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