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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과 페르시아만 전쟁

by 처사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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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과 페르시아만 전쟁

 

 

1. 새로운 세계 질서

 

부시가 제창한 것으로 알려진 '새로운 세계 질서(New World Order)'란 말은 처음에는 그 말의 구체적인 실체가 불명확했다. 페르시아 만 전쟁 뒤 부시에게 '외교의 부시'라는 말이 따라다녔다. 즉 부시가 199011월 직접 각국 수뇌에게 전화를 걸고 베이커 국무 장관을 중동-중남미-미국으로 하루 15km를 날아다니게 하면서 강행한 캠페인 덕분에 결정적으로 '무력사용승인'이라는 유엔 안보리 결의 678호를 얻어내고 다국적 연합군의 전쟁태세를 공고히 한 것은 외교상 드물게 존재하는 큰 사건이었다.

 

그러나 그것은 필요하다면 원칙을 굽히더라도 목적을 달성한다는 힘의 외교에 불과했다. US뉴스와 월드 리포트지의 페르시아 만 전쟁 내막 보고서 '승리 없는 승전고'에 따르면 유엔결의 찬성표의 대가로 콜롬비아는 비밀리에 마약 밀수범의 미국 인도에 관한 합의를 지키지 않아도 좋다고 인정받았고 말레이시아는 미국의 섬유 수입 할당 초과 특례를 인정받았다. 다국적군 참가 대가로 이집트군은 67억 달러의 대미 군사 채무를 상쇄시킬 수 있었다. 미 국무성이 작성한 테러 지원국 리스트에 빠지지 않고 이름이 올라 있던 시리아도 미국의 중개로 사우디아라비아로부터 수십 억 달러의 원조를 받아냈다.

 

한편 소련에게는 힘으로 대항했다. 유엔 결의 지지를 받아낸 뒤 미국은 소련이 적은 병력이라도 다국적군에 참여할 것을 요구했다. 소련 측이 원했던 중동 국제 평화 회의 개최 안보리 결의안은 시기가 좋지 않았다. 미국으로선 당혹스러울 수밖에 없었던 전쟁 중 고르바쵸프의 평화 공세도 교묘하게 받아넘기며 한치도 타협하지 않았다. 소련의 패배였던 것이다. 이것은 또한 세계 정치 무대의 최고 스타였던 고르바쵸프가 퇴조하고 있음을 극적으로 보여주고 있는 예이기도 했다. 이에 대한 소련의 군과 보수파의 불만은 199012월에 셰바르드나제 소련 외무 장관의 사임으로 나타났다. 이 파장은 심지어 1991년 후반에 일어난 보수파 쿠데타 미수 사건과 소련 붕괴로까지 이어졌다.

 

 

힘의 외교와는 또 다른 차원을 보면 1992년 대통령 선거전에서 제 3의 후보 로스 페로로부터 혹독한 비판을 받은 것처럼 페르시아 만 전쟁 직전까지 미국의 대 이라크 외교는 철학과 정세 판단을 결여한 외교의 표본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이라크 군이 쿠웨이트를 침공하기 8일 전 에이프릴 글러스피 주 이라크 미국 대사가 후세인 이라크 대통령과 회견하면서 유약한 태도를 보여, 후세인에게 쿠웨이트를 침공하더라도 미국이 크게 문제 삼지 않을 것이라는 잘못된 인상을 심어주기도 했다. 그러나 그녀만을 질책할 수는 없었다. 그로부터 3일 뒤에 부시 대통령이 후세인 대통령 앞으로 보낸 친서에 이라크가 쿠웨이트 국경에 대군을 결집시키고 있다는 사실에 대해선 언급도 하지 않은 채 후세인 측이 대사에게 말한 '미국과의 우호 관계를 바란다'는 발언을 환영한다는 것에 그치고 있다.

 

 

2. 미국과 페르시아만 전쟁

 

미군기의 바그다드 폭격과 그로 인해 페르시아 만 전쟁의 불길이 타오른 것이 1991117일 새벽. 그로부터 2년 후에 다시 폭탄과 순항 미사일이 이라크를 향했다. '새로운 세계 질서'를 이끌 것이라 생각되던 부시 대통령은 백악관에서 물러나고, 굴욕적인 패배를 맛보았던 후세인은 권좌에 복귀해 '성전의 재개'를 부르짖으며 떠나간 부시를 격렬하게 도발했다.

 

 

1991년 당시 능수능란한 솜씨의 부시는 28개국이 참가한 다국적군을 만들어내고 신속하게 40만 이상의 미군 병력을 투입, 전쟁이 벌어지기 전에는 3만 명에 이를 것이라 예상되던 미군 전사자 수를 크게 줄이는 놀라운 능력을 과시했다. 또한 '보이지 않는' 전투 폭격기 F117등 하이테크 병기를 구사하여 전체로는 43일만에, 지상전에서는 100시간만에 이라크 군을 점령지 쿠웨이트에서 깨끗이 몰아냈다.

 

 

전쟁 직후인 19913월 미국 국민의 부시 지지율은 미국 대통령 사상 최고치인 90%를 기록했다. 그러나 그것은 부시로 하여금 자만하게 하였고 결국은 부시 최대의 정치적 실패에 이르게 하였다.

 

국민들의 전쟁에 대한 승리감은 욕구 불만으로 바뀌었고 무엇보다도 미국 국민을 초조하게 했던 것은 미국 당국의 예상과는 달리 쓰러지지 않고 버티는 <후세인의 그림자>였다. 이것이 갈 길 바쁜 부시의 발을 잡아끌었고 후세인 대통령은 병력을 재편해 국내 반 체제파에 대한 탄압을 계속했다. 또한 19916월과 9, 19922월과 7월로 예정되었던 핵개발계획에 대한 유엔 시찰을 완강히 저항하자, 미국 국민은 결국 완전히 실망하게 되었다.

 

 

그런 의미에서 이 전쟁의 최대 쟁점은 부시 대통령이 내린 1991228일 아침의 공격 정지-정전 결정이었다. 미군 군사 전문가 몇 명에 의하면 그들 모두 당시의 정전 결정을 지지했던 것에서 '조금 더 전투를 계속했어야 했다'는 견해로 돌아섰음을 확인할 수 있었다. 실제로 부시 대통령의 공격 정지 명령은 이라크 영토 깊숙한 바스라 서쪽 약 43km까지 진주한 미군 제 24보병 사단이 이라크 정예 공화국 방위대 3개 사단을 전멸시킬 수 있는 진형을 갖추었을 때 내려졌다. 파견군 총 사령관 슈왈츠코프 장군은 전쟁을 계속할 것을 주장하며 워싱턴에 강하게 저항했다고 보도되었다.

 

 

그러나 부정확했던 미국의 정보 수집. , 미국은 자신들이 이라크 군에게 실제 이상으로 커다란 손실을 입혔다는 그릇된 믿음에 사로잡혀 있었고 부시가 이라크 국민이나 병사에게까지 공감을 표시하면서 지나칠 정도로 '정의의 전쟁'을 표방했다는 사실, 사우디아라비아로부터 전후 이 지역에 힘의 공백 상태를 낳지 않도록 이라크를 완전히 해체시키지 말고 전쟁을 조기에 종결시키라는 미국에 대한 강한 압력, 또한 당시 소련과 중국의 움직임에 대한 염려 등이 당시 정전 결정을 부추기고 있었다고 말하기도 한다.

 

부시는 자신의 결단이 옳은 것이었다고 계속 주장하고 있다. 그렇지만 모든 것을 다 감안하더라도 단 몇 시간, 며칠만이라도 전쟁을 계속했어야 한다는 인식이 계속 확산되고 있다. 그 몇 시간, 며칠이 부시의 운명과 역사를 바꾸어 놓았을지도 모른다.

 

 

3. 전후의 이라크

 

 

페르시아 만 전쟁 이후 1996년 처음 실시된 이라크 총선에서 집권 바트 당이 승리를 거두었다. 이라크 국영 TV220명의 신임 의원 명단을 발표하면서 소속 정당은 밝히지 않았으나, 67명의 의원을 선출하는 수도 바그다드에서 바트 당이 45명의 의원을 당선시켰다고 밝혔다.

 

에자트 아브라힘 선거 관리 위원장은 이번 선거를 통해 국민들의 후세인 대통령에 대한 확고한 지지가 확인되었으며 의회의 대표성이 제고되었다고 평가했다. 하지만 바트 당 후보 160명을 포함, 이번 선거에 출마한 689명의 후보 전원에 대해 사전 심사가 이뤄져 이라크 반체제 인사들은 이번 선거를 요식 행위라고 비난하고 있다. 또한 이라크 의회는 정부의 법안을 승인하는 권한을 갖고 있으나 국가 최고 기구인 혁명 평의회가 포고령을 통해 법률을 제정하고 있어 실질적인 입법 기능은 발휘하지 못하고 있는 실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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