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칠레 쿠데타

by 처사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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칠레 쿠데타

 

 

1.칠레 쿠데타의 과정

 

1973911일 모네다 궁(칠레 대통령 관저)에서 살바도르 아옌데 대통령이 소총을 턱에 대고 방아쇠를 당김으로써 의회제 민주주의를 바탕으로 사회주의를 실현하려 한 아옌데의 개혁 실험과 남미 칠레의 민주주의는 무너져 버리고 말았다. 그날 오전 7시가 조금 넘었을 무렵, 칠레 제2의 항구 도시 발파라이소가 해군에 포위되었다는 보고를 받고 아옌데 대통령은 수도 산티아고의 중심부에 위치한 모네다 궁으로 급히 돌아 왔다. 군은 라디오 방송을 통해서 마르크스주의자의 멍에에서 조국을 해방시키기 위해 단결하여 임무를 수행한다며 쿠데타의 개시를 선언했다.

 

인민 연합(공산당, 사회당 등)을 기반으로 1970년 대통령 선거에서 집권한 아옌데 정권 은 공약에 따라 물가 동결, 대폭적인 임금 인상을 실현해 소비를 활성화시킴으로써 경제를 활황의 길로 이끌어나갔으며 새로운 복지 시대로의 기대감을 한층 부풀게 했다. 그러나 재정 지출의 확대는 격심한 인플레이션을 낳았다. 정상적인 방법으로는 돈벌이가 불가능해진 상점이 매점매석을 함으로써 거리에는 물자가 사라지고 암거래가 횡행하기 시작했다. '자원 민족주의'라는 이름으로 다수 야당인 국회에서도 미국계 동()회사의 국유화를 압도적 다수로 가결했다. 아옌데는 무보상으로 국유화를 실현시켰기 때문에 미국에게 경제 제재의 구실을 제공했고 국제 금융 기관은 경제 위기에 신음하는 칠레에 대한 융자를 중단했다.

 

그럼에도 1972년경부터 아옌데는 사회주의화의 길을 재촉해 중소기업과 유통의 국유화를 진행시켰다. 상점과 운송업자는 대규모 전국적 파업을 개시했고 중산계급은 정부를 불신하기 시작했다. 1973년 인플레는 150%로 올랐고 거리에서는 반정부 시위와 정부지지 시위의 충돌이 되풀이되었다. 아옌데가 행한 복지 정책의 수혜자인 저소득층과 여러 가지 부분의 국유화에 의해 자신의 기득권을 잃어버릴 수밖에 없는 중산층 이상 사람들 사이의 이데올로기적인 대립에 의한 양극화 현상은 이미 극에 달해 있었다.

 

아옌데는 19738월에 중도 기독교 민주당과의 타협을 시도하려고 했지만 이미 그들은 군의 개입에 의한 정권 복귀를 은밀히 기대하는 입장이었기 때문에 합의를 거부했다. 타협 없는 정쟁 속의 일부 세력과 한 패가 된 군이 일시적으로 개입해 혼란을 수습하는 일은 라틴 아메리카 역사에서 자주 있는 일이었다. 그러나 이런 상황에서 정권을 장악한 칠레의 군사 정부는 실권을 장악한 후 모든 정치 활동을 금지했으며 그 후 16년 반에 걸친 장기 군부 독재 지배를 향해 스스로 나아갔던 것이다. 그러나 아옌데로서는 최선의 선택이었던 '칠레의 사회주의'라는 실험이 폭력으로 부정됨으로써 칠레 국민이 받아야만 했던 희생은 너무나도 큰 것이었다.

 

 

2.칠레의 사회주의

 

칠레는 일찍부터 의회제 민주주의가 발달한 나라. 당시의 문자 해독층이 98%, 대학 진학률 약 17%로 국민의 교육 수준도 높았다. 그러나 동시에 빈곤과 소득 격차 문제가 매우 심각했으며 사회주의를 포함한 좌파적 사고가 중산 계급과 노동자에게 널리 퍼져 있었다. 2차 대전 직전에는 중산 계급과 노동자를 기반으로 한 인민 전선 정부가 결성된 적도 있다. 아옌데는 이미 1958년 대통령 선거에서 유력한 후보로 등장, 3번째 도전 끝에 당선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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