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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이의 학생 혁명

by 처사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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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이의 학생 혁명

 

 

1. 반일 '황화 특집'이 부른 구국 혁명

 

1972년 가을, 단순한 친목 단체로 19702월에 결성되어 처음에는 주로 사교 댄스와 스포츠를 통한 학생들의 교류의 장이었던 타이 전국 학생 센터(NSCT)모임은 열기에 휩싸였다. 출랑롱코른, 타마사트, 치앙마이 대학 등에서 모여든 학생 대표들은 나라의 장래를 걱정하며 회의를 계속했다.

 

군부 출신인 타놈 총리의 장기 독재 정권에 대한 불만이 나날이 높아졌고 1963년 창간된 사회 과학 평론은 학생들의 의식을 착실하게 일깨워갔다. 사회 과학 평론은 학생과 작가들이 투고하는 월간 평론지로 편집자는 영국 유학을 갔다 온 슬라크 시와라크라는 지식인이었다. 이 평론지를 통해 그는 훌륭한 비유를 들어가며 정치 비판을 계속했고 그러자 그에 감화 받은 학생이 늘어갔다. 곧 이들 NSCT 구성원의 대부분은 명문대생들로, 정부를 비판하는 유인물을 팔거나 게시판에 붙이는 등의 활동으로 견실하게 조직을 확대해 나갔다. 그들 가운데 학생 운동을 대중화시킨 인물로 당시 출랄롱코른 대학생이었던 티라유트는 NSCT 서기장에 취임한 후, 당시 타이에 경제 진출을 시작한 일본에 반대 운동을 펼침으로써 운동의 활성화를 이룰 수 있다고 생각했다.

 

마침 사회 과학 평론19724월 일본을 비판하는 <황화 특집>을 게재했고 NSCT1120일부터 30일까지 일본 상품 거부 운동을 전개했다. NSCT 휘하의 주요 10개 대학을 기점으로 약 70개 학교 20만 명의 학생이 이 운동에 참여했으며 출랄롱코른 대학에서는 일본의 동남아시아 진출 전략을 토론하는 '일본의 새로운 얼굴'이라는 제목의 패널 토론이 개최되었다. 또 타이 주재 일본 대사관을 통해 다나카 수상 앞으로 항의문을 전달하기도 했다.

 

타이의 학생 운동은 홍콩과 대만, 말레이시아, 싱가포르, 인도네시아 육군들에게도 영향을 미쳐, 반일 운동은 아시아 전역으로 확산되는 추세를 보였다. 그래서 1973329일 발각된 군부 스캔들은 끓어오르기 시작한 대중 운동에 기름을 붓는 격이 되었다. 이 사건의 발단은 방콕에서 약 60km 떨어진 타이 중부 니콘파톰 지방의 전원 지대에 육군 헬리콥터가 추락한 사고였다. 여기서 잔해를 조사하던 경찰은 육군 수송 부대 사령관 등 6명의 시체 외에 사슴과 들소의 사체가 몇 구씩 뒹굴고 있는 것을 발견했다. 사령관등은 미얀마 국경에 접해 있는 칸차나부리 지방의 사냥 금지 구역에서 밀렵을 하고 돌아오던 중이었고 사냥한 수확물이 너무 많아 헬리콥터가 무게를 이기지 못한 것이 추락의 원인이었다.

 

사고가 일어나기 5일 전에는 카세트 사르트 대학 <환경 보호 모임>학생들이 군 간부와 그 자제들의 밀렵 현장을 목격하기도 했다. 그런데 이 군인들 무리 중에 타놈 총리의 아들, 니롱이 끼어있다는 사실이 밝혀졌고 타놈 총리는 언론에도 압력을 가하고 신문사와 방송국에 이 사건과 관련된 보도 중지를 요청하는 등 의 방법으로 이 사건을 무마하려 했다. 이에 분개한 학생들은 자연 보호단을 결성해 야생 동물 지키기 운동을 전개했고 람캄행 대학 학생들은 밀렵 사건을 풍자한 잡지를 발행하여 이 사건을 적극적으로 비판하고 나섰다. 이런 상황에서 대학 당국이 1973619일 이 학생들 9명을 학칙 위반으로 퇴학시키며 강경 대응하자 이 처분을 둘러싸고 대학 당국과 학생들이 정면으로 대립하게 되었다.

 

한편 티라유트는 NSCT 서기장을 사임, 학생들뿐만 아니라 정치가와 교육자, 지식인들도 참가하여 헌법 제정을 요구하는 <100인 위원회>를 발족시켰다. 1973107일에는 티라유트 등 위원회 멤버들이 왕궁 근처에서 헌법 제정을 요구하는 유인물을 배포하다가 13명이 체포되었다. 그후 체포자들에 대한 즉각 석방과 조기 제헌을 요구하는 운동이 각 대학으로 퍼져 나갔고 수업 거부가 잇따랐다. 이것을 시작으로 '군부와 학생'이란 구도는 보다 뚜렷해졌고 학생 운동은 대중을 포괄하는 전국 규모의 반정부 운동으로 발전하게 되었다.

 

 

 

 

2. 민중 투쟁, 15만 명의 시위대

 

19731013일 이른 아침부터 타마사트 대학 대운동장에서 반정부 집회가 시작되었다. 각계 각층의 사람들이 모여들었고 학생 지도자와 모여든 군중은 한 목소리로 체포된 학생들의 석방을 요구했다. 시위 행진이 시작되고 참가자는 집회장에서 치틀라다 궁전으로 향했다. 그 사이 학생 대표와 진압 본부 사령관인 프라파트 내무 장관과의 회담은 이미 진행 중이었다. 오후 8시에 타놈 정권은 체포자 석방과 다음해 10월까지의 헌법 공포라는 학생들의 요구를 받아들였고 시위대도 해산시키는 것으로 일단 쌍방이 합의했다.

 

그러나 학생들 중 강경파는 대표들의 사태 수습을 거부하고 '내각 타도'를 외치면서 13일 밤부터 14일 새벽까지 격렬한 시위를 계속했다. 정부 쪽에서는 홍보 차량을 이용해 합의가 성립되었음을 알리고 NSCT도 시위대 최전선에 이를 전달하려 했지만 잘 이루어지지 않았다. 14일 오전 시위대는 앞으로 계속 나아갔고 경찰 부대가 최루탄으로 위협하자 강경파는 투석으로 대응했다. 그러자 정부 내에서는 이들을 '해산하지 않는 반란 분자'로 규정, 타놈 정권은 비상 사태를 선언하고 국군을 출동시켰으며 군과 경찰에 <무제한의 강력한 조치>를 명령했다.

 

경찰의 움직임을 저지하기 위한 바리게이트가 만들어지고 왕궁에 구조를 요청하러 가는 시민들도 있었다. 사망자가 백 수십 명에 달하는 타이 민주정치사상 최악의 유혈 사태가 발생, 타놈 총리는 14일 오후 6시 부미볼 국왕에게 사표를 제출하였으며 그 후임 총리에 타마사트 대학 총장인 싼야 타마사크 박사가 임명되었다. 싼야 문민 정권의 탄생으로 1957년 쿠데타 이후 시작된 군인 독재 정치는 종지부를 찍었다. 타놈, 프라파트, 나롱 3인은 나라 밖으로 탈출했다. 싼야 정권과 NSCT는 다음날인 15일 오후 치틀라다 궁전에서 '평화와 질서의 회복'에 합의했다. 이날 저녁 NSCT대표는 민주 기념탑 부근에 모인 학생들에게 신 정권과의 합의 사항을 전달하고 시위대의 해산을 호소, 오후 9NSCT 간부는 TV에서 '우리가 쟁취한 민주주의를 보증한다'고 자신들의 입장을 밝혔다. 야간 외출 금지령이 해제되고 타이 전역에 비로소 평화가 찾아 왔다.

 

타놈 정권을 타도한 원동력은 진정한 민정을 요구하는 학생과 가난한 시민들의 소박하고도 강렬한 열정이었다. 티라유트를 포함한 당시의 학생들은 이제 40세의 나이가 되었다. 이들은 905월 민주화 요구 운동에서도 수친다 정권에 반대하는 기수로서 시민의 선두에 서서 시위를 조직함으로써 학생 혁명 당시 권력과 싸우며 자유를 쟁취한 그 기상의 건재함을 과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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