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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일과 동독

by 처사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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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일과 동독

 

 

19931030, 베를린의 브란덴브루크 문 바로 옆 제국의회 의사당 앞 광장에는 서독의 헬무트 콜 총리, 빌리 브란트 전 총리, 동독의 바이츠제커 대통령, 데메지에르 총리, 인민의회 의장 자비네 베르그만 폴 여사 등 동서독 지도자들과 수십만의 인파가 모여 있는 가운데 정면 계단 앞에 세워진 국기 게양대에 3색기가 천천히 올라갔다. 서로 갈려 있던 독일이 45년만에 하나로 통일되는 순간이었다. 이에 앞서 2일 저녁, 동베를린의 샤우슈필하우스에서는 시종 착잡하고 무거운 분위기의 동독 정부 해체식이 거행되었다. 그러나 통일 기념 행사는 의외로 차분히 진행되었다. 3일 오전 11, 카라얀의 옛집 베를린 필하모니의 연주홀에서 통일 독일 출범 행사가 개최되었다.

 

오후가 되자 브란덴부르크 문과 제국의회 광장은 다시 인파로 뒤덮였다. 동독, 정식 명칭으로 독일 민주 공화국은 사라지고 대신 서독, 정식 명칭 독일 연방 공화국이 면적 375천 평방 킬로미터, 인구 7760만 명을 가진 유럽의 거인으로 재 탄생했다. 면적으로는 프랑스, 에스파냐 다음의 3위지만 인구는 서유럽 제1위이며, 유럽 전체로 보아도 소련 다음 가는 대국이다. 통일 이전의 서독은 국민 총 생산 세계 3, 세계 제1의 수출국, 유럽 공동체 공업 생산량 3분의 1을 차지하고 있었으며, 동독은 동유럽 사회주의국가들 가운데 가장 선진이었다.

 

1989109일 라이프찌히에서 '자유 민주'를 외치는 10만 군중의 시위로 시작된 동독의 개혁은 꼭 일 년 만에 서독으로의 흡수 통합에 의한 독일 통일로 종결되었다. 동독은 노동자들에게 버림받았다. 1990318일의 총선에서 동독 노동자의 63%가 서독과의 급속한 통합을 지지하는 크리스트교 민주연합(CDU) 등 우익 정당 측으로 손을 들어주었다. 그간 살아온 사회에 대한 불신과 불만이 낳은 결과였다.

 

 

그 불신과 불만의 내용은 구체적으로 다음과 같다.

 

 

첫째, 당에 대한 불신이 팽배해 있었다. 당의 선전 매체들은 항상 '동독이 최고'라고 해왔다. 그러나 실제로는 자동차를 사려면 15년을 기다려야 하고, 집을 얻으려면 1천 마르크의 뇌물을 줘야 할 정도로 부패가 만연했다.

 

둘째, 비밀 경찰 슈타지의 감시에 대한 불만이 매우 컸다. 8만의 정규 요원, 12만의 비정규 요원을 거느린 슈타지는 직장뿐 아니라 사생활까지 침범해 왔다. 비정규 요원들은 월 1천 마르크와 자동차를 빨리 공급받을 수 있는 혜택을 누리기 위해 자진해서 슈타지에 협력하기도 했다.

 

셋째, 공장 경영에 대한 불만이었다. 극단적인 수평주의가 노동자들의 의욕을 떨어뜨렸고 간부들의 무사 안일주의, 관료적 태도는 노동자들의 창의력을 결정적으로 파괴했다.

 

넷째, 낙후된 서비스 산업과 질 나쁜 소비재에 대한 불만이 컸다.

 

이상과 같이 동독 노동자들의 불만은 목구멍까지 차오른 상태였다. 그들은 실업 상태가 어떤 것인지 몰라 불안하긴 했지만 지금까지처럼 일하느니 차라리 실업자가 되는 게 나을지 모른다고 생각할 정도로 동독 사회주의에 염증을 느끼고 있었다.

 

 

고르바쵸프의 페레스트로이카는 이들의 불만을 자유와 민주, 시장 경제에 대한 열망으로 타오르게 했으며 동독 정권이 위기에 몰렸을 때 소련이 무력 개입을 하지 않을 것임을 천명, 통일에 결정적인 협조를 했다. 탈출하는 동독인에게 국경을 개방하여 통독의 기폭제 역할을 한 헝가리도 감사의 대상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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