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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레스트로이카

by 처사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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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레스트로이카

 

 

고르바쵸프의 페레스트로이카- 새로운 사회주의를 향하여

 

1917년 러시아 혁명에 의해 마르크스주의를 신봉하는 최초의 국가가 성립되었다. 그러나 혁명 정부는 성립 초기부터 내란과 열강의 간섭에 고통을 당하자 곡물 강제 징발 등 전시 공산주의 정책을 실시했다. 그렇게 되자 농민의 불만이 커지고 경제도 황폐해졌기 때문에 1921년부터 자본주의의 원리를 일부 인정하는 신경제정책으로 네프를 개시했다.

 

1924년 소비에트 연방의 설립자 레닌이 사망하자 권력투쟁이 전개되었고 이후 스탈린이 독재 권력을 장악함으로써 공포정치가 행해지게 되었다. 영토의 확대, 거대한 군사력을 바탕으로 제2차 세계 대전이 끝났을 무렵에 소련은 미국에 버금가는 초강대국이 되어 있었다. 그러나 소련은 극단적으로 군사력에만 의지한 강대국으로, 2차 세계 대전을 통해 2천 만 명의 사상자와 독일군에 의한 점령 지역의 황폐화 등의 원인으로 경제 상태는 붕괴 직전이되어 있었다.

 

대전 후 패전국에서 약탈한 기계와 배상금으로 경제는 급속하게 회복세로 돌아섰으나, 이것은 여전히 농민의 희생을 바탕으로 하고 중공업 발전에만 중점을 둔 성장이었다. 더구나 냉전의 시작으로 군수부문의 생산이 우선되었으며 생활 필수품 생산은 뒷전으로 밀려난 상태였다.

 

그러나 사회주의 체제에 따라서 교육이 광범위하게 보급되었고 또한 공업화에 수반하여 도시 중간층이 형성되자 이미 스탈린 지배 방식은 통용되지 않았으며, 극도의 불만과 긴장 상태가 지속되던 중 1953년에 스탈린이 사망했다. 그러나 레닌은 현직에서 일하다 죽었고 그후 스탈린은 치열한 권력 투쟁에 의해 권력을 획득한 것이었으며 그도 또한 현직에 있으면서 죽었으므로 후계자에의 권력 승계가 원만히 이루어질 수 없었고 소련에는 후계자 결정을 위한 정규 규정이 없는 상태였다.

 

스탈린이 죽기 직전에는 말렌코프가 후계자의 제 1 순번으로 인식되어 그가 사실 각료 회의 의장(수상) 및 정치국과 서기국의 수석으로 선출되었었다. 그러나 베리아, 몰로토프, 카가노비치, 불가닌 등 실세들을 부수상으로 임명하여 집단 지도 체제가 들어섰다. 그러나 이 같은 과도 체제는 오래 가지 못하고 흐루시쵸프가 제 1서기로 선출되어 서기국의 실권을 장악했다. 당이 실권을 장악하고 있는 소련의 입장에서 볼 때 당의 집행 기관인 서기국의 장이 최고 실력자가 되는 것이다. 그후 치열한 권력 투쟁을 겪은 후 1958년에 흐루시쵸프가 수상까지 겸임하여 최종적으로 실권을 확립했다. 이 과정에서 비밀 경찰 두목인 베리아를 제외하고는 전혀 유혈의 숙청 작업이 없이 권력 교체가 순조롭게 진행되었다.

 

흐루시쵸프의 권력이 거의 확립된 1956. 그는 충격적인 스탈린 비판을 행했다. 그리고 과거 스탈린에 의해 숙청 당하거나 실각한 사람들의 명예 회복과 정치범의 석방이 이루어졌다. 또한 언론 활동에도 일정한 자유가 주어지게 되었다. 물론 그 자유에도 여전히 많은 제약이 있었으나, 소련 사회에 비로소 희미한 새벽빛이 비치기 시작한 것이다.

 

 

흐루시쵸프는 사회주의의 우월성을 믿고 있었고, 종래의 폐쇄적이고 억압적인 정책을 수정한다면 자본주의를 따라잡을 수 있을 뿐만 아니라 결국에는 초월할 수 있다고 생각한 것이다. 구체적으로 중앙 집권적인 경제 체제를 완화하고 지방에 일정한 자주성을 가질 수 있도록 정책을 폈다. 또한 소비재의 공급에 힘을 기울여 국민 생활도 배려했고 더 나아가서 종래에 무시되던 농업 개발에도 힘을 쏟았다. 1957년에는 인공위성 스푸트니크 1호 발사에 성공하여 우주 개발에서 미국을 앞세우는 것처럼 보이기도 했다. 또한 농업 생산고도 기록적인 신장을 보여 식량 자급이 이루어졌으며, 미국을 방문하여 아이젠하워 대통령과 우호적인 회담을 갖기도 했다.

 

그러나 1960년대에 들어서면서 공업 생산의 신장률이 멈추었고 농업은 무리한 증산 계획 때문에 파멸적인 타격을 받음으로써 갑자기 모든 상황이 절망적으로 돌아서게 되었다. 국제 관계에 있어서도 쿠바에 미사일 기지를 건설하다가 미국 대통령 케네디의 강한 경고를 받고 철수하는 수모를 당해야 했다.

 

이와 같은 실정의 연속 중 1964년 흐루시쵸프는 흑해 연안 휴양지에서 휴가를 즐기다가 해임 소식을 듣게 되었다. 코시킨과 브레즈네프를 중심으로 한 소련의 중앙 위원회 간부회에서 흐루시쵸프의 해임을 결정한 것이다. 그러나 그는 예전 권력자처럼 처형이나 암살을 당하지는 않고 몇 해 후에 병을 얻어 죽었다.

 

 

 

흐루시쵸프의 시대에는 언론의 자유에 제한이 있었고, 중앙 집권적인 계획 경제 그 자체도 부정되지는 않았으며, 개혁에 있어 치열한 준비가 결여되어 있었기 때문에 모든 정책이 실패로 끝나기는 했다. 그러나 흐루시쵸프는 현실에 존재하는 문제에 대해 현실적으로 대처하려 했다는 점에서 고르바쵸프의 페레스트로이카 정책의 선구였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흐루시쵸프가 실각한 후 개혁은 일시적으로 후퇴하게 된다. 그러나 고르바쵸프를 비롯한 개혁파의 사람들 대부분은 이 흐루시쵸프 시대에 자란 사람으로 비록 브레즈네프와 안드로포프 및 체르넨코 등 수구 세력에 의해 소련은 다시 옛날로 뒷걸음쳤지만 그것은 일시적인 현상이었고 고르바쵸프의 등장으로 새로운 사회주의를 위한 개혁이 시작된 것이다.

 

1985년 소련에 고르바쵸프 정권의 등장과 함께 관료주의를 극복하고 경직된 정치 및 경제를 바로 세우는 작업인 페레스트로이카와, 정보를 공개하는 글라스노스트 정책이 추진되었다. 또한 공산권인 동구 여러 나라에 대해서도 대등한 국가 관계를 구축하는 방법을 내세웠다.

 

이 같은 페레스트로이카 정책의 영향으로 동구 여러 나라에서는 '연대'(폴란드), '민주 포럼(헝가리)', '시민 포럼(체코슬로바키아)', '새포럼(동독)' 등의 시민 조직이 결성되었고, 이러한 시민 조직에 의해 민주화 운동이 추진된 결과 1989년의 동구 혁명을 실현하게 되었다. 이 해는 공교롭게도 프랑스 혁명 발발 200주년이 되는 해로서, 동구 여러 나라들은 바로 이와 같은 시민 조직의 지도 아래 '시민 혁명'을 성공시키게 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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