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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학의 학문적 자유

by 처사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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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학의 학문적 자유

 

 

 

전통적인 대학의 이념에 따르면, 대학은 진리를 탐구하는 교수들과 그 지도를 받아 학문을 하는 학생들의 공동체이다. 그리고 이러한 교수들과 학생들의 공동체로서의 대학은 학문을 통한 진리 탐구를 가장 중요한 과제로 삼기 때문에 이를 위해서는 외부로부터의 어떠한 간섭도 정당하지 않으며, 이를 용납할 수 없다는 확고한 자세를 취해 왔다.

 

특히 지금 대학의 모태인 중세의 대학들은 그 시대를 풍미하는 지배적 관념이었던 기독교 신앙과 교회의 간섭으로부터 자율성을 보장받기 위해 피나는 노력을 전개해왔다. 그 당시의 기독교와 그를 추종하는 교회는 단순히 종교 집단으로서의 의미뿐만이 아니라, 그 시대를 지배하는 일종의 권력이었다. 교회가 권력을 유지하기 위해서 옹호하는 기독교의 교리는 따라서 어떤 다른 반박 논리를 허용하지 않았고, 상대적으로 기독교를 제외한 다른 학문들에 대해서는 배타적인 자세를 취했던 것이다. 하지만 대학이 기독교의 논리에 저항하려는 노력을 하지 않았다면, 오늘날과 같은 놀라운 과학 기술, 문명의 발달은 이룩되지 못했을 것이다. 중세의 기독교 신앙은 당시로서는 과학적 발전을 제약하는 반동적 힘으로 작용했기 때문이다. 지동설을 주장했다가 화형을 당한 브루노(G. Bruno), 종교 재판에 회부된 갈릴레이(G. Galilei)의 이야기는 지배적 관념이나 정치 권력으로부터의 간섭이 과학의 진보에 해로운 결과를 가져올 수도 있음을 보여주는 좋은 역사적 실례이다.

 

인간 사회와 인류 역사는 아무런 제약 없이 오직 진리 탐구에만 전념할 수 있는 공간이 존재해야만 여러 가지 뜻밖의 난관과 갈등을 극복하고 발전을 기약할 수가 있는 것이다. 대학의 자율성과 학문 연구의 자유가 보장되어야 하는 것은 바로 이 때문이다.

 

사상, 표현의 자유

 

우리는 흔히 '생각은 자유'라고 말한다. 마음속에서야 어떻게 생각하든 상관없다는 얘기다. 그러나 이런 개인적인 사고의 자유는 누구나가 당연히 갖고 있는 것이어서 거의 무가치하다. 사상의 자유가 조금이라도 가치 있는 것이 되려면 양심의 자유는 말할 것도 없고 거기에 표현의 자유가 포함되어 있어야 한다.

 

'사상의 자유'란 기본적으로 어떤 사상을 신념으로 갖는 것, 그것을 주장하고 출판하는 행위 등은 몇몇 특수한 경우를 제외하고는 결코 국가가 그것을 금지하거나 처벌해서는 안 된다는 의미를 함축하고 있다.

 

오늘날 대부분의 국가에서는 이러한 자유가 당연한 것으로 생각되고 있지만 이 권리가 오랜 싸움을 거쳐 하나의 자유로 확립된 것은 근대 민주주의 사회에 와서야 이루어진 일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사상, 표현, 언론, 출판의 자유'에 관한 문제는 논란거리를 제공해준다.

 

진리를 탐구하는 사람들은 비록 자신이 발견해 낸 새로운 지식이 기존의 상식에 어긋나고 정치 권력에 해로운 것일지라도 그것을 진리라고 주장할 수가 있다. 그러나 반대로 사회를 통치할 책임을 진 사람들은 살인, 강도와 같은 반사회적인 행동을 금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해로운 사상의 유포를 금하는 것이 그들의 의무라고 생각한다. 바로 여기에서 정치 권력과 지식인 사이의 갈등이 생겨날 수 있다.

 

어떤 사상이 사회에 해독을 끼친다는 이유로 그러한 사상을 주장한 사람들이 부당하게 처형된 사례들은 수없이 많다. 그 가운에는 우리가 잘 알고 있는 소크라테스도 있다. 소크라테스는 이미 공인되어 있는 진리라 할지라도 그것을 이성의 법정으로 끌어내서 공명 정대한 정신으로 토론하는 가운데 진리에 가까이 도달할 수 있다고 가르쳤다. 또 여러 사람의 의견이나 권위에 의존해서 판단되는 것은 옳지 않다고 가르쳤다. 그런데 그가 살았던 당시에는 이러한 사상이 무신론적이며, 따라서 청년들을 타락시킨다는 이유로 고발되어 사형에 처해진 것이다.

 

그러한 또 하나의 예로서, 16세기말에 이탈리아의 브루노라는 승려는 '지구가 태양의 둘레를 돈다'는 지동설을 주장했고, 그 뜻을 굽히지 않았다는 이유로 화형에 처해졌다. 그러한 주장은 신이 세계를 창조하였고 따라서 지구가 당연히 우주의 중심이라는 기독교 신앙에 위배되는 것이었기 때문에 당시의 권력 기관이었던 교회가 그를 처벌한 것이다.

 

이처럼 소크라테스와 브루노의 경우를 보면, 어떤 사상이 기존 사회가 유지되고 존속되는데 있어서 해로운 결과를 가져온다는 주장은 엄밀히 말해서 기껏해야 당시의 지배적 관념이나 지배 권력에만 해로운 것일 수도 있다는 것을 웅변적으로 말해 주고 있다.

 

그렇다면 사상의 자유, 표현의 자유는 절대적으로 허용되어야 할 자유인가? 이에 대해서 존 스튜어트 밀(J. S. Mill)은 그의 저서인 자유론에서 사상과 토론의 자유를 억누르면 그것은 반드시 장기적인 차원에서 봤을 때, 영구적인 이익을 해치게 되기 때문에 거의 무제한적인 자유가 보장되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첫째로, 사상의 자유를 탄압하는 사람들이 잘못이고 그들이 억누른 사상이 옳은 것인 경우에 그것은 인류에게서 진리를 박탈했거나 박탈하려고 애를 쓴 것이 된다.

 

둘째로, 이미 알려진 사상이 옳고 거기에 오류가 끼어 드는 것을 막기 위해서라 할지라도 잘못된 사상을 탄압해서는 안 된다. 왜냐하면, 토론을 통해서 기존의 사상이 지니고 있는 가치가 더욱 빛나게 될 기회를 잃어버리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셋째로, 서로 대립되는 두 가지 견해가 각각 일면적인 진리만을 담고 있을 때 소수가 주장하는 견해를 탄압해서는 안 된다. 다수가 옳다고 믿고 있는 견해가 간과하고 있는 부분을 소수가 믿고 있는 견해를 통해 보완될 수 있기 때문이다.

 

밀은 이러한 논리를 통해 어떠한 주장이 아무리 반도덕적으로 보인다고 할지라도, 도덕적 신념의 문제로서 이를 발표하고 토론하는 완전한 자유가 보장되어야 한다고 주장하게 된 것이다.

 

물론 하나의 예외가 있을 수 있는데, 어떤 사상이 살인과 같은 범죄 행위를 고의적이고 직접적으로 선동하는 경우에는 그것에 간섭할 수 있다고 하였다. 여기서 '고의적이고 직접적'이라는 말은 중요하다. 어떤 사람이 그의 견해를 듣거나 책을 통해 읽고 나서 곧 난폭한 범죄 행위를 저질렀다고 하더라도 그러한 범죄를 직접 선동한 내용이 없다면 그 사상가를 처벌해서는 안 된다는 의미를 담고 있기 때문이다.

 

결국 밀의 주장은 사상가이든, 그러한 사상에 영향을 받아 어떤 범죄를 저지른 자이든 그가 갖고 있는 사상이나 신념 때문에 처벌받아서는 안되고, 폭력, 살인과 같은 처벌받아 마땅한 범죄를 직접적으로 선동하거나, 실제로 저질렀을 때만 처벌받아야 한다는 것이다.

 

 

 

사상, 표현의 자유의 한계

 

우리 나라의 헌법과 법률은 사상, 언론, 출판의 자유는 공공 복리와 국가의 안전 보장, 질서 유지를 위해서는 제한될 수 있다고 규정하고 있다. 그런데 이러한 제한 규정은 매우 모호하고 자의적으로 해석될 가능성이 많기 때문에 자주 논란을 불러일으킨다.

 

예컨대, 대표적으로 사회주의 사상과 관련된 외국의 책자를 번역, 출판하는 행위를 금지하고 처벌할 수 있는가 하는 문제가 있다.

 

그것을 처벌해서는 안 된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은 다음과 같은 논리를 펼 수 있을 것이다. 첫째, 출판하는 책이 어떤 내용을 담고 있다 할지라도 국가 권력이 그것을 간섭하는 것은 출판의 자유를 침해한다. 출판의 자유는 절대적으로 보장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이에 대해서 반박할 수 있는 논리는 국가의 안녕과 질서를 해치는 출판물에 대해서는 제약을 가할 수 있다는 식이 될 수 있다. 즉 사회주의 사상은 국가를 폭력으로 전복시키라고 선동하는 것은 물론 다른 사상의 자유를 용납하지 않는 독단적인 사상이므로 사상의 자유를 주장하는 것은 어불성설(語不成說)이라는 것이다. 하지만 사회주의 사상을 옹호하는 사람들은 사회주의 사상이 결코 사람들의 자유를 억압하는 것이 아니며, 사회주의 사상에 대한 왜곡과 오해에서 비롯되기 때문에, 어떤 입장이든 사람들에게 어떤 것이 옳은 것인지에 대한 정당한 검증 과정이 필요하다고 주장할 수 있다.

 

둘째, 그것은 우리 나라의 입장에서 봤을 때, 외국의 문제를 다루고 있는 것이기 때문에 국가의 안녕과 질서를 해칠 직접적인 우려가 없다. 따라서 직접적인 범죄 행위를 선동하지 않는 한 그것을 처벌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이에 대한 반박 논리로서는 우리 나라는 북한과 대치 상태에 있기 때문에 보다 엄격하게 적용되어야 한다는 것이 될 수 있다.

 

셋째, 그것은 학문적 연구를 증진하기 위한 목적으로 출판된 것이다. 따라서 그것이 비록 국가의 안녕 질서를 해칠 우려가 조금은 있다 할지라도 그것의 출판을 금지하기보다는 내용에 대해 토론하고 비판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것이다. 이에 대한 반박 논리로는 학문 연구를 위해서라면 그것을 직접 연구하는 사람에게만 제한적으로 제공돼야 하고, 연구자들은 정부의 허가를 받아 자료를 열람할 수 있다는 것이다.

 

언젠가 한 대학 교수가 쓴 소설이 문학 작품으로서의 가치가 있는가, 아니면 외설적인 내용만을 담은 음란물일뿐인가 하여 법의 심판대에 오른 일이 있었다. 예술, 표현의 자유를 적극적으로 옹호하는 입장에서는 그것은 문학 작품이며, 따라서 그것이 묘사하고 있는 내용이 도덕적인가, 부도덕한가 하는 문제는 국가가 판단하고 처벌할 문제가 아니라고 주장할 것이다. 음란물이라는 판단도 기껏해야 그 시대의 성도덕에 배치될 뿐이기 때문에 궁극적 평가는 대중의 자유로운 토론에 맡겨두면 된다는 논리이다. 로렌스(D. H. Lawrence)채털리 부인의 사랑이나 헨리 밀러(Henry Miller)북회귀선같은 작품, 그리고 우리 나라의 경우에도 정비석의 자유 부인과 같은 작품들이 한때는 외설적인 작품으로 단죄되었지만 훗날에 문학 작품으로 재평가되었다는 점에서 볼 때, 음란물이라는 명목으로 국가가 문학 작품에 간섭하려는 것은 어리석은 일이라는 것이다.

 

물론 우리 나라의 형법은 '음란한 문서, 도화, 기타 물건을 배포 판매'하는 행위를 처벌할 수 있도록 규정하고 있기 때문에 위와 같은 주장은 법의 개정을 요구하거나 법규의 엄격한 적용을 강조하는 것에 그칠 수밖에 없다. 다음으로 문제가 되는 것은 그것이 문학 작품인가, 음란물인가 하는 것이고 도대체 누가 음란성을 판별할 것인가 하는 문제이다. 법원은 문학 작품이라고 해서 음란성이 부정되는 것은 아니라는 것을 전제로 하여 음란성 판단을 위한 몇 가지 기준을 제시하고 있다.

 

첫째, 이 사회에 있어서 건전한 사회 통념에 따른 지배적인 성 문화관에 의거하여 판단해야 한다. 둘째, 제조자(작가)가 어떤 의도를 갖고 썼는지와 상관없이 문서 자체를 가지고 객관적으로 판단해야 한다. 셋째, 성적 수치심이 지나치게 민감하거나 둔감한 자, 혹은 미성년자가 아니라 그 시대의 통상적인 성인을 기준으로 해서 판단해야 한다. 넷째로 작품 일부분이 아닌 작품 전체로서 판단해야 한다.

 

그런데 앞서 언급한 사건의 경우에 법원이 위촉했던 감정인들 또한 음란성 여부에 대해 서로 상반된 견해를 보이고 있다. 한편에서는 그 작품이 성의 해방을 옹호하고 현대인의 소외를 성 문제를 통해 다루고자 한 소설이며, 춘향전보다도 성의 묘사가 지나치지 않다고 지적하면서 음란성을 부정한다. 그러나 다른 한편에서는 그 작품이 헌법이 보호할 만한 문학적, 예술적 가치가 없는 법적 폐기물에 불과한 음란물이라고 단정 짓고 있다.

 

이처럼 상반된 견해가 제출된 사실은 문학 작품의 평가를 일반 독자와 문화계 자체에 맡기거나, 최소한 광범한 자문을 거쳐 신중하게 판단해야 할 것이라는 주장의 기초가 될 수 있다.

 

마지막으로 음란물에 대한 국가의 단속이 사회의 도덕적 타락을 막아보려는 노력에서 이루어지는 것이라면 국가가 작가를 처벌하기보다는 오히려 왜곡된 성문화에 대한 진단과 처방을 함께 생각하는 계기로 활용하는 것이 더욱 현명한 방안이라는 주장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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