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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족 관계 연표 <1990~1994>

by 처사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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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족 관계 연표 <1990~1994>

 

 

 

1990

 

120일 소련군 바쿠 진주

 

320일 리투아니아 독립 선언

 

321일 나미비아 독립 선언

 

42일 터키에서 4개의 쿠르드 계 정당이 동맹

 

45일 동투르케스탄에서 무슬람의 봉기

 

51일 중국 정부 라사 시의 계엄령 해제

 

82일 이라크 군 쿠웨이트 침공

 

87일 남아프리카에서 ANC, 무력투쟁의 정지

 

825일 아브하지아, 쿠르지아로부터 분리 선언

 

103일 독일 통일

 

1212일 쿠르지아, 남오세티아에서 충돌

 

 

 

1991

 

19일 소련군, 리투아니아에서 무력행사

 

21일 남아프리카, 아파르트헤이트 3법 진폐 선언

 

319일 몽골, 옛 문자의 부활을 결정

 

410일 쿠릴, 사할린 아이누 평의회 설립 총회

 

625일 크로아티아 슬로베니아 독립 선언

 

1015일 보스니아 헤르체고비나 독립 선언

 

1221일 소련 11공화국, CIS 창설의정서에 조인. 소련 해체

 

 

 

1992

 

27일 일본, 영주 외국인의 지문 날인 폐지를 각의 결정 EC, 마스리히트 조약에 조인

 

320일 짐바브웨, 백인 소유지 등의 수용법 가결

 

327일 쿠르드 노동당, 터키 정부에 전면전 개시 결정

 

331일 러시아의 자치 공화국, 연방 조약에 조인

 

46EC, 보스니아헤르체고비나에 독립 선언

 

428일 아프가니스탄, 이슬람 정권에 전권 이양

 

429L.A. 등지에사 흑인 폭동

 

54일 캐나다, 이누이트 준주 설치를 주민투표로 승인

 

63일 오스트레일리아에서 애보리지니에 말레이 군도의 토지 소유권 승인 판결

 

826일 체코와 슬로바키아, 분리에 합의

 

1026일 캐나다에서 퀘백 주 독립성을 승인하는 국민투표, 사실상 부결

 

126일 인도 북부의 아요디아에서 힌두교도와 이슬람의 충돌

 

 

 

1993

 

115일 소말리아의 무장 세력 13, 무장해제에 합의

 

37일 아프가니스탄의 게릴라 8파 대표, 평화 협정에 조인

 

524일 티베트의 라사에서 물가고에 항의 데모, 에르투리아 독립

 

530일 터키, 쿠르드 게릴라 토벌 작전

 

99일 이스라엘과 PLO 상호 승인

 

913일 팔레스티나 잠정 자치 조인 울란바토르에서 세계 몽골 대회 개최

 

924일 캄보디아 왕족 발족 CIS 수뇌 회의. 10개국 수뇌, 경제 동맹 조약에 조인

 

928일 스리랑카, 남부에서 타미르이람 해방의 토라해방군과 전투

 

1022일 쿠르지아, CIS에 가맹

 

111일 구주 연합 조약 발표

 

1215일 영국, 북아일랜드, 평화 선언을 발표

 

1230일 로마 교황청, 이스라엘과 외교관계를 수립

 

 

 

1994

 

11일 멕시코에서 선주민 무장 봉기

 

46일 르완다에서 대통령 일행이 탄 비행기 격추

 

410NATO, 보스니아, 헤르체고비나의 세르비아인 세력 지역을 첫 공중 폭격

 

54일 이스라엘과 PLO, 가자와 제리코의 이스라엘 군 철수 협정에 조인

 

510일 남아프리카에서 첫 흑인 대통령 만델라 취임

 

831IRA, 무기한무조건의 정전 선언

 

918일 하이치, 아리스티드 대통령의 귀국 확정

 

101일 파라오 공화국 독립, 미국이 방위권

 

1021일 북한미국 포괄 합의 문서 조인

 

1024일 스리랑카의 통일 국민당 집회에서 대통령 후보 등이 폭사

 

1026일 이스라엘과 요르단, 평화 조약에 조인

 

111일 중동북아프리카의 경제 서미르, 카사블랑카 선언을 채택하여 종료

 

1130일 네팔에서 공산당 정권 발족

 

190.미국의 파나마 침공

 

 

 

19891220일 새벽 부시 대통령은 파나마 파병을 명령. 침공의 목적은 미국 시민을 보호하고, 파나마에 민주주의를 회복시키며, 운하 조약을 준수하게 하고, 마약 사범 노리에가 장군을 체포하는 것이라고 하였다. 그러나 그 어느 것도 침략을 정당화할 명분은 아니었다.

 

민주주의의 확립은 각 나라 국민들이 직접 이루어야 하는 것이다. 게다가 1977년의 운하 조약은 운하와 운하 지대에 대한 주권을 금세기 말까지 파나마에 완전히 반환한다고 되어 있어, 파나마가 이 조약을 파기하고 싶어한다는 미국의 명분은 설득력이 없다. 결국 주권 반환을 요구하는 파나마 국민을 대변하는 노리에가 장군을 이 상황에서 배제하는 것이 미 정부의 진정한 목적이라는 점은 자명했다. 노리에가가 마약과 관련되어 있다는 선전은 미국이 국내외의 반발을 피하기 위한 핑계에 불과한 것이었다. 다시 말해서 미국의 이처럼 무리한 침공은 다름 아닌 '파나마 운하 지역은 미국의 것'이라는 사고 방식에서 비롯된 것이다.

 

파나마는 스페인의 정복자 발보아에 의해서 최초로 그 존재가 확인되었다. 그가 산 위에서 반대편으로 '평화로운 바다(태평양)'을 보았던 1513925일이었다. 인도로 갈 때 이곳 수십 킬로미터의 육로를 통하면 남아메리카의 남단을 돌아가는 것보다 1만 킬로 이상이 절약된다.

 

 

1848년 캘리포니아에서 금광이 발견되자, 미국은 보다 편리한 양 대양 간 통로를 필요로 했고 미국 재계 인사들의 파나마 철도 회사는 1855년에 지협 횡단 철도를 완성한다. 뒤이어 1879'운하왕' 레셉스가 운하 건설에 착수하지만 높은 산과 극심한 열대병 때문에 좌절하였다. 프랑스가 운하 건설 계획을 포기하자 기다렸다는 듯이 미국 독점 자본이 이에 착수했고 미국은 1901년의 헤이- 폰스포트 조약에서 중미 지협 횡단 운하에 대한 독점적 지배권을 영국으로부터 인정받았다. 미 정부는 19031월의 헤이- 앨런 조약으로 폭 6마일의 운하 지대에 대해 계약금 1천 만 달러, 25만 달러로 99년 간의 조차권을 획득하게 되었다. 그러나 콜롬비아 측은 운하 회사에 대한 지불금 4천만 달러에 비해 계약금이 너무 싸다며 비준을 거부했다.

 

 

이 상황에서 미국은 콜롬비아로부터 독립하려는 파나마의 희망을 이용하였다. '독립'을 위해 파나마에서 반란이 일어난 것은 1903113, 콜롬비아가 비준을 거부한 3일 후였다. 아마돌 등 독립을 지향한 그룹은 미국으로부터 무기와 돈을 원조 받았다. 콜롬비아 군부대의 상륙을 저지하기 위해 카리브해와 태평양 양 쪽으로는 미국 순양함이 두 척씩 정박하고 있었다. 그리고 3일 후인 116일에 미국은 새로운 정부를 승인했던 것이다. 레셉스의 계획에 참가했던 프랑스인 기자 뷰노 발리자는 옛 친구 아마돌과 파나마 새 지도자의 지원으로 주미 공사에 임명되자 1118일 헤이 국무 장관과 운하 조약에 조인했다. 이 운하 조약은 미국이 파나마의 독립을 보장한다고 명기하였으며 헤이- 앨런 조약의 내용을 몇 가지 바꾸었다. 즉 운하 지대의 폭이 10마일로 확대되었고 조차 기간도 '99년 간'에서 영구적인 것으로 바뀌었으며 운하 지대에 대한 파나마의 주권을 보장한다는 조항이 삭제되었다. 이것으로부터 운하와 운하 지대에 대한 미국 '주권'의 신화가 만들어지게 된 것이다.

 

 

19139, 드디어 완성된 운하를 최초의 배가 통과함으로써 파나마 국민에게 굴욕으로 점철된 역사가 시작되었다. 다시 말해서 동서 350 km 정도의 길고 가느다란 파나마 영토는 미국에게 주권을 빼앗긴 운하와 운하 지대에 의해 둘로 나누어지고, 운하와 운하 지대를 방위한다는 이유로 파나마 내정에 간섭할 권리가 미국에게 주어졌던 것이다.

 

 

파나마 국민의 주권회복을 위한 운동은 19641월 국기 게양 문제를 둘러싼 파나마 학생들과 경찰 사이의 격렬한 충돌로 미국과의 단교로까지 이어지게 된다. 19681011일에 쿠데타로 정권을 장악한 토리호스 장군의 혁신적 군부는 19779월 토리호스- 카터 조약을 체결하고 19991231일 정오를 기점으로 운하와 운하 지대에 대한 파나마의 주권을 완전히 회복한다는 확약을 미국으로부터 얻어냈다. 19817월 항공기 사고로 죽은 트리호스 장군 이후, 그의 민족주의를 계승한 노리에가 장군이 미국의 표적이 되었다. 미국은 19876'민주화'란 명목 하에 '불안정화' 공작을 계시한다. 19882월에는 마약 거래에 관여한 혐의로 노리에가가 미국 법정에 기소되고 3월부터 경제 제재를 시작, 19895월에는 대통령 선거 무효 선언을 함으로써 반 노리에가 공작을 한층 강화하고 마침내는 미군의 침공으로 이어졌다. 그것은 파나마 운하와 운하 지대는 파나마 국민의 것이라는 명백한 역사적 사실에 대한 거역인 것이었다.

 

 

<파나마 운하>

 

태평양과 대서양을 연결하는 길이 6km의 운하. 파나마 운하의 역사는 파나마와 미국 관계의 역사이기도 하다. 처음 이 운하의 건설에 나선 것은 수에즈 운하를 만든 레셉스였으나 실패하였다. 그 후 이를 이어받은 미국은 콜롬비아의 정세가 불안한 것을 이용하여 강제로 파나마의 분리 독립을 꾀하였고(1903), 또 다시 폭 16km의 파나마 운하 지대를 1,000만 달러에 사들여 자기 나라 영토로 삼은 후 거기에 운하를 건설하였다(1913). 미국은 이 운하를 이용하여 남아메리카와 아시아에 진출을 꾀하며 파나마 운하 지대를 미국의 군사경제 전략의 요충지로 중요시했다. 독립은 했으나 이 운하로 국토가 둘로 갈라진 파나마에서는 수에즈 운하의 국유화(1956)가 계기가 되어 반미 투쟁이 지속적으로 전개되었으며, 1979년에 발효한 조약에 의해서 1999년 말의 전면 반환을 약속 받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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