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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카 콜라 문명

by 처사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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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카 콜라 문명

 

 

코카콜라는 1886년 남부 조지아주 애틀랜타에서 처음 만들어졌다. 약제사 존 펨퍼턴이 설탕과 캐러멜을 주원료로 발명한 시럽이 그 고장의 찻집인 '제이콥스'의 가장 대표적인 상품이 된 것이다. 이 음료의 소유권을 얻어 1892년 코카콜라 사를 창설한 초대 이사장 에이서 캔들러의 지휘 아래 코카콜라는 미국 철도망의 발전에 힘입어 전국으로 퍼져 나갔다.

 

현재의 코카콜라 제국을 건설한 사람은 '더 보스'라고 알려진 로버트 우드러프. 그가 코카콜라사의 실권을 장악했던 1923, 미국은 제1차대전 후 중산 계층이 생겨났고 할리우드 영화 등의 대중 문화가 꽃 피기 시작하는 등 호경기를 맞이했다.

 

우드러프의 광고, 제품의 품질 향상에 힘을 기울였는데 케리 그란트, 로버트 몽고메리 등 인기 영화 배우를 한 발 앞서 선전에 활용해 '세련된 음료수'라는 코카콜라의 이미지를 만들어 내기도 했다. 눈에 띄는 거의 모든 장소에 코카콜라의 광고판이 세워지고 이제 코카콜라는 미국인들의 일상에 빠져서는 안 될 음료수로 정착했다.

 

미국에서 코카콜라의 지위는 제 2차 세계 대전을 계기로 결정적으로 확립되었다. 일본군에 의한 진주만 공격 직후부터 코카콜라는 광고에서 드러내놓고 애국심을 강조함으로써 어린이들뿐만 아니라 미국을 떠나온 병사들에게 코카콜라는 공통적으로 기억되는 추억의 맛으로 자리잡았으며 전쟁이라는 비상 사태 속에서 그들이 지켜야 할 가치관이나 생활과 동등한 의미로까지 발전하게 되었다. 또한 코카콜라가 미군과 함께 주둔지에 진주함으로써 코카콜라 제국의 판도를 넓히는 계기가 되기도 했다.

 

 

199211. 관세 및 무역에 관한 일반 협정(GATT)을 둘러싼 유럽과 미국의 농업 교섭 타결에 항의하는 프랑스 농민들의 분노의 대상은 바로 코카콜라였다. 파리 남부 브장송의 코카콜라 공장의 바깥에서는 코카콜라 자동판매기가 불태워지고 샤르트르에서는 약 300명의 농민이 그곳 슈퍼에 몰려가 그곳 진열대를 무너뜨리는 등 항의했다.

 

코카콜라의 이미지는 좋든 나쁘든 미국을 대표한다. 현재 코카콜라가 진출해 있는 나라는 195개국을 넘어서고 있다. 전 세계에 하루에 대략 56백 만 병(1병에 287ml)이 소비된다. 이렇게 세계적으로 친근한 음료수의 본격적인 해외진출은 제2차 대전시 미군과 함께 시작되었다. 코카콜라 제국의 '더 보스'인 우드러프는 미국 정부와 교섭해 군이 진주하는 곳에 코카콜라 공장을 지어 병사들에게 제공한다는 계약을 체결하고 전선 가까이에 차례차례 코카콜라 공장을 건설, 이 공장의 관리를 위해 회사에서 파견된 248명의 기술진이 현지인 등을 고용해 코카콜라를 만들어냈다. 그들은 '코크 대령'이란 애칭을 받기도 했다.

 

그러나 전쟁이 벌어지는 동안 애국적 이미지가 지나치게 강했던 탓인지 코카콜라의 해외 진출은 곳곳에서 '반미'의 반응과 이어졌다. 이러한 공격은 냉전 초기 공산주의자로부터 생겨났고, 특히 1949년 프랑스에서는 공산주의자가 지방 와인업자와 손을 잡고 프랑스에서 코카콜라를 금지해야 한다는 소송을 제기하기도 했다. 반대로 코카콜라가 민주주의와 자유라는 미국적 개념과 결합됨에 따라 코카콜라는 미국에 대한 동경이라는 형태로 받아들여지는 경우도 많았다. 이 전형적인 예는 일본에서 나타났다. 1960년대 비로소 민간 시장에 판매 허가가 떨어짐과 동시에 코카콜라는 패셔너블한 음료수로 폭발적인 인기를 끌었다. 코카콜라가 해외에서 성공을 거둔 또 하나의 이유로서, 당초 코카콜라에 대한 반발을 교훈 삼아 현지인들과 융화되기 위해 끈질기게 노력했다는 점이다. 예를 들어 코카콜라 사는 해외 현지 기업과 코카콜라의 제조판매권을 계약하는 시스템을 채용하여 각국의 사회 풍토와 경제적 필요를 충족시킬 수 있도록 노력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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