체코, 프하라의 봄
by 처사21체코, 프하라의 봄
1968년 체코 사건은 20년 후 페레스트로이카의 전주곡이었다. 이때는 소련에서 보수파의 입장이 강해 긴장감만이 감돌았지만, 후에 페레스트로이카의 주도자들도 이로부터 큰 교훈을 얻었던 것이다.
바르샤바 조약군의 점령에 항의하여 체코슬로바키아를 떠났던 무냐티크는 1989년, 그를 중심으로 한 지식인 반대파가 이미 1952년부터 그 입장을 구축하기 시작하여 착실히 지반을 다졌으며, 체코 사건에 대한 의욕과 실마리를 만들어왔다고 말했다. 이 사건은 결코 우연한 사건이 아니었다.
1968년 1월 오랫동안 실권을 장악해 온 노보트니 대신 알렉산드르 두브체크가 당 서기장에 선출되었다. 검열은 없어지고 개혁이 시작되었다. 이 움직임이 바로'프라하의 봄'이라 불리는 것이며 6월 자유파 지식인들은 '2천 단어 선언'을 발표했다. 같은 해 8월 20일 소련 등 바르샤바 조약 기구의 5개국 군대 20만 명이 갑자기 체코슬로바키아로 침입하여 전지역을 점령하고 두브체크를 연행했다. 그러나 22일 비밀리에 급히 당 대회를 개최한 체코 공산당은 군대 철수를 요구하며 다음 날 1시간 동안 총파업을 일으켰다. 의외로 강한 저항에 직면한 소련은 스보보다 대통령, 두브체크와 교섭하여 27일에 공동 성명서를 발표했다. 그러나 이후 10일에는 군대 7만 명의 상주가 결정되었고 1969년 4월에는 두브체크 후임에 후사크가 서기장이 되는 등 조금씩 정상화가 진행되었다. 소련 공산당은 소련을 구성하는 공화국을 포함하여 사회주의 국가들의 주권은 제한할 수 없지만, 구체적인 권리는 '공통의 이익'과 '계급'의 이름 아래에 제한할 수 있다는 입장을 취하고 있었다.
이 사건에 대하여 중국의 주은래는 소련이 사회 제국주의, 사회 파시즘화 되었다고 연설했다. 또한 일본에서도 소련의 군사 개입 직후 8월 25일 나카노 요시오, 구노 오사무, 마루야마 마사오 등이 신문에 호소문을 발표하고 소련을 비난하면서, "종래 베트남에서 미국의 군사 행동에 반대해 온 사람은 당연히 소련의 체코 점령에도 반대 의사를 분명히 해야 하며, 또한 우리들은 베트남 전쟁에 일관하여 항의해 온 사람만이 소련의 무력행사에 진정으로 항의할 자격이 있다고 생각한다."고 발표하는 등 국제 사회에 큰 영향을 미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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