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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화인민 공화국의 탄생

by 처사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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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화인민 공화국의 탄생

 

 

1. 중화인민 공화국의 탄생

 

중화 인민 공화국의 탄생은 그 식민지 체제의 붕괴와 식민지, 종속국의 독립이라는 2차 대전 후 세계사의 기본적 흐름을 보여준 상징적인 사건으로 역사에 기록되었으며 세계 각 지역의 민족 해방 세력은 크게 환영했다. 특히, 당시 프랑스와 민족 해방 전쟁을 계속하고 있던 베트남 민주 공화국에게 중화 인민 공화국의 탄생은 제국주의의 포위망이 타파된 것으로 받아들여졌다.

 

중화 인민 공화국은 뒤떨어진 경제, 봉건적 전통이 뿌리깊은 정치문화로부터 출발해야했다. 모택동도 1945 4월 공산당 제 7차 대회의 정치 보고인 '연합 정부론'에서 "새로운 부르주아적 성질을 가진 철저한 민주주의 혁명 없이 식민지반식민지반봉건의 폐허 위에 사회주의 사회를 건설하려 한다면 그것은 공상에 지나지 않는다"고 했다. 건국 초기에 중국의 지도자들 역시 부르주아적인 발전을 목표로 하는 신() 민주주의 단계가 장기간 존속할 것이라고 보았다. 그러나 냉전체제의 심화, 특히 한국 전쟁을 계기로 중국은 강국이 되기 위해 사회주의로 조기 이행하는 것을 목표로 하는 전략을 채용했다. 그와 더불어 공산당의 지도에 의한 정치체제의 일원화가 강화되었다. 그 결과로 중국은 반식민지, 반봉건의 폐허 위에 사회주의 사회를 건설하는 길을 선택했으며 그 선택의 대가는 현재에 이르기까지 중국이 걸어 온 질곡의 역사가 말해주듯 실로 큰 것이었다.

 

 

2. 천안문 사태

 

1976년의 유혈 참극인 천안문 사건과는 별개의 것으로 1989 6 3일부터 다음 날 오전 5시까지 천안문 광장에서 벌어진 유혈무력진압의 정치 참극을 말한다. 같은 해 4월부터 북경 대, 청화대학생들이 중심이 된 특권층 관리의 부정부패와 권력 남용, 공산당의 과도한 권력 집중체제에 대한 비판이 북경 시민들의 호응 속에 급속히 민주화 요구로 확대되었다.

 

이에 대해 팽진 등 당 보수파 원로들은 천안문 시위를 '부르주아 사회주의 운동'으로 규정하였고 이붕 수상은 4 20일 계엄령을 선포했다. 그러나 천안문 점거 농성이 계속되자 등소평은 이를 체제 도전으로 간주, 시위 요구에 동조적이던 조자양 당 총서기를 체포연금하고 강경 보수파들로 하여금 시위를 진압케 했다. 이에 따라 6 3일 새벽 양상곤 휘하의 27군을 투입, 진압 작전을 폈으나 1백만 시민의 육탄 저지로 실패했다. 그러자 같은 날 오후 10시부터 장갑차를 앞세워 시위 군중에 무차별사격을 가하여 무력 진압을 강행했다. 무력 진압 과정에서 1,400여 명의 사망자, 1만 면 이상의 부상자가 발생한 것으로 알려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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