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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고슬라비아의 해체와 내전

by 처사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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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고슬라비아의 해체와 내전

 

 

1. 유고슬라비아의 해체와 내전

 

1991 6 25일 슬로베니아와 크로아티아가 독립을 선언하고 1992 1 15일에는 EC가 두 공화국을 승인함으로써 유고슬라비아 사회주의 연방 공화국은 실질적으로 소멸됐다. 이들의 선언은 소련의 해체보다 반년 먼저, 해체는 거의 동시에 이루어졌다. 뒤이어 1991 10월과 11월에는 보스니아, 헤르체고비나, 마케도니아도 각각 독립을 선언했고 1992 4월에는 세르비아와 몬테네그로로 이루어진 새 유고슬라비아가 탄생했다.

 

1941 4월 나치스 독일은 유고를 점령하여 크로아티아를 독립국으로 만들면서 파시스트의 괴뢰 정권을 만들었다. 크로아티아의 정권은 세르비아인의 키릴 문자를 폐지하고, 세르비아 정교회를 탄압하여 학살을 자행했다. 이에 대한 싸움은 세르비아인 유격대 체트니크에 의해 개시되었고 얼마 뒤에 티토를 지도자로 하는 공산당의 빨치산이 민족을 초월한 지지를 받아 그것을 확대해감으로써 각지에 인민 위원회를 구성하고 싸운 끝에 1946 1월 연방제의 인민 공화국을 발족시켰다.

 

1963년 유고는 사회주의 연방 공화국이 되었으며 자주 관리라는 형태로 시장 경제를 대폭 도입하는 개혁을 시작했다. 그러는 가운데 경제 상태가 악화되었고 1960년대 말부터 1970년 대 초에 걸쳐 세르비아 공화국 코소보 자치주의 알바니아 인을 비롯하여 보스니아, 헤르체고비나 공화국의 이슬람교도, 그리고 크로아티아 공화국이 각기 공화국 또는 연방에 대해서 권리권한 확대를 요구하게 되면서 민족주의 운동이 활발해지게 되었다. 1974년에 반포된 헌법에 의하면 자주 관리는 바로 사회주의라는 방향을 철저히 추진하는 동시에 티토를 종신 대통령으로 하고 공산주의자 동맹의 역할을 강화하여 통일을 지켜나가고자 했다. 그러나 1979년의 제 2차 석유 파동과 세계적인 불황 속에서 경제 상황은 더욱 악화되었고 민족적인 대립은 더욱더 격화되어 끝내는 해체에 이르고 만 것이다. 이때 경제적으로 부유한 북쪽의 2개 공화국은 분리 독립함으로써 자국의 이익을 확보했다. 공산주의자 동맹은 인구 비율로 봐서도 큰 당이었으나 그 조직 원칙이나 당과 인민의 관계에 있어서도 또한 소련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문제가 있었을 것이다. 이후 보스니아와 헤르체고비나에서는 세르비아 인, 크로아티아 인, 무슬림 인이 3파전을 이루는 내전을 계속하고 있다.

 

이와다 마사유키는 일찌감치 슬로베니아의 독립을 실질적으로 인정한 오스트리아라든가 독일의 외교적 책임을 물으면서 '대 유고슬라비아'에 관해서는 대항하는 여러 민족의 공존공영이 어렵다고 하여 민족 자결을 표방하면서 슬로베니아와 크로아티아를 분리 독립시키고 '소 유고슬라비아'로 불리는 보스니아, 헤르체고비나에 관해서는 민족의 공생을 표방하여 소 유고슬라비아의 일체성에 협조하는 미국과 유럽 방식의 논법은 어불성설의 비합리적인 논리라고 평가했다. 한편 시바 요시히로는 1981년에 120만 명이 된 어느 구성 민족에도 속하지 않는 '유고슬라비아인'의 존재에 주목했다. 확실히 민족적 동질성을 구성 민족이 아닌 유고슬라비아 인으로 삼는 사람들이 증가한 사실은 소련에서의 소비에트 인이라는 의식 성장과 더불어 민족 문제를 생각하는 경우에 중요한 요소가 될 것이다.

 

 

2. 유고의 티토

 

저항운동의 최고 책임자는 적들도 '유고의 붉은 별'이라고 부르며 두려워하는 대상인 크로아티아 출신의 공산주의자 요시프 브로즈 티토였다. 파르티잔이 얕볼 수 없는 힘을 가지게 되자, 그들을 전멸시키려는 작전이 집요하게 계속되었다. 7차에 걸친 대공세가 펼쳐졌고 파르티잔은 포위 당해 몇 번이나 전멸 위기에 몰리기도 했다. 특히 네레트바강 전투, 스우체스카 전투에서는 위기일발 지경에 몰렸고 티토도 중상을 입었다.

 

 

고난의 싸움을 견뎌낸 파르티잔은 1943 9월 이탈리아가 항복하자 이탈리아 군 10개 사단을 무장해제시키고 새롭게 8만의 무장 세력을 탄생시켰다. 연합국도 티토의 저항을 높이 평가하여 최대한의 원조를 결정했다. 저항 운동은 날로 성장하여 같은 해 야이체에서 인민해방 반파시스트 회의를 개최하였고 국내의 제 민족제 계층을 대표하는 사람들이 모여 사실상의 임시 정부를 결성했다.

 

파시스트에게 점령된 지역이면 어디에서나 주민의 자발적인 저항이 일어났다. 프랑스, 이탈리아, 그리스의 저항은 파시스트를 물리칠 정도로 힘이 있었다. 그 가운데서도 유고의 파르티잔은 탁월하였으며 독자적인 힘으로 해방의 길을 열었다.

 

 

 

해방 후 국가 건설에 몰두하기 시작한 유고의 앞을 가로막은 것은 스탈린이 이끄는 소련이었다. 소련은 해방 전쟁의 와중에서 파르티잔에 적대적이던 반공 망명 정부와 접촉함으로써 유고 지도부를 실망시켰다. 냉전이 시작되자, 소련은 동구 각국에 압력을 가해 소련의 위성국으로 만들었는데, 티토의 지도부는 여기에 강하게 저항했다. 때문에 공산주의 진영으로부터 추방되었고(1949년 소련은 유고와의 상호우호 원조 조약을 파기하고, 다른 동구권 국가들도 이에 따랐다.), 격렬한 반 티토 선전에 시달렸다. 국가의 위기에 직면한 지도부는 소련형 사회주의와 결별하고 자주 관리와 시장 원리를 도입하는 독자적인 사회주의의 길로 접어든다. 외교면에서도 비동맹 중립으로 전환했다.

 

이 정책은 냉전의 완화에 크게 공헌했다. 그러나 유고 내부의 민족 문제가 해결된 것은 아니다. 유고는 1974년에 헌법을 개정하고 집단 지도제를 채용하여 티토 사후 대통령을 1년씩 각 공화국에서 돌아가며 맡는 둥 민족 융화를 위해서 노력했지만 각 공화국 간의 경제적 격차 확대 및 동구 민주화의 충격 등으로 인해 민족의 균열은 심화되었다. 그 결과 격심한 혼란과 연방의 해체를 경험하게 된 것이다.

 

 

3. 내전에 휩쓸린 유고슬라비아

 

1980년 티토가 죽은 뒤에 유고 연방은 통합의 구심점을 잃고 각 민족 내부에서는 민족주의 세력이 부상하였다. 슬로베니아와 크로아티아가 1992 6 25일 독립을 선포하자 사흘 뒤에 유고 연방군의 탱크가 두 공화국에 진격했다. 이후 독립을 유예하면서 내전은 크로아티아와 보스니아로 옮겨졌다. 크로아티아에서는 다수의 크로아티아 인과 소수의 세르비아 인과의 대립이 불씨가 되고 있으며 1992 3 1일에 독립을 강행하면서 내전에 휘말린 보스니아는 450만의 인구가 이슬람 계 43%, 세르비아 계 32%, 크로아티아 계 17%로 이루어진 유고의 축소판이다. 이 내전의 종식을 위해 유엔이 전쟁에 참여하고 있으며, EC가 경제 제재 조치를 단행함으로써 타협책을 제시하고 있지만 내전이 종식될 전망은 여전히 불투명한 상태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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