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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랍의 후세인

by 처사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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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랍의 후세인

 

 

 

 

1. 아랍 민족주의의 선봉에서, 후세인

 

걸프 전쟁 발발(1991)

 

199117일 새벽 미 공군 F15E 전폭기 중대가 사우디아라비아 중부에 위치한 미 공군기지에서 발진하여 이라크의 수도 바그다드를 공습. 이어 25백 대에 달하는 F15E 전폭기 편대가 잇달아 사우디아라비아의 중부와 동부 지방에서 이륙했다. 몇 시간 뒤 "…………끝내 후세인은 쿠웨이트에서 떠나지 않았다. 따라서 무력 이외에는 후세인을 쿠웨이트에서 떠나게 할 다른 선택이 없었다.……… 나는 미국인에게 이번 전쟁이 제2의 베트남전이 되지 않을 것이라고 확언한다………"라는 미국 대통령 부시의 특별 성명이 발표된다.

 

 

199082일 걸프 전쟁의 발단이 된 이라크의 쿠웨이트 점령이 시작되었다. 새벽 3, 이라크 군의 탱크가 쿠웨이트 국경을 넘어섰다. 쿠웨이트 왕과 그 가족은 사우디아라비아로 도망쳤고, 이라크 군은 특별한 저항 없이 7시간만에 쿠웨이트를 손에 넣었다.

 

 

세계의 화약고 중동은 다시 주목거리가 되고 세계는 바짝 긴장했다. 그러던 중 108, 예루살렘에서 이스라엘 경찰의 발포로 팔레스타인인 20여 명이 죽고 150명이 다친 사건이 일어났다. 팔레스타인 시위대가 통곡의 벽에서 기도하는 유태인들에게 돌을 던지자, 이들을 해산시키기 위해 이스라엘 경찰이 실탄, 고무탄, 최루탄을 무차별 발사했던 것이다. 유태인들이 통곡의 벽 위에 있는 예루살렘 신전 터에 새로운 신전을 세우려 한다는 보도가 있은 후 일어난 사건이었다. 1967년의 중동 전쟁 이후 최악의 유혈 사태였다.

 

이라크 대통령 사담 후세인은 이스라엘이 점령지에서 철수하지 않으면 이번 학살에 대한 보복을 받을 것이라고 경고했다.

 

 

한편 유엔 안전보장이사회는 1129, 다음해 115일까지 쿠웨이트에서 철수하지 않으면 이라크에 대해 필요한 수단을 모두 사용한다는 결의안을 통과시켰다. 이로써 한국전쟁 이후 두 번째로 유엔군이 조직되기에 이르렀고 미국은 이미 20만의 병력을 페르시아만에 배치해 놓고 있었다. 안전보장이사회가 정한 시한을 넘긴 지 24시간 후인 1991116일 자정을 기해 미국은 이라크 수도 바그다드를 전면 공습함으로써 다시 전쟁에 뛰어 들었다.

 

 

이라크 대통령 사담 후세인은 서방측에는 잔인한 독재자요, 아랍 제국의 건설이라는 야망에 들뜬 전쟁광으로 여겨졌다. 그러나 아랍인들은 그를 민족주의의 영웅으로 생각했다.

 

사담 후세인은 유복자로 태어나 의붓아버지 밑에서 가축을 돌보며 '사막의 아이'로 성장했다. 그에게 커다란 영향을 끼친 사람은 교사였던 외삼촌과 아랍 민족주의를 제창한 나세르 대통령이었다. 195619세의 후세인은 이라크 왕정을 타도하는 혁명에 가담했으며, 이듬해 1947년 다마스쿠스에서 창설된 아랍 민족주의 조직으로 '부활, 재생, 부흥'이란 뜻을 지닌 바트 당에 가입했다.

 

바트 당은 서구 제국주의에 의해 아랍이 죽음의 상태에 빠졌으므로 제국주의를 몰아내고 아랍의 잠재력과 위대한 문명을 꽃 피우자고 주장하면서 범아랍주의, 통일, 자유, 사회주의를 표방하고, 팔레스타인의 해방과 아랍의 통일을 꾀했다. 후세인은 바트 당의 이념을 적극적으로 받아들였다. 1958년에 압둘 카심이 정권을 잡자, 후세인은 4년 간 도피 생활을 했다. 이때 고등학교를 마치고 카이로 대학에서 공부했으며, 외삼촌의 딸 사지다와 결혼했다. 10년 뒤, 명문 출신인 사미라를 두 번째 아내로 맞았다.

 

1963년에 바트 당이 카심 정권을 무너뜨리자, 후세인은 바그다드로 돌아와 1968년에 혁명 평의회 부의장이 되었으며, 19797월에는 마침내 대통령이 되었다.

 

 

2. 걸프 전쟁

 

걸프 전쟁은 서방측의 최신예 무기가 첫 선을 보인 '화려한 무기 전시장'이었다. 30센티밖에 오차가 나지 않는 토마호크 크루즈 미사일, 레이다에도 포착되지 않는 F117A스텔스 기, 스커드 미사일을 공중에서 요격하는 패트리어트 미사일, 아파치 헬기, 뿐만 아니라 미국의 군사 위성의 위력도 눈부셨다. 미사일 공격을 미리 알고 경보를 발하는 조기 경보 위성, 구름 층은 물론 사막의 모래 층까지 3미터 가량 투시할 수 있는 레이더 위성 라크로스, 적진 관측 사진을 찍어 보내주는 사진 정찰 위성 등등 첨단 과학 기술과 전자 장비가 총 동원된 전쟁이었다. 다국적군은 이 같은 최신 무기로 하루 평균 2천 회, 30초에 한 번 꼴로 이라크와 쿠웨이트를 쑥밭으로 만들었다.

 

 

224일에 미국, 영국, 프랑스, 사우디아라비아 등 11개국으로 구성된 다국적군이 지상 공격을 시작했다. 이에 앞서, 소련의 고르바쵸프의 중재로 이라크가 제시한 8개안의 종전 평화 협의안을 다국적군은 불충분하다는 이유로 거부했고, 26일 새벽, 이라크는 쿠웨이트 주둔군을 철수한다고 방송했다. 그러나 미국은 '아무런 통보를 받지 못했다'면서 공격을 멈추지 않았다.

 

27, 미국 대통령 부시는 밤 12시를 기해 종전을 선언한다고 발표했다. 휴전 회담은 33일 이라크 남부 사프완 공군 기지에서 열렸다. 미국의 슈와르츠코프다국적군 사령관, 사우디의 할리드 빈 술탄 아랍군 사령관, 이라크의 아마드 국방부 작전국장, 마흐무드 3군 사령관이 참석한 가운데 이라크는 미국측이 제시한 평화안을 전면 수용한다고 밝혔다. 이로써 40일에 걸친 걸프 전쟁은 이라크의 패배로 종결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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