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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합주의

by 처사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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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합주의

 

 

오늘날 각종 이익 단체들은 국가의 정책 결정에 강한 영향을 미치면서 공공의 이익보다는 자신들의 사적 이익만을 추구하는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이것은 자유 민주주의 국가에서 보편적인 현상이라 할 수 있다. 각종 이익 단체들은 국가와 또는 자신들끼리 막후 협상을 통해서 또는 그 협상이 여의치 않을 경우 실력 행사를 통해서 자신들에게 유리하도록 국가 정책에 커다란 영향을 미친다. 그런데 불행히도 오늘날 국가는 이들 집단들의 사적 이익을 엄하게 견제하면서 국익 또는 공익만을 전적으로 지키기는 어렵게 되어 있다. 미국 언론인 알렉산더 체이스의 지적처럼, 오늘날 민주주의에서 일반이익은 경쟁하는 소수자 집단들의 특수 이익이 우연히 일치하든가 서로를 상쇄할 때에만 추진된다.

 

20세기에 들어와서 구미의 선진국에서는 이미 정당과 의회의 메커니즘을 활용한 선거 제도를 통해 유권자들이 진정한 선택을 행할 수 있다는 고전적인 민주주의는 사라졌다. 그 대신 유권자들은 반대당들의 상투화된 정강을 어쩌다 한번씩 선택할 수 있을 뿐이고 정부는 여론을 반영하는 것이 아니고, 여론을 조직하면서 국민의 일반 의지와는 상관없이 정책을 결정하게 되었다. 게다가 정부는 강력한 토대를 가진 이해 관계 세력을 통치에 끌어들이지 않고는 다양한 이해 관계를 조정할 수 없게 되었다. 정부는 더 이상 파당적인 이익을 견제하면서 국익과 공익을 보호할 수만은 없게 된 것이다. 그래서 정부는 공적 동의를 얻기 위해 고용주나 노동 조합을 비롯한 강력한 이익 단체들을 통치 과정에 참여시키게 되었다.

 

그래서 오늘날 정부의 승인 또는 정부와의 협상이나 계약과 같은 방법으로 정부의 기능을 대신하는 사적 영역의 조직들이 보편화되었다. 오늘날 공공의 이익에 관련된 중요한 다수의 결정들이 행정부나 의회나 시장 메커니즘에 의해 공적으로 행해지지 않고 이익 집단의 대표자들 간이 또는 이들 이익 집단과 정부 간의 타협에 의하여 사적으로 이루어진다. 이것이 이른바 조합주의이다. 조합주의란 공공 정책의 수립과 시행을 어느 정도 담당하고 있는 사회의 여러 이익 집단이나 조직에 공적 지위를 부여해 주는 국가의 개입 과정이다. 조합주의는 국가가 그 기능의 상당수를 시민 사회의 비국가 조직에 떠넘긴 데서 비롯된 것이다. 그 결과 조합주의적 조직들은 계속 성장하여 그들 회원들을 대신해서 새로운 대표 기능을 수행하고 정부의 중개자로 역할하게 된다. 결국, 조합주의는 시민 사회의 주요 기능적 집단을 국가 내로 끌어들이는 것이고 동시에 국가 영역을 시민 사회 내로 확장하는 것이기도 하다.

 

 

이런 조합주의는 오늘날과 같이 복잡하고 다양한 시민 사회의 이해 관계를 이익 집단 간의 또는 계급 간의 첨예한 갈등 없이 또 국가의 강제력보다는 이해 당사자의 합의로 조정하는 것이기 때문에 긍정적인 측면이 있다. 이런 조합주의적 방식으로 영국 정부는 20세기 전반에 다른 서유럽 국가들에 비해 낮은 수준의 계급 갈등만을 겪었을 뿐이며 권위주의적 체제로 전락하거나 정치적 파멸 없이도 1차 세계 대전과 1930년대의 공황을 이겨내는 데 성공했다. 그러나 조합주의의 문제점이나 부작용도 만만치 않다. 조합주의적 조직들은 국익이라는 합의적 견해에 따르면서 아직 그런 견해에 따르지 않는 그래서 통치 과정에 참여하지 못한 조직들의 힘을 약화시켜 버린다. 따라서 이런 통치방식은 과두 체제의 성향을 지니게 된다.

 

오늘날 경영자 단체, 노동 조합, 각종 전문 단체 등은 행정에 관련된 정보를 독점하고 있기 때문에 공공 정책 결정의 통합적이고 불가결한 요소로 되었다. 이들 이익 단체는 때로 그들 각각의 구성원들에게 상당한 통제력을 행사한다. 그러나 그런 통제력의 행사가 조합주의적 절차의 공개성이나 대표성을 보장하는 것은 아니다. 그들 조직들은 흔히 그 다양한 구성원들을 전체적으로 대표하는 데 실패하여 대중들의 불만의 대상이 되기도 한다. 조합주의적 절차는 고도로 엘리트주의적이다. 의회의 통제를 직접적으로 받지 않는 정부의 관료 조직과 같이 이들 사적 이익 집단들도 관료주의적으로 구조화되어 있다. 이들 집단의 협상자들은 자신들의 협상 내용을 실천에 옮기기만 할 뿐인 그들 집단의 소속원들을 도구로 이용하고 조합체의 입장에서 의제를 정의한다. 그리고 그 결정의 비용은 힘이 더 약하고 조직이 더 빈약한 집단에 전가된다.

 

조합주의는 필연적으로 보수적인 성향을 띤다. 조합주의는 각 조직의 이익에 상응하는 아주 속도로만 변화에 반응하기 때문이다. 이때 각 조직들은 반대 세력을 무력화하고 대중 의견을 조작하거나 그에 영합하기 위해 여타 세력들과 다툰다. 하버마스는 이런 현상을 "공공 영역의 재봉건화"라고 표현했다. 중세 봉건 시대에 군주, 귀족, 교회가 공공의 문제를 전담했듯이 오늘날에는 소수의 이익 집단들이 공공의 문제를 전단하기 때문이다. 그 결과로 조합주의에 참여한 조직들의 정부에 대한 영향력은 강화되고 공중의 대정부 견제력은 약화된다. 공중이 아니라 조합주의적 조직들이 정부를 떠받치고 있는 셈이다. 그렇기 때문에 조합주의의 협상이 결렬되면 정부도 역시 위험에 처한다. 오늘날 정부와 조합주의적 조직은 뗄래야 뗄 수 없는 관계에 있다. 조합주의에 참여한 어느 한 조직이 참여를 그만두면 법이나 위협장치로도 어쩔 수 없는, 정부의 가장 긴요한 기능을 마비시켜 버리는 무정부적 상황이 전개되는 것이다.

 

우리의 경우 그 동안 시민 사회의 다양한 이해 관계를 권위주의적인 방식으로 해결해 왔다. 그러나 국민의 정부가 들어선 지금 이제 그런 방식은 불가하다. 그렇다고 각종 이익 단체들이 자신들의 사적 이익을 지나치게 내세우면서 적당한 타협점을 찾지 않으면 정부가 강제력으로 해결해야 하거나, 해결을 못해 무정부 상태가 초래되거나, 심지어는 정부가 무너지거나, 아니면 국가가 사적 이익 추구의 각축장이 되어버릴 것이다. 이도 저도 바람직한 일은 아니다. 따라서 민주주의를 지키고 발전시키기 위해서 이익 집단들의 자제와 현명한 타협이 요구된다고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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