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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BM과 컴퓨터

by 처사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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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BM과 컴퓨터

 

 

1.1981년의 컴퓨터의 등장

 

컴퓨터는 1980년대이래 서구 근대 사회를 극적으로 바꾸어 놓았다. 일명 '전자 두뇌'라고도 하는 컴퓨터는 한꺼번에 여러 가지 업무를 수행할 능력이 있다. 컴퓨터는 자동차와 비행기가 수송 능력을 확장시키듯이 계산 능력에 있어서 혁명을 불러 일으켰다.

 

1937, 미국인 엔지니어인 하워드 에이킨이 IBM 마크 7을 고안했다. 이 컴퓨터는 오늘날 메인 프레임 컴퓨터(대형 컴퓨터)의 할아버지 격이며 전자식 스위치가 아닌 기계식 스위치와 진공관을 사용했다. 최초의 진정한 전자식 컴퓨터는 2차 대전이 몰고 온 기술적 진보의 결과로, 이 컴퓨터는 콜로서스 1호인데, 맨체스터 대학의 알랜 튜링과 M.H.A 뉴먼에 의해 영국 정부를 위해 만들어졌다. 이 컴퓨터를 사용함으로써 독일군의 암호 체계 '울트라 코드'가 풀렸고, 이후 연합군은 1943년에 이르러서는 대부분의 암호 체계를 풀어낼 수 있었다.

 

콜로서스에 이어 30톤짜리의 컴퓨터인 애니악(ENIAC: Electronic Numerical Integrator & Computer)이 펜실바니아대학의 존 모츨리, 존 프레스퍼 에커트에 의해 개발되었다. 또한 에커트와 모츨리에 의해 고안되어 1951년에 발표된 스페리 범용 자동 컴퓨터(UNIVAC)는 최초의 상업적 성공을 거두기도 하였다. IBM이 판매한 IBM1401은 산업 부문에서 기계식 계산기를 대체한 최초의 컴퓨터였다.

 

트렌지스터 컴퓨터는 진공관 대신 트랜지스터를 사용한 컴퓨터를 말하는데, 1958년에 콘트롤 데이터 회사를 위해 세이무어 크레이가 개발했다. 이로써 컴퓨터는 집채만한 크기에서 매우 작고 속도가 빠른 컴퓨터로 바뀌게 되었다. 크레이는 나중에 컴퓨터 회사를 차려서 최상급의 컴퓨터를 만들어내기 시작했다. 크레이11975년에 발표된 슈퍼컴퓨터로서 초당 100만 개의 연산을 할 수 있는 능력이 있었다. 1985년에 나온 크레이2는 초당 12백만 번의 연산 능력이 있었으며, 1991년에 나온 CM-200 슈퍼컴퓨터는 초당 93만 번의 연산이 가능하기에 이르렀다.

 

퍼스널 컴퓨터라는 개념은 소위 실리콘 벨리라는 곳에서 탄생했다. 1976년에 스티븐 잡스(1955)와 스티븐 위즈니액(1950)은 마이크로 프로세서를 장착한 퍼스널 컴퓨터인 애플 1을 잡스의 집 차고에서 만들었다. 두 사람은 애플 1을 만들어 컴퓨터 애호가와 전자 제품을 열광적으로 좋아하는 사람들에게 팔기 시작해 1977년 초에는 애플 컴퓨터 사를 설립하고 4월에는 세계 최초의 완전한 개인용 컴퓨터인 애플 2를 등장시켰다. 이 애플 컴퓨터사는 수만 대의 컴퓨터를 저가로 세계 시장에 내놓음으로써 1970년대 말과 1980년대 초에 마이크로 컴퓨터 혁명을 일으켰다. 다시 말해서 가정에서 사용하는 컴퓨터라는 개념을 현실로 구현한 것이다. 컴퓨터를 구매할 능력이 없거나 혹은 복잡한 컴퓨터 언어를 가르칠 방법이 없던 기업이나 교육기관에서도 최첨단의 기술적인 혜택을 누릴 수 있게 되었다. 애플 컴퓨터사는 5년만에 외형이 5억 불이나 성장했으며, 거인 IBM사가 19818월에 개인용 컴퓨터(PC)를 발표하기 이전까지 컴퓨터 산업을 석권했다. 애플사와 IBM사는 1990년대에 이르러 세계 컴퓨터 시장을 양분했으며 마이크로 컴퓨터는 전세계의 수많은 기업, 학교, 가정 어느 곳에서나 쉽게 볼 수 있게 되었다.

 

 

2. IBM 컴퓨터

 

정보처리 혁명의 파도가 사회 구석구석까지 파급되면서 이 정보 사회를 가져다 준 컴퓨터의 기술혁신, 산업화, 판매 보급 등의 분야에서 IBM은 역사적으로 언제나 주역의 자리에 있었다. 총매출 690억 달러(90년도), 종업원 수 37만 명의 이 기업은 세계 132개국에 사업을 전개하고 있다.

 

세이지(반자동식 방공관제 시스템)1949년 소련의 원폭 실험 성공 소식이 전해지자마자 미 공군이 채택하기로 결단을 내린 고도의 방공시스템이었다. 이 시스템은 미국 본토 전역을 24시간 체제로 커버하며 침입하는 폭격기의 속도와 위치, 코스를 단 시간 내에 정확하게 포착해서 요격한다.

 

각지에 산재해 있는 레이더 기지로부터 서로 모순되는 정보가 집결되면, 이전에는 일정한 규칙에 따라 일일이 비행코스를 산출해냈는데 이것을 즉시 보다 효율적으로 처리하기 위해서는 컴퓨터를 이용한 시스템이 필요했다. 그래서 미국 정부는 먼저 MIT에 개발을 의뢰했고, 5개 기업이 자신의 이름을 걸고 격렬한 입찰 공방전에 들어갔다. 그렇지만 당시 컴퓨터는 아직 실험 단계에 불과했다. 벨 전화연구소(현 벨 연구소)의 쇼클레 박사 등이 트렌지스터를 발명한 때로부터 겨우 몇 년밖에 지나지 않은 시점이었다. IBM은 보기 좋게 계약을 따냈고, 1선 엔지니어가 총력을 기울여 SAGE 개발에 뛰어들었고 IBM킹스톤은 이를 위해 긴급하게 만들어진 공장이었다. 당시 미국 의회에서는 '빨갱이 사냥'의 메카시즘이 휘몰아치고 있었으며 1953년 소련의 수폭 실험이 성공하자 빠른 속도로 SAGE컴퓨터 프로젝트가 결정되었고 1956년 첫 반출이 시작되었던 것이다. 그것은 일종의 공포 상태에서 발안되었으며 트랜지스터도 사용되었지만 겨우 600개 정도였고 나머지는 5만 개의 진공관으로 이루어졌고 금도 83kg이 사용되었다. 총 중량 275톤에 막대한 전력을 소비했다. 이 밖에 공조 설비만도 300. 하나의 시스템이 사용하는 면적은 3600. 반출에는 26대의 트레일러 트럭이 필요했다. 창이 없는 콘크리트 건물 안에서 방을 어둡게 만든 다음, 끊어져버린 진공관을 점검해야만 했다. , SAGE 컴퓨터의 메모리 유니트는 4K비트로 지금은 그런 비슷한 것도 찾아 볼 수 없는 것이었다.

 

SAGE컴퓨터 메모리는 64K비트까지 향상되어 <Q7>이란 이름으로 전국 48개소에 2기씩 설치되었다. 하나가 작동 중일 때 다른 하나는 점검하는 식이었다.

 

 

신뢰성은 높았지만 현실적으로 입증할 수 있는 사태는 생기지 않았다. 다시 말해서 그 당시 원래 소련은 핵폭탄을 미국 본토까지 운반할 폭격기 등을 보유하고 있지 않았으며 1957년에 소련이 스푸트니크 호를 쏘아올리며 핵 미사일 시대가 본격화되자 이미 SAGE는 과거의 유물로 변해버렸기 때문이다. 이렇게 SAGE프로젝트에 따른 이익은 적었지만, 그 부차적인 효과는 매우 컸다. 자동화된 공장이 만들어졌고 수천 명이나 되는 종업원을 새로운 일렉트로닉스 부문에서 훈련시킬 수 있었다.

 

1930년대 IBM이 정상의 기업으로 자리를 잡을 수 있었던 것은 뉴딜 정책으로 인해 정부 사회 보험국 등에서 필요로 하는 펀치 카드기를 공급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컴퓨터 계의 왕좌의 자리를 점하게 된 계기를 만들어준 것은 바로 냉전이었다고 할 수 있다. 케네디 가와도 친교가 있던 슨 주니어가 이끄는 IBM1960년대 들어 머큐리, 제미니, 아폴로로 이어지는 우주개발계획에서 관제, 추적 등 전자 두뇌 부분의 프로젝트를 따냈다. 컴퓨터 시대는 미국의 대담한 국방우주 계획을 도약의 발판으로 삼아 성장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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