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어독서창고

흐루시초프의 소련의 개혁

by 처사21
728x90
반응형

흐루시초프의 소련의 개혁

 

 

1961년 당 대회 기조보고에서 흐루시쵸프는 1980년까지 소련이 주민 1인 당 공업 및 농업 생산에서 미국을 추월할 것이라고 말했다. 이것은 '허풍선이 흐루시쵸프'의 예로 자주 인용되는 부분이다.

 

그러나 역사와 인물을 비판할 때, 시대 배경과 내외 정세를 고려하지 않으면 공정성을 잃기 쉽다. 실제로 <흐루시쵸프 10> (19531964)동안의 경제 성장률은 생산물의 질은 뒤로 하고 일본을 빼고 세계에서 가장 높았다. 예를 들면 이 때 지어진 5층 아파트의 경우 지금은 <흐루시쵸프의 빈민굴>이라 불리고 있을 정도이다. 그러나 한 집에 두세 가족이 사는 것이 보통이었던 전후 부흥기에 이 5층 아파트가 얼마나 귀중한 주거지였을지는 말할 필요조차 없다. 지금 60세를 넘은 당시의 입주자들 외에는 이 사실을 이해할 수 없을 것이다.

 

역사가 메드베제프에 따르면 1959년 가을의 미국 방문에서 캠프데이비드 정신(평화 공존)을 제창한 것이 흐루시쵸프 시대의 기로였던 셈이다. 미국 방문 직후의 중소 북경 수뇌 회담은 실패로 끝나고 모택동 주석은 스탈린 비판과 미국과의 협조를 독단적으로 행한 흐루시쵸프를 '수정주의자'라고 비난했다. 공동 성명도 발표하지 못한 채 소련 측은 일정을 수정하고 귀국했다. 아이젠하워 대통령과의 우호 관계도 19605월의 4대국 파리 수뇌 회담 직전에 미 첩보기 U2가 소련 영내에서 격추된 사건을 계기로 깨지고 말았다. 새로운 대통령 케네디와는 19616월 빈에서 회담했지만, 베를린 문제로 의견이 대립되었다. 2개월 뒤에 동독은 서독으로의 도망자를 막기 위해 국경에 장벽을 구축했다. 10월 흐루시쵸프는 <수폭의 아버지 사하로프>의 반대를 누르고 핵실험을 재개했다. 그것도 여봐란 듯이 58메가톤이라는 사상 최대의 실험이었다. 10월에 열린 소련의 22회 당 대회에서는 중국을 공공연하게 비난했으며 스탈린의 시신을 레닌 묘역에서 다른 곳으로 옮겼다.

 

196210월 쿠바에 있는 소련 미사일 철거를 둘러싼 <카리브 해 위기>를 통해 세계는 처음으로 미소 핵 대립의 위협을 실감했다. 196311월 흐루시쵸프는 '호적수'인 케네디 대통령이 암살 당한 것을 비통해했는데, 본인 주변에도 내정의 실패로 어두운 그늘이 지기 시작했다. 당 독재체제의 전환, 즉 당과 행정 기관을 분리하고 각 지방의 국민 경제 회의에 경제권을 넘긴다는 흐루시쵸프의 아이디어 자체는 올바른 것이었다. 그러나 상의 하달의 <명령 방식>에 길들어진 국민들 사이에서 오히려 혼란이 생겨났다. 고르바쵸프와 옐친 모두 이 관료주의와 지방 이기주의에 골치를 앓아야 했다.

 

흐루시쵸프는 '시대를 너무 앞서 간 사람'이었다. 회심의 농업 진흥책도 개척지의 풍화 침식과 화학 비료농기구 부족으로 현실화가 불가능했다. 또한 고르바쵸프의 말기와 흡사한 조령모개 식의 인사조치로 당 관료 조직도 결국 이를 외면해버렸고 지도부 내에는 반대파가 생겨나기 시작했다.

 

19641016일 당 중앙위 총회는 갑자기 노령과 건강상의 이유로 당 제1서기총리의 직무 해임을 요구한 N.S.흐루시쵸프의 제안을 승인하고 , 1 서기에 L.I.브레주네프를 선출했다고 발표하여 세계를 놀라게 했다. 그후 1971'단순한 연금 생활자'에 불과하게 된 흐루시쵸프가 사망했고 그의 묘는 역대 지도자가 묻힌 크레믈린이 아니라 제정 시대부터 많은 문화인들이 잠들어 있는 시내 노보데비치 수도원 묘지에 있다.

 


 

728x90
반응형

블로그의 정보

국어독서창고

처사21

활동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