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합리성에 기반한 민주주의

by 처사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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합리성에 기반한 민주주의

 

 

사회 생활은 이해와 욕구가 다양한 사람들이 모여 사는 생활이므로 어떤 조정과 통제에 의한 질서가 불가피하다. 그래서 그런 조정과 통제 기능을 담당하고 질서를 수립할 권력 또는 피할 수 없다. 에덴 동산에 살지 않는 한, 또 무정부적 유토피아를 실현하지 않는 한, 인간 사회의 권력은 필수적이다. 권력은 인간이 협동에 의해 자연의 지배로부터 해방되는 데, 또 인간과 인간 사이의 정글의 법칙으로부터 해방되는 데 필요한 도구인 것이다.

 

그러나 권력은 이렇게 해방의 도구로만 쓰이는 것은 아니다. 불행하게도 그것은 인간의 자유를 속박하는 족쇄가 되기도 한다. 권력은 사회 질서를 유지하는 필요선인만큼 개인들의 자유를 제한하는 필요악이기도 하다. 특히 권력이 사회 성원 다수의 동의나 합의 없이 자의적으로 수립되고 행사될 때 또한 다수의 이익이 아니라 소수의 이익만을 위해 행사될 때 그것은 인간의 해방이 아니라 속박을 가져올 뿐이다.

 

과거에는 권력이 주로 절대 군주나 봉건 제후에 의해 그들의 이익만을 도모하는 방향으로 행사되어 왔다. 중세 유럽에서는 교회가 교직자들의 이익을 위해 막강한 권력을 휘두르기도 했다. 권력이 소수의 이익만을 도모할 때 권력으로부터 소외된 다수의 일반 사람들은 경제적인 수탈과 정치적인 압제를 면치 못한다. 근대까지의 세계 역사는 대개 이런 자의적인 독재 권력에 의한 수탈과 압제의 역사이다.

 

오늘날에도 제3세계의 많은 독재 국가에서는 소수의 이익만을 도모하는 자의적인 독재 권력에 의해 많은 사람들이 시달리고 있다. 서구의 계몽주의는 그런 소수의 자의적인 권력에 도전하여 다수의 합의에 바탕을 둔, 보다 합리적이고 정당한 권력을 수립하려고 한 근대적인 노력이며 그런 노력의 산물이 자유 시민 혁명의 과정을 거쳐 오늘날 서구의 자유 민주주의 제도로 정착되었다.

 

그러므로 서구의 자유 민주주의의 기념 이념은 다수의 합의에 의한 정당한 권력을 수립하고 행사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서구의 자유 민주주의는 소수의 임의적인 권력으로부터 벗어나 다수의 합의에 바탕을 둔 권력을 수립하고 행사할 수 있는 정치제도를 고안해 내었다. 삼권 분립, 의외 제도, 평등 선거 등이 자의적인 권력을 분산시키고 합의적인 권력을 수립하고 행사하려는 정치 제도들이다.

 

그러나 다수의 합의에 바탕을 둔 권력을 행사하는 데 있어 가장 필수적인 것은 언론의 자유이다. 언론의 자유가 없고서는 어떤 자유 민주주의도 허울에 불과하다. 왜냐하면, 언론의 자유 없이는 진정한 다수의 합의에 도달할 수 없기 때문이다. 서구의 자유 민주주의 국가에서 언론의 자유를 무엇보다 소중히 여기고 또 그것을 보장하는 것은 이 때문이다. 다수의 자유로운 토론을 거쳐 도달한 합의에 의해 수립되고 행사되는 권력이 자유 민주주의를 내세우는 권력의 이상적인 모습이다. 그런데 모든 국민이 토론에 참여할 수는 없으므로 선거에 의해 대표를 뽑고 그 대표가 의회에서 토론을 하게 한다든가 또는 자유로운 언론을 통해 민의를 반영하는 여론이 노출되도록 한다든가 하는 편법이 시행되고 있다.

 

하지만 오늘날 서구에서마저 다수의 이익을 위해, 그리고 다수의 합의에 의해 권력을 수립하고 행사한다는 자유 민주주의의 본래의 이상은 사라지고 다수에 의한다는 형식만이 남아 있다. 그래서 재벌이나 특수 이익 집단이 알게 모르게 정책 결정에 막강한 영향력을 행사하고 언론은 민의를 반영한다기보다는 지배 계급의 이익을 대변하는 조작된 여론을 반영한다. 그래도 서구에서는 언론의 자유가 보장되어 있고 선거가 공정하게 치러지고 권력의 전횡을 막을 수 있는 여러 제도적 장치가 있어서 자의적인 독재 권력은 방지된다.

 

 

그러나 자유 민주주의를 표방하는 제3세계의 많은 나라에서는 언론의 자유도 없고 선거도 공정하게 치러지지 않고 또 권력의 전횡을 막을 수 있는 제도적인 장치도 효과적이지 못하다. 그런 곳에서 자유 민주주의라는 말은 실은 독재의 허울에 불과하다. 그런 곳에서는 권력의 성립 자체부터가 비민주적이다. 왜냐하면 다수의 합의에 의해서가 아니라 정변이나 소수의 결정이나 부정 선거가 불공정한 제도에 의해 권력이 수립되고 형성되기 때문이다. 또 그런 부당한 권력을 유지하기 위해 자유로운 다수의 합의와는 전혀 상관이 없는 온갖 금력과 폭력과 위협과 기만술책을 사용한다.

 

중남미를 비롯한 제3세계의 많은 우익 독재 정권들은 반공을 구실로 자유 민주주의의 요체인 언론의 자유나 기타 기본적인 인권을 말살하면서도 자유 민주주의를 내세운다. 그들은 공산주의를 막기 위해서는 자유를 제한할 수밖에 없다고 말한다. 말하자면, 반공을 위해서, 또는 자유 민주주의를 위해서 자유 민주주의를 할 수 없다고 말하는 것과 같다. 그들은 서구의 자유 민주주의 국가들이 공산주의 운동을 합법화함으로써 그 운동을 무력화한 사실이나 공산주의를 막는다는 구실로 자유를 제한하는 것이 공산주의 사상이나 운동을 돕는 밑거름이 된다는 사실은 말하지 않는다.

 

어쩌면 교활한 그들은 자신들의 독재 권력의 유지를 위한 구실로 공산주의라는 내부의 적이 필요하기 때문에 그것의 성장을 은근히 조장하는지도 모른다. 그렇지 않다면 공산주의를 막는다는 구실로 자유 민주주의를 표방하면서도 자유 민주주의를 시행하지 않는 그들이 공산주의를 퇴치하지 못하고 날이 갈수록 공산주의의 위협이 더 크다고 말하기만 할 수 있을까. 공산주의를 막는 것이 그들의 책임이라면 공산주의 위협이 커질수록 공산주의를 막아야 할 그들의 책임을 다하지 못한 것이며 따라서 그들은 존재 이유를 잃은 것이다.

 

그런데 역설적이게도 반공을 외치는 독재 권력일수록 공산주의를 퇴치했다는 말은 없고 늘 공산주의 위협이 커졌다고만 말한다. 말하자면, 반공에 실패했다는 얘기를 스스로 하는 셈이다. 반공을 내세우는 권력이 반공에 실패했다면 책임을 져야 한다. 그렇지 않다면 그들이 내세우는 반공은 반공을 위한 것이 아니라, 반공을 구실로 자신들을 반대하거나 비판하는 사람들을 공산주의자로 몰아 탄압하고 부당한 권력을 유지하려는 속임수라는 것을 드러내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

 

자유 민주주의를 표방하는 한 다수의 자유로운 합의에 바탕을 둔 정당한 권력을 수립하고 행사하는 것은 필수적이다. 그리고 언론의 자유는 정당한 권력의 전제가 된다. 언론의 자유가 없고 자유로운 합의가 없다면 그 어떤 제도든 자유 민주주의라는 이름으로 부를 수 없다. 인간의 기본적인 자유와 권리를 허용하고 폭력을 고취하지 않은 한 어떠한 사상이나 이념이나 정당도 허용하는 것이 자유 민주주의의 기본적인 입장이다. 물론 때에 따라서 여기에 어떤 제한이 있을 수 있다. 그러나 그 제한은 반드시 다수의 합의에 기초해야 한다. 그렇지 않다면 자유 민주주의가 아니다.

 

공산당의 일당독재를 인민 민주주의라는 허울로 내세우는 좌익 독재에 속는 것이 어리석은 것처럼, 자유 민주주의라는 말을 양두구육으로 내세우는 우익 독재에 속는 것도 어리석다. 언론의 자유를 보장하지 않고 다수의 합의에 근거하지 않은 채 민주주의를 내세우는 것은 인민 민주주의건 자유 민주주의건 속임수다. 민주주의를 간판으로 내건다고 민주주의가 되는 것은 아니다. 독재 집단일수록 그런 말을 강조한다. 민주주의를 실천하고 있는 서구에서는 "우리는 민주주의를 한다"고 떠들지 않는다. 빈 양철동이가 소리만 요란한 법이다.

 

민주주의는 소수의 임의적 독재 권력 즉 비합리적 권력이 아니라 다수의 자유로운 합의에 바탕을 둔 합리적 권력이다. 합리적인 민주 권력이 인간의 정치적 해방을 낳는 것이라면, 비합리적인 독재 권력은 인간의 정치적 예속을 낳는 것일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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