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식인의 임무
by 처사21지식인의 임무
예나 지금이나 동양에서나 서양에서나 지식인의 체제 유지나 체제 변혁에 있어 중요한 구실을 수행해 왔다. 미국의 역사가 리처드 호프스태터의 지적처럼, "지식인은 참여적이다. 그는 맹세하고, 몰입하고, 동원된다." 옛날로 거슬러 올라갈수록 지식인은 권력의 시녀로서 체제의 유지와 합리화의 구실을 해왔고, 현대에 이를수록 체제변혁적인 성향을 보인다. 그렇다고 옛날 지식인이 모두 체제유지적이었고, 현대의 지식인이 모두 체제변혁적이라는 얘기는 아니다. 시공을 초월해서 지식인의 대부분은 권력의 시녀노릇을 해왔고, 하고 있다.
중국과 한국에서는 일찍부터 과거 제도를 도입함으로써 지식인에 대한 문민 통치를 확립했다. 말하자면 지식인의 체제유지적인 전통이 일찍부터 수립된 셈이다. 근세로 접어들어 서양의 문물을 받아들이면서, 한국의 갑오경장이나 독립협회운동 그리고 중국의 5.4운동에서 보듯이, 지식인들이 봉건적인 사회제도의 타파를 포함하여 기존 질서의 개혁을 주창하는 등 체제변혁적인 측면을 보이기 시작했지만, 그러나 아직도 지식인의 체제유지적인 전통은 강하게 남아 있다.
유럽에서는 중세가 끝나고 근대로 들어서면서부터 지식인들이 체제 개혁을 주도해왔다. 그때까지 권력을 독점해 오던 군주, 귀족, 사제의 권력 경쟁에 부르주아라는 제4계급이 뛰어들었다. 이들은 상업과 공업에 의해 부를 획득하고 그 부를 바탕으로 왕권이나 교권과 같은 전통적인 권위에 도전을 한 것이다. 그 도전의 첨병 구실을 한 것이 필로소프(philosophe)라는 계몽주의 지식인들이었다. 그들은 불란서 혁명을 주도하고 성공시킴으로써 그들의 위력을 과시하였다. 그 이후로 유럽의 중요한 사회 변혁은 거의 모두 지식인들에 의해 주도되었다. 그래서 역설적이게도 반지식인적인 공산주의 운동조차도 지식인에 의해 주도되었고 최초의 공산 혁명인 러시아 혁명도 당시 러시아 최고의 지식인들에 의해 주도되었다. 유럽에서는 일찍부터 지식인들이 체제 변혁에 앞장서는 전통을 수립한 것이다.
미국의 경우는 독립 운동이 계몽주의 사상에 영향을 받은 부르주아 지식인들에 의해 주도되었으므로 그 출발은 체제변혁적인 태도였다. 그러나 일단 독립 운동이 성공하고 삼권 분립에 의한 안정적인 정치 체제가 확립된 후로 미국의 지식인들은 악명이 높은 정도로 체제순응적인 태도를 취해 왔다. 특히 실용주의 사상, 가치 중립을 내세우는 실증주의적 연구태도, 그리고 자신의 정부는 도덕적이라는 믿음으로 미국의 지식인들은 체제유지적인 기능을 수행해 온 것이다. 이런 경향은 1960년대의 월남전 개입 반대 데모 때부터 서서히 바뀌고 있지만 아직도 미국의 지식인들은 체제유지적인 성향이 농후하다. 지식인의 이런 미국적 분위기는 권위와 전통을 강조하는 이른바 신보수주의 지식인들의 태도에서 잘 나타나고 있다.
어떤 사람은 체제에 비판적이고 체제변혁적인 지식인을 지성인으로 따로 구별하여 높이 사지만 지식인이 꼭 체제에 비판적이거나 도전적일 필요는 없다. 중요한 것은 태도가 아니라 태도가 근거한 양식과 가치관이기 때문이다. 건전한 양식과 가치관이 아니라 사리사욕이나 출세욕과 같은 불건전한 양식과 가치관에 근거한 태도는 체제옹호적이든 체제비판적이든 모두 바람직하지 못하다. 물론 체제옹호적인 사람들 중에 양식이 의심스러운 사람이 많다는 사실은 불행한 일이다.
또 어떤 사람은 지식인이 대체로 현실에 불만이 많고 체제에 비판적이라고 못마땅해 하지만 그러나 실제로 대부분의 지식인들은 체제의 수혜자들로서 체제 변혁으로 이득을 볼 수 있는 사람들이 아니다. 또 지식인들은 대체로 개인주의적이고 현실 문제에 적극적으로 나서는 사람들도 아니다. 그리고 체제에 비판적인 지식인보다는 권력의 시녀역을 스스로 맡고 나서는 기회주의적이고 출세주의적인 지식인이 더 많은 것이 동서고금을 통해 하나같은 사실이다.
또 어떤 사람은 지식인은 이기주의적이고 도덕적으로 문제가 많지만 그래도 역사가 가질 수 있는 가장 바람직한 지배 계급으로 보기도 한다. 그래서 현대와 같이 고등 교육을 받은 사람의 수가 많고 또 전문 지식을 요구하는 사회 현상을 낙관적으로 본다. 그러나 프랑스 혁명과 러시아 혁명을 성공시킨 지식인들이 혁명 후에 행한 공포 정치는 차치하고라도 현재 미국의 정책, 특히 외교 정책에 막강한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는 지식인들의 메테르니히적 작태는 어떻게 설명할 것인가?
또 어떤 사람은 지식인을 권력의 시녀로서 체제를 옹호하고 합리화하는 사악한 족속들로 간주하기도 한다. 지식인은 부정한 권력에 빌붙거나 아니면 양식에서 우러난 반대가 아니라 출세를 위한 반대를 함으로써 체제의 정당성을 합리화시켜 준다는 것이다. 물론 권력자들에게 아첨하고 권력자의 눈에 띄기 위해 양식의 문제로써가 아니라 방법론상의 문제로써 반대를 하는 지식인이 많은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한편 세계의 역사에는 양식 때문에 박해를 무릅쓰고 권력과 체제에 비판적이고 현실 변혁을 주장한 지식인들이 끊임없이 있어온 것도 사실이다.
박해를 무릅쓰고 양식을 지킨 이들에 의해 사회의 전반적인 의식이 발달되어 왔다. 오늘날 우리의 의식 수준은 박해를 무릅쓴 이들의 양식에 힘입고 있다. 이들은 또한 우리의 양식을 일깨우고 그것을 지킬 용기를 불어넣어 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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