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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르쿠제의 『일차원적 인간』

by 처사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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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르쿠제의 『일차원적 인간』

 

 

 

 

현대는 인간이 기계를 활용하는 것이 아니라 기계가 인간을 부리는 문명을 낳고 말았다. 공장에서는 기계를 멈추지 않게 하기 위하여 사람들이 3교대로 24시간 동안 작업을 한다. 빌딩의 출입문은 딱딱한 기계음으로 '어서 오세요'라는 인사말을 차갑게 건네며 자동으로 열리고 닫힌다. 단 한번도 얼굴을 맞대면해 본 적이 없는 사람들이 PC통신이나 인터넷으로 업무를 처리하거나 상거래를 한다. 그 와중에서 사람들은 하루가 다르게 변하는 기술을 습득하기에도 정신을 못 차릴 만큼 바쁘다. 그 기술에 내포되어 있는 반인간적 매커니즘을 꿰뚫어 볼 시간도 마음의 여유도 갖고 있지 못하다. 그 결과 사람들의 사고 방식도 기계처럼 단편화하고 점차 비판능력을 상실해가고 있다.

 

일차원적 인간은 이처럼 기술만능의 시대와 '기술 합리성'이 만능이라는 사유 방식에 대한 비판적 성찰을 담고 있다. 기술 합리성에 의해 전면적으로 관리되는 사회에 대한 마르쿠제의 비판은 사람들이 점차 따뜻한 인간성을 잃어가고 있는 이 순간에, 그리고 과학과 기술이 계속해서 발달하는 한, 여러 번 곱씹어야 할 인간성 회복을 위한 외침이다.

 

마르쿠제

 

마르쿠제는 18987월 베를린에서 유태계 양친 아래 태어났다. 29세때인 1927년에 독일 프라이부르크 대학에서 철학박사 학위를 받았다. 1932<프랑크푸르트 사회조사연구소>에 참가하였으며 그후 이 연구소가 나치의 박해를 피해 미국으로 이전하자 함께 미국으로 망명했다. 그는 헤겔 철학의 이성적 특징을 밝혀 헤겔에 대한 부정적 인식을 해소해준 이성과 혁명, 프로이트의 이론을 현대 산업사회에서 재구성한 에로스와 문명, 마르크스주의를 왜곡하고 기계에 의해 인간이 지배되던 소련 체제를 비판한 소비예트 마르크스주의등 탁월한 저작을 남겼다. 하지만 자신의 스승이었던 하이데거와 <프랑크푸르트 사회조사연구소>의 지도자 호르크하이머, 동료 아도르노와 에리히 프롬의 그늘에 가려 있었다. 일차원적 인간은 그로 하여금 동료들의 그들에서 벗어나 현대의 철학자이며 사회 비판가로서 입지를 굳히게 해준 저서이다.

 

 

저술의 시대적 배경

 

2차대전이 종결된 이후 서구는 경제적으로 황금기를 맞았다. 대량 생산과 대량 소비가 실현되었으며 사람들은 풍요 속에서 안주하였다. 이 시대 사람들의 사고 속에는 기업관료적 권력과 '합리성'에 대한 은밀한 예찬이 자리잡고 있었다. 기업, 국가 등 제도화한 권력 기구들이 만들어 놓은 기술적, 관료적 합리성이 '과학적'이라는 구호 아래 서슴없이 사람들을 통제하고 있었다. 이에 대항하여 인간의 자율성을 회복하려는 움직임이 대학이나 예술연구소를 근거지로 삼아 태동하기 시작했다. 마침내 1968년에 시카고, 파리, 프라하, 멕시코시티, 마드리드, 도쿄, 베를린 등 세계 곳곳에서 그 반항적 움직임이 절정에 달하였다. 흔히 '68년 혁명'이라고 부르는 거대한 문명 비판의 흐름이었다. 이 세계적 격동은 자유주의적 자본주의에 대한 저항이었으며 동시에 사회주의적 압제에 대한 저항이었다. 따라서 그것은 현대 문명 전반에 대한 저항이었다. 이 책은 그 풍요와 저항이 고조되던 1964년에 출간되어, 그 저항 운동의 선두에 섰던 학생들에게 '성전'처럼 읽히고 행동의 방향을 제시해 주었던 현대의 고전이다.

 

 

 

『일차원적 인간』의 주요 내용

 

마르쿠제는 현대 사회 특히 미국이나 소련과 같은 산업 사회를 일차원적 사회로 파악한다. 그가 말하는 일차원성이란, 그 사회의 구성원들이 사회와 인간에 대하여 내면적 모순을 느끼지 못하고 현존 상태를 비판 없이 수용하는 긍정적 태도에 의해 특징지워진다. 그러한 사회에서는 의식, 예술, 언어 등이 모두 일차원성에 매몰되어 있다. 때문에 기계 문명이 인간을 복종시키는 비합리적 사회 제도를 오히려 '합리적'이라고 판단하게 된다.

 

이러한 사회에서는 아무리 민주주의적인 절차에 의해 정당성을 부여받은 권력이라 할지라도 그 지배 권력은 "풍요와 자유를 가장하여 사적 및 공적 생활의 모든 영역에서 모든 진지한 반대를 통합하고 모든 선택가능성을 흡수한다" 지배 권력은 과거처럼 폭력을 동원하는 것이 아니라(물론 동구공산권에서는 폭력이 공공연하게 사용되었지만) 표면적으로 온건한 '관리'의 형식을 도입한다(우리 나라에서 추진되던 전자주민증제도를 상기해 볼 것). 그 속에서 사람들이 스스로는 자유와 안락을 누리고 있다고 생각할지라도 그들은 사실상 "고상해진 노예들"에 불과하다.

 

일차원성을 극복할 수 있는 힘이 예술에 담겨 있다. 예술은 부정의 합리성을 갖고 있는'위대한 거부'로써 현존하는 것에 대한 항의를 내포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현대의 예술은 그러한 힘을 잃어버리고 있다. "거의 모든 사람이 이제는 손잡이만 틀면, 또는 잡화점으로 발만 들여놓으면 손끝에 순수 예술을 가질 수 있게 된 것은 좋다. 그러나 이런 보급을 통해 그들은 그 내용을 재생하는 문화 기계의 톱니가 되는 것이다. [] 예술적 소외는 다른 부정의 양식과 함께 기술적 합리성의 과정에 굴복한다."

 

마르쿠제는 언어에서조차도 일차원적 사유의 전달 기능만이 과도하게 발달했다고 판단한다. 일차원적 언어는 사실이나 진리를 증명하고 설명하는 것이 아니라 결정, 단정, 명령을 전달할 뿐이다. 그것은 현존하는 질서의 정당성을 의심하는 언어를 배제한다. 사람들은 스스로 자신의 언어로 말을 하지만, 동시에 그들은 자신들이 선출한 정치가와 보호자와 광고주의 언어로 말을 하게 된다.

 

사회의 일차원성은 일차원적 사유에 의해 뒷받침된다. 사유의 일차원성이 보편화된 이유는 사회가 기술화, 관료화, 안정화됨에 따라 이성의 비판적 사유력이 약화되었기 때문이다. 비판이 약화된 사유는 오직 '효율성'만을 최고의 가치로 삼는다. 정치 영역과 경제 영역에서의 효율성은 그보다 앞서서 추구되어야 하는 '정당성'을 중요한 가치로 상정하지 않는다. 따라서 정치에서는 권력의 획득과 유지만이, 경제 영역에서는 최대한의 이윤 획득만이 최고의 가치가 된다. 그 결과 인간은 권력과 이윤을 획득하기 위한 수단으로 전락하게 된다. 마르쿠제는 여기에서 효율성을 원동력인 기술에 주목한다. 그에 의하면 기술이 물질 생산의 보편적 형식으로 되자, 즉 기술적 합리성에 의해 인간이 한낱 도구로 취급되자, 문화 전체가 그 기술에 의하여 제약받게 되었기 때문이다. 과거의 억압은 눈에 드러나는 폭력을 사용하였지만 현대의 억압은 오히려 생활의 안락을 향상시키고 노동 생산력을 증가시키는 기술 장치에의 복종으로 유도한다. 이제 세계는 관료와 기업가와 기술자에 의해 전면적으로 '관리'된다.

 

이처럼 전면적으로 관리되는 사회에서 해방되기 위해서는 인간을 위한 진리를 확립하는'이론적, 실천적 이성'으로서의 부정의 힘이 필요하다. 부정적 힘으로서의 실천 이성은 윤리학, 정치학, 경제학을 분리하지 않는다.

 

즉 인간의 삶에서 분리될 수 없는 요소들을 자의적으로 분리하여 각각의 효율성만을 추구하는 것이 아니라, 인간 삶의 전분야에 걸쳐 참다운 삶의 조건을 꼼꼼히 따져보는 것이다. 따라서 '경제는 경제 논리에 맡겨라'는 식의 지극히 일차원적인 사유와 학문을 배제한다. 그러한 지식은 사회를 일차원적으로 만드는 노예의 지식이기 때문이다.

 

마르쿠제에 의하면 현존하는 사회 질서로부터 자유롭게 창조하는 예술적 상상력이 사람들에게 비판 의식을 갖게 하는 부정적 이성을 회복시킬 수 있다. 그는 비록 현대에 와서 예술의 비판 능력이 감소되기는 하였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술은 부정의 합리성을 갖는다고 주장한다. 예술은 사회 구성원들에게 자각능력을 일깨워준다. 그리고 역설적으로 보일 수 있지만, 사회 구조 차원에서는 기술적 합리성이 더한층 완성되어야 한다. 기술 합리성이 완성되면 인간에게 욕구충족과 고통의 감소를 가져다 줄 것이며 그러한 조건은 인간적 자유의 토대가 될 것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부정적 이성은 기술의 토대에서 상상력의 인도를 받아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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