풍수지리의 허와 실
by 처사21풍수지리의 허와 실
대원군은 한양의 궁궐이 예부터 자주 화재를 당한 까닭에 경복궁과 마주하고 있는 관악의 산세가 본래 불의 형체로 되어 있는 데 연유한다고 믿고, 경복궁을 지을 때 이 관악의 화기(火氣)를 제압할 요량으로 흰 돌로써 수성(水性)이 강한 해태상을 만들어 궁문 앞 양쪽에 두었다 한다. 또한 이것으로도 부족하다고 생각했음인지 관악산 꼭대기에 우물을 판 다음 구리로 만든 용을 우물에 넣어 화기를 진압케 했다는 것이다.
그 뒤에도 대원군은 풍수 지리설의 열렬한 신봉자임을 다시 보여 주었다. 그는 고종이 친정(親政)하면서 은퇴 생활로 들어갔다가 1882년과 1884년 두 차례 재기했는데, 1894년 청․일 전쟁이 한국에서 일어난 직후 일본의 특파 대사가 한국에 와서 왕실을 회유한 일이 있다. 이 때 특파 대사는 대원군을 회견한 자리에서 장차 한국에 철도를 부설할 필요성을 역설했다고 한다. 이에 대해 대원군은 안색을 변하여 말하기를 "철도를 놓으려면 반드시 산을 뚫고 계곡을 메워야 하는데, 그렇게 되면 암석을 깨뜨리게 될 터이다. 암석은 국가의 척수인즉 이를 깨뜨리고도 어찌 오래갈 수 있겠는가!'고 반대했다는 것이다.
- 윤흥기 '풍수 지리설의 본질과 기원 및 그 자연관 -
현재 한국의 풍수 지리설은 인간과 자연의 바람직한 관계를 살펴보는 방법으로서 그 중요성이 인식되는 경향이 있다. 사실 오늘날 풍수 지리설이 크게 대두하게 된 것은 자연 환경에 대한 관심의 고조 때문인 것으로 보인다. 대규모의 토지 개발과 공업화가 급속도로 진행된 결과 자연 환경이 크게 훼손되고, 이에 따라 생활 환경에 있어서까지 오염 문제가 심각한 사회 문제로 대두하게 되었는데 풍수 지리설이 이 문제를 해결하는 데 도움을 줄 수 있지 않을까 하고 기대하게 된 것이다.
그러나 이는 풍수 지리설의 정체를 바로 파악하지 못한 데서 나온 입장으로 보인다. 풍수 지리설은 땅의 신비와 그것이 인간의 운명에 미치는 영향을 설명하고 있을 뿐이며, 그 자체가 인간의 자연 환경에 대한 인식이나 작용을 논한 것은 아니다. 게다가 풍수 지리설은 그 각각 미신적인 요소가 너무 강한 면이 있다. 풍수 지리설의 경우 역학(易學)이란 명칭 아래 과학화를 지향하고 있으나 그것이 학문일 수 없는 것은 자명한 일이다. 풍수 사상은 토지 문제와 밀접한 관련을 맺고 있는데 그 중 대표적인 것이 묘자리 선정이다. 현재 한국인은 성묘철이 돌아올 때마다 묘지가 만원이라는 사실을 실감하고 있다. 이러다가 온 국토가 명당 찾기에 혈안이 되어 묘자리로만 뒤덮일 지경이다. 묘지의 길흉이 자손의 화복을 좌우한다는 관념은 당연히 아무런 근거가 없는 것이다. 풍수 사상에 입각한 명당 자리 찾기의 폐해는 온 국토를 묘지로 가득 차게 할 정도가 되었다.
혹자는 국도(國都)를 정할 때 이 풍수 사상이 매우 유용하다는 말을 한다. 6백 년 전 개성으로부터 한양으로의 천도(遷都)와 그 도시 설계에 풍수 사상이 절대적인 영향을 끼쳤다는 사실을 지적하기도 한다. 그러나 비록 서울의 입지가 매우 잘 된 것이라고 하더라도 그것이 풍수 지리 사상의 정당성을 뒷받침한다는 것은 우스운 일이다. 국가의 대사인 수도(首都) 선정 문제를 오로지 풍수학의 형국론에 따라 판단하고 결정한다는 발상 자체가 어처구니없는 일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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