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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음악미의 재발견

by 처사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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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음악미의 재발견

최종민 ( 한국정신문화원 )

 

 

치욕적인 일제강점기의 문화말살정책으로 전통문화의 맥을 끊기운 우리들은 문화라면 으례 남의 나라 것이나 생각하고 우리가 많은 문화유산을 물려받은 상속자라는 인식조차 제대로 못하고 지내온 터였다. 그래서 음악이라면 으례 서양의 고전음악이나 떠올리는 것이 고작이었고 국악에 대해서는 무식한 것이 보통이었는데 근래에 여러 방면에서 반성과 자각의 움직임이 있는 것은 반가운 일이다. 그러나 아직도 우리의 문화전통은 주체성을 회복하지 못하고 서구문화의 종속상태에 있는 것이 사실이기 때문에 이러한 모임의 성과가 우리의 문화전통을 회복하고 특징있는 한국음악문화를 창조하는데 기여할 수 있으면 하는 소망이 간절하다.

 

음악에서 한국미를 발견한다는 것은 곧 한국음악(전통음악)에서 아름다움을 발견하는 것으로 해석할 수 있겠다. 한국음악미란 그것이 중국음악미나 서양음악미와는 다른 한국적인 특징이 있어야 하겠다. 왜냐하면 그것은 중국음악이나 서양음악에서 찾을 수는 없기 때문이다. 또 아름다움의 발견이란 어디에서 물건을 찾아내듯이 그렇게 쉬운 일이 아니다. 구체성을 띠기도 어렵고 객관적이기도 어렵다. 지식이나 기술만 가지고 하는 것이 아니라 심미안(審美眼)을 가지고 하는 것이다. 심미안이라는 것이 천차만별이어서 어느 사람이 한국음악의 미를 얼마나 찾았다고 하여 그것이 곧 다 찾은 것은 아니다. 더구나 음악이라는 실제는 온전한 상태로 늘 있어온 것이고 그것에서 아름다움을 느끼는 깨달음의 정도는 언제나 한계가 있게 마련이기 때문이다. 동양식으로 말하면 진리가 없어서 내 진리를 모르는 것이 아니라 진리는 얼마든지 있지만 내가 부족해서 그것을 모르는 것으로 되어있기 때문에 우리음악의 아름다움과 우리와의 관계도 그런 식으로 설명할 수 있다. 즉 내가 깨달은 만큼의 한국미를 우리음악에서 발견해 낼 수 있을 것이라는 점이다. 그런데 이러한 작업은 측량할 길 없는 그 느낌이나 깨달음의 내용을 구체적인 언어로 표현하여 개념화하는 작업까지 해야 논의의 대상이 되는 것이다. 그러니까 한국음악이 가지고 있는 아름다움은 일단언어로 표현되어야 하고 그 표현은 각 사람마다 상당한 차이가 있을 것이기 때문에 그러한 결과들이 많이 축적되어야 우리음악의 음악미에 대한 논의가 구체화되고 객관화 되리라고 본다.

 

그런 점에서 보면 지금까지 이 방면에 대한 연구결과를 검토하는 것이 순서이겠는데 중요한 것만 몇 편 선별해서 살펴보기로 하겠다.

 

이혜구는 일찍이 시조의 아름다움을 다이나믹스에 있다고 한 바 있다. 화성도 없고 멜러디도 복잡하지 않고 빠르기는 메트로늄으로 잴 수 없을 정도로 느린 시조가 그 음악성이나 표현력을 갖는 것은 솔숲에 바람이 지나갈 때 느낄 수 있는 그런 다이나믹스가 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이 견해는 나중에 한국음악의 특성에서도 다시 피력된다. 즉 느린 한국음악의 가장 두드러진 특색은 강유(다이나믹스)라고 하면서 빠른음악에서는 리듬의 변화가 생명인 것처럼 리듬이 별로 감지되지 않는 느린 음악에서는 음의 강유가 그 생명이라고 하였다. 그래서 한국음악의 특성은 󰡔낙이부류애이불비(樂而不流哀而不悲)󰡕라는 우륵의 표현과 같은 음악관에 입각하여 정악은 강유와 농담을 생명으로 삼는 음악으로 발달하였고 속악은 자유분방한 리듬을 가지고 󰡔장단고저 변화무궁 이리 농락 저리 농락󰡕하는 식으로 감정 표현을 자유자재로 하는 음악으로 발달하였다고 하였다. 그러나 정악과 속악의 외면적 특성 밑에 흐르는 공통 정신은 기존의 틀에 구애됨이 없이 변통성있게 자기의 개성을 표현하는데 있고 그러한 창작정신은 음악가의 생명력을 존중하는 생각에 바탕을 두고 있다고 하였다. 1980년에 발표한 한국음악에 있어서의 전통적 미의식에서는 정악이거나 속악이거나 모두 첫째로 반복 또는 모방의 음악은 사진소리 또는 괴뢰와 같은 죽은 음악이고, 그와 반대로 변화있고 개성적인 음악이 산음악이라 하듯, 변화성 다양성을 미의 속성으로 인식한 것이고, 둘째로 미보다는 힘을 택하고 더 나가서는 소음일지라도 힘의 효과를 위하여서 그것을 수용할 정도로 힘 또는 생명력을 미적쾌감의 근원으로 인식한 것입니다라고 하여 개성과 힘 또는 생명력이 미적가치로 중시되었다고 하였다.

 

 

황병기는 판소리와 산조에 나타난 한국인의 미의식이라는 글에서 판소리와 산조의 아름다움이, 1.선의 미, 2.역동의 미, 3.무한연속의 미, 4.멋의 미에 있다고 하였다. 하긴 판소리나 산조는 입체로 이루어진 것이 아니고 선으로 이루어져 있다. 그러므로 표현양식 자체가 선이므로 선의 미를 지적한 것은 당연하다. 그런데 그 선이 아름답게 되는 요건 중에는 선을 이루는 각음의 생명력이라든지 시김새, 공력 등이 중요한 것이고 선율의 흐름이 조이고 풀면서 힘찬 느낌을 주도록 하는 역동의 미도 결국 선의 미에 포함될 수 있는 것이다. 세번째로 지적되는 무한연속의 미조차도 판소리나 산조의 선율이 동기발전식이 아니고 무한연속 가능의 구조를 가지고 있기 때문에 그것 역시 선의 미 안에 포함될 수 있는 하나의 요소이다. 네번째의 이라는 것도 우리 예술이 어느 것이나 다 멋을 창조하고 멋을 풍기는 것을 본령으로 삼고 있기 때문에 당연한 지적이라고 본다.

 

이보형도 판소리와 산조에 나타난 미의식에 대하여 발표한 적이 있는데 민속악은 감정을 잘 표현해야 하고 한()을 그려야 한다. 또한 사설과 음악이 잘 맞아야 하며 이면에 맞는 소리를, 긴장과 이완(맺고 풀음)이 잘 되어서 극적표현을 효과적으로 할 수 있어야 한다고 하였다. 황병기가 음악현상 자체에 대한 아름다움을 지적하고 있다면 이보형은 그러한 아름다움이 만들어질 수 있는 조건들을 지적하고 있는 셈이다.

 

한명희는 우리네의 정악에는 장려미정관미유장미노련미순응미 등이 있다고 발표한 바 있다. 이러한 지적들은 음악현상 자체를 다룬 것이 아니고 필자의 느낌을 정리한 것으로 보인다. 그래서 다분히 감상자의 입장에서 파악한 정악의 아름다움이라고 할 수 있다.

 

아무튼 한국음악의 아름다움에 대한 표현들은 다양하기 그지 없고 피차의 시각에도 상당한 차이가 있다.

이혜구, 황병기 두 사람은 주로 우리 음악현상을 선이라는 것으로 파악하고 그것의 특징있는 흐름을 보이는 대로 다이나믹스라든지 힘있음이라든지 시김새라든지 긴장과 이완같은 용어로 표현하고 있다. 또 개성을 중시하는 변통성과 멋의 미도 지적하고 형식상으로는 무한연속의 형식미라고 지적하고 있다. 거기에 비해서 이보형은 한(감정)을 잘 그려야 하고 이면에 맞게 곡을 짜야 하며 극적 표출력이 있어야 한다고 하여 조금은 미의식에 가까운 좋은 음악의 기준을 지적하고 있다. 한명희 역시 주로 정악의 인상이랄까 느낌을 정관미니 노련미같은 용어로 표현하고 있다.

 

지금까지 우리 음악의 아름다움에 대한 연구업적을 개관해 보았다. 모두들 다 맞는 지적들을 해 준 것 같은데도 그것들만 가지고 우리음악의 아름다움이 다 설명될 수는 없다고 본다. 그래서 지금까지의 연구업적을 배경으로 하여에 깔고 새로운 설명을 시도해 보고자 한다.

 

누구나 수제천과 베토벤의 교향곡을 들으면 서로 다른 음악이라는 것은 안다. 그러나 그것들이 어떻게 다르며 각각의 특징적인 아름다움은 어떻게 형성되는가 하는 것을 알게 하려면 많은 설명이 필요하다. 하긴 수제천은 조금도 아름답지 않다. 그런것도 음악이라 하느냐라고 한다면 문제는 달라진다. 하지만 수제천도 어느 음악 못지 않은 명곡이다. 수제천은 베토벤 교향곡과는 다른 음악이면서 대단히 아름답다라고 한다면 수제천은 특징있는 아름다움의 조건들을 가지고 있다고 할 수 있다. 그 수제천의 미적 특징을 찾아내는 것, 그것이 일차적으로 해야 할 일이라고 생각한다. 만약 그 특징을 완벽하게 찾아낼 수 있고 또 그것을 자유자재로 재현할 수 있다면 우리는 수제천과 같은 한국미를 가진 새 음악을 얼마든지 만들 수도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필자는 그러한 한국음악의 특징을 찾기 위해서 다음과 같은 방법을 썼다. 즉 먼저 음악을 이루고 있는 기본재료인 의 문제로부터 시작하여 +의 문제, ‘선율’, ‘장단’, ‘얼개’, ‘형식등의 문제에 이르기까지 요소별로 분석하여 그것들의 특징있는 아름다움이 무엇이며, 그것이 어떤 근거(미의식)에서 한국음악의 아름다움이 될 수 있는가하는 식으로 설명하고자 한다. 내가 이런 요소별 특징을 다루고자 하는 이유는 그동안 그러한 연구가 없었다는 것도 하나의 이유이지만 창작하는 분들에게 한국미를 갖춘 작품을 쓰는데 어떤 도움이 되었으면 하는 욕심이 있기 때문이다.

 

1. ‘에 대하여

 

음악을 이루는 가장 작은 단위는 음인데 한국음악에서 사용하는 음은 서양 고전음악에서 사용하는 음과 다르다고 본다.

성악과 기악으로 나누어서 발성의 문제와 악기의 문제를 통하여 살펴보면 우선 한국노래의 발성에는 서양발성과 다른 특징이 있다. 소리를 띄우거나 공명에 신경을 쓰기보다는 근본소리 자체를 단련시킨다. 고운 소리보다는 힘있고 극적인 소리를 중히 여기고 호흡은 단전호흡을 주장한다. 그렇게 해야 우리말의 가사도 잘 발음할 수 있고 또 우리의 발성기관을 말할 때처럼 편안하게 상용할 수 있다. 우리의 발성기관 자체의 구조나 우리의 언어습관과도 관계된다고 본다. 그래서 서양발성 연습이 공명훈련에 치중한다고 한다면 한국발성은 목청훈련과 목구멍 훈렴에 치중한다고 할 수 있다. 우리네 판소리 명창들은 목청자체가 한번 일그러졌다가 소리하기 좋게 재구성되어 있다고 한다. 그만큼 본질의 소리로 아름다운 소리를 생각하는 것인데 그것은 자연히 작위적이고 가공된 소리를 좋지 않은 소리로 취급하게 된다.

 

음에 대한 이해도 동서양이 다른 것 같다. 서양에서는 음을 물체의 떨림에 의하여 생기는 것으로 보는데 동양에서는 범음지기 유인심생야라 하여 음이 사람의 마음으로부터 나오는 것으로 되어있다. 또 음악은 인간의 성정으로부터 나온다고 보아서 음악교육의 목표가 좋은 음악을 통하여 인간의 성정을 도야하는 것으로 되어 있다. 그런데 그 성정의 도야라는 것이 본래 성이 타고난 인지의 덕성을 실제 행위에서 회복하는 것이고 그것이 주자가 말하는 이복기초(以福其初)에 해당하는 것이기 때문에 말보다는 근본을 중시하는 본질 존중의 사상이라고 할 수 있다. 사람의 소리에서 본질의 소리는 곧 생명체의 소리이고 그 생명체는 고정되어 있는 것이 아니라 생명이 운동을 하는 법이니까 우리네의 소리는 생명력이 분출하는 대로 강유도 있고 밀고 당기는 것도 있고 음향도 있고 힘도 있는 것이다.

 

이러한 아름다움은 젓대나 거문고 같은 악기에 있어서도 마찬가지로 적용된다. 적용된다기보다 마찬가지 내용이 발견된다. 우리네 악기의 분류는 그 악기를 만든 재료에 의하여 분류하는 방법을 쓰고 있다. 그것은 소리의 본질음을 중시하기 때문에 재료를 중시한 것이고 또 그 본질음의 색깔이 존속되는 정도의 공명만 사용한다. 말하자면 공명을 극대화하여 크고 멀리가는 소리를 만든다든지 각 악기의 음이 거의 같은 성질의 음이 되도록 발달시킨 서양악기들과는 달리 공명을 최소한으로 하고 오히려 악기를 만든 재료의 소리가 분명히 울리도록 발달했다는 것이다. 또 악기를 만든 재료는 여덟가지로 금죽인데 이것은 아마 자연을 대표하는 여덟가지 재료인 것 같다. 왜냐하면 악야자 천지지 화야라 해서 음악이란 천지만물의 조화를 꾀하는 것이란 사상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우주의 대표적인 여덟 가지의 재료로 악기를 만들어 천지와 인정의 조화 원리를 터득하여 작곡한 음악을 연주하면 그것으로서 천인 합일이 이루어지고 합자연이 된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아무튼 우리네의 음악에 사용되는 음은 본질음을 중시하는 시조나 판소리의 소리 같은 것이고 대금이나 거문고의 소리 같은 것이다. 그런데 그런 음을 만들어 내자면 연주자가 자기의 성정에서 우러나 생명력 자체로 표출하는 것이어야 한다. 옛 사람들은 그런 소리를 얻기 위해서 무한히 공력을 쌓았고 그래서 공력있는 소리가 가장 높이 평가 받았었건만 요즘의 신작(新作)에서는 그런 음을 찾아 보기가 어렵다.

 

2. ‘+에 대하여

 

우리네의 음악에서는 음과 음이 연결될 때 피아노 소리처럼 같은 높이의 음만으로 연결되지 않는다. 어떤 음은 농현을 하기도 하고 또 어떤 음은 퇴성을 하기도 한다. 그래서 남도악에서는 떠는목 평으로 내는목 꺽는목이라는 용어도 있다. 음 자체가 생명력의 분출로 이루어지는 것이기 때문에 그것들이 연결될 때에도 역시 밀기도 하고 당기기도 하고 어떤 경우는 끌어 올리거나 끌어 내리기도 한다. 음의 흐름은 계속 변화하면서 흐르기 때문에 거기에 다이나믹스가 생길 수도 있고 농담이 생길 수도 있다. 그러니까 음과 음의 연결에 있어서는 시김새 사투리에 따라 나타나는 소리 현상이라는 것이 매우 중요하다. 때문에 악기를 전공하는 분들은 자기 악기의 독특한 시김새를 터득하는 것이 중요한 과제이고 그 시김새만 통달하면 간단한 악보를 놓고도 그 악기로 표현할 수 있는 최상의 음악을 만들 수 있는 것이다. 과거의 악사들이 그러했다. 피리악보 하나만 있으면 대금도 그 악보를 놓고 부는 것이었다. 그래서 악보에도 보면 관보 현보 정도만 있는 것이지 각 악기별 악보가 없다. 그만큼 한국음악을 하는데에 있어서는 음과 음을 연결할 때에 처리하는 시김새가 중요한 것이다.

 

그런데 근래의 작품들 중에는 그러한 악기의 특성을 적절하게 살리는 시김새를 무시한채 곡을 쓰는 경우도 많아서 굳이 저 악기를 안 써도 될것을 왜 저 악기를 썼을까? 심지어는 국악기를 안 쓰고 서양악기를 쓰는 것이 효과적일 것 같은데 왜 국악기를 썼을까 하는 의문마저 갖게 하는 작품도 있다.

 

3. ‘선율에 대하여

 

한국음악은 선율 자체가 생명이다. 선율 하나로 모든 감정을 다 표현해야 한다. 그래서 색깔도 다양해야 하고 극적 표현력도 있어야 한다. 물론 장단과 결합하여 음악을 만들어 가는 것이지만 선율자체의 인상은 가장 강렬하다고 할 수 있다.

그런데 우리음악 선율의 구절법은 서양 음악의 그것과 좀 다른 것 같다. 처음은 불쑥 질러내듯이 강하게 내고 끝은 희미하게 여민다. 이것을 이혜구처럼 가사와 결부시켜 설명하면 쉽게 이해가 간다. 즉 서양언어는 관사, 전치사 등이 중요한 의미의 명사나 동사 앞에 오기 때문에 못갖춘마디식의 박자를 갖는다는 식이다. 그러니까 약박으로 시작하고 강박으로 강하게 마치는 것이 순리적이다. 그러나 한국언어는 중요한 낱말이나 어간이 앞에 오기 때문에 서양의 언어구조와 정반대라는 것이다. 그러니 강박으로 시작하고 약박으로 마치게 된다. 실제로 한국음악은 노래를 부를 때에도 첫음을 불쑥 채치며 내듯이 하고 거문고나 가야금도 싸랭-하거나 쌀징-하면서 두 줄을 걸쳐 낸다. 관악기들도 나니레식으로 장식음을 쓰면서 강하게 낸다. 그러나 끝음은 아주 희미하게 여민다.

 

그런데 요즘의 신국악 중에는 양악식의 구절법을 쓰는 작품이 많고 특히 강박으로 몇번째 짠짜안-짠짜안-짜아아안 식으로 마치는 종지를 즐겨 쓰고 있다.

 

그 다음 우리네의 선율은 동기발전식이 아닌 무한연속가능의 선율이라고 본다. 그래서 단위도 더 크고 그 단위가 일정하지도 않다. 변통성이 많다. 그러한 특성이 있는 우리 음악의 선율인데 근래에 보면 서양식 박자에다가 동기발전식의 전개법을 써서 작곡하는 경우가 많은데 그렇게 할 경우 우리선율이 가지는 유장미나 장려미를 살리기가 어렵고 죄고 푸는 한국리듬의 흐름도 파괴되는 것 같다. 그러니까 되도록이면 장단단위로 선율을 파악하도록 하고 가사가 있을 경우는 어단성장(語短聲長)의 원리를 잘 활용했으면 한다.

 

가사가 있는 음악의 경우는 정가를 제외한 많은 성악이 가사의 문학성과 선율의 음악성이 잘 조화될 것을 요구하고 있다. 특히 판소리의 경우는 이보형이 지적한대로 이면에 맞는 소리라고 하여 가사의 극적인 내용과 음악의 극적인 표현이 조화될 것을 요구하고 있다. 그래서 그 표현은 곡조에 국한시키는 것이 아니라 창법이나 발음법까지 포함해서 따지게 되어 있고 그것이 우조길평조길계면길우주성음평조성음계면성음같은 용어로 발달되어 있다. 이러한 판소리의 성음이 절묘하게 결합하여 선율로 이루어진 듯이 보이는 판소리가 무한한 표현력을 갖게 되는 것이다. 이러한 원리를 조금이라도 참고하여 한국의 오페라를 만들어야 할 텐데.

 

4. ‘장단에 대하여

 

서양음악의 박자에 해당하는 것이 한국음악의 장단이다. 장단에는 24박짜리 느린 진양장단도 있고 20박짜리 상연산장단도 있다. 16박짜리 가곡장단이나 10박짜리 가곡장단, 12박 단위의 중모리나 중중모리 등 우리나라의 장단에는 빠르기와 리듬의 형태를 함께 나타내는 많은 종류가 있다. 이러한 장단들은 선율하고도 가사하고도 관계가 있다. 더 거창하게 말하면 우리 삶의 방식인 문화하고 관계가 있다. 그러한 우리의 장단을 배제하고 4분의 4박자나 8분의 6박자로 작곡하는 것이 못마땅하다. 특히 장단을 통하여 흐르는 생명력의 흐름은 서양의 박자에서와 다르게 흐르고 있다. 흔히 말하는 민속악 장단의 치고() 달고() 맺고() 풀고()와 관계있는 흐름이다. 우리음악은 불쑥 강박으로 시작하면서도 이내 뜸을 들이듯이 차차 긴장시켜서 4분의 3부분 쯤에 가서 하고 맺어주고 그 다음 짧게 푼다. 이러한 흐름은 매 장단마다 반복되기도 하고 또 길게 몇 장단에 걸쳐 이루어지기도 한다. 즉 치고 달고 맺고 풀고하는 이 긴장’ ‘이완의 원리는 선으로 된 한국음악의 중요한 미적 특색이고 그것은 장단의 주도에 의하여 이루어지는 것이다. 한 가지 더 지적할 사항은 장단을 치는 고수는 절대로 똑같은 장단만 반복하는 것이 아니라는 점이다. 음악의 눈을 잘 파악하여 전체가 하나의 표현단위가 되도록 도와 주기 위함이기도 하고 또 같은 것의 반복을 미적쾌감에 위배된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또 판소리 같은 극 음악에서는 극적상황에 잘 어울리게 조와 함께 장단을 배열한다는 것도 중요한 점이라 하겠다.

 

5. ‘얼개에 대하여

 

서양음악의 구성(texture)에 해당하는 우리음악의 그것은 무엇일까? 또 우리의 수제천을 들어 보면 그것은 합주(unision)도 아니고 그렇다고 화성이나 다성음악의 구조가 발견되는 것도 아니다. 그렇다면 그 악기와 악기들의 선율 상호간의 관계는 어떻게 얽어져 있을까? 그것을 알아 보고자 한다.

 

앞에서도 간혹 언급되었지만 우리 음악은 소리자체부터 성정에서 우러나오는 생명력 있는 충실한 소리로 각 악기의 시김새와 성능을 최대한으로 발휘하며 연주가가 기량껏 자기 표현을 하는 것이다. 그러한 연주내용은 독주이거나 합주이거나 마찬가지이다. 그러나 합주일 경우는 여러 악기가 서로 뼈대가 되는 기본선율은 같이하면서 자기 악기의 자기음악을 표현하는 것이어서 얼핏 보면 합주(unision)같이 들린다. 그러나 따지고 보면 합주(unision)가 아니다. 그리고 무엇보다 각자의 독주와 같은 그 음악이 합쳐져서 합주를 이루는데 합주의 묘미란 각악기 재료들의 본질적인 음들이 음악이라고 하는 개성있는 표현을 통해서 뼈대선율을 공유하면서 어울린다는 것이다. 그래서 우리네의 합주는 그 음악을 독주로 해도 독립된 음악이 되고 중주로 해도 독립된 음악이 된다. 예를 들면 노래와 기악반주를 함께 하는 가곡같은 경우는 노래와 기악반주를 함께 해도 음악이 되고 그 중에서 노래를 빼고 기악반주만 해도 음악이 된다. 또 악기 하나만 떼어내어 연주해도 독립된 음악이 된다. 이러한 얼개는 한국사회의 조화에 대한 개념이 서양사회와 다른데서 비롯된 것이라고 생각한다. 즉 우리는 개인의 완성을 통해서 전체의 완성을 꾀했던 것이고 그 완성이라는 것이 이복기초하는 인격적인 측면이었던 것인데 비하여 서양은 전체에 개인이 역할을 분담하는 식의 기능적 측면이 강조되었고 그래서 개인은 전체에 의하여 매몰 될수도 있는 그런 관념 때문인 것으로 본다.

 

그런데 요즘 작품들은 그러한 부분의 독립성을 무시한 채 서양의 호모포니나 풀리포니 비슷한 방법을 차용하는 예를 자주 볼 수 있다. 이와같은 전통적 얼개를 쓴다면 대개의 음악이 음자체의 미를 최대한으로 표출할 수 있게 좋은 음악이 되련만 그렇지 않으니까 자꾸만 무엇을 그릴려고 애를 쓴다든지 음향의 효과에만 신경을 쓰는 속을 그대로 내보이는 음악이 되고 만다.

 

6. ‘형식에 대하여

 

음악을 담는 제일 큰 그릇이 형식이다. 우리의 형식은 대개 크다. 가곡 한바탕은 10여 곡에 2 시간 정도는 불러야 하고 산조 한바탕도 40 분 이상을 걸려야 한다. 판소리는 보통 3 시간7 시간쯤 걸리고 굿판을 벌이면 하루 종일 해야 한다. 그런데 이런 형식을 자세히 들여다 보면 얼마든지 연장할 수 있는 반복형식이 묘하게 발달되어 있다. 그래서 농요(農謠) 한 꼭지만 보더라도 한 곡조를 가지고 왼 종일 부를 수도 있게 되어 있다.

 

그런데 이런 큰 형식의 전체적인 짜임새는 대개 산조나 영산회상같이 느린 장단에서부터 차츰 차츰 빠른 장단으로 진행된다. 그래서 맨 마지막은 아주 빠르게 몰아서 맺어놓고 그 다음 짧게 풀고 마친다. 이러한 흐름은 우리의 감정변화를 그대로 반영한 형식이어서 흥미롭다.

 

그런데 요즘 작품들이 이런 우리의 형식을 활용하지 않는다. 짧게 짧게 변화를 주려고 하고 대비의 효과를 노리지 전통음악처럼 거창한 형식을 배짱있게 척척 만들어 나가지 못한다.

 

필자가 지적한 이러한 요소의 아름다움들이 우리음악의 미적 특징도 되겠지만 우리음악 자체일지도 모른다. 우리는 이러한 특징들을 어떠한 형태로든지 계승 발전시킬 때 한국미를 가진 새 음악을 창조할 수 있게 될 것이고 그러한 작업이 이루어져야 일제시대에 끊어졌던 음악 문화의 맥이 다시 이어지게 될 것이다.

 

그렇다고 하여 옛날식 음악을 답습하자는 것이 아니다. 어차피 우리는 오늘이라는 시대에 살고 있다. 그러나 우리가 서양음악의 종족에서 벗어나 우리 전통음악의 미적특색을 계승발전시킨, 참다운 우리의 현대음악을 창조하는 날 우리는 우리음악을 서양쪽으로 역류시킬 수 있는 문화 수출국이 될 것이다. < 예술문화 제21986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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