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어독서창고

열린 도덕과 개방 사회의 이념

by 처사21
728x90
반응형

열린 도덕과 개방 사회의 이념

 

황 경 식 (서울대, 철학)

 

 

열린 도덕과 개방된 사회

 

프랑스 철학자 베르그송(H.Bergson)도덕과 종교의 두 원천에서 도덕, 종교, 사회를 두 가지로 나누고 하나를 개방적인 것으로 다른 하나는 폐쇄적인 것으로 이름했다. 그는 도덕적 의무의 기원에 대해 가상적인 설명으로부터 시작하고 있다. 원시사회와 어린이의 행동에 대한 연구로부터 나온 사례들을 이용해서 그는 두 가지 도덕을 구분하고 있다. 첫번째로 닫힌 도덕 혹은 정태적인 도덕은 조화롭고 통일적인 하나의 집단을 만들기 위해 사회의 성원들을 교화하는 기능을 갖는다. 정태적인 도덕은 인간의 의지에 구속력을 갖는 서로 다른 모든 특수한 임무들을 결합하여 전체적인 의무의 체계를 구성해 낸다. 엄밀히 말하면 도덕발전의 이러한 단계에 있어서 인간은 자아라는 것을 갖지 못하며 인간의 의식은 철저하게 사회화된다. 그야말로 베르그송의 정태적 도덕은 온전한 순응주의의 일종으로서 그것은 교도와 훈련만을 요구하며 불변적인 것으로 간주되는 신조들에 대한 자동적인 복종만을 요구한다. 이런 상태에 있어서 인간의 복종은 개미굴 속의 개미들의 복종과 다를 바 없으며 유기체의 일부인 세포들이 유기체에 대해 맺는 관계와 같이 무의식적인 삶에 비교될 수가 있다.

 

폐쇄적정태적 도덕은 그것이 내리는 명령에 대해 이유를 제시하지 않고서 기계적인 순응만을 요구할 뿐이며 단지 의무이기 때문에 따라야만 하는 것이다. 닫힌 도덕에 있어서 인간들은 플라톤의 비유에 나온 바와 같이 어두운 동굴 속에 묶여 있는 수인과 같은 것이다. 그러나 이들 수인 중에 어느 하나가 자신의 사슬을 끊고 동굴을 탈출하게 된다. 인간의 도덕적 삶에 있어서 이렇게 출현한 영웅적 존재는 고정된 규범과 규칙의 굴레에서 해방되어 운동, 변화, 생명에로 열려 있는 새로운 도덕을 창출한다. 사랑으로 가득 찬 영혼의 소유자인 이러한 존재의 도덕은 억압의 도덕이 아니라 열망과 동경의 도덕인 것이다. 산상수훈에서 나타난 바와 같은 이러한 개방적이고 역동적인 새로운 도덕은 고정된 형식이나 독단적인 교조적 틀에 담겨질 수가 없다. 그것이 겨냥하는 목표는 신적인 사랑이 충만한 영혼의 상태를 도입하는 것이다. 정확하게 공식화되고 인간을 사회에 밀착시키기 위한 책무 및 의무들로 인간을 구속하는 대신 열린 도덕은 서로 사랑하는 가운데 우리가 하고자 하는 대로 행하라는 가르침을 따른다.

 

열린 도덕은 철인이나 예언자 혹은 성자들과 같이 인류의 진정한 도덕적 영웅들의 영혼 속에 기원을 갖는다. 그러한 훌륭한 인격들은 우리가 본받아야 할 모범으로서 존재하지 우리를 구속하는 규칙을 부과하지 않는다. 그들은 그들 자신의 솔선수범을 통해서 우리들을 그들에로 이끌어 간다. 그들은 명령하지 않으며 그들이 단지 존재하기만 하는 것으로 족한 것이다. 개방적 도덕의 특성은 그것이 특정 사회의 한계를 넘어서서 모든 인류를 포용하는 데 있다. 그것은 단지 사회적인 것이 아니라 그야말로 인간적인 것이다. 열린 영혼의 사랑은 심지어 동물, 식물, 나아가 전 자연에까지 이른다.

 

역동적인 도덕은 자연적인 것이라기보다는 습득되는 것이요, 억압의 도덕이 아니라 동경의 도덕이며, 쾌락의 도덕이 아니라 환희의 도덕이며, 규칙의 도덕이 아니라 사랑의 도덕이다. 역동적인 도덕은 역설적으로 들리며 심지어 모순을 내포하는 듯이 보인다. 그것은 오른 뺨까지 돌려 댈 것을 권유하며 가진 것을 모두 팔아 가난한 이에게 줄 것을 권고한다. 그러나 이러한 것들이 특정한 행위에 대한 요구라기보다는 모든 도덕적 문제에 사랑을 가지고 창의적으로 반응할 수 있는 영혼의 상태를 산출하고자 하는 것임을 이해할 때 역설은 해소되고 만다. 이런 이유로 해서 정태적인 닫힌 도덕과 동태적인 열린 도덕에 내재하는 정의의 두 관념간에도 근본적인 차이가 있게 된다. 정태적인 정의는 고정되고 무감각하며 거칠고 비인간적인 데 비해 동태적인 정의는 창조적이고 새로운 경험에로 열려 있으며 사랑이 서리어 있는 것이다.

 

자연의 굴레를 벗어나고 사회의 속박으로부터 해방되어 도덕적 영웅들이 출현하는 바 인간의 영혼이 열리는 과정은 오랜 시간을 요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그러한 영웅들이 등장하는 전조는 서구에 있어서는 이스라엘의 선지자들과 희랍의 철인들이 있다. 그리고 그와 비슷한 시기에 인도에서는 부처가 나타났고 중국에서는 공맹이 나타났다. 소크라테스는 희랍에 있어서 열린 도덕의 가장 위대한 대변자였다. 그러나 이러한 희랍적 전통에 힘입어 열린 도덕을 가장 깊이 있게 나타낸 것은 역시 유태-기독교적 전통이었다고 할 수 있다. 이러한 도덕적 영웅들에 힘입어 정의는 단지 도시국가나 특정한 국가의 벽을 넘어 모든 인간을 포함하는 인류의 보편적인 선을 지향하는 것으로 되었다.

 

물론 기독교에 300년이나 앞서 스토아주의자들이 모든 인간은 동일한 아버지()의 자손으로서 한 형제임을 가르쳤고 동일한 언어로 동일한 사상을 제시했으나 그러한 것들은 기독교와 동등한 반향과 효과를 거두지 못했다. 스토아주의의 결정적 결함은 그것이 지나치게 주지주의적이었다는 점이며 그것은 결국 하나의 철학에 불과하였다. 기독교로부터 본격화된 도덕 발전의 과정은 근세에까지 이어지며 거기에서 연유된 열린 도덕은 박애, 즉 보편적인 인류애, 인간의 권리 및 입헌민주주의라는 관념을 통해 정치적 표현을 얻게 된다. 미국의 독립선언이나 프랑스의 인권선언은 인간의 불가침의 가치와 존엄성에 대한 기독교적 복음의 결과물이다. 현대의 민주주의 정의의 관념은 결국 유태-기독교적 연원을 갖는다는 게 베르그송의 입론이다.

 

개방사회라는 개념을 영미언어권에 도입해서 널리 유포시킨 자는 철학자 칼 포퍼이지만 이 개념을 최초로 사용한 사람은 불란서 철학자 베르그송이었다. 베르그송에 있어서 개방사회란 인간 공동체의 발전에 있어 하나의 모형으로서 제시되었다. 그에 따르면 우리의 문명된 공동체는 제아무리 그것이 자연에 의하여 일차적으로 우리들에게 운명지어진 사회와 다르다 할지라도 실로 그와 같이 본능적으로 형성되었던 소규모의 군거사회와 근본적인 유사성을 가지고 있다는 것이다. 그 규모의 크기에서만 서로 다를 뿐 원시사회와 우리의 문명사회는 모두가 자연적 조건들에 기초해서 억압의 도덕을 통해 이루어진 닫힌 사회라고 한다. 광대한 현대사회에 있어서도 문명의 온갖 물질적 저장과 정신적 획득이 사라진다면 원초적 본능이 금방이라도 살아나 과거의 군거사회를 그대로 재현할 것으로 본다. 결국 규모의 크기와는 상관없이 모든 닫힌 사회의 공통되는 본질은 특정한 개인들끼리 구성되며 다른 개인들은 그로부터 배제한다는 점이라고 한다.

 

베르그송에 따르면 현금에 이르기까지 우리가 알고 있는 모든 현실정치는 닫힌 사회의 전제들에 의거해서 행해져 왔다. 어떻든 간에 지금까지 과거의 모든 정치는 결국 전쟁을 겨냥한 정치였다. 전시에는 살인, 약탈, 배반과 기만, 거짓말까지도 합법적일 뿐 아니라 찬양받을 만한 것이 된다. 지금까지는 평화조차도 전쟁 방지나 또는 전쟁을 위한 공격의 준비였다. 우리들의 사회적 의무는 사회적 결합을 목표로 하는 데 이는 결국 우리가 원하건 아니건 간에 적과의 대치 상태에 있어서의 훈련의 태도를 형성하게 한다. 이는 결국 사회가 아무리 문명으로 장식된다 해도 그 바로 아래에는 원시적 본능을 숨기고 있음을 뜻한다. 우리의 사회적 의무 밑바닥에 도사리고 있는 사회적 본능은 닫힌 사회를 목표로 하는 것이다.

베르그송은 닫힌 사회와 열린 사회 간의 차이가 정도의 차이가 아니라 전적으로 다른 종류의 사회간의 차이임을 강조한다. 가족이나 국가의 범위를 인류에로 단지 확장만 한다고 해서 열린 사회의 개념에 이를 수는 없다는 것이다. 필요한 것은 인간 존재에 대한 보다 새로운 통찰과 질적으로 상이한 경험이라고 한다. 가족과 시민사회 간에도 진정한 구분이 없으며 우리가 살고 있는 사회와는 양적으로가 아니라 질적으로 다른 인간공동체만이 진정한 의미의 개방사회일 수 있다는 것이다. 모든 인류에 대한 사랑에 기초한 개방사회에로 가는 길은 자기 보존에의 원시적인 자연적 본능이나 군거집단의 성원들간의 유대로부터 곧바로 생겨나는 것이 아니라 종교나 철학을 통한 우회를 거쳐 전개된다고 한다. 왜냐하면 종교는 신을 통해서 인간으로 하여금 인류를 사랑하라고 가르치며 또한 철학은 우리 모두가 공동으로 갖고 있는 이성을 통해서 모든 인간의 권리와 존엄성을 알게 하기 때문이다. 어떤 경우에 있어서나 가족과 국가의 단계를 확장한다고 해서 인류애에 도달할 수는 없다. 단적으로 우리는 그러한 것들을 과감히 초월함으로써만 진정한 인류애에 이를 수 있다는 것이다.

 

이상과 같은 사상을 통해서 베르그송은 정신의 눈이 열려 가는 과정을 보여 주고자 한다. 철학과 계시는 역사에 있어서 열린 사회와 열린 도덕의 두 가지 원천으로 파악되고 있다. 나아가서 이러한 종교적 지평과 철학적 지평이 열림을 역사의 연속성에 있어 불연속적인 비약으로 본다. 이러한 비약은 예견되거나 예측되기 어려운 것이다. 도덕적 영웅들이나 성인들과 같은 예외적인 인간들은 개방사회와 개방도덕의 비전을 역사 속에 가져온 사람들이다. 기독교의 성인들에 앞서 인류는 희랍의 성자들, 이스라엘의 예언자들, 불교의 아라한들을 이미 알고 있었다 한다. 도시국가의 닫힌 도덕이나 억압의 도덕과는 달리 전인류에로의 열린 도덕은 모범이 되는 이들 삶 속에 구체적인 모습으로 구현되고 있는 것이다.

 

베르그송은 개방성을 인류애의 강도로 규정한다. 그것은 모든 인간을 용납하고 일깨우는 사랑이다. 나아가서 개방성은 인류애에 그치지 않고 그 사랑이 동물, 식물 나아가서는 모든 자연에까지 이르게 된다는 것이다. 가족이나 민족에 대한 사랑과 인류에 대한 사랑은 사랑의 범위가 확대되어 가는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전자의 감정과 후자의 감정 간에는 근본적인 차이가 존재한다. 가족이나 민족 혹은 국가에 대한 사랑은 애정의 대상에 있어서 선별과 선택을 내포하며 일부 사람을 포용할 뿐 다른 일부 사람을 배제하게 되며 따라서 그러한 사랑은 한편으로 증오를 동반하게 된다. 그러나 열린 정신에 있어서의 사랑은 특정 대상에 끌리거나 특정 상대만을 목표로 삼지 않으며 따라서 인류애는 인류 전체에로 지향하게 된다.

 

열린 정신에 있어 우리는 새로운 하나의 도덕이 나타남을 보게 되는데 이는 닫힌 정신에 있어서의 도덕과는 달리 자연으로부터 나온 것이 아니라 정신을 일깨우는 새로운 감정을 통해 습득된 것이다. 이러한 새로운 감정과 정열에 휩싸임으로써 열린 정신은 혈족이나 도시 국가에 예속시킨 자연의 굴레로부터 박차고 나오게 된다. 열린 정신은 닫힌 사회 속의 일상적인 목표로부터 해방을 경험함으로써 단순한 쾌락이나 풍요에는 무관심해진다.

 

베르그송의 정치이론에 있어서의 위대한 공헌은 정태적인 닫힌 사회와 동태적인 열린 사회를 서로 대비되는 범형으로 제시했다는 점이다. 이러한 두 가지 범형적 사회는 인간 행위의 전영역에 있어서 이상적 한계로서 기능한다. 설사 온전한 열린 사회가 가까운 미래에 실현될 수 없다 할지라도 그것은 이상적인 한계 개념으로서 인간에게 열망과 지향의 표적 노릇을 하게 된다. 그리고 베르그송은 열린 사회를 향한 인간들의 노력의 현실적인 정치적 표현으로서 민주주의에 언급하고 있다. 그에 따르면 모든 정치 체제 중에서 민주주의는 자연의 굴레로부터 가장 멀리 떨어져 있으며 닫힌 사회의 조건들을 넘어서고 있는 유일한 체제이다. 베르그송에 있어서 민주주의는 단지 선거를 통한 체제 이상의 것이며 도덕적 근거, 보다 자세히 말하면 열린 사회의 기초에 바탕을 둔 것이다.

 

베르그송은 자신의 저서의 마지막 구절에서 인간은 자유로이 자신의 문명을 만들어 나가고 이 지구를 인간 정신이 깃들 만한 가치가 있는 곳으로 만들어야 한다는 자신의 신념을 재천명하고 있다. 그는 이렇게 적고 있다. 인류는 그가 이룩한 진보에 반쯤 짓눌려 신음하고 있다. 인간은 그의 미래가 자신의 손에 달려 있다는 것을 충분히 깨닫지 못하고 있다. 우리가 할 일은 무엇보다도 계속 살아나갈 것인가 아닌가를 결정하는 것이다.그에 따르면 현대의 정치적 상황은 닫힌 사회에서 열린 사회에로 가는 도상의 어딘가에 존재한다. 그러나 개방사회에로의 길은 좁고도 험한 것이며 폐쇄사회에로의 유혹이 끈질기게 개방사회에로의 길을 막고 있다. 하지만 베르그송은 언젠가 개방사회가 실현된 날이 오리라는 기대와 소망과 신념을 버리지 않았던 것이다.

 

개방된 사회와 그 적들

 

나치즘과 파시즘이 득세하던 2차대전의 포화 속에서 철학자 포퍼(K.Popper)개방사회와 그 적들이라는 저서를 저술했다. 그는 우리 당대인들과 후대인들을 위해서 다시는 전체주의적 위협이 재발되지 말기를 바라는 깊은 인도주의적 염원에서 그 책을 썼으며 플라톤과 헤겔 그리고 마르크스를 개방사회의 주요한 적들로 공격하고 있다. 그에 따르면 개방사회를 건설하고자 하는 시도는 희랍인들 특히 소피스트들과 소크라테스 시대로부터 시작되었다 한다. 개방사회는 단지 기존의 것이라 해서 그리고 전통적인 것이라 해서 갖게 되는 절대적 권위를 거부하면서도 자유와 인류애 그리고 합리적 비판의 뿌리가 되어 온 전통을 보존하고 발전시키고 확립하고자 한다는 것이다. 포퍼는 이미 베르그송이 개방사회와 폐쇄사회라는 용어를 사용하고 있음을 알았고 또한 그의 개방사회론과의 유사성이 있음도 인정했다. 그러나 베르그송의 철학관과의 차이에서 유래하는 바 근본적인 차이를 지적하면서 베르그송의 구분이 지극히 종교적인 구분인 데 비해 자신의 것은 합리주의적 구분이라고 했다. 폐쇄사회는 마술이나 주술에 대한 믿음으로 규정되는 데 비해 개방사회는 그러한 신비적 요소들을 비판하고 인간 자신의 지성과 합리적 논의를 권위로 해서 의사결정을 행하는 사회라는 것이다.

포퍼가 지적한 이러한 차이 이외에도 베르그송과 포퍼 사이에는 보다 중대한 하나의 차이가 있다. 그것은 바로 무엇을 향한 개방성이냐의 문제와 관련된 것이다. 포퍼의 개방성은 수평적 개방성이라 할 수 있는데 이는 시행착오라는 실험적 방법과 과학자들이 보여 주는 바 비판적 사고에의 개방성이다. 개방사회에 대한 포퍼의 생각은 종교적인 신비성에 바탕을 두기보다는 현세적인 자유주의적 체제에 기초를 두고 있다. 그는 소피스트와 소크라테스를 로크, 계몽주의, 프랑스 혁명, 밀 등에 의해 대변되는 현대 자유민주주의의 선구자로 간주하고 있다. 이에 비해 베르그송은 수직적 개방성을 강조하는데 이는 존재의 근원을 향한 인간혼의 개방성이다. 달리 말하면 포퍼의 개방성이 인간중심적 휴머니즘에 뿌리를 두고 있다면 베르그송의 그것은 신중심적인 휴머니즘의 체험을 축으로 하고 있다. 따라서 베르그송에 있어서는 플라톤과 히브리의 예언자, 기독교의 신비주의자들이 영웅으로 등장하나 포퍼에 있어서는 플라톤이 개방사회의 적이며 주술에 바탕을 둔 몽매주의적 신화와 폐쇄사회의 대변자인 것이다.

 

포퍼는 소크라테스와 플라톤을 엄격히 구분하며 후자는 전자의 권위를 등에 엎고 대중을 오도하고 있다고 풍자한다. 그러나 베르그송에 있어서는 플라톤이 개방사회를 향한 행진에 있어 소크라테스와 동업자로 칭송된다. 기독교에 대해서는 상당한 의견의 일치가 있기는 하나 포퍼는 전적으로 신약에만 주목하고 있으며 다른 모든 신비주의와 마찬가지로 기독교의 신비주의도 비합리주의적인 것으로 매도하고 있다. 그리고 이 두 사람은 모두 올바르게 이해된 민주주의는 개방사회 관념의 진정한 현대적 표현일 뿐만 아니라 그 대단원을 이룬다고 생각하나 민주주의의 의미에 대해서는 아주 상이한 견해를 갖고 있다. 포퍼는 보다 개인주의적이나 베르그송은 루소와 마찬가지로 자유와 평등을 매개하는 것으로서 박애를 강조하고 있다. 그리고 보다 중요한 차이로서 베르그송은 개방사회가 전인류를 포괄한다고 말하는 데 비해 포퍼는 개방사회가 여럿 있을 수 있으며 이들은 다른 개방사회와 경쟁관계나 전쟁상태에 있을 수 있다고 보았다. 베르그송에 있어서 개방사회의 성취는 전쟁의 소멸과 새로운 형태의 세계공동체의 형성을 뜻한다. 그러나 포퍼는 그러한 발전에까지 언급하지 않음으로써 자칫하면 자신의 이론이 냉전체재의 이데올로기적 투쟁을 위한 무기가 될 위험을 남기고 있다.

 

포퍼의 개방사회론을 보다 자세히 이해하기 위해서 그 자신의 말을 살펴보기로 한다. 그에 따르면 닫힌 사회는 마술적 사회나 부족사회 혹은 집단적 사회를 의미하며 열린 사회는 개개인이 스스로 결단을 내릴 수 있는 사회를 말한다. 닫힌 사회는 함께 살며 공통적인 노력과 공통적인 위험, 공통적인 기쁨과 공통적인 고통을 나누는 혈족관계에 의해 예속되어 거의 유기체적 단위로 존재하는 집단이나 부족과 비슷하다. 닫힌 사회는 노동의 분업이나 상품의 교환과 같은 추상적인 사회관계에 의해 서로 관련을 맺는 것이 아니라 촉각, 후각, 시각과 같은 구체적인 육체적 관계로 맺어진 구체적 개인들의 구체적 집단이다. 이에 비해 열린 사회에서는 대다수의 구성원들이 사회적으로 높아지기 위해 그리고 다른 사람의 지위를 차지하기 위해 투쟁하고 있으며 이로 인해 계급투쟁과 같은 중대한 사회적 현상이 일어나기도 한다. 그러나 닫힌 사회에 있어서는 구성원들간에 지위다툼이 있을 수 없으며 계급을 포함한 닫힌 사회의 제도는 신성불가침한 금기인 것이다. 열린 사회는 유기체적인 특성이 없으므로 추상적 사회에로 점차 발전해 가게 된다.

 

포퍼에 따르면 현대의 열린 사회에 있어서 사회집단들이 갖는 비인간적인 추상적 성격으로 인해 대부분의 사람들은 익명과 고립 속에서 살게 되며 결과적으로 불행한 상태에서 살고 있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사회는 비록 추상화되었지만 인간의 생물학적 구조는 크게 변하지 않았기 때문이며 따라서 인간은 추상적 사회에서는 만족할 수 없는 사회적 요구를 갖는다는 것이다. 그러나 포퍼에 의하면 이러한 상태는 보다 값진 이득을 얻기 위해 치러야 할 불가피한 대가라는 것이다. 출생이라는 우연으로 결정되는 것이 아니라 자신들이 자유롭게 선택할 수 있게 됨으로써 새로운 인간관계가 나타나게 되며 이와 아울러 새로운 개인주의가 생겨나게 된다. 그리고 생물학적 결속이나 육체적 결속이 약화된 곳에서 정신적인 새로운 결속이 주된 역할을 하게 될 수도 있는 것이라고 포퍼는 말한다. 닫힌 사회가 붕괴되고 우리의 욕구를 억제하고 합리적으로 되고자 하며 자신이 선택하고 스스로 책임지고자 하는 노력으로부터 문명은 일종의 긴장을 감수하게 되며 이러한 긴장은 추상적 사회에 있어서 지식과 합리성, 협동과 상호부조가 증대함과 더불어 우리가 치러야 할 대가인 것이다. 그럼으로써 우리의 생존기회가 증대되며 우리는 보다 인간답게 존재할 수 있다고 한다.

 

포퍼에 따르면 닫힌 사회로부터 열린 사회에로의 이행은 인류가 거쳐온 가장 위대한 혁명이라는 것이다. 희랍인들은 초보적인 단계에서 그러한 혁명을 시작했다고 한다. 소크라테스를 비롯한 일부 철인들은 이성, 자유, 인류애에 대한 새로운 신념에 눈을 떴으며 이는 우리가 기대를 걸만한 유일한 신념인 열린 사회에 대한 신념이라고 한다. 여기에서 우리는 베르그송의 보편주의와 유사한 경향을 감지하게 된다. 우리는 두려움에 기초한 억압의 닫힌 도덕이 아니라 사랑에 기초한 열망의 열린 도덕에로 나아가게 된다.

 

포퍼는 철학의 등장이 닫힌 사회의 멸망을 의미한다고 본다. 철학은 마술적 신념을 합리적 신념으로 바꿔 놓으며 또한 철학은 제 이론과 신화에 도전하여 그것들을 비판적으로 논의하는 새로운 전통을 확립함으로써 전통을 변화시키는 것이다. 포퍼의 개방사회론은 자유주의적 개인주의를 토대로 하고 있다. 그에 따르면 인간은 두 가지 갈림길에 처해 있는데 하나는 원시적인 부족주의나 집단주의에로 다시 돌아가는 길이고 다른 하나는 개방사회에로 과감히 전진하는 길이다. 앞의 길은 결국 인간을 야만화야수화에로 몰고가는 길인 데 비해 뒤의 길은 모든 인간을 진정으로 인간적 삶에로 인도하는 유일한 길이라 한다. 그런데 일단 우리가 자신의 이성에 의존하기 시작하고 우리의 비판능력을 활용하기 시작한 이상, 개인이 선택하고 스스로 책임질 수 있게 된 이상 우리는 부족적 마술의 길로 돌아갈 수는 없다. 지식의 열매를 먹은 자는 천국을 이미 잃어버렸기 때문이다. 우리가 부족주의의 주술적 시대로 돌아가고자 하면 할수록 우리는 종교재판, 비밀경찰, 깡패의 폭력에로 나아가게 된다. 이성과 진리를 억압할 경우 우리는 인간적인 모든 것을 가장 야만적이고 포악한 파괴에 내맡기게 된다. 우리는 다시 자연의 조화된 상태로 되돌아갈 수는 없다. 되돌아가고자 한다면 우리는 끝장을 보게 됨으로써 결국 금수로 돌아가야만 하기 때문이다.

 

우리는 현실과 사태를 정면으로 마주쳐야 한다. 우리가 어린 시절로 되돌아가기를 꿈꾼다면, 다른 사람에 의존해서 행복을 찾고자 한다면, 인간다움과 이성과 책임의 십자가를 지는 일을 기피한다면, 용기를 잃어버리고 긴장에 압도되어 버린다면 그때마다 우리는 자신 앞에 놓인 결단의 문제를 보다 분명히 이해함으로써 우리 자신의 각오를 새롭게 하지 않으면 안 된다. 우리는 야수로 되돌아갈 수가 없다. 우리가 인간으로 남고자 한다면 오직 하나의 길, 즉 열린 사회에로의 길만이 있을 뿐이다. 우리에게 주어진 이성을 사용하여 안전과 자유를 위해 계획하면서 불확실하고 불안정한 미지의 세계에로 공동의 탐험을 감수하지 않으면 안 된다.

 

 

개방된 사회와 비판적 이성

 

사회의 유형에 대한 지금까지의 구분에 따르면 터부나 독재자가 지배하는 사회는 폐쇄사회라 부를 수 있다. 성원들이 자율적인 이성에 따라 행위하지 못하는 사회에서는 사회적 제 행위가 인습적인 금기(터부)나 독재자의 명령에 따라 결정되게 마련이다. 반면에 명령하는 독재자도 강제적인 금기체제도 없는 개방사회에 있어서는 성원들의 행위가 스스로 자신을 제한하는 양심과 자율적인 이성에 의해 규제된다. 개방사회가 되기 위해서는 그 성원들의 자율적이고 비판적인 이성의 능력이 전제되어야 한다. 폐쇄사회와 개방사회 간의 구분은 사회가 그 성원들의 개인적 자유를 제약하는 정도에 따른 것이다. 따라서 그것은 전제주의와 민주주의 간의 구분과도 유사하다.

 

그러한 구분은 정치적인 측면에서 논의될 수도 있겠지만 심리적인 차원에서 논의될 수도 있다. 다시 말하면 폐쇄사회의 성원들과 개방사회의 성원들은 그들이 속한 사회유형에서 예견될 수 있는 일반적인 차이를 갖게 된다. 개방사회의 성원들은 자신의 양심과 이성에 따르지만 폐쇄사회의 성원들은 그러지 못한다. 이는 정보를 받아들이는 태도에 있어서나 타인과 제도를 평가하는 방식, 나아가서는 인간과 그의 사회적 역할의 관계를 바라보는 관점, 각종 의사결정의 과정 등에서 나타난다. 그러한 차이는 사고방식뿐만 아니라 생각을 표현하는 방식, 외면적인 행동양식으로까지 나타난다. 우선 폐쇄사회의 성원들은 특정한 권위적 존재로부터 그러한 정보를 얻게 된다. 포퍼도 지적하고 있듯이 플라톤의 공화국에 있어서 철인왕은 그러한 권위적 존재의 전형이다. 그의 지혜는 본질적으로 전통에서 유래된 것이기도 하다. 그러한 능력을 갖지 못한 보통사람들은 그러한 권위적 존재로부터 얻게 되는 것으로 만족해야 한다.

 

폐쇄사회의 가장 기초적인 형태로서 프로이트가 제시한 부족사회는 가정과 동일한 사회 심리적 특성을 나타낸다. , 폐쇄사회에 있어 권위적 존재의 지위는 전통적 가정에 있어서 아버지의 지위와 본질적으로 동일한 것이다. 아버지는 모든 것을 알고 있으며 자식들은 무엇이든지 그에게 물어야 한다. 현대 독재사회에 있어서는 독재자가 아버지의 이미지를 갖게 되며 그는 매사에 있어서 전지전능에 가까운 권위로서 등장한다. 우리는 이러한 사례들을 역사의 도처에서 그리고 우리 현대사회 속에서 발견할 수 있으며 그 가장 극단적이고 철저한 예를 오웰의 공상소설인1984에서 발견할 수 있다.

한편 개방사회에 있어서 성원들의 정보를 얻게 되는 방식은 일반적으로 과학에 있어서 응용되는 방식과 유사하다. 그것은 새로운 아이디어와 추측을 만들어 내고 그것을 검증해 가는 방법이다. 이러한 방법을 통해 우리가 얻게 되는 것은 절대적 지식이 아니라 다소간에 체계화된 추측들일 뿐이며 누구나 다 추측할 수 있는 능력을 갖추고 있는 까닭에 진리를 보장하는 권위적 존재가 들어설 여지가 없는 것이다. 오랜 전통도 절대적 권위를 누릴 수는 없으며 단지 추측과 가설의 토양이요 바탕이 될 뿐이다. 물론 완전한 의미의 개방사회가 실현된 곳은 아직 어디에도 없으며 각종 권위들이 다양한 방식으로 변장을 한 채 우리들 주변에 도사리고 있다. 그러나 과학자들의 공동체를 위시해서 각종 형태의 사회단체들이 점차 그러한 이념에 접근해 가고 있는 것 또한 사실이다.

 

앞에서도 말했듯이 개방사회와 폐쇄사회 간의 차이는 광범위한 심리적 함축을 지니고 있다. 그것은 사람들이 자기 자신과 타인들을 바라보는 방식에서 나타나기도 하는데 왜냐하면 권위적 존재는 본질적으로 보통사람들과는 다른 존재이기 때문이다. 나아가서 권위적 존재는 우리의 정보내용과 그러한 정보에 대한 관점에 영향을 미칠 뿐만 아니라 우리의 행위에도 영향을 준다. 따라서 개방사회와 폐쇄사회 간의 차이는 더 이상의 논의를 위한 출발점이 될 수가 있을 것이다.

 

권위적 존재가 된다는 것은 특정한 사회적 역할을 수행함을 의미한다. 나아가서 그러한 역할 수행을 제대로 할 수 있기 위해서는 특수하고 특이한 자질을 갖추어야 할 것을 전제한다. 그러한 자질은 외양에 의해 판별될 수 없다. 왜냐하면 유사한 문화적 배경과 교육환경을 가질 경우 사람들은 대체적으로 유사성을 보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권위적 존재와 보통 사람간의 차이는 외양의 차이가 아니라 본질에 있어서의 차이여야 하는 것이다. 그래서 사람들이 본질상 서로 차이가 있다는 생각은 폐쇄사회에 있어서 사람들이 갖게 될 특정한 역할을 설명하기 위해 기본적인 중요성을 갖는다. 그래서 폐쇄사회의 성원들은 사람과 역할 간의 관계를 그 사람의 내재적 성질이나 자질에 의해 결정되는 것으로 생각하는데 그러한 내면적인 자질은 부분적으로 교육을 통해 개발되기도 하나 근본에 있어서 타고난 것으로 간주한다. 사회적 역할은 이러한 내면적 본질의 외면적 표현에 불과한 것이다.

 

따라서 폐쇄사회에 있어서는 사회 이동, 다시 말하면 특권과 권력에 있어서 낮은 역할이나 지위로부터 높은 역할이나 지위에로의 이행은 습득된 특성이 아니라 천부적으로 점지된 특성에 의거한다. 물론 이러한 특성은 한 개인의 일생 동안 반드시 불변적인 것은 아니며 나이를 먹어감에 따라 사회적 힘이 달라질 수도 있다. 프로이트에 따르면 고대의 종족사회에 있어서는 아들의 역할로부터 아버지의 역할에로의 이동이 불가능하였다. 이러한 이동은 아버지가 살해되는 폭동에 의해서만 가능했고 그럴 경우 그의 권력은 그의 아들간에 공유될 수 있는 것이다.

 

반면 개방사회에 있어서는 성원들이 인간과 그들의 역할이 서로 다르다는 것을 안다. 지위의 차이는 역할의 차이를 가리키나 원칙적으로는 어떤 사람이건 모든 역할을 다 수행할 능력이 있다는 사실이 가정된다. 현실적으로 특정한 사람이 보다 높은 지위를 차지하게 되나 그것은 그의 근면이나 성실과 같은 습득된 특성에 의거한 것이며 종족이나 혈통과 같이 천부적 특성으로 인한 것이 아니다. 그리고 폐쇄사회에 있어서 구심점을 이루었던 그러한 지적인 권위자의 역할도 있을 수 없다. 그러한 역할은 그것을 수행할 수 있는 자와 없는 자 간의 본질적 차이를 전제한다. 그러나 개방사회에 있어서는 그러한 본질적 차이가 있을 수 없어서 각자의 역할은 그러한 본질과 관련된 것이 아니라 각자가 습득한 특성에 따라 달라진다. 심리적으로 볼 때 개방사회와 폐쇄사회 간의 이러한 차이로 인해서 개방사회의 성원들은 인간과 그들의 역할을 구분하고 그 차이를 알게 된다. 이러한 구분을 한다는 것은 동일한 사람이 다른 역할을 맡을 수 있으며 역할상의 변화가 있다 할지라도 인간이 자기 동질성을 유지할 수 있게 됨을 의미한다.

 

또한 개방사회의 성원들이 갖는 두드러진 특징은 그들의 의사 결정이 기본적으로 외적인 명령을 준수하는 것이 아니라 자기 자신의 욕구 충족을 지향한다는 점이다. 그리고 개방사회의 성원들은 이러한 의사결정에 있어 자신의 양심과 이성에 따른다는 점에서도 폐쇄사회의 성원들과 구분된다. 개방사회의 성원들은 양심과 이성에 의거해서 자신의 욕구를 충족하기 위한 행동 계획을 세우고 수행하게 된다. 반면에 폐쇄사회의 성원들에 있어서는 양심과 이성은 아무런 관계가 없다. 왜냐하면 그가 알고 있는 행동계획은 외적인 명령에서 유래된 것이지 자기 자신의 의지의 결과가 아니기 때문이다. 설사 자신의 계획이 있다 할지라도 그것을 수행했을 경우 그가 봉착하게 될 위험을 고려하는 그의 이성이 그것을 용납하지 않는다. 따라서 그의 행위를 결정하는 기본적인 요인은 자신의 욕구나 의지가 아니라 외적인 명령이요 그에 대한 두려움이다.

 

폐쇄사회에 있어서 행위의 원천들은 전통이나 권위로 구분될 수 있다. 물론 전통이 하나의 권위로 대변되기 때문에 그 구분이 그리 명확한 것은 아니다. 하지만 대체로 그 구분은 인습적인 금기에 의해 지배되는 사회와 권위적 개인에 의해 통제되는 사회와의 구분에 대응한다. 그리고 전통과 권위는 내면화되고 내재화된다. 그래서 인습적 금제가 내재화되어 그 성원들의 이성과 결합됨으로써 특정한 계획을 비합리적인 것으로 선별하고 배제하는 심적인 스크린이 되며 권위적 존재의 명령도 내재화되어 언젠가 우리 자신의 의지의 대행물로서 행세하기도 한다. 따라서 자율적이고 반성적인 이성의 부단한 비판이 요청된다고 하겠다.

 

이미 말한 바와 같이 폐쇄사회에 있어서는 정보를 관리하는 권위적 원천이 존재한다. 따라서 이러한 권위를 논의에 의거해서 비판하는 일을 봉쇄할 제도적 장치가 필요하게 된다. 그래서 폐쇄사회는 언론의 자유를 규제하는 방편들이 고안 적용되고 권위적 존재가 제시하는 지식체제에 대한 대안적 가설이나 비판이 금지된다. 그 대신에 폐쇄사회에 있어서는 사람들이 의사소통의 금제들을 내면화함으로써 자신의 언론 행위를 스스로 알아서 규제하게 된다.

 

반면에 개방사회에 있어서는 지적인 권위가 없는 까닭에 특정 유형의 언론을 봉쇄할 필요가 생겨나지 않는다. 성원들간의 견해 차이는 논의를 가능하게 하고 논의를 통해서 각자는 서로의 의견을 비판하고 대안을 구상하게 한다. 두 유형의 사회에 있어 의사소통 과정간의 이러한 차이는 개인들의 사고과정에도 그대로 반영됨으로써 개인은 자기 의식의 매개를 통해서 자기 스스로와의 대화와 토론이 가능하게 된다. 물론 자신의 생각을 비판하는 일은 지극히 어려우나 그릇된 생각을 견지하는 일 또한 어려운 일이 아닐 수 없다. 개방사회는 개방된 시민의 산실이고 개방된 시민은 개방된 사회에로 나아가는 추진력이 된다.

 

물론 어떤 사회도 순수히 개방된 사회이거나 순수히 폐쇄된 사회는 아니다. 그러나 이상에서 논의한 두 사회에 대한 개략적 규정은 그에 비추어 모든 사회의 위치를 조정하는 준거로서의 의미를 갖는다. 지금까지의 논의를 요약하면 개방사회의 성원들은 역할과 인간 간의 구분을 받아들이고 인간은 다양한 역할을 수행할 능력이 있는 존재로 간주한다. 그리고 개방사회의 성원은 비판과 추측들을 의사소통과 사고의 합당한 방식으로 받아들인다. 그리고 개방사회의 성원들은 어떤 권위나 권위적 존재도 받아들이지 않는다. 첫번째 주장은 개방사회 성원들의 인지적 능력에 관한 것이고 두번째 주장은 정보 교환과 수납에 관련된 그들의 가치관에 관한 것이며 세번째 것은 그들이 취하게 될 이데올로기적 입장에 관한 것이다. 물론 이러한 주장들은 지나치게 단순한 것이긴 하나 개방사회 이념 자체도 현존하는 민주주의의 단순화 내지는 이상화의 산물이라 할 수 있다. 이러한 단순화를 통한 체계적 논의는 보다 복잡한 문제를 다룰 수 있는 개념적 도구로서의 의미를 갖는다.

 

이성의 한계와 양심의 요청

 

인간의 역사는 폐쇄사회로부터 개방사회에로의 부단한 투쟁의 과정이다. 그런데 주목할 만한 중요한 한 가지 점은 비록 이성이나 합리성에 의해 개방사회가 세워진다 할지라도 그 사회의 성원들이 양심 내지는 도덕적 감정을 갖지 않을 경우 개방사회가 존속하기 어려우리라는 점이다. 다시 말하면 이성이나 합리성은 비록 그것이 개방사회의 필수적인 요건이기는 하나 그것은 필요조건일 뿐 충분조건은 아니라는 사실이다. 개방사회는 이성이나 합리성을 요청할 뿐만 아니라 성원들의 도덕적 감정 내지 양심에 의거해서 지속될 수 있는 것이다. 이 점을 보다 구체적으로 이해하기 위해서 우리는 홉스와 로크의 정치철학상에 있어서의 깊은 차이점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홉스는 인간의 양심이나 도덕감을 받아들이지 않았기 떄문에 인간사회의 안정을 위해서는 절대군주와 같은 강력한 외적 강제력을 동원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 반면에 로크는 인간의 내면적인 도덕감을 믿었기 때문에 시민 스스로에 의해 자율적으로 규제되는 민주적 체제를 내세울 수 있었다. 이러한 두 가지 유형의 정치철학은 인간의 도덕감과 개방사회 간의 관계를 구체적이고도 체계적으로 해명해 주고 있다.

 

개방사회의 전제로서 합리성만으로는 충분하지 못하며 도덕감이나 양심을 요청한다는 점을 해명하기 위해 사회과학자들은 두 사람간의 게임으로서 수인의 딜레마라는 이야기를 활용하고 있다. 이러한 게임은 개방사회에서 빈번하게 일어날 수 있는 갈등상황의 구조를 보여 주기 위한 것이다. 이러한 상황에 있어서의 갈등은 두 가지 가능한 의사결정간에 일어날 수 있는 것인데 그 중 한 가지는 개인의 관점에서 볼 때 합리적인 선택이고 다른 하나는 사회적인 관점에서 합리적인 선택이다. 사회가 성립하고 존속하기 위해서는 그 성원들간의 두번째의 선택이 이루어져야 하고 권장되어야 한다. 따라서 개인들 안에 사회적 관점을 대변하는 것으로서 양심이나 도덕감이 요청되는 것이다. 결국 수인의 딜레마라는 상황은 개방사회에 있어서 합리성과 도덕감 간의 갈등을 나타낸다. 권위에 의거하는 전통사회나 폐쇄사회도 이러한 갈등의 가능한 해결책이긴 하나 우리의 관심사는 개방사회에 있어서의 이러한 갈등의 해결방식인 것이다.

 

그 딜레마는 다음과 같은 이야기로 잘 설명될 수가 있다. , 두 사람이 체포되어 각기 따로따로 심문을 받고 있다. 그들은 어떤 범죄의 공범자라는 혐의를 받고 고발되었다. 심문자는 그들 각각에게 다음과 같이 말한다. , 그들 중 한 사람은 범죄를 시인하고 다른 한 사람은 시인하지 않을 때 시인한 사람은 방면되고 그의 증언으로 인해 시인하지 않은 사람은 20년 간 옥살이를 해야 한다. 만일 둘이 함께 자백을 거부할 경우 함께 1년 간 감옥에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심문인이 제시한 대안들은 하나의 도표로 나타내질 수 있는데 두 사람을 각기 갑, 을이라 하고 수치는 형량을 표시하며 앞의 갑의 형량을, 뒤는 을의 형량을 나타낸다.

죄수

죄수 」 󰠏󰠏󰠏󰠏󰠏󰠏󰠏󰠏󰠏󰠏󰠏󰠏󰠏󰠏󰠏󰠏󰠏󰠏󰠏󰠏󰠏󰠏󰠏󰠏

 

자백 묵비

󰠏󰠏󰠏󰠏󰠏󰠏󰠏󰠏󰠏󰠏󰠏󰠏󰠏󰠏󰠏󰠏󰠏󰠏󰠏󰠏󰠏󰠏󰠏󰠏󰠏󰠏󰠏󰠏󰠏󰠏󰠏󰠏󰠏󰠏󰠏󰠏󰠏󰠏

자백 10 : 10 0 : 20

 

묵비 20 : 0 1 : 1

이 표에서 분명히 알 수 있듯이 두 사람이 모두 자백하지 않고 묵비할 때 두 사람이 각기 1년만 옥살이를 하기 때문에 최상의 대안이 된다. 그러나 다른 관점에서 보면 상대방이 어떤 대안을 택하든 각자는 자백을 함으로써 가장 큰 이득이 예상되는 까닭에 자백을 하는 것이 상책이다. 설사 그들이 따로 감금되어 있지 않고서 서로 대화를 나누어 함께 자백하지 않기로 합의한다 할지라도 상대방이 약속을 이행하리라는 보장이 없는 이상 자신의 이익을 추구하고 위험부담을 기피하기 위해서는 그 약속을 깨고 죄상을 불어 버리는 것이 가장 합리적인 길이 된다는 것은 분명하다.

 

따라서 이상에 나타난 바와 같이 각자의 개인적인 이득과 그의 사회적인 이득 간에 상충이 있게 된다. 그리고 어떤 의미에서는 사회적 이득이 보다 진정한 이득이기도 하다. 두 수인이 처한 이러한 상황이 딜레마가 되는 이유는 한 수인이 그들 사이의 유대나 의리를 생각해서 입을 다물었을 경우 그의 상대방은 의리없이 자백을 해버림으로써 자기만이 크게 손해를 입는 위험을 무릅써야 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만일 둘 다 자기의 안전을 위해 의리를 어기고 실토를 하게 될 경우 그들 모두가 의리를 위해 묵비했을 때보다 서로에게 크게 불리한 결과에 이르게 된다. 각 수인의 딜레마는 공범한 상대방의 의리정신에 대한 불신에서 생겨나는 것이다. 결국 이러한 상황은 각자 개인적인 관점에서 보면 합리적인 의사결정이 전체적으로 보면 결국 모두에게 더 불합리한 결과를 가져오는 상황으로서 우리가 일상적으로 흔히 처하게 되는 문제상황인 것이다.

 

이상의 이야기는 다소 전문적이고 장황한 것이긴 하나 흔히 일어날 수 있는 사회상황을 분석하는 유용한 모형이 될 수 있다. 난관에 봉착했을 경우의 집단행동을 생각해 보기로 하자. 영화관에 삼천여 명의 사람이 있는데 누가 불이야라고 소리쳤다고 해보자. 이러한 상황은 바로 수인의 딜레마라는 구조를 갖는 상황이다. 개인적 이해관계에서 볼 때 각자는 최선을 다해 출구로 돌진해야 한다. 누가 어떻게 하든 상관없이 그런 길만이 난국을 피하는 최상의 방책이다. 반면에 전체의 이득을 고려할 경우 질서를 지키며 차례대로 건물을 빠져 나가는 일이다. 서로 밀치고 밀리는 아우성과 수라장 속에서 한 사람도 구제되지 못하는 참상을 자주 보게 된다. 모두에게 이득이 주어질 침착하고 질서 있는 행위는 어떤 의미에서 양심이나 내면적 도덕률의 명령이기도 하다.

 

이상과 같은 극단적인 상황이 아니더라도 우리의 일상생활에서는 그와 유사한 구조를 갖는 상황이 무수히 많다. 예를 들어서 세금내는 문제를 생각해 보자. 모든 사람이 세금내는 일을 좋아하지 않는다. 그리고 어떤 한 사람의 세액은 사회 전체로 봐서 무시할 수 있을 정도의 것이며 누구나 자신의 돈을 아끼고 싶다. 그러나 모든 성원들이 이런 계산적 합리성에 의거해서 행동할 경우 사회는 파국에 처하게 되며 사실상 아무도 그러한 파국을 원하는 자는 없을 것이다. 이런 상황에 있어 합리성과 양심 간의 갈등이 있게 되는데, 즉 자기 자신의 이득만을 고려하고자 하는 경향과 사회 전체의 이득을 고려하고자 하는 경향 간에 상충이 있게 된다. 그렇게 볼 때 결국 양심이란 우리 개인의 심성 속에 있는 사회 전체의 이익을 대변하는 기능이라 할 수 있는 것이다.

 

결국 우리가 해결해야 할 문제는 수인의 딜레마 이야기에서 각 수인들이 자백을 하지 않을 방도가 무엇이며 화재가 난 극장에서 사람들이 비극적인 수라장을 만들지 않게 할 방도가 무엇인가이다. 다시 말하면 전체적으로 합리적인 그러한 의사결정에 이르기 위해서 어떤 종류의 일반원칙이 적용되어야 하는가이다. 사실상 칸트의 정언명법은 바로 이러한 문제를 주제적으로 다룬 사례라 할 수 있다. 칸트는 도덕에 대한 논의에 있어서 계산적 합리성을 배제하면서 인간의 내면에 있어서 실천이성 내지는 양심의 존재를 확신했으며 그런 양심의 내재율을 정언명법으로 공식화해 낸 것이다. 그가 제시한 정언명법의 제1공식은 우리가 보편적인 법칙이 되기를 바라는 바에 따라서 행위하라는 것이다. 흔히 보편화 가능성의 원리라고도 하는 이 원리는 어떤 규칙이 단지 처세술의 신조가 아니라 도덕법칙이 되기 위해서는 그것이 보편화되어 모든 이에게 적용되어도 좋다는 조건을 충족시켜야 한다는 뜻이다.

 

수인의 딜레마 이야기에서는 각 수인이 규칙으로 삼을 수 있는 두 가지 가능한 행위 대안이 있는데 그것은 자백을 하는 것과 하지 않는 것이다. 그런데 한 사람이 자백을 하게 될 경우 그는 그 규칙이 보편법칙이 되기를 원하지 않을 것이 분명하다. 왜냐하면 상대방도 범죄행위를 시인할 경우 결국 쌍방이 상당한 불이익을 당하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한편 만일 한 사람이 자백을 하지 않을 겨우 그는 상대방도 자백하지 않기를 원한다. 왜냐하면 이 경우 상대방이 자백하게 되면 그는 최악의 상태를 감수해야 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정언명법의 제1형식에 의거할 경우 자백을 하는 것은 부도덕한 일이며 자백하지 않는 것이 당위적 의무가 되는 것이다. 칸트가 제시한 정언명법의 두번째 형식을 응용할 경우에도 역시 동일한 결론에 이르게 된다. 두번째 형식은 나와 타인의 인격을 단지 수단으로 대하지 말고 목적으로 대하라는 것이다. 그런데 한 사람이 자백을 하게 될 겨우 그는 상대방이 어떻게 하든 그 상대방의 처지를 나쁘게 만들게 된다. 따라서 그 사람은 자신의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서 상대방을 수단으로 대접하게 되는 셈이다. 그러므로 정언명법의 두번째 형식을 적용할 경우에도 역시 자백을 해서는 안 된다는 결과에 이르게 된다.

 

결론적으로 말하면 두 수인이 모두 가능한 한 최소한의 옥살이를 원한다고 가정할 경우 그들은 두 가지 원칙의 상충에 직면하게 된다. 하나의 원칙은 개인적 합리성의 원칙으로서 이에 따르면 상대방이 어떤 대안을 택하든 간에 자신은 자백을 하는 것이 보다 안전하고 자신에게 유리한 길을 택한 것이다. 그러나 이는 결국 상대방뿐만 아니라 자기 자신에게도 최선의 길이 되지 못하며, 상대방의 인격을 한갓 자신의 목적 달성을 위한 도구로 이용하는 길이다. 다른 하나의 원칙은 칸트의 정언명법에 의해 정식화된 양심의 원칙이요 도덕률로서 자백을 하지 않음으로써 상대방의 인격을 목적으로 대우하는 동시에 모두에게 가장 유리한 길을 선택하는 것이다. 물론 이러한 양심률이 바람직한 개방사회의 전제가 될 뿐만 아니라 올바른 개방사회는 또한 그러한 양심률를 강화하는 기능을 한다는 점도 주목할 필요가 있다.

 

이상에서 말한 바와 같이 게임의 상황에서는 각기 일반 원리에 의해 규정되는 두 가지 대안적 선택간에 상충이 있게 되는데 여기에서 우리는 결국 서로 환원될 수 없는 두 가지 물음에 당면하게 된다.

 

하나는 이러한 상황에서 우리가 도덕적으로 마땅히 선택할 대안이 무엇인가이고 다른 하나는 합리적으로 계산할 때 내가 선택할 대안이 무엇인가이다. 그런데 폐쇄사회에 있어서는 양심이 기능을 할 수 없으며 합리성도 금기와 관련된 두려움이나 체재와 관련된 현실적 두려움을 함축하는 신념체계에 의해 지정되고 조종된다. 따라서 선택에 있어서의 심각한 갈등이 있을 수 없으며 외적인 명령을 단지 받아들이는 것만이 전부이다. 따라서 상충하는 대안들 간의 선택이라는 문제는 생겨나지 않는다. 그러나 개방사회에 있어서는 언제나 이런 선택의 문제가 생겨날 수 있으며 그런 한에서 상당한 불안과 죄책감이 생겨나게 된다. 그러나 그것은 우리가 자유를 향유하기 위해서 마땅히 치러야 할 대가인 것이다.

 

그런데 선택 상황에 있어서의 그러한 갈등은 합리성과 도덕성이 언제나 일치하리라는 신념 체계를 받아들임으로써 해결될 수도 있다. 그래서 불의가 횡행하고 의인이 고난을 당하기도 하나 때가 되면 불의한 자가 정죄되고 심판을 받기 되며 역사는 사필귀정이라는 일종의 종교적 믿음을 갖게 되면 도덕적으로 사는 것이 결국 응분의 보상을 받게 되리라는 생각에 이르게 된다. 그러나 이러한 신념체계는 현실적으로 수많은 악한들이 가장 성공한 생애를 마쳤던 역사적 반례들에 의해 쉽사리 논파될 것으로 보인다. 따라서 전통적으로 종교적인 믿음을 옹호하기 위한 논거로서 악인은 내세에 가서라도 심판을 받게 되리라는 입론이 생겨나게 된다. 그래서 칸트는 도덕의 존재를 옹호하기 위해서 신의 존재와 영혼의 불멸을 요청하게 되었던 것이다. 합리성과 도덕성이 합치하고 의인이 진복자라는 주장을 위해서는 그러한 요청은 불가피한 일이 아닐 수 없다.

 

그러나 이러한 근거에 의해 옹호되는 전통적인 종교를 받아들일 수 없는 자에 있어서는 선택상황의 갈등이 미해결된 채로 남게 된다. 그러나 또 다른 활로를 찾지 않을 수 없으며 우리는 제3의 방도를 시도하게 된다. , 수인의 딜레마와 같은 극단적인 상황에 봉착했다 할지라도 우리는 합리성과 도덕성이 합치하는 대안과 전략을 발견하고자 한다. 그래서 그러한 선택상황에서 선택하기 어려운 하나의 대안을 가장 인간적인 우리의 대안으로 되게 하는 결단이 필요하게 된다. 수천의 사람들이 밀집한 불타는 극장에서 우리는 자율적 이성과 양심의 계명에 따라 침착하게 질서 있는 탈출을 시도할 수 있는 것이다. 물론 이러한 대안은 가장 불확실한 대안이고 그것을 시도한 사람은 지극히 드물지만 그것은 분명 하나의 대안임이 사실이고 그것은 또한 우리 모두를 살리는 대안인 것이다. 개인적 합리성이 사회적 합리성을 능가하는 이기주의적 불신의 풍토에서는 남도 죽이고 나도 죽는 비극의 연속이 불가피 하다. 이런 관점에서 볼 때 우리는 양심이나 도덕감의 문제를 보다 신중하게 다루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 나와 우리 >

 


 

728x90
반응형

블로그의 정보

국어독서창고

처사21

활동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