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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호와 거짓

by 처사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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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호와 거짓

 

김 경 용 ( 미국 마운트 버논대, 기호학 )

 

기호학이란 기호의 생산과 사용, 그리고 이로부터 일어나는 의미의 생산과 이용에 대한 연구를 하는 학문이다. 좀더 넓게는 소쉬르가 정의한 대로, 기호학이란 기호의 삶 - , 기호가 겪는 역사 - 에 대한 연구이다. 움베르토 에코의 거짓말 이론에 따른 기호학의 정의를 보면, 그것은 원칙상 거짓을 말하기 위해서 사용되는 모든 것을 연구하는 학문이다. 그러나 여기서 그의 다음과 같은 단서를 잊어서는 안 된다.

 

만약 어떤 것[, 기호]이 거짓을 말하는 데 쓰일 수 없다면 , 반대로 그것은 진실을 말하는 데 쓰일 수가 없다. 더욱이나 그것은 실로 조차 할 수가 없는 것이다.

 

이 단서에서 에꼬가 말하고자 하는 요점은, 우리가 세계에서 체험하는 일들로부터 우리의 생각이나 느낌을 기호를 통해 표현할 수 있음과, 기호는 이러한 표현을 허용함에 있어서 진실과 거짓을 함께 말하는 이중의 기능을 동시에 수행한다는 점이다. 앞으로 논의되겠지만, 진실을 총체화하기 위해 거짓을 제거할 수는 없다. 거짓이 제거되면 진실도 사라지기 때문이다. 이것은 진실과 거짓이 함께 갖는 역설이다. 아이러니칼한 것은, 진실에 도달하려면 거짓에 의해 거짓을 극복하는 방법밖에 없다는 점이다. 기본적으로 진실과 거짓은 서로 상대방에 의해서 정의된다. , 거짓없이 진실을 알 수 없고, 진실 없이 무엇이 거짓인가를 알 길이 없다. 결국 진실과 거짓은 서로 분리될 수 없는 것으로 변증법적 해석 과정에 의해서 이것들의 진의를 파악할 수 있게 된다.

 

에코가 내린 기호의 공식적 정의를 알아보자. 그에 의하면, “어떤 다른 것을 대표하는 것이면 그것이 무엇이건 기호가 된다”. 하나의 기호는 두 가지를 동시에 대표한다. 첫째, 기호는 물체나 이미지를 대신한다. 기호의 이런 부분을 기표(記表:signifier)라고 부른다. 예를 들어 보기로 하자. 최근에 미국에서 Power/Master 라는 문제의 맥주가 나와 광고된 적이 있었다. 맥주 상표로 쓰인 두 영어 단어 ‘Power’‘Master’는 기표다. Power를 우리말로 파워라고 표시했을 때, ‘파워두 글자는 기표다.‘Power’파워를 읽을 때 나오는 두 음절의 소리들은 역시 기표다. 같은 이치가 ‘Master’에도 적용된다. 우리는 기표를 볼 수 있고 들을 수 있고, 어떤 때는 만질 수도 있다.

 

둘째, 기호는 어떤 느낌이나 생각을 대표한다. 기표들을 보거나 들을 때 우리가 느끼는 감상들을 기의(記義:signified)라고 부른다. 흔히 의미라고 우리가 알아온 것은 기의이다. 영어사전에서 찾게 되는 Power라는 단어의 뜻들 , ‘’‘체력’‘권력’‘권능’‘지배력’‘전력(電力)’ 등등 은 기의들이다. 특히 이런 사전적 의미들을 외시의미라고 한다. 외시의미는 객관적 의미이기 때문에 Power라는 말을 누가 듣든, 어디서 듣게 되든 그 뜻이 분명하다. 외시의미보다 한 층 위에 함축의미라는 것이 있다. Power라는 단어가 쓰인 상황이나 이 단어를 읽는 사람의 과거 경험에 따라 이 단어가 그에게 주는 의미가 다르다. 예로, 권력이 없는 사람이 ‘Power’라는 말을 듣고 느끼는 것은 어떤 결핍이거나 열등의식이거나 권력자에 대한 증오아니면 공포같은 함축의미들이다. 권력자가 같은 ‘Power’라는 말에서 느끼는 함축의미는 지배’ ‘자신감’ ‘통제력’ ‘쾌감등등 여러 가지가 될 것이다. 이런 함축의미들은 개인에 따라 다르기 때문에 주관적이다. 함축의미들이 이데올로기(혹은 신화)를 작동시키며, 문화적 집단을 일으킨다. 종합하면 하나의 기표는 두 개의 다른 수준에서 수많은 기의들을 불러낸다. 이처럼 하나의 기표에서 여러 가지 생각들(관념이나 개념)을 갖게 되기 때문에 기표들은 일반적으로 다중의미체라고 이해하게 된다.

 

그런데 기의는 우리의 눈에 보이지도 않고 손으로 만질 수도 없는 추상적인 생각이나 느낌이기 때문에 그 스스로 우리의 인지 작용에 나타나지 못한다. 그것이 표현되려면 지각이 가능한 어떤 것에 실려야 한다. 기표는 바로 기의의 운반체이다. 그래서 기표와 기의의 결합은 어떤 생각이나 느낌, 달리 말하면 의미의 표현과 전달을 의해 불가피한 수속이다.

 

이상을 종합하면, 하나의 기호는 기의와 기표의 결합으로 이루어진다. 이처럼 기표와 기의를 연결시키는 일을 의미작용이라고 한다. 의미작용은 기표에서 어떤 기의를 찾아낼 수 있을 때, 혹은 어떤 기의를 기표에 부과했을 때 일어난다. 의미작용에 의해서 기표와 기의를 하나로 묶어냈을 때 하나의 기호(sign)를 얻게 된다. 예를 들면 ‘Power/Master’맥주상표 자체는 강력한 지배의욕을 나타내는 기호이다. , 기호는 무엇인가를 대표 혹은 재현한다. 바꿔 말하면, 기호는 어떤 다른 것을 대표하는 힘을 가지고 있다. 이 힘에 의지해서 우리는 우리의 체험들을 기호로 표현하고, 표현된 것을 다른 사람들에게 전하거나 혹은 적당한 매체에 저장할 수가 있는 것이다. 매체들은 기호를 생산, 조작, 저장하는 데 도움을 주는 테크놀로지다. 그러면서도 매체 테크놀로지 자체가 복잡한 기호이다.

 

여기서 한두 가지 강조해야 할 것이 있다. 하나의 기호를 만듦에 있어, 기표와 기의는 임의로 연결되어질 수 있다. , 임의성(任意性)이 부호화(符號化)의 본성이다. 모든 기호는 암호와 똑같은 속성을 갖는다. 그것은 호두알처럼 속(기의)과 껍질(기표)로 되어 있다. 암호를 제대로 해독하기 위해서 두 가지가 필요하다. 하나는 약속이다. 어떤 약속 밑에 어떤 기표와 기의가 연결되어 있는지를 알아야 한다. 그런데 이 약속은 암호 사용자들 사이에만 알려지는 것이고 그 이외의 사람들(타인들)에게는 비밀이다. 약속을 타인들에게 비밀로 하기 위해서 기호는 어떤 특수한 방식으로 코드화(부호화)된다. 코드는 타인들(국외자)을 속이기 위해서 기호에 거짓을 삽입하고 타인들에게 혼돈을 일으킨다. 요컨대, 코드는 기호로 하여금 암호 사용자들에게는 어떤 틀림없는 약속(말하자면진실’)을 보장하며, 동시에 타인들을 감쪽같이 속게 한다.

 

그래서 기호학적 해석은 호두알을 깨듯이, 기호를 만들고 있는 코드를 깨뜨려 그 약속의 내막을 알아보는 행위이다. 둘째로, 기호들로 된 텍스트(text)를 이해하기 위해서 상황을 알아야 한다. 약속과 상황이 모호하게 될 때 거짓은 일어난다. 앞의 Power/Master 맥주의 예에서, 왜 하필이면 맥주라는 음료에 ‘Power’‘Master’라는 단어들을 사용한 것일까? 어떤 의도가 이 상표에, 또 이런 기표들을 사용한 맥주 상품에 숨겨져 있는가를 알아내야 한다. 이에 대해서는 다음 절에 논의하기로 하고, 여기서는 기호의 속성에 대해 좀더 논의를 계속하기로 한다.

 

기호에 의해서만 우리의 체험을 표현하고 커뮤니케이션을 할 수 있으나, 기호는 어디까지나 모호한 수단에 불과하여 항상 오류를 내포하고 있다. 이런 이유로 우리의 표현이나 커뮤니케이션은 대개 거짓의 그늘에 덮이게 된다. 그렇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바로 이런 이유 때문에 커뮤니케이션의 필요성은 끊임없이 우리 주변에 생기는 것이다. 커뮤니케이션은 주어진 커무니케이션 상황에서 사용된 기호의 모호성과 그것에 의해 표현된 것에 내포되어 있는 오류나 거짓을 가려냄으로써 진실을 돋보이게 하여 그것을 포착하려는 과정이다. 기호 자체가 갖는 불확실성과 기호를 판독하는 우리의 의미작용의 불확실성을 좀더 알아 둘 필요가 있다.

 

선불교의 한 경구에 의하면, “그대가 말하는 순간에, 요점을 잃는다.” 이 경구는 기호학의 몇 가지 기본을 극적으로 표현하고 있다. “그대가 하는 말은 기표에 해당한다. “요점이란 실상 표현하고자 하는 어떤 추상적인 것으로 기의에 해당된다. 이 경구는 우리의 표현 행위가 두 가지 다른 평면을 필요로 함을 암시한다. 두말 할 것 없이 기의의 평면과 기표의 평면이다. 문제는 기의가 기표의 힘을 빌려 우리의 인지 작용에 명시되고자 할 때 기의는 그것의 완전성을 잃는다는 사실이다. 기표가 표현할 수 있는 만큼밖에는 표현될 수 없고, 기표가 가지는 어떤 특이한 표현 방식에 내맡길 수밖에 없다.

앞서의 경구가 암시하는 다른 중요한 점은 모든 표현이 은유라는 사실이다. 은유란 한 평면의 것을 다른 평면의 것에 의해서 표현한 것을 말한다. 예로, 비디오 예술의 창시자인 백남준은 을 우리 조상들이 가졌던 최초의 텔레비전이라고 보았다. “달은 TV이다.”라고 했을 때, 달은 TV의 은유가 된다.(거꾸로 말해도 마찬가지다).물론 우리는 달이 TV가 아님을 알고 있다. 이들은 두 가지 다른 세계의 다른 물체들이다. 이런 뜻에서 달은 TV이다.”라는 말은 요점을 잃은 표현이다. 그럼에도 이 표현에 어떤 심장한 의미가 통하는 것은, 달과 TV가 어떤 유사성 내지는 상사성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그것은, 둘 다 바라보는 상이란 사실이다. 은유는 이처럼 두 가지 질적으로 다른 평면을 상사성에 의해 연결시킴으로써 의미 작용을 일으킨다. 달은 하나의 기표로서, 그것은 수많은 희비애락의 기의들과 연결되어 있다. 그래서 달은 하나의 기호이다.

 

달은 TV이다라는 말은 실상 거짓말이다. 그러나 실상은 거짓인 것에 의해서 우리는 보다 높은 의미의 세계에 들어갈 수 있다. 일단 의미의 세계에 들어가고 나면 앞서의 거짓은 무의미한 것이 되고 만다. 손가락은 달을 가리킬 때만 필요한 것이지, 일단 우리가 달을 보고 나면 손가락은 더 이상 필요치 않다. 우리가 일단 개념(기의)를 파악하고 나면, 그것이 담겨 있던 그릇(기표) , 개념을 표현하는 형식 은 더 이상 필요치 않다. 이렇게 해서 기표가 은유적으로 표현하고 있는 의미의 세계로 들어갈 수 있는 것이다. 기표에 잡혀 있게 되면 은유를 이해할 수 없고 의미를 놓친다. 손가락(기표)은 달(기의)을 가리키고 나면 더 이상 불필요한 것임에도, 손가락만 보고 있는 사람들이 허다하다. 바꿔 말하면, 기호의 외시의미만을 직감할 뿐 함축의미를 파악하지 못하게 되는 것이다.

 

기호는 기표와 기의의 결합으로 이루어지지만, 우리의 지각 작용에 처음으로 포착되는 것은 기표다. 그래서 자크 라캉은 기표들의 우월성을 주장한다. 이것은 적어도 세 가지 중요성과 연관된다. 첫째는 기표가 기의를 무력하게 만들거나 혹은 기표가 기의의 행세를 하는 것이다. 이에 대해서는 방금 설명한 바와 같다. 둘째, 일단 기의가 파악되면 기표는 불필요해질 수 있지만, 기표가 기의를 어떻게 표현하며 어떻게 기의를 운반해 주는가에 따라서 우리가 파악하게 되는 기의가 달라질 수 있다. “말은 다르고 다르다.”는 이치가 여기에 있다. 보다 중요한 현상은 예술에서 일어난다. , (FORM)이 바뀌면 내용(內容)은 극단적으로 바뀔 수 있다. 어쩌면 내용은 형보다 앞서 미리 존재할 수 없다고도 볼 수 있다. 셋째, 기표는 본질상 은유이면서도, 그것은 환유의 역할을 할 때가 있다. 환유란 어떤 부분적인 것에 의해서 그것에 연결되어 있던 전체를 대표하는 것을 말한다. 가령 하나를 보고 열을 안다.”할 때, 하나는 열에 대한 환유다. 통계적 표본은 모집단(母集團)의 환유다. 신문에 난 자유의 여신상 사진은 미국의 환유다. 범인이 문고리에 남기고 간 지문은 그의 환유다.

 

기호학적 해석은 몇 가지 수준에서 행할 수 있다. 여기서는 두 가지만을 밝히기로 한다. 첫째 수준은 기표로부터 함축의미를 찾아내는 것이다. 기호를 이루는 기표가 어떤 형태를 하고 있으며 왜 그런 형태를 취하고 있나를 알아 보는 것이다. 둘째 수준은 신화(神話)를 발견하는, 혹은 신화를 만들어 내는 수준이다. 기의의 연쇄 고리를 신화라고 부른다. , 신화란 기의들을 이야기체로 엮어냄으로써 얻어진다. 간단히 말해서, 신화란 하나의 이야기이다. 기표가 나르는 기의들을 찾아낸 다음, 이들을 엮어 하나의 이야기를 만들 수 있을 때, 기호에 감추어진 신화는 발견되는 것이다.

기호는 이러한 담론을 부르는 초대장이다.

 

기호학 연습

 

앞서 소개한 Power/Master 맥주 광고를 가지고 간단한 기호학 연습을 해보자. 이 맥주 광고는 한동안 미국에서 말썽이 되었었다. 이 맥주는 알코올 함량이 매우 높아서 독한 일반 주류에 못지 않았다. 그러나 이런 사실이 말썽의 주원인이 된 것은 아니다. 이 맥주가 말썽이 된 것은 그것이 흑인 상대의 상품이라는 데서 비롯되었다. 상품명 Power/Master는 기표이다. 이 기표는 어떤 기의를 흑인 소비자들에게 일으키려 시도하고 있는가? 이 기표를 제대로 읽으려면 미국 사회에서의 흑인의 사회적 지위를 알아야 한다. 잘 아는 대로 흑인들은 아프리카 대륙에서 미국으로 끌려와 노예가 되어 참담한 고난의 인생을 살았다. 그 후 그들의 후예들은 해방을 얻었지만, 오늘날에도 그들은 아직 어두운 과거를 맘속에 간직한 채 살고 있다. 그들이 권력에 굶주려 왔고 노예가 아닌 주인이 되고 싶은 열망에 살아가고 있음을 그들의 지난 역사로부터 쉽게 짐작할 수있다. Power/Master맥주는 바로 이런 욕망에 겨냥한 상품이었다.

 

이 맥주가 권력자들을 상대로 한 상품이라면, 이 맥주에 대한 시비는 그것의 과도한 알코올 함유량 정도에서 끝났을 것이다. 문제는 권력의 주인이라는 외시 의미를 가진 이 맥주가 실상은 권력도 없고 주인도 아닌 흑인들을 판매대상으로 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Power/Master라는 기호가 감추고 있는 것은 이 맥주를 사 마시는 흑인들에게 어떤 함축 의미를 부여해 주고, 그것에 의해서 흑인들로부터 돈을 많이 벌어보자는 것이다. 따라서 Power/Master 가 갖는 외시의미는 실상 속임수다(그러나 이것이 속임수인 것은 우리가 이 기표의 함축의미를 눈치 챌 수 있을 때에만 알게 된다). 함축의미를 모른 채 외시의미에 매달리고 있는 한, 이 특정 예의 광고에서 우리가 기호학적으로 얻는 것은 없다.

 

 

그래서 우리는 함축 의미의 차원에서 이 광고를 분석해야 한다. Power/Master 맥주가 흑인들에게 불러 일으키는 함축의미들은 무엇일까? 그것은, 힘없고 주인도 아닌 흑인들이 이 맥주를 마시면 힘찬 사람이 된다.’,‘권력자처럼 된다.’,‘지배자처럼 된다.’,‘주인행세를 할 수 있는 사람이 된다.’는 것이다. 실제로는 이런 것들을 갖추지 못하고 있는 사람들이 이 맥주병을 손에 들게 되었다고 해서, 혹은 이 맥주를 마시고 개트림을 하며 만족하고 있다고 해서, 그들이 강력해지는 것도 아니고 주인다워지는 것도 아니다. 이 맥주의 상표는 흑인들에게 결핍되어 있는 것을 Power/Master 라는 기표에 의해 흑인들의 의식에 불러일으킴으로써, 맥주를 사 마시는 행위에 의해 그들의 결핍을 메우게 하려는 것이다. 맥주가 그들의 결핍을 메울 수 없음은 물론이다. 따라서 이 맥주가 불러일으키는 모든 함축의미가 허위 의식이다.

 

그런데 이 맥주를 사서 손아귀에 쥐어 들고 있을 때, 그리고 마치 강력한 지배자인 양 착각하고 있을 때, 그는 Power/Master의 모든 외시의미와 함축의미가 숨기고 있는 거짓을 산 것이다. 이런 착각은, 이 특정 기표가 이 맥주를 사서 손에 들고 있는 흑인에게, 마치 그것이, 혹은 독한 맥주가 그들에겐 없는 어떤 권능과 지배력의 환유로 받아들여졌기 때문에 온 것이다.

 

Power/Master 맥주의 기호는 어떤 다른 거짓을 숨기고 있는가? 좀 진부한 것이지만 적어도 두 가지를 더 지적할 수 있다. 첫째, 하필 그것이 다른 것이 아닌 맥주로 상품화된 것은 매우 의도적이다. 다른 술만큼 독한 술을 맥주라고 한 것은 명백한 거짓이다. “맥주는 술이 아니다.”라는 상투적인 말, 그래서 그것은 상습적으로 마실 수 있는 음료 정도의 것이라는 소비자의 타성을 겨냥한 상술이다. 음료가 술보다 더 많이 팔리는 것은 당연하다. 실제로 일반 술만큼 독한 맥주를 마신 후 힘있는 자나, 주인 행세를 하려면 어떤 행위가 나올 것인가? 실제로는 권력도 없고 주인의 신분도 아닌 흑인들이 Power/Master를 마신 후 할 수 있는 것이란 폭행이나 추태뿐이다. 흑인 식자들은 바로 이 점을 꼬집어 이 맥주가 흑인에게 의식적으로나 행위상으로 위해하다고 비판하고 나선 것이다. 권력과 주인의 신분이 없는 흑인들에게, 이 맥주를 마심으로써 결핍된 것을 충족시킬 수 있다는 허위 의식을 팔아 흑인을 착취하려는 것이라고 비평자들은 꼬집었다.

 

둘째, Power/Master의 두 영어 단어의 첫 음절들은 ‘Pa Ma’로 들린다. 이와 같은 유운은 또하나의 함축적 의미를 일으킨다. 영어를 사용하는 문화권에서 Pa아버지의 애칭, 아빠, Ma어머니의 애칭엄마를 뜻한다. 다시 말하면 Power/Master의 결합은 수사학적으로 볼 때 Pa & Ma ,‘아빠 엄마의 압운으로 치환된다. 이것은 흑인들에게 어떤 정념을 일으킬 것인가? 힘이 없어 설움을 받으며 오랜 역사를 살아온 노예들의 후예, 그리고 아직도 사회적 권력구조의 먼 변두리에서 전전긍긍하는 흑인들에게, Pa/Ma의 압운을 지닌 이 맥주는 보다 원초적인 위안을 주는 실체로 착각하게 한다. 서럽게 사는 사람들이 마시고, 강력한 지배자인 양 한바탕 기염을 토하고 나서 술이 깰 때쯤, 결국에 되돌아 오는 각성은 자신들이 여전히 힘없고 비천한 신분의 인간일 따름이라는 사실이다. 이런 서글픈 각성에서, 마치 엄마와 아빠에게 그랬듯이 푸념어린 응석을 부리고 하소연을 하기 위해 또 한잔 Pa/Ma에 비애를 헹궈보는 것이다.

 

강력하고 지배적인의 뜻을 갖는 정념과 의탁과 위로같은 부드러운 정념의 비유적 결합이 Power/Master 맥주 상표에 함께 들어있다. 이 맥주의 광고와 흑인 소비자들 사이에 작용하는 끌고 당기는 긴장이 정반대의 정념들 사이에 놓여 있다. 이 상반하는 정념들 사이에 일어나는 온갖 의미들을 엮어 자본주의의 신화를 만들 수 있다. 아니면, 이런 의미들의 고리를 통해 하나의 신화를 발견할 수 있다.

 

이런 신화들의 제작은 반드시 거짓이라고 말할 수 없다. 왜냐하면 기표들이 Power/Master 로고의 형태를 갖추어 하나의 기호로 성립되었을 때, 그것은 차후에 누군가에 의해서 어떤 식으로건 의미 작용에 내맡겨지게 마련이기 때문이다. 더욱이, 기호가 임의로 만들어진 것처럼, 그것은 또한 임의로 해석될 가능성의 구실을 허용했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기호학적 해석이 전혀 멋대로 된 수속을 따르는 것은 결코 아니다. 기호를 해석할 때는, 진실과 허위의 동일한 평면에서 기호가 내포하고 있는 진실을 파악하기 위해 등가의 논리를 사용하게 된다. 무엇과 무엇 사이의 등가인가? 그것은 주어진 기표와 해석자의 자연스러운 이해의 느낌”(,위에 보인 신화가 내표하는 새로운 기의들)사이의 등가이다. 그러나 이러한 등가는 정확한 등가가 아니라 어디까지나 은유적 등가이다. 바로 이 점에서부터 하나의 거짓이 생산될 수 있다. 그러나 의미의 생산은, 기호를 만든 사람의 언어적 평면으로부터 해석자의 느낌의 평면에 동원된 다른 언어적 평면으로 번안됨에 의해서만 이루어진다. 이러한 번안의 성격을 보면, 그것은 불가피하게 모호성을 허용한 채 주어진 기표나 언어들을 다른 기표나 언어들로 다소 부정확하게 옮겨 놓는 작업이다.

 

의미 작용이란 단순히 언어의 한 수준에서 다른 언어로 옮기는 조작이며,의미란 단순히 이러한 번안의 가능성을 가리킨다. 좀 극화해서 말하자면 인간의 초언어적 담론은 단순히 일련의 거짓이고, 커뮤니케이션은 일련의 오해라는 것으로 귀결된다.. 기호학자들에겐 거짓과 진실은 하나이고 같은 것이다. (Greimas, 1990, pp.78).

 

이 인용에서 그레마스가 말하는 거짓이란 은유가 갖는 모호성을 가리키는 것임에 유의해야 한다. 우리가 은유의 세계에 살고 있는 한, 이러한 부조리는 어쩔 수 없는 인간의 조건이다. 이런 조건에서 어떻게 진실을 증폭하고 고의적으로 생산되는 거짓을 극복할 수 있는가가 문제인 것이다. 이를 위해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개인 단위에서 이루어지는 수많은 기호학적 연습이다. 수많은 사람들이 기호학적 담론을 통해 어떤 공감대를 형성할 때, 개인적 해석관례와 집단적 관례 사이의 문제성 있는 차질은 홀연히 사라질 것이다. 이렇게 해서 얻어지는 공감대는 우리를 어떤 진실에 접근시켜 준다.

 

Power/Master 로고는 모호한 기호이기 때문에 그 의미를 파악하려면 보다 넓은 모호성의 그물을 쳐야 한다. 모호성에 의해 모호성을 제거하는 것을 필수 다양화 원칙이라고 한다.(Ashby, 1956; Weick, 1969) 모호한 것에 확실성을 가지고 가봤자 얻어지는 게 없다. 앞서 제시한 신화 제작의 접근 방식은 애쉬비의 원칙을 따른 것이다. 그러나 신화 자체가 모호하다는 이야기는 아니다. 위의 신화는 이 원칙에 의해 어느 정도 모호성을 제거하고 난 후에 얻어진 것들이다. 이와 같은 과정을 통해 Power/Master 맥주의 로고가 은연중에 내포하고 있는 포착하기 힘든 중심 메시지에 접근할 수 있다. 바로 이 점이 기호학적 접근방식의 위력이다. 한편 신화 제작을 통해 얻어지는 유도된 기호체들에 의해서 어떤 새로운 메시지를 사람들에게 전할 수 있다.

 

여기서 거짓이란 무엇이며 그것이 어떻게 일어나는가를 밝힐 필요가 있다. 거짓은 여러 가지로 정의될 수 있지만, 여기서는 네 가지 예만을 들기로 한다. 거짓은 첫째, 어떤 자연적 사실과 그것에 대한 표현의 차이다. 가령 실제 현상과 맞지 않는 어떤 과학이론(모든 이론은 은유다:Brown,1977) 은 거짓을 품고 있다. 둘째, 어떤 느낌이나 생각과 그것에 대한 표현의 차이는 바로 그 표현을 거짓으로 보이게 한다. 이 두 가지 예는 기표(혹은 은유)가 기의를 제대로 표현하지 못한 기표의 제한성에서 비롯된 것이다. 이런 거짓에는 고의성이 없거나 적지만 문제성이 없는 것은 아니다. 다음의 두 가지는 고의적 거짓이기 때문에 진정한 거짓이고 우리의 특별한 주의를 요청한다. 셋째, 진정한 의미에서의 거짓(, 우리가 거짓이라고 상식으로 알아 온 거짓)은 기표와 기의간의 임의의 관계를 어떤 이해 관계를 지닌 목적을 가지고 뒤틀어 이용할 때 생긴다. 마지막으로, 무엇을 느꼈음에도 이떤 이유로 그 느낌을 숨기고 표현하지 않음은 거짓이다. 침묵은 거짓이다. 그것은 침묵하는 자의 자기기만이기도 하고, 다른 사람에게 말없이 어떤 계략을 쓰는 행위이기도 하다. “침묵은 금이라고 하지만, 그것은 거짓에 지불하는 뇌물이다.

 

사실이란 무엇인가? 우리는 그것의 일부밖에 알 수 없고, 그것의 완전한 정체는 늘 모호한 기표의 베일에 싸여 있다. 사실의 완전한 정체는 항상 기표 저쪽에 숨어 있다. 과연 기표는 모든 것에 우선해서 우리의 지각 작용에 영향을 미친다. 기표가 우리의 지식에 투영하는 것만큼밖에 우리는 알 수가 없고, 그만큼밖에는 체험할 수가 없으며, 기표의 능력만큼밖에는 표현할 수가 없다. 우리의 실질적 관심은 기호에 배태되는 거짓의 정체와 성격을 파헤치는 것이다. 동시에 다른 한편으로 관심을 기울여야 할 것은, 기호에 의해서 어떻게 진실을 더 분명하게 드러나게 할 수 있는가를 궁리하는 일이다.

기표의 성격에 따라 그것이 내포하는 거짓의 깊이가 다르다. 다른 광고에 비해, Power/Master 맥주 광고는 매우 노골적이고 그만큼 모호성이 약했기 때문에 시장에 나오자마자 말썽의 초점이 되었다. 결국 이 맥주 회사는 한동안의 논란 끝에 맥주 이름을 바꾸기로 했다. 기호에 내재하는 진실 대 허위의 비율은 우리가 사용하는 기표의 종류에 따라서, 그리고 선택된 기표들을 나르는 매체 테크놀로지의 성격에 따라서 달라진다.

 

분명히 나쁜 기표와 나쁜 테크놀로지가 존재한다. 이런 것들을 나쁘게 사용하려는 의도가 존재하고, 그런 의도를 가진 사람들과 조직기구도 존재한다. 대체로 우리가 대중이라고 이해하고 있는 일반 사람들은 그런 의도의 피해자들인 것이다. 기호학적 해석은 거짓만을 벗기는 것이 아니라. 거짓 뒤에 숨어 있는 것마저 폭로하는 사명을 갖는다. 기술상으로 보자면, 기호학은 결국 거짓에서 새로운 의미를 찾아내며 거짓을 감시하는 학문이라고도 할 수 있다. 많은 사람들이 기호학적 연습을 할 것을 이미 제안했거니와, 이러한 기호학적 담론이 바로 기호의 역사에 합류하는 행위인 것이다. 사람이란 무엇인가? 사람은 하나의 기호이다. 그래서 인류 역사는 기호의 역사와 나란히 흐른다. 이러한 흐름 속을 의미있게 흐르려면 거짓으로부터 진실을 가려내는 혜안(慧眼)이 필요하다.

< 미디어 신화, 1993, 경문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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