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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의 변조

by 처사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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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의 변조

 

김 경 용 ( 미국 마운트 버논대, 경제학 )

 

 

실로 다양한 문화의 정의들이 존재한다. 수많은 문화의 정의로부터 문화의 여러 가지 면모를 이해해 볼 수 있다. 그러나 문화의 흘러가는 방향은 어디인가? 이것은 간단히 대답을 얻을 수 없는 문제이다. 여기서는 대중문화를 중심으로 삼아 문화의 향방을 알아보려 한다.

 

알랜 오코너는 문화를 하나의 능동적이고도 갈등적 과정으로 봄으로써 서로 상충하는 문화의 과정들과 문화산물들을 날카롭게 대조시킨다. 그의 문화의 견해가 갈등을 전제하고 있는 것은 우선 여러 문화들의 존재를 묵시한다. 오코너가 말하는 하나의 과정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좀 다른 차원에서 재조명할 필요가 있다.

 

여기서 다른 관점을, 문화가 갖는 이중성(二重性), 즉 문화가 갖는 통합력과 문화가 일으키는 변별력을 중심으로 논의하고자 한다. 이들 두 가지 힘은 서로 상반하는 것들이면서도 문화라는 하나의커다란 과정과 틀속에 공존한다. 보다 근본적으로는 커뮤니케이션이 바로 이 상반하는 힘의 원천이면서, 동시에 이들 상반하는 힘 사이의 갈등을 조정하는 힘이 된다.

 

이 논의의 기본입장을 우선 밝히자면, 여러 다른 문화들의 가치들과 유의성은 서로 상대적으로 결정되며 그 하나하나가 지니는 고유한 차이에 의해서 존재 이유를 지닌다는 문화적 상대론(문화적 보편론에 반해서)의 입장이다. 이것은 현대 문화현상을 다룸에 있어서 문화의 통합력보다는 문화의 변별력에 보다 강조를 둠을 의미한다.

 

문화의 통합력

 

우선 문화의 통합력이 어떻게 인류의 생활권에 명시되고 있는지 살펴보자. 문화의 통합력이란 하나의 문화가 어떤 공통성을 중심으로 일어나거나, 혹은 그것이 서로 다른 것들을 조작하여 어떤 하나의 시각에 따라 균질화시키는 것을 말한다. 문화의 통속적 정의는 이와 같은 통합력으로부터 쉽사리 얻어진다. , 서로 다른 개체들이 공통된 시각을 공유할 수 있을 때 하나의 문화가 형성된다. 커뮤니케이션이 갖게 하는 조작적 과정이다. 이러한 커뮤니케이션 과정은 어떤 국소지역에 존재하는 여러 이질적 문화 요소들을 어떤 공통특성이나 이념 밑에 단결시키는 조작이다. 예로, 싱가포르는 원주민을 비롯해서, 중국계, 일본계 등등 여러 종족으로 이루어졌다. 이러한 국민들을 단합시키기 위해서 싱가포르 정부는 대중매체를 통해, ‘하나의 국민, 하나의 국가, 하나의 싱가포르이란 표어로 대대적인 캠페인을 한다. 이런 조작은 문화적 구성원의 차이들을 약화 내지는 소거시킴으로써 내세운 공통성을 더욱 돋보이게 하고 극대화시켜 나간다. 이렇게 함으로써 커뮤니케이션은 문화적 통합체에 주체의식을 고취하고, 그것에 생명을 주며, 그것을 만인의 존경을 받아야 할 집단 의식으로 승화시킨다. 이러한 통합력의 작용이 없이 문화는 일어나지 못한다. 기존문화에서 통합력이 사라지면 그 문화는 붕괴한다.

 

따라서 하나의 문화는 그것이 문화의 구성 분자들이 함께 나누는 공통성 혹은 균질성에 의해서 알아볼 수 있게 된다. 문화의 통합력은 두 가지 차원에서 부단히 작용한다. 하나는 특정 문화권 팽창의 수준이고 다른 하나는 이미 생성된 문화를 보전하는 차원이다. 이 두 가지 수준은 다소 상반된 접근방식을 취하기 때문에 서로 갈등 관계에 있다. 공교롭게도 현 세계에는 두 가지 커다란 문화의 흐름이 있다. , 한편에선 문화 팽창주의가 단일 문화주의를, 다른 한편에선 문화 보전주의가 다원 문화주의를 내세우며 갈등한다. 예로, 미국과 캐나다는 서로 국경을 나누는 인접국들로서, 두 나라 모두 여러 다른 문화들과 여러 다른 종족들로 이루어진 점이 같지만, 문화정책은 정반대로 다르다. , 캐나다 정부는 1971년에 공식적으로 다원문화주의를 공표함으로써 국경 내에 공존하는 여러 다른 문화의 기본권을 인정하고 그들을 유지 보전하는 방향으로 나아가고 있음에 비해, 미국은 아무 공식적 입장을 취함이 없이 단일문화주의를 고취하고 있다. 미국이 단일문화주의의 입장을 취하는 것은, 소위 용광로라는 은유에서 찾아볼 수 있다.

 

그러나 문화의 통합작용은 어디까지나 개체문화의 생성과 유지를 가능케 하는 국소적 지역현상으로 시작됨을 알 수 있다. 따라서, 문화적 통합작용이란 일차적으로 개체문화의 생성을 위한 국소적 조작이라고 볼 수 있다.

 

국소적 조작에 의해서 어떻게 다른 문화들이 출현되는지 잠시 역사적으로 조감해 볼 필요가 있다. 오코너에 의하면, 문화라는 어휘는 영국에서 발생했는데, 문화라는 개념 자체가 시대에 따라 다른 의미를 가지고 있었다. 1800년대 이전에는 문화는 농경공정과 연결되어 있었다. 그러한 문화의 의미는 자연 속에 무엇인가를 배양하는 조작을 지칭했다. 따라서 문화는 애당초부터 인위적 조작을 의미했다. 양곡 문화같은 것이 문화의 형태였다. 이것은 문화가 아직 자연과 공존하면서 문화가 자연 위에 조작을 가하기 시작했음을 뜻한다.

 

그러던 것이 문화라는 말이 사회공정을 기술하는 데 쓰여지기 시작했다. 이것은 당시 새로 일어나고 있던 산업화에 대한 하나의 반작용으로서, 산업화라는 새로운 사회공정으로부터 어떻게 전통적 생활양식을 보호할 것인가 하는 관심에 기인하는 것이다. 즉 전통적 생활양식을 혼돈시키려는 임박한 산업화로 말미암아, 전통적 생활양식을 비로소 하나의 문화로 보게 된 것이다. 여기서 주의를 기울여야 할 점은, 소위 전통적 생활양식은 귀족들이 누리며 즐기던 생활방식이라는 것이다. 귀족들의 생활방식은 상노(床奴)를 부리고 평민 위에 군림하던 생활방식으로서 그것의 문화성은 지배자만의 시각에 의해서 정의되었다. 평민과 상노들의 토속적 국소 문화가 있었음은 물론이다. 이런 문화는 실상 어느 문화보다도 깊은 역사 인류 역사와 같은 깊이의 역사 를 가지고 있으며 민속문화라고 불린다. 그러나 이것들은 지배자들의 안중에 없었다. 게다가, 한편 심한 경우에는 그들의 문화는 근대주의들에 의해서 파괴되기도 했다. 예로 미국 본토 인디언들의 토속문화는 유럽에서 온 새로운 지배자 문화에 의해서 억압되었다. 새로운 지배자의 눈에 인디언의 토속문화는 야만문화로 존재가치가 없었던 것이다.

 

그래서 19세기 전반에는, 문화라는 개념이 농경사회를 중심으로 형성되었던 전통적 생활습속의 총체를 지칭하면서도, 거기에는 귀족과 상민간의 갈등관계 위에 형성된 문화가 존재했다. 특히 이러한 문화가 일으킨 산물 중 귀족사회와 그것이 일으킨 예술들이 문화의 핵을 이루었다. 그래서 문화란 귀족사회가 소유하던 귀족취미와 예술같은 것들로 대표되었다. 그런 문화는 농부들의 것이 아니었다. 어쩌면 귀족과 상민간의 문화적 갈등은 상민 쪽의 문화공백과 귀족편의 문화향유라는 두 가지 상반하는 인식상태에 나타나는 것으로 귀족들이 누린 문화적 우월감의 원천이었다.

 

소유되는 어떤 것으로서의 문화라는 개념은 19세기 후반의 미국 사회에서도 계속되었다. 문화는 미국사회의 정상에 위치하는 지배계급들의 이상주의와 지성을 지칭했으며, 이런 것들은 공장 노동자들이나 농부같은 하층계급 사람들의 것이 아니었다.

 

이러한 문화는 그것이 사회구조의 상층부에 존재하고 있었기 때문에 왕왕 상위문화’, ‘고급문화같은 말로 표현되었고, 문화는 사회적 엘리트들의 전유물이었다. 여기서 알 수 있는 것은 문화라는 것이 하나의 사회지표였을 뿐만 아니라 사회를 계층화하는 국소적 조작력이었다는 점이다. 문화는 문화를 가진 자와 문화를 갖지 못한 자로 사회를 분리해 냈다. 미국사회에서 문화를 가진 자는 고귀한 엘리트들이었고, 문화를 못 가진 자들은 일반공중들이었다. 다시 말하면 문화는 어떤 특수 계층을 위한 하나의 사회적 특전이었다.

 

오코너는 소유된 문화로서의 문화(이를테면 귀족문화)창출된 문화로서의 문화를 날카롭게 대조시킨다. 특히 후자를 유행문화라고 부른다. 19세기 말까지의 문화에 대립해서 일어난 20세기의 유행문화는 소위 문화라는 것을 갖지 못했던 일반 공중이 생산한 문화다. 유행문화는 일반공중 사이에서 작용하는 문화 공정들을 지칭한다. 그러나 유행문화는 오랜 옛날부터 많은 사회에서 놀이, 노래, 농담, 민담, 전설, 신화 등의 형식으로 민초들과 더불어 싹트고 자라 왔음이 사실이므로, 유행문화를 20세기 현상으로 국한할 필요는 없다. 오히려 그간 무시당해 온 민속문화 혹은 민간문화가 20세기에 와서 재발견되고 유행문화라는 이름으로 새롭게 조명되고 있는 것임을 강조할 필요가 있다. 유행문화는 부분적으로, 민속문화를 도시화한 후 그것을 수용하고 있다. 또 한가지 강조할 것은, 소위 상위문화가 무시해 온 민속/민간 문화가 유행문화라는 표찰을 얻었지만 이 표찰 자체가 어느면 손상된 권위를 애당초부터 지니고 나타난 점이다. , 유행문화에는 흘러가는 일시적 문화라는 함축 의미가 붙어 있다. 다시 말하면, 그것은 고전으로 남을 수 없는 떠돌이 문화거나 저질문화라는 인상을 준다.

 

어쨌거나 이 새로운 유행문화의 등장으로 말미암아 종전의 소위 문화는 왕왕 고전문화 혹은 고등문화로 상대적인 승격을 하게 된 것이다. 갠즈, 오코너는 문화에 서열적 등급을 매기는 것은 무의미하다고 본다. 그러나 이와 같은 분화에서 일어나는 것은, 앞서의 문화가 뒤따라 일어난 문화로 말미암아 서로 다른 문화적 특색들을 각각의 핵으로 삼아 독립적으로 통합을 이루는 현상이다. 여기서 간과해선 안될 매우 중요한 점은, 유행문화는 문자 그대로 흘러가는 문화로서 변화무쌍한 변천을 겪음에도 그것은 불멸의 확실한 기반을 지니고 있다는 사실이다. 그 기반은 민초들의 가슴에 있다. 민간문화는 괄시당해 온 문화이기 때문에 보이지 않는 문화였지만, 그것이야말로 민초들로부터 비롯되어 민초들의 가슴에 편만히 수용되어 온 진정한 민중의 문화’, 다시 말하면 민중이 소유한 문화이다.

 

특전으로서의 고전적 문화와 일반공중들이 창출한 유행문화를 뒤이어 대중문화가 일어났다. 이것은 20세기 중반에 실용적으로 발전된 새로운 대중매체들(특히 라디오, TV, 잡지, 영화)를 중심으로 생산되어 일반 대중에게 보급된 문화이다. 특히 이 문화는 서구 사회의 경제 엘리트들이 상업적 영리를 목적으로 대중매체를 이용하여 생산한 문화다. 따라서 대중문화는 대중의문화가 아니라 대중에게 부과된문화다. 때때로, 대중 문화는 권위적 독재주의 정치구조의 위로부터 밑으로 내려오는, 어쩌면 관제문화의 성격마저 띠는 수가 있다. 그래서 대중문화의 메시지는 다분히 전체주의적이다.

 

대중문화라는 말은 세계 제2차대전을 전후해서 일어난 헐리우드 영화산업, 미국 라디오망, 사진, 잡지 등의 등장과 더불어 만들어진 말이다. 대중문화는 애초부터 소위 문화 산업으로 일어났으며, 마치 생산공장의 일괄작업식으로 쓰레기같은 문화 산물들을 생산해 냈다. 그런 관계로 대중문화는 고급문화의 두 주어휘, 독창성개인성을 도외시하고 문화산업의 운영 이사들이나 운영 위원회의 작업 지시에 따라 오락으로서의 소비문화 산물들을 대량 생산해 낸다. 그래서 오코너 같은 비평자에겐, 이러한 대중문화는 상업적이고 조작적 의사(擬似)문화로 보인다.

 

민주화가 유행처럼 퍼지고, 기계공학화가 이를 뒷받침하는 현대에 들어오면서 대중문화는 마치 민주문화라는 함축의미마저 갖게 되었다. 현대의 대중문화는 편재성 개념 주변에 다음과 같이 정의된다. , 대중문화란 산업화된 사회의 구성원들이 모든 다른 구성원들과 공유하는 모든 것으로 정의된다. 이를 바꿔 말하면, 산업사회에서 구성원들에 의해 보편적으로 공유되는 문화는 대중문화이고, 이런 보편적 공유에 미치지 못하는 것은 하부문화가 된다. 그러나 보편성 혹은 편재성이 대중문화를 민주주의 문화로 만들 수 없음을 강조할 필요가 있다. 편재성은 대중의 자발적 동의없이 대중에게 이데올로기적으로 부과될 수 있기 때문이다. 편재성은 공유의 기회를 증가시킬 것임에 틀림이 없지만, 그러한 공유를 민주화로 간단히 간주할 수는 없다.

 

현대 대중문화의 놀라운 특징은 재래의 민간문화 혹은 유행문화를 엄청난 구매력을 가지고 흡수해 버리는 데 있다. 일반공중이 창출한 문화는 유행과 인기도에 의해 대중문화 산물의 시장에서 시험된 후, 시장에서 생존할 수 있음이 밝혀지면 대중문화 속으로 흡수되어 버린다. 이것은 대중문화가 지니는 특수한 통합력이다. 이로 말미암아 유행문화는 대중문화에게 빼앗기고 있다. 그러므로 현대에 와서 일반공중은 다시 한번 자기네 문화의 사실상 상실, 따라서 또 다른 류의 문화의 부재를 경험하고 있다. 예로, 동부 아프리카에서 일어난 랩 음악이 미국에 들어와 흑인 사회에서 하나의 유행문화를 이루자 그것은 이내 대중문화에 흡수되고 말았다. 그것은 거리의 하부문화로 떠돌다가 상업 음반산업의 냉랭한 세계로 옮아간 것이다. 실로 흑인들은 그들의 흑인영가, , 블루스, 재즈, 스윙음악 같은 것들을 미국의 대중문화에 속속 잃어왔다. 빼앗긴 문화들은 대중문화로 탈바꿈하여 일반 공중에게 분배되지만, 일반공중은 부과된 문화 산물이 인기를 결정해 주는 도구이거나 구경꾼의 입장을 면치 못한다. 더욱이나 대중문화는 일반공중들의 취미에 영합하며 유지되는 문화이기 때문에 괄목할 만한 문화의 저속화가 일어나고 있다.

 

오늘날 세 가지 문화들 지난 세기로부터 온 귀족문화, 금세기에 일어난 유행문화와 대중문화 은 공존한다. 이 세가지 문화의 하나 하나는 그것이 가지는 고유특성에 의해서 개별문화로 통합되어 있다고 불 수 있다. 지금까지의 논의는 이미 각개 문화가 그 나름의 총체로서 존재하게 되었음을 기술하는 것이지만, 이런 기술과정에서 이미 분명해진 다른 한 가지 사실은 이 개별적 통합체들이 문화라고 하는 커다란 틀 속에 공존하는 계열체들로서 서로 다른 지위를 가지고 존재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그러나 여기서 주목할 것은 매체주도형 대중문화는 고급문화(귀족문화)와 저급문화(유행 문화)를 모두 수용할 잠재력을 가지고 있는 점이다. 대중문화가 고급문화권을 침범하여 문화적 산물들을 일반 공중에게 방류함으로써 대중문화는 고급문화의 주매체인 채 한다. 실제로 일어나는 현상은 고급문화가 대중문화에 내파(內破)되는 것이다. 더욱이, 앞서 지적했듯이 대중문화는 유행 문화를 흡수함으로써 왕왕 대중문화는 유행 문화의 동의어처럼 쓰이기도 한다. 결론적으로 말하여 대중문화는 이 시대의 통합력을 대표한다고 볼 수 있다. 대중문화의 통합력은 실로 엄청난 위력으로 모든 것을 흡수하여 뒤섞어서 균질화시키고, 그것을 자연스럽게보이도록 만들어 놓았다. 과연 대중문화는 패권적(覇權的) 힘인 것이 틀림없다. 이런 이유로 모든 문화이론이 한결같이 어떻게 대중문화의 횡포로부터 다른 문화형태를 방어할 것인가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

 

문화의 변별력

 

귀족문화는 농경사회에 연계되어 있었기 때문에, 또한 유행문화는 민초로부터 일어났기 때문에 이런 문화들은 자연에 접촉되어 있었다. 그러나 대중문화는 자연에서 분리하여 온갖 문화들의 산물들을 조작 재생산함으로써 일어나는 문화이기 때문에 거의 순전히 인위적 문화다. 이것은 문화가 천부의 자연으로부터 인위적 문화로 자리를 바꾸고 있음을 의미한다. 대중문화 시대에 와서 문화에 의한 문화의 조작은 극도에 이르러 소위 과실재성을 생산함으로써 현대인들에게 순전히 인위적 환경을 마련하고 있다. 대중문화는 현대인의 통합된 생활환경을 일으키고 있지만, 그것은 동시에 대중문화 자체를 다양화한다.

 

구문화는 귀족들이나 문화적 엘리트 계층에게만 존재하는 그러한 문화였다. 따라서 구문화권에서는 문화의 부재가 일반 평민들의 상황을 특징짓고 있었다. 마르크스주의 용어로 다시 표현하자면, 귀족문화는 유산계급의 문화였을 뿐 무산계급에게는 없는 것이었다. 문화의 이와 같은 이분법은 사람들을 문화적으로 월등한 엘리트와 문화적으로 열등한 대중으로 갈라 놓았다. 이와 같은 문화적 불평등은 이미 유산계급과 무산계급 간에, 혹은 엘리트와 대중 간에 갈등의 여지를 배태하고 있었다. 그러한 귀족문화가 유행문화와 맞서게 되었고, 이 둘은 다시 대중문화와 맞서게 되었다. 이에 따라 유산계급의 전통적 고급문화는 민속문화와 대중문화에 맞서는 대항적 문화로 탈바꿈하였다.

 

그런데, 문화비평자들이 우려하는 것은 대중문화가 앞서의 문화를 파괴하거나 대체할지도 모른다는 점이다. 그들에 의하면, 대중문화는 전통적 고급문화의 영역을 침범하여 그것의 정기를 빼앗고 변조하여 누구나 가져 볼 수 있는 헐값의 문화로 퇴락시키고 있다. 앞서도 지적했거니와, 대중문화는 고급문화만을 침범한게 아니다. 민속문화도 같은 운명을 당하고 있다.

 

대중문화의 진정한 힘은 팔아치우는 데있다. 이것은 엄청난 힘으로서 그것은 기존문화와 그것의 생산물들을 조작하여 상품으로 재생산해 내고 있다. 과연 대중문화가 팔지 못하는 것이란 단 하나도 없다. 그것은 이데올로기를 상품화하고, 종교마저 팔아치운다. 페르샤만 전쟁이 나자 대중문화 시장은 전쟁의 영상을 요모조모 팔았다. 예로, 사막 위장복, 사막의 방패 콘돔, 사담 후세인 화장지(化粧紙), ‘우리는 군대를 지지한다라는 표어가 새겨진 나일론 깃발, ‘사막의 폭풍 작전단추, 중동지역 지도 등등이 제조되어 날개 돋힌 듯 팔렸다.

 

대중문화의 이와 같은 판매력은 대중문화가 소비문화를 필요로 함을 암시한다. 실제로 그것은 소비문화를 일으켰다. 자연히 소비문화는 소비자들에게 팔려 나갈 문화산물의 영속적 공급을 필요로 한다. ‘영속적공급이 암시하는 것은, 구조적으로 문화산물이 문자 그대로 소모품이어서 얼마 후 닳아빠지거나 버릴 수 있는 특성을 지녀야 함을 뜻한다. 한편 소비문화는 소비행위의 즐거움을 한없이 부추기며, 이를 위해서 문화산물의 다양화를 꾀한다.

 

20세기 후반부터 일어난 새로운 문화현상은 보드리야르가 말하는 모조이다. 문화의 모조는 기존문화를 죽인 다음 그것을 인위적으로 부활시켜 새로운 문화산물로 재생산 복제해 낸다. 모조의 중요한 조작은 복제 재생산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차이를 변조해 내는 것이다. 여기서 차이 변조라 함은 실제로는 다를 것이 없는 것을 조작하여 다른 것처럼 만들어 내는 조작을 일컫는다. 바로 이것이 대중문화의 진정한 또 다른 힘이다. 대중문화의 차이변조는 문화의 다원화를 조장한다. 이 새로운 상황을 모조문화라고 부를 수 있다. 모조문화야말로 대중문화의 재생산력을 영속화하는 힘이다.

 

모조문화와 소비문화에서는 차이, 선택, 판매, 소모하는 네 가지 변수가 중요하다. 첫째, 차이는 모조문화의 주특성이다. 갠즈는 대중문화를 저급문화로, 귀족문화를 고급문화로 부르는 것이 잘못이라고 지적했다. 같은 맥락에서 볼 때, 모조문화 속에 한없이 분화하여 일어나는 다원적 문화들 앞에서 문화의 등급이란 무의미하다. 다만 차이만이 의미를 일으킬 뿐이다. 과연 갠즈는 취향의 차이에 착목함으로써 서로 다른 취향 공중들을 위한 취향문화들의 공존을 역설했다. 차이만이 유일한 가치를 결정하며, 문화 간의 우열은 무의미하다고 보았다. 이것은 마치 차이가 문화의 민주화를 이룩해 주는 꼴이다. 차이의 수사학은 설득력이 크다. , 차이에는 높고 낮음이 없다. 모든 문화는 같은 수준에 있는 것으로, 다만 그것들의 고유성은 차이에 의해서 특성지어지며 존경되어야 한다고 한다. 문화는 서로 비교되는 것이 아니라 서로 대조될 뿐이다. 이런 수사학은 문화산물의 높고 낮은 차이를 타파함으로써, 공평하게 존경받아야 할 문화 산물들이 무한히 생산될 길을 터 놓았다. 차이 개념의 수평화는 어쩌면 문화의 단차원화를, 그럼에도 단차원화된 문화 속에서 오직 차이만이 유혹적 모습으로 온갖 변모를 하는 그런 문화를 초래할지도 모른다. 오직 차이의 변조만이 문화에 생기를 준다.

 

차이는 선택이라는 변수에 자유를 준다. 가치가 취미로 치환된 상황에서, 문화의 우열을 눈치봄이 없이 어떤 문화를 각자의 취미에 따라 선택하면 되는 것이다. 이런 상황에서 취미는 선택이라는 매우 단순한 의사결정으로 취환된다. 좋아하든지혹은 싫어하든지정감적 의사결정에 의해서 어떤 문화가 선택된다. 모조문화 속에서도 지성적 의사결정은 불필요하다. 결국 차이가 주는 자유란 의식의 번거로운 비판을 면제해 주고 차이의 좋고 나쁨에 즉흥적으로 반응하는 단순판단을 허용하는 자유이다.

 

지성적 의사결정보다 정감적 의사결정이 우위에 있는 것은 모조가 수많은 문화적 선택지를 생산판매하고 있다는 사실에서 온다. 선택된 것은 소모되도록 운명지어지기 때문에 문화산물의 특성을 오래 심사숙고할 필요가 없다. 복제들은 얼마든지 있고, 하나가 마모되면 버리고 다른 것을 사면된다. 예를 들면, 일회용 콘택트 렌즈, 일회용 면도날, 일회용 기저귀, 일회용 주방용구 등이 그런 것들이다. 문화산물들의 대량복제는 문화산물들 자체를 쉽사리 버려도 되는 것으로 비하시킴으로써 가능해졌다.

 

모조문화는 그 내부에 반문화의 생성을 억제하지 않는다. 오히려 반문화의 산물들을 모조문화의 생산자료로 삼는다. , 대중문화를 조작적이고 착취적 문화로 인식하는 대중 속의 소수자들은 패권주의적 대중문화에 대항해서 그들 나름대로의 하위문화들을 일으킬 수 있다. 그러나 모조문화는 주류문화(, 대중문화)와 하위문화를 동시에 수용하고 차이변조를 더욱 더 촉진한다. 또한 모조문화 속에서 일어나는 차이변조는 각 문화와 그 문화회원들을 고립화시킨다. 그들에게 문화적 우열의 표찰을 제거하는 대신 모든 문화의 구성원들에게 하나의 공통된 행위, 즉 소모에 적극적으로 가담할 것을 촉구하고 있다.

 

차이 개념이 갖는 문제성들을 종합하면 다음과 같다. 첫째, 차이 개념은 문화의 등급을 무의미하게 하고 다만 취미의 차이를 조장한다. 둘째, 소비문화에서 차이 개념은 문화산물을 버려도 되는 것으로 비속화한다. 셋째, 차이 개념은 소비자를 정서적으로 조작한다. 이런 것을 달리보면, 차이는 다분히 변덕스런 선택과 소모를 자연스럽게 유도한다.

 

대중문화가 일으켜온 문화의 비속화 현상으로부터 돌이켜 보면, 갠즈가 문화의 서열적 등급을 반대하는 것은 문화의 차이에 대한 둔감화라는 하나의 이데올로기처럼 들린다. 대중문화의 소비자들은 가령 랩 음악이 갖는 문제성에 대해 둔감하다. 문제있는 것에서 문제를 보지 못하는 것이 문제인 것이다. 랩 음악의 가사는 파괴적 에너지를 가진 해학과 풍자의 수사학을 수용하고 있다. 그러나 이 사실이 문제가 되는 것이 아니다. 반대로 랩 음악이 채용하고 있는 형식 때문에 이 에너지가 소진되는 것이 문제이다. 랩 음악은 음악의 전통적 음역을 매우 단조롭고 빠른 절분음으로 축소하여 방정맞은 율동에 동기(同期)시킨 형식이다. 그래서 어떤 랩 음악을 들어도 그 투가 같다. 이러한 악곡 형식 때문에 주도문화에 의해 거부된 참담한 흑인 하층민들의 소리는 하나의 투쟁으로 들리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누가 들을까봐 재빨리 푸념하는 진부한 타령조의 투정으로 들린다. 경망스러운 좁은 음역의 절분음은 흑인 하층민이 외치고 싶은 소리를 떳떳하게 전달하지 못하고 우스운 여흥으로 만든다. 그래서 전에 들어보지 못했던 기이한 오락적 율동은 대중문화에 팔려가고 있을지언정, 그것이 숨기고 있는 파괴적 에너지는 아무런 사회-정치적 힘을 격발시키지 못해 왔던 것이다. 형식이 바뀌면 내용이 바뀐다. 흑인의 이데올로기는 단조로운 절분음의 형식 속에서 분쇄되고 있다. 그럼에도 여기서 차이를 변조하는 것은 틀린 가사들 뿐으로, 가사의 차이 변조에 의해서 다른 수 많은 랩 음악이 생산된다. 이런 음악을 만들기 위해 특별난 음악교육이 필요없고, 천재를 필요로 하지 않는다.

 

종합하면, 대중문화가 허용하는 문화의 변별력이란 대중문화 산업이 부단히 조작하는 차이변조에 소비자를 민감하게 하는 힘이다. 그러나 이성적으로 볼 때, 차이 개념은 차이 자체를 무화(無化)한다. 이것은 역설이다. 차이에 의해서 진부한 차이만 풍성해지고, 고급스런 차이는 사라져 버린다. 이러한 민주적차이는 분명히 문화에 온 질병과 같은 것이다. 그것은 문화를 진부화하고, 결국 버릴 만한 것으로 비하시킨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차이변조로 생명을 얻는 대중문화가 왕성한 재생산력과 판매력을 가지면서 타문화에 왕성한 침투력을 보이는 것은 신기롭다. 그러나 그것은 차이의 민주화에 의해 차이 변별기능이 마비된, 이를테면 문화적 에이즈(c-AIDS)같은 것이라고 하겠다. 차이는 이성의 영역에서 작용하는 것이 아니라 정감의 영역을 요리하는 홀림이다. 이와 같은 유혹은 사람의 정서를 예측할 수 없는 변덕으로 몰아간다. 문화적 히스테리가 곳곳에 일고 있다.

< 미디어 신화 1993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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