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쓰레기 더미를 바라보면서

by 처사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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쓰레기 더미를 바라보면서

 

박 완 서 (소설가)

 

 

우리 집 부엌 창으로는 유난히 쓰레기통이 잘 내다보인다. 살고 있는 층의 위치 때문이기도 하겠지만 자꾸만 신경이 써져서 더 잘 눈에 들어오는지도 모르겠다. 그렇다고 유별난 쓰레기통은 아니고 아파트단지 어디에서나 볼 수 있는 트레일러가 싣고 가게 돼 있는 육중한 대형 쓰레기통이다. 분리수거를 의무화하고부터 집집마다 딸린 쓰레기 투하구를 봉쇄하고 새로 설치한 이 트레일러형 쓰레기통이 꾸역꾸역 넘쳐나는 것을 내다볼 때마다 막연한 불안감에 사로잡히게 된다. 그렇다고 그게 어디론지 실려 가 빈 통이 돼서 돌아온다고 마음이 개운해지는 것도 아니다. 도리어 막연하던 불안감이 좀더 확실해진다. 이 거대한 아파트의 숲에서 동마다 허구한 날 배출하는 그 엄청난 쓰레기를 받아들일 데가 이 땅 어드메에 아직도 남아 있는 것일까? 남아있다고 해도 어느 날 문득 포화상태가 되어 쓰레기를 거부할 날이 곧 닥칠 것 같고, 그렇게 되면 우리가 배출한 쓰레기의 높이가 고층 아파트의 높이를 쉽사리 앞지를 것 같다.

 

그건 생각만 해도 백주의 악몽이다. 어쩌자고 그렇게 많이 사들이고 많이 먹고 많이 버리는 것일까? 나는 마치 우리 아파트의 시어머니라도 된 것처럼 들며 나며 뭔가 한 보따리씩 사들이지 않으면 휙휙 쓰레기를 던지는 주부들을 보면서 혀를 찬다. 그러나 내딴엔 내가 남보다 적은 쓰레기를 배출한다고 느끼는 것도 식구가 없기 때문이고, 부피로는 얼마 안되지만 내 쓰레기는 거의가 비닐 종류이다. 장바구니를 가지고 다니는 것이 옳은 일이라는 것을 알면서도 나중에 쓰레기 봉지로 이용하려고 비닐 봉지를 받게 된다. 그뿐 아니라 조금씩 사는 과일이나 야채가 스티로폴과 비닐로 미리 포장되고, 쌓아놓은 데서 덜어서 살 경우도 저울에다 달아서 가격표를 붙이는 과정에서 비닐포장은 저절로 이루어진다. 이렇게 해서 생긴 잡다한 비닐 봉지들은 과일 껍질이나 야채를 다듬을 때 생긴 쓰레기와 설거지 찌꺼기를 담는 데 유용하게 쓴다. 그런 것들은 많이 생겨나는 것도 아니면서 그냥 내버려두면 냄새가 나는 것들이라 제때 제때 비닐 봉지에 담아서 봉해 두게 된다. 둔다는 것은 보관한다는 뜻이 아니다. 우리 집에서 배출하는 음식 찌꺼기는 아주 적기 때문에, 큰 비닐 봉지 속을 채우려면 거의 보름은 걸린다. 그 동안을 냄새가 덜 나게 하려니 큰 비닐 봉지 속을 작은 비닐 봉지로 가득 채우는 결과가 된 것이다. 남보다 양을 좀 줄였다고 위안을 삼으려는 건 아니다. 위안은 커녕 먹는 것만은 어떻게든지 안버리려고 손님이 남긴 음식 찌꺼기까지 내 뱃속에다 꾸역꾸역 쳐넣으면 자신이 쓰레기통이 돼 가는 걸 보는 것처럼 비참해질 적도 있다. 딸들한테 그런 얘기를 하면 노이로제 환자 취급을 한다.

 

트레일러 쓰레기통 바로 옆에는 재활용 할 수 있는 폐품을 버릴 수 있는 통이 따로 마련돼 있지만 전혀 그 구실을 못한다. 진짜 쓰레기통에 비해 터무니없이 작아서 아파트에서 배출하는 막대한 빈 병과 폐휴지를 담는 구실보다는 거기가 재활용품을 버릴 수 있는 장소라는 표지판 구실을 겨우 해내고 있을 뿐이다. 내용물보다 포장이 몇 배 더 큰 세상인 것을 감안하지 않은 설계 잘못 때문에, 그 통은 그 위에 함부로 버려진 폐품더미에 묻혀서 아예 보이지도 않는다. 특히 명절이라도 지나고나면 갈비상자, 과일상자를 비롯한 온갖 선물세트상자와 술병, 청량음료 병들로 트레일러보다 훨씬 더 거대한 산더미를 이룬다. 나의 노이로제는 트레일러보다도 그 재활용할 수 있는 쓰레기 더미에서 비롯되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나도 거기다 톡톡히 큰 몫을 보태고 있기 때문이다.

 

나에게는 많은 우편물이 온다. 내가 우편물을 한아름 안고 들어오는 것을 보고 잘 모르는 이웃은 팬레터를 그렇게 많이 받느냐고 부러워하기도 하지만, 팬레터는 한달에 한 통도 받을까말까 한다. 거의가 다 사보를 비롯한 홍보용 책자들이나 내가 구독신청을 한 일이 없는 잡지들이다. 그런 것들을 싼 봉투는 하나같이 지질이 얼마나 좋은지 찢을래도 잘 찢어지지도 않는 것들 뿐이다. 책도 많이 오는 편이지만 그것도 출판사에서 홍보용으로 보내 주는 것일 뿐, 아는 저자의 서명이 들어 있는 반가운 신간을 받는 일은 어쩌다 있는 일이다. 필요한 책이나 읽고 싶은 책은 거의 돈주고 사 보지 거저 생긴 책에서 문학적 지적 욕구를 충족시키는 일은 거의 없다. 껴 둘 공간이 없어 사보나 판촉물 책자들은 버리게 되지만, 버리기 전에 대강이라도 한번씩 훑어보는 것은 내용보다는 종이에 대한 외경 때문이고 우체부에 대한 미안감 때문이다.

왜 그렇게 기업마다 회사마다 단체마다 호화판 사보를 만드는 것일까? 만들었으면 자기네 사원끼리 돌려보지, 왜 그렇게 뿌려대는 것일까? 특히 적지 않은 환경단체들까지 대동소이한 잡지나 신문을 만들어서 뿌려대는 것은 이해가 잘 안되고 신뢰감도 떨어진다. 환경문제처럼 큰 목소리보다는 작더라도 구체적인 실천이 시급한 분야도 없으련만, 비슷하고 적당한 목소리로 제각기 다투어 귀한 종이만 낭비하고 있다는 인상이나 풍길 게 뭐란 말인가.

 

한보따리 안고 들어온 우편물 중에서 겨우 신용카드 청구서 두어장 건지고, 몽땅 버려야 할 쓰레기로 분류해야 할 때면 팔에서 힘이 쭉 빠진다. 특히 열흘이나 보름 정도의 여행에서 돌아와 산적한 우편물을 정리한다는 것은 중노동에 해당한다. 거기다 돈 내고 구독하는 세개의 신문과 월간계간지의 부피까지 가세를 하면 인쇄물 홍수에 전율하게 된다. 우리 아파트 내에서 우리가 가장 다량의 종이 쓰레기를 배출할 거라는 가책 때문에, 나는 종이를 될 수 있는 대로 차곡차곡 모아 부피를 줄인다. 인쇄물은 그게 쉽지만, 과일이나 과자 상자를 평평하게 분해하는 것은 여간 힘들고 손 가는 일이 아니다. 여북해야 손님이 딸기나 케이크 상자를 들고 들어오면 그걸 먹게 돼서 좋다는 생각보다는, 배보다 배꼽이 훨씬 더 클 것이 분명한 저 튼튼한 상자를 어떻게 판판히 펴고 접어 부피를 줄일 것인가 그 걱정부터 하게 된다. 유럽에선 생일 케이크도 케이크 둘레를 한바퀴 좁다란 마분지 한겹으로 두르고 포장지에 싸 두던데, 왜 생일에 떡 대신 케이크 사는 것은 양풍을 본뜨면서 그런 건 흉내를 안내는지.

 

재작년에 영국에서 석달 가량 머물면서 가장 신기하게 여겼던 건 내가 머물렀던 중하류쯤 되는 주택가의 집집마다 현관문에 <no free newspaper>라는 동판이 붙어 있는 거였다. 우리나라의 무슨무슨 신문 사절과 비슷한 말이지만 신청하지 않은 인쇄물을 거부하는 것이고, 우편함과 함께 튼튼한 동판으로 고정돼 있었다. 더 신기한 건 그렇게 함으로써 신청하지 않은 인쇄물이 단 한번도 안들어온다는 거였다. 나는 그게 그 나라에서 가장 부러웠지만 혼자서는 흉내낼 수 없는 일이다. 그렇다고 나에게 사보를 비롯한 홍보용 책자를 보내주는 분들에게 일일이 편지를 써 사절을 할 용기는 더군다나 없다. 거저 주는 건 받아두는 게 무난하다는 우리의 문화랄까 관습으로부터 자유로워진다는 건 쉬운 노릇이 아니다.

 

우리 사회의 전반적인 종이의 과소비가 너무한다 싶을 정도를 지나 공포감으로까지 다가온 것은 지난해 에티오피아 난민촌을 돌아보고 나서부터일 것이다. 3,40년전까지만 해도 숲의 나라로 일컬어지던 에티오피아가 20년 가까운 내란과 가뭄으로 황폐해진 모습은 차마 눈뜨고 볼 수 없었다. 전쟁으로 인한 굶주림은 우리도 겪은 바이나 그래도 우리는 그때 땅이 살아있어 희망이 있었다. 살아있는 땅이란 강이 흐르고 흙에 물기가 있어 풀과 나무가 자라는 땅이다. 땅이 녹색을 잃고 죽어갈 때 거기 몸 붙이고 사는 사람의 고초는 이루 말할 수가 없다. 풍요를 구가하는 줄만 알았던 우리 지구상에 이런 데가 있었다니. 이건 도대체 누구의 죄입니까? 라는 탄식이 저절로 나왔다. 어린것들이 자기 죄 값으로 굶주리고 죽어갈 리는 없지 않은가. 저절로 우리의 과소비에 인도적인 죄의식을 느껴야 했고, 특히 나무를 베어 내야만 생산이 가능한 종이를 선진국에서 너무 흥청망청 쓴게 지구의 기후 변화에 영향을 주었을 거란 막연한 근심이 적나라하게 현실화된 것을 본 것처럼 무서웠다. 내 생애에 잊을 수 없는 충격적인 여행이었다.

 

그래도 종이 쓰레기를 내놓을 때는 그것들이 어디 가서 재활용이 되겠거니 하는 믿음과 희망을 갖게 된다. 그래서 비닐 한장이라도 섞일세라 정성을 다해 차곡차곡 모으게 된다. 그러나 그것들이 눈앞에 산더미처럼 쌓여 추적추적 비라도 맞고 있는 걸 보면 그렇게 슬플 수가 없다. 재활용이 되는 거라면 저렇게 구박을 받을 리가 없을 것 같다. 때로는 비에 젖은 폐지들이 내가 펴낸 책처럼 보일 적도 있다. 내가 종이 쓰레기에 화도 잘 내지만, 모으기도 지성껏 하는 것은 어쩌면 나 역시 활자 공해에 이바지한 바가 적지 않다는 자격지심일지도 모르겠다. 그렇지 않고서야 종이가 비에 젖는 게 그렇게 숨가쁘도록 슬플 리가 없다. 재활용이 제대로 될까 의심스러운 또 하나의 이유는 폐지는 그렇게 많이 나오건만 재생지를 만나기는 쉽지 않다는 데도 있다.

 

내 친구 하나는 외국으로 출장을 가면서 명함을 맞춰야 할 필요성을 느꼈다고 한다. 평소 찢을래도 찢어지지도 않게 코팅까지 한 명함을 혐오한 그는 재생지로 소박하게 명함을 박으리라 마음먹었지만 보통 명함집에선 그런 걸 취급하고 있지 않더라는 것이었다. 여기저기 수소문해서 그런 데를 찾느라 온종일 걸렸다고 한다. 싸게 박으려고 그런 것이 아니라 단지 재생지를 써주려고 온종일 수고를 한 그가 아름답다. 인쇄물 중에도 그런 아름다운 걸 만나고 싶지만, 내가 아는 것으로는 환경 잡지인 <녹색평론>이 유일한 것이다.

 

틈만 나면 쓰레기를 만들거나 눈앞에 보이는 쓰레기 더미에 신경을 쓰다보니 첩첩한 아파트단지가 거대한 쓰레기 더미가 되어 육박해 오는 듯한 무서움증이 느닷없이 엄습해 올적이 있다. 아파트는 인구가 열겹 스무겹 포개진 채 밀집해 있으면서 자체 내에선 우거지 한줄기도 생산은 못하고 왕성하게 먹고 쓰고 싸기만 하니 무진장한 쓰레기 생산장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런 생각을 하면 공포스러울 뿐 아니라 우리를 먹여 살릴 만한 살아있는 땅이 아직도 남아있기나 한 것일까 하는 궁금증에 사로잡히게 된다. 그건 단순한 궁금증만이 아니라 일종의 그리움이기도 하다. 그런 것들이 쌓여 우울증이 되면 나는 잠시 아파트단지를 떠나본다. 어린 날 고향을 찾듯이 위로받고 싶은 마음과 설레는 마음이 반반씩인 게 여행을 떠날 때의 심정이다.

 

그러나 어디에도 고향은 없다. 내 고향이 갈 수 없는 고장이 된지가 반세기가 넘건만 나는 아직도 도시만 떠나면 내 고향의 이미지를 간절하게 더듬는 버릇이 있다. 동산과 시냇물과 들판과 텃밭과 농가와 농부와 황소가 아무렇지도 않게 조화된 풍경이 우리에게 끼치는 완벽한 평화와 안식을 해치는 것이 70년대까지만 해도 울긋불긋한 슬레이트 지붕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시골이라고 편하게 살지 말란 법이 어디 있나 하고 양보하는 마음으로 곧 그것을 받아들이고 나니 이번엔 여기저기서 펄럭이는 비닐조각이 싫었다. 그것도 비좁은 땅이 도시의 왕성한 식욕을 채우려니 그럴 수밖에 없는 쪽으로 돌릴 수가 있었다. 그러나 찻길이 닿는 곳이면 아무리 산골이라도 한우 고깃집, 토종닭집, 오리 고깃집, 멧돼지 고깃집 간판이 있는 것은 정말 싫다. 그런 데 들어가서 토종닭 다리를 아귀아귀 먹으면서도 싫으니 무슨 고약한 심보인지 모르겠다. 잠시라도 놓여나고 싶었던 게 단지 아파트단지만이 아니라 도시적인 왕성한 식욕과 쓰레기 생산력도 함께라고 생각했건만 그것조차 거짓이었다는 자기혐오 때문인지 모른다.

 

지난 가을 시골을 정처없이 떠돌아다녀 보고는 새로운 발견을 또 하나 하게 되었는데, 아파트나 공장이 안보이는 시골은 거의 없다는 것이다. 설사 아파트가 없는 마을이라 해도 동구밖이나 뒷동산 능선 너머로라도 아파트의 회색빛 모서리가 보였다. 시골 사람들이라고 아파트에 살지 말란 법 있나 하고 눙치려고 해도 내가 기를 쓰고 도망친 것으로부터 덜미를 잡힌 것처럼 진저리가 쳐졌다. 같이 간 사람에게 저놈의 아파트 좀 안봤으면 좋겠다고 했더니, 그는 우리가 차를 타고 다니고 있다는 걸 잊지 말라고 했다. 뼈아픈 소리였다. 자기는 온갖 문명의 편의를 누리면서 조금 덜 문명화된 것의 불편을 눈요기나 위안거리로 삼으려 든 것처럼 돼버렸으니 말이다. 낯이 뜨거운 김에 그럼 걸어다니겠다고 날쳤더니, 몇 십리 걷기로 작심했다면야 아파트도 공장도 식당도 비닐하우스도 안보이는 마을을 찾기는 어렵지 않겠지만, 거기엔 아마 농사짓는 사람도 남아있지 않을 거라고 운전대 잡은 동행은 말했다. 그는 아마 비웃고 있었을 것이다. 그래 관광식당이 농가보다 더 많든, 아파트나 공장 건물이 시골의 부드러운 지평선을 직선으로 가르든 말든, 농사짓는 사람이 아직도 이 땅에 남아있다는 것만도 고마워해야 하지 않을까?

 

아니, 그건 고마움 이상의 그 무엇이다.

 

이 땅은 도처에 산이 많지만 산기슭이나 산과 산 사이에는 어김없이 평야가 펼쳐있게 마련이다. 첩첩산중 산모퉁이를 돌다가도 홀연히 나타난 마을과 만나게 된다. 농사꾼의 손길이 간 논과 푸성귀가 자라는 텃밭과 인기척 있는 집이 나오면 그렇게 기쁠 수가 없다. 그리고 만약 이 땅에서 저런 시골마저 사라지는 날이 올 그때까지 사는 일이 없기를 조금도 거짓없이 바라게 된다. 그건 어쩌면 바람이 아니라 그렇게 되면 안사는 게 아니라 못살게 되리라는 예감인지도 모르겠다. 농사꾼이 농사짓는 데 들이는 시간과 노고를 도시나 공장에서 들인다면 농가소득의 몇배도 올릴 수 있다는 것은 우리 모두의 상식이다. 소득이 적은 대신 존경받는 척도는 권력 아니면 돈이지, 그밖엔 어림도 없는 얘기다. 농사꾼이라고 왜 그걸 모르겠는가.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직도 농사꾼이 남아있다는 것은 땅이 땅 구실을 못하는 걸, 즉 생명력을 잃어버리는 걸 차마 못보겠다는 땅과의 어쩔 수 없는 사랑 때문이리라. 우리들의 밥상엔 그들의 사랑이 올라앉아 있다. 만일 그들이 땅사랑에 지쳐서 그만두어 버려도 우리가 한국 사람이라는 자부심을 가질 수 있을까. 그들이 농사를 안지어도 우리가 물건만 만들어 열심히 팔면 굶어 죽진 않는다는 것은 확실하다. 그러나 아무리 돈주고 사다 먹어도 우리 밥줄을 좌지우지할 수 있는 나라에게 우리가 기죽고 눈치보지 않을 수가 있을까. 사람 죽이는 무기를 대주는 나라한테도 기죽는 생각을 하면, 생명선을 쥔 나라한테는 구더기처럼 기라고 한들 기지 않고는 못배길 것이다. 그렇게 생각할 때 우리의 농사꾼들은 우리 밥상만 관장하고 있는 게 아니라 우리의 자부심의 근거까지 돼주고 있는 것이다.

 

나는 이 땅에서 농사의 맥이 끊어지지 않고 이어지고 있다는 것만 고마워서 농약을 얼마나 많이 치고 어떻게 재배했나에는 거의 신경을 안 쓰고 살았다. 혹시 자기 농장을 가지고 있다거나 유기농법으로 농사를 짓는 농가와 특별한 관계를 맺고 그런 것만 먹고산다는 집을 보면 아니꼽게 여기기까지 했다. 그들이 하는 짓이 아파트 모서리나 관광식당 간판이 안보이는 순진한 시골을 찾아 헤매는 내 모습과 별로 다르지 않아 보여 더 역겨웠는지도 모르겠다. 그래서 그런 사람을 비꼬면서 나는 보통사람들이 먹는대로 먹다 죽을 거라고 은근히 잘난 척을 해왔다. 그러나 해도 참 너무한다 싶게 이웃 나라 먼 나라의 농산물이 쏟아져 들어오면서 사정은 달라졌다. 비싼 것이 우리 것이려니 하고 안심하던 것은 벌써 옛날 이야기이다. 겉모습은 비슷한데 가격 차이가 두배, 세배 아니 열배까지 난다면 그 차액을 챙기려 들지 않을 장사꾼이 어디 있겠는가. 눈뜨고 그걸 속아 산다는 것은 장사꾼만 이롭게 하는 것이고 그만큼 농사꾼을 손해나게 하는 짓이라는 것을 아무리 굼뜨고 아둔해도 안알아차릴 수가 없었다. 결국 장사꾼과 한통속이 되느냐, 이 땅에 얼마 안남은 진짜 농사꾼들과 공동체를 이루느냐, 기로에 선 꼴이 되었고 전에 비웃던 친구를 통해 한살림공동체의 회원이 되었다.

 

며칠 전에 생산자와 소비자가 만나는 장터가 있어서 거기 나가 한마디 연설도 하고 생산자들과 막걸리를 마시며 격의없는 대화도 나누었다. 사회자는 자꾸 생산자라고 했지만 나는 그리움과 존경을 다해 농사꾼이라고 불렀다. 참으로 뜻깊은 자리였고 기쁜 자리였다. 역시 뭐니뭐니 해도 사람이 제일이었다. 내가 도시를 훌쩍 떠나 찾아 헤매던 게 내 고향을 닮은 시골 모습인 줄 알았는데 그게 아니라 농사꾼다운 농사꾼이었다는 걸 알 것 같았다. 농사꾼 앞에서 조그맣고 겸손해지는 느낌이 그렇게 좋을 수가 없었다. 마침 주일이라 성당도 안 가고 거기를 간 건데 조금도 마음에 꺼림칙하지 않았다. 오히려 주님이 계셨더라도 아파트단지 내의 호화 성당에 계시지 않고 그 자리의 얼굴이 새까만 농사꾼들 사이에 섞여 계실 것 같았다. 그들의 하소연을 통해 땅 힘을 살리는 유기농법의 어려움에 공감할수록 우리 공동체 식구들만 너무 좋은 것을 먹고사는 것 같아 미안하기도 하고 땅을 살리는 데 동참하고 있는 게 자랑스럽기도 했다.

 

내가 가입하고 있는 게 한살림이라, 그걸 예로 들었을 뿐 그와 유사한 공동체는 그밖에도 많이 있는 줄 안다. 드문드문이나마 그런 곳이 생겨나는 게 우루과이라운드의 거센 바람 속에서도 우리 농촌이 아주 죽지는 않으리라는 희망이 돼주고 있기는 하나, 전체 인구와 국토 면적에 비해서는 그야말로 새발의 피다. 다만 힘찬 어떤 가능성을 제시한 걸로 그들이 소중한 것이다. 이 소중한 가능성을 살리고 확산시키는 데 교회라는 막강한 공동체가 뭔가 해야 하지 않을까.<내 탓이오>하는 것과 같은 자기위안적인 구호말고 구체적인 행동방향 제시와 솔선수범으로 말이다. 땅을 정복하고 번성하라는 기독교 문화를 환경오염의 주범으로 보는 시각도 만만치 않은 이때, 하느님의 참뜻은 땅을 가꾸고 지킴으로써 더불어 번성하는 것이라는 걸 교회가 앞장서서 보여줬으면 싶다.

<쓰레기더미를바라보면서 녹색평론 통권17199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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